최근 수정 시각 : 2024-08-03 16:32:08

공신태비 한씨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생년은 1410년 5월 12일 ~ 1483년 6월 22일.

명나라 초기의 명군이었던 선종 선덕제의 후궁으로 본관은 청주 한씨였으며, 본명은 계란(桂蘭)이었고, 공신부인(恭愼夫人)으로도 불린다. 한확 강혜장숙여비 한씨의 막내 여동생으로 인수대비 한씨의 고모이기도 했다.

명나라 황실 최후의 조선인 후궁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사후 부원군 영의정에 추증된 한영정의 막내딸이었으며, 미모가 뛰어나기로 유명한 친누나를 명나라의 성조 영락제에게 후궁으로 바쳐 벼락출세한 것으로 유명한 한확의 여동생이었다.

오라비 한확이 큰언니 강혜장숙여비 한씨를 영락제의 후궁으로 강제로 들여보내 출세하는 것을 지켜봤으며, 영락제가 붕어한 후 묻힐 때 그녀의 큰 언니까지 교살된 뒤 장릉에 순장당했다는 것을 알고 애통해했다.

그런데 영락제에 이어 제위를 계승한 인종 홍희제가 일찍 붕어하고 선종 선덕제가 즉위하자 조선인 환관들이 순장된 전전대 조선인 후궁 여비 한씨의 막내 동생도 그만큼 미모가 뛰어나더라고 바람을 넣는 바람에 아예 딱 집어서 공녀로 지명을 당했다. 게다가 명나라 황실을 내리사돈 삼아 계속 부귀를 누리려는 오라비 한확마저 공녀 진상을 노리고 시집을 보내주지 않자 1년 동안 울화병을 앓아 누웠다. 그런 상황에서
"큰누이를 팔아 큰 부귀를 누렸는데, 작은누이까지 팔아 얼마나 더 부귀를 누리려 하는가?"
라고 절규하며 혼수로 준비해뒀던 물품들을 다 찢어버리고 패물을 내팽개쳤다고 한다. 명나라로 떠나는 당일이 되자 세인들은
"언니가 생매장을 당했는데 동생은 산송장 신세로구나"
라고 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명나라로 간 뒤에는 다행스럽게도 선덕 연간 내내 총애를 받아 오라비 한확이 조선에서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선덕제의 붕어 이후에도 운이 따라 순장당하는 것을 피해 생존했다. 그러다가 다음 황제인 영종 정통제 토목의 변으로 인해 오이라트 에센 타이시에게 포로로 잡히고 동생인 대종 경태제에게 제위를 뺏기는 사건이 발생하자, 함께 폐태자당한 정통제의 3살 배기 아들 주견심을 맡아서 기르게 되었다. 보통 절대군주 체제하의 국가에서 오갈 데 없는 폐태자를 도와줬다가 역모 혐의를 뒤집어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친모조차 폐태자 주견심을 돌봐줄 여건이 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외국인 후궁이 직접 맡아 기른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자기도 큰언니처럼 어차피 언제 순장당할지 모르니 목숨을 내던진 용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8년 만에 정통제가 기적적으로 귀환하고, 제위를 되찾으면서( 탈문의 변) 앞길이 다시 펴지게 되었다. 돌아온 정통제 입장에선 목숨을 걸고, 자기 아들을 살려주며 길러준 사람이었으니 고맙지 않을 리가 없었고, 맡아서 기르던 폐태자 주견심은 고스란히 황태자로 복권되어 다음 황제인 헌종 성화제로 즉위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특히 성화제는 어렸을 때 키워준 공로에 보답한다며 한씨를 극진하게 대접했고, 한씨 역시 황실의 일을 잘 알았으므로 모두가 그 출신을 개의치 않고, 큰어른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정통제가 순장 제도를 폐지해버린 운도 따른 덕택에, 공신태비 한씨는 큰언니와는 달리 천수를 누려 성화 연간 19년에 향년 74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성화제는 크게 애곡하며 '공신'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태비로 추존했다고 전해진다.

3. 여담

말년까지 비선으로서 모국인 조선의 외교와 국방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명나라 조정은 한때 조선의 군비 증강을 꺼려 조선 활의 주재료이자 100% 수입산 전략물자인 물소뿔의 무역을 통제했는데, 공신태비 한씨가 단신으로 황제에게 탄원하여 통제가 풀리기도 했을 정도였다.
(한확의 아들이자 공신태비 한씨의 조카인)한치례가 아뢰기를,

"신이 처음에 북경에 들어가서 정동(鄭同)[1]을 봤는데, 정동이 전하의 안부를 묻고 또 궁각(弓角, 활의 재료인 물소뿔)을 주청(奏請)할 것인가를 묻기에, 신이 윤필상(尹弼商)이 그 일 때문에 왔다고 대답하니, 정동이 신으로 하여금 궁각(弓角)을 청하는 일을 쓰게 하여 (공신태비) 한씨(韓氏)에게 전달하고자 하므로, 신이 이것은 내가 하러 온 일이 아니라고 말했으나, 정동이 굳이 요구하므로 신이 부득이하여 써 주었습니다. 이 일을 신이 처음에는 정동이 하는 일로 의심했는데, 한씨의 도서(圖書)[2]를 보고서야 비로소 그렇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인정(人情)으로 가져간 물건을 한씨가 적게 여기지 않던가?"

하니, 한치례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자색 명주를 받고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했다.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신준(申浚)에게 이르기를,

"한치례가 궁각(弓角)을 청한 일[3]을 나는 무방하다고 생각하는데,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신준이 대답하기를,

"신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북경에 가는 사람이 사사로이 가지고 가는 인정물건(人情物件)[4]이 없을 수 없다. 다시 마련하여 아뢰라."

하였다.
《성종실록》 88권, 성종 9년 1월 10일 계유 2번째 기사
청주 한씨는 안그래도 성조 영락제와 선종 선덕제 시기에 명나라 황실의 외척이라 하여 조선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지만, 그 권세가 영종 천순(정통)제와 헌종 성화제 시기까지 이어진 것은 오로지 공신태비 한씨 덕분이었다. 황제조차도 공신태비 한씨를 극진히 대했으므로 오라비 한확의 아들들에다가 청주 한씨의 방계들까지 돌아가면서 명나라를 왕래하며 부귀를 누렸고, 특히 한확의 아들인 한치례가 대를 이어 대중국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실제로 청주 한씨 일가의 권세가 도를 넘어 주변에서 죄다 한치례의 사신 파견을 반대하고, 본인도 병이 들었다는 핑계로 사양하려 했으나 성종이 양쪽의 의견을 모두 무시하고 그대로 한치례를 보냈다.
서릉군(西陵君) 한치례(韓致禮)가 와서 아뢰기를,

"신(臣)은 평소에 병든 나머지 천식(喘息)을 앓고 있는데, 이제 성절사(聖節使)로 충원하시니, 가을이 깊어져 날씨가 추워지면 중도(中道)에서 병이 나 가기 어렵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비록 병이 있더라도 그 몸을 삼가고 보호하면 염려할 것이 없고, 또 이제 진헌(進獻)하는 물건이 많으니, 경(卿)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했다.

사신(史臣)이 논하기를, "한치례(韓致禮)는 한확(韓確)의 아들이며, 한확의 누이는 중국 조정에 뽑혀 들어가 선종 황제(宣宗 皇帝)의 후궁(後宮)이 되고, 아보(阿保)[5]의 공(功)으로 성화 황제(成化皇帝)에게 총애를 받았다. 환관(宦官) 정동(鄭同)과 더불어 서로 결탁하여, 황제를 권하여 자주 정동을 본국(本國)에 심부름시켜, 칙지(勅旨)로 옷·노리개·음식 등의 물건을 올리게 하고, 자질구레한 것까지 다 갖추어 혹독하게 거둬들이기를 싫어함이 없어, 생민(生民)의 큰 병폐가 되었다. 또 칙령(勅令)으로 한씨(韓氏)의 족친을 해마다 성절사(聖節使)로 충원하여 입조(入朝)하게 하므로, 한치례 및 그의 형(兄) 한치인(韓致仁)·한치의(韓致義), 사촌들[群從]인 한치형(韓致亨)·한충인(韓忠仁), 조카인 한한(韓僴)·한찬(韓儹)·한건(韓健)이 서로 갈마들면서 부경(赴京)했다. 그리하여 금대(金帶)와 서대(犀帶)를 띠는 것이 모두 황제(皇帝)의 칙지에서 나왔으며, 금•은(金銀)·채단(彩段)의 상사(賞賜)가 다함이 없어, 한씨의 일족(一族)은 정동으로 인하여 앉아서 부귀(富貴)를 취하고 해(害)를 나라에 끼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했다.
《성종실록》 106권, 성종 10년 7월 4일 무오 2번째 기사


공신태비 한계란은 성화 연간에 황태후로부터 각 비빈에 이르기까지 황궁 내에서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명나라의 조정 관료들로부터는 조선에 이익을 주기 위해 본국인 명나라에 손해를 끼친다고 하여 평가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1] 선덕제의 치세때 조선에서 진상된 화자 출신의 환관으로, 한씨의 최측근이었으며 당시 환관들의 최고위직이었던 태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2] 도장과 글씨 [3] 엄밀히는 물소뿔의 확보가 윤필상의 임무였으므로 한치례의 월권 행위였고, 게다가 국격이 떨어지게시리 후궁과 환관을 통해 비선으로 로비를 했으니 왕명을 어긴 죄로 국문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4] 선물 [5] 어린 시절에 보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