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15:55:49

안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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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추존 · 비정통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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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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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연대 부흥운동 주요인물 결과
670~673 한성 고구려국 검모잠 / 고연무 / 안승 실패
681 안동도호부에서의 보장왕의 모반 보장왕 무산
684 금마저에서의 보덕국의 반란 대문 실패
696~698 요동 일대의 반당전쟁 걸걸중상 / 걸사비우 / 대조영 발해
897~901 송악의 궁예 정권 궁예 후고구려
918 왕건의 역성혁명 왕건 고려
1217 최광수의 난 최광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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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국의 국왕
안승왕 | 安勝王[1]
왕호 <colbgcolor=#fff,#1F2023> 보덕왕(報德王) / 안승왕(安勝王)
봉국 보덕국
관등 소판(蘇判)
성씨 고(高)(?) · 연(淵)(?) → 김(金)
안승(安勝) / 안순(安舜)
왕후 왕후 김씨(金氏)
부친 보장왕(寶臧王)(?) / 연정토(淵淨土)(?)
조카 대문(大文)
생몰년도 음력 630년대~650년대 추정[2] ~ ?
재위기간 음력 669년 ~ 670년(부흥운동)
674년 ~ 683년(보덕국왕)
1. 개요2. 생애
2.1. 출신2.2. 고구려부흥운동2.3. 보덕왕2.4. 이후
3. 평가4. 대중매체5. 같이보기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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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 왕족으로 고구려가 668년 멸망한 이후 검모잠 등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고구려의 비정통 군주로 추대되었고, 지금의 황해도 지역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을 주도했으나 당나라 군대가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개시하면서 결국 실패했다. 이후 남쪽의 신라로 달아나서 보덕국의 국왕이 되었고, 나중에는 신라의 귀족이 되면서 완전히 신라에 편입되었다.

2. 생애

2.1. 출신

보장왕 서자 또는 외손자로 전해지고 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보장왕의 서자, <신라본기>에는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 신당서》 <고려전>에는 보장왕의 외손자 안순(安舜)으로 나와 있다. 그래서 이름도 고안승(보장왕의 서자라는 추정) 혹은 연안승(연정토의 아들이자 보장왕의 외손이라는 추정)으로 여러 서적에서 뒤섞여 쓰인다. 임기환은 "보장왕의 외손자와 연정토의 아들 둘 다 맞다"라고 보고 있다.[3]

그러나 안승이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부흥 세력의 왕으로 추대된 점 등으로 볼 때 고구려인들이 보기에도 당나라에 끌려간 보장왕 대신 왕위를 이을 만한 지위를 가진 인물인 보장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더 우세하다. 《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도 《삼국사기》에 문무왕이 안승을 보덕국왕에 봉한 글에서 "선왕(보장왕)의 정당한 후사(正嗣)는 오직 그대뿐이니 제사 맡을 자 또한 그대 말고 누가 있겠는가"라고 언급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외손자라면 정당한 후사라느니 하는 말을 쓸 수 있겠느냐"고 지적하며 안승을 보장왕의 서자로 보았다.

다만 이는 다분히 유교적인 시각으로, 당장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외손도 직계로 쳐줬으며, 조선 전기까지도 딸이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신라나 고려는 오히려 서자를 정당한 후사로 치지 않았다. 다만 이건 제사나 친척 관계의 친소에 있어서의 경우고, 삼국시대부터 이미 부계 혈통 계승이 명확히 확립되어 있어서 직위의 계승에 있어서는 형제 상속이든 부자 상속이든 무조건 부계가 우선시되었다. 이 부분은 오히려 모계 계승이 자주 일어나고 여왕까지 3명이나 등장한 신라가 특이한 사례로, 한국사에서 유일하게 남성보다 신분이 더 우선시된 사례이다. 이 때문에 신라는 박씨, 석씨, 김씨 왕조가 전부 기원이 아예 다른 왕조임이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으며, 고고학계에서도 셋 다 기원이 다르다는 것이 정설이다.[4]

이는 고구려에서 분가한 나라인 백제도 마찬가지다. 21세기 학계에서는 초고왕계와 고이왕계가 따로 있었고 이들이 번갈아 가면서 집권하다 근초고왕 대에 와서야 초고왕계로 일원화되었다 보지만, 동시에 신라의 박씨, 석씨, 김씨가 삼국사기 정사 기록에서조차 서로 기원이 다른 세 일족이라 명확하게 명시되는 반면, 초고왕계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후손이고 고이왕계는 부여 시조 해부루의 후손이라 여겨지고 있다.[5] 따라서 이들 왕조는 촌수가 많이 멀어서 그렇지 엄연히 부계 조상을 공유하는 동성(同姓)에 속한다.

그리고 소서노의 졸본부여 세력이 주몽보다 100년 전에 졸본 일대로 이주한 부여 세력으로 여겨진다는 점과 대무신왕이 동성인 차비 해씨[6]와 혼인한 것, 초고왕계, 고이왕계와 함께 건국을 함께한 대성팔족 해씨가 졸본부여인임이 강조되는 점에서 소서노도 부여 해씨의 방계로 유력시된다. 즉 주몽이 졸본부여의 수장 연타발의 사위가 되어 자리를 물려받아도, 백제 초기 초고왕계와 고이왕계의 교체 과정에서 부자 계승이 아니라 외족 계승으로 추정되는 정황이 몇 차례 드러나도, 이들은 어디까지나 '동성혼'의 안에서만 인정되었다는 뜻이다.[7]

고구려는 관나부인의 사례처럼 후궁이 아닌 정식 소왕후를 두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안원왕 대에는 제1왕후의 후사가 없자 서로 자기 가문의 왕자를 태자로 올리려던 제2왕후와 제3왕후의 외척들끼리 내전이 터지기도 했다. 만약 당시에 남아있거나 발견된 제1왕후의 후사가 없었다면 자연히 소왕후들의 후사가 왕위 계승 1순위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들은 비록 제1왕후의 적자보단 격이 떨어지긴 했어도 엄연히 후궁 출신의 서자가 아닌 왕후 출신의 적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대 이런 제도가 없었던 외국이나 후대에는 이 '애매한 적자'를 그냥 서자라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8]

고구려에서는 신라와 달리 적어도 초대 주몽 대부터 이성승계 사례가 없었으므로, 만약 안승이 연씨 부계였다면 안승이 수많은 고씨들을 제치고 국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을지가 의문이다. 정말 안승이 연씨 부계였다면 국왕보다는 차라리 연개소문과 같은 최고 실권자의 혈통이나 모계 혈통 때문에 옹립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물론 보장왕 직계가 다 끌려가서 왕위를 이을 자가 없었다면 도피에 성공했던 외손이 가장 왕통과 가까우므로 아주 이상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고구려에는 안승과 함께 활동한 고연무(高延武) 등 다른 고씨도 분명 남아 있었다.[9] 하지만 고밀(高密)의 경우처럼 사성 고씨가 존재했음이 확인되며, 고구려 유민들의 이름만 봐도 정말로 아무나 고씨인 경우가 많아서[10] 고씨라고 해서 모두 왕족이었던 건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

하지만 700년에 가까운 고구려 왕조의 역사에서 보장왕의 직계가 단절되었다 쳐도 주몽의 후손은 이 시기로 가면 아주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주몽 대부터 어디까지나 부계 계승만을 했기 때문에, 직계가 아닌 방계가 즉위한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으며 특히 고구려 초기에는 제법 촌수가 먼 왕들이 즉위했던 정황이 있다. 따라서 보장왕의 직계가 단절된다면 고구려 왕위계승 관례상 대양왕- 평원왕- 양원왕- 안원왕의 후손 중 하나가 잇는 것이 맞다. 또 장수왕의 후손 일부가 중국에서 현대까지 집성촌을 만들어 내려오던 것, 신찬성씨록에 삼국사기 기록에 남지 않은 고구려 왕족들이 여럿 등장하는 것, 고려 중기에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 남은 사료가 적어 고구려가 멸망하고 44년 뒤에 편찬된 고사기와 52년 뒤에 편찬된 일본서기가 훨씬 많은 사료가 남아있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후세 기록에 누락된 왕족들이 꽤 많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안승의 가계에 보장왕과 연정토가 모두 강조되기 때문에, 반대로 안승이 '보장왕의 서자이자 연정토의 외손자'일 가능성도 있다. 안승은 671년 설인귀에게 어리다는 평을 들었고, 보장왕이 26년 재위했기 때문에 안승은 보장왕이 재위하는 중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은데, 학계에서는 보장왕은 590년대 중후반~600년대, 연정토는 590년대 중후반~610년대 초반에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연정토는 650년대생으로 추정되는 안승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 보장왕은 망국 당시 60대 후반~7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데, 막상 후계자로 내세운 안승이 어리다는 건 안승이 보장왕의 다른 후손을 제치고 왕으로 추대될 만큼 모계 혈통이 강고했다는 뜻이고, 왕후가 아들을 못 낳으면 소왕후를 세우는 고구려 계승의 특성상 안승의 어머니가 일개 후궁이었을 가능성은 없다.

따라서 보장왕이 연개소문에게 추대되어 즉위한 뒤 연개소문의 조카딸을 소왕후 또는 후궁으로 삼아 혼인동맹을 맺었고 그 사이에서 안승이 태어났는데,[11] 안승이 워낙 늦둥이라 전처의 아들인 고복남, 고인무, 고덕무 등에게 서열이 밀렸지만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보장왕과 전처의 아들들이 모두 끌려가자 후처의 아들인 안승이 추대되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이 경우 연정토가 667년 신라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정토의 후손인 안승이 추대된 것, 안승과 신라가 서로 연계하는 것에 이어 최종적으로 안승이 신라에 귀부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진다. 안승이 연정토의 외손자가 맞다면 고구려가 안승을 왕으로 추대할 때 신라와의 외교 관계를 고려해서 추대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안승의 출생에 대한 기록은 산만한 점이 많아 한 가지만 믿기는 힘들지만, 현대인이 안승의 가계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와 별개로 당시 고구려인들은 안승을 고구려 왕이 되기에 충분한 혈통을 가진 사람으로 보았음은 확실하다. 안승은 남이 앉힌 왕이 아니라 검모잠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들이 스스로 추대했던 왕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부분에서 왕위 계승권이 분명히 있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가계에 속하는 인물이라는 것은 정설이다.

생몰년은 불명이나 670년 검모잠을 살해했고, 671년 7월 나당전쟁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승이 나이가 어리다고 하고 있으므로 이때 10대 후반~20대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2.2. 고구려부흥운동

668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안승은 서해의 사야도(史冶島)[12]에 피신했다. 그러던 중에 670년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당나라 관리를 살해하고 남쪽으로 이동해 온 검모잠이 안승을 발견하여 한성(漢城)[13]에서 안승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후 소형(小兄) 벼슬을 지내던 다식을 신라로 보내서 '신라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조건[14]으로 구원을 청했는데, 이에 신라의 문무왕은 안 그래도 당나라의 야욕에 한창 부담을 안고 나당전쟁 준비를 하던 중이어서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하고 협력을 약속했다. 670년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의 연합군 압록강을 건너 개돈양( 신성)을 선제 공격해 나당전쟁이 시작됐지만 당고종이 대장군 고간이 지휘하는 대군을 보내자 이에 대한 대응을 두고 안승과 검모잠 간의 의견 대립이 격화되면서 고구려 부흥군은 분열되었고, 안승은 검모잠을 죽인 후 지지 세력을 이끌고 신라로 투항했다.[15] 안승이 신라로 피신한 후에도 황해도 일대에서는 고구려 부흥운동이 계속되었고, 신라군도 이것을 지원했다. 그러나 672년 8월 석문 전투에서 고구려 부흥군과 함께 싸우기 위해 북상한 신라군이 당군에 크게 패배하면서 신라는 더 이상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부흥군은 당군에 연전연패해 673년 5월 호로하 전투를 끝으로 고구려의 옛 땅에 잔존해있던 고구려 부흥 세력은 고간이 이끄는 당군에 의하여 완전히 토벌되었고, 남은 무리는 신라로 피난했다. 이로서 신라와 당나라간의 나당전쟁은 벌어지고 있었지만 결국 고구려 멸망 직후부터 시작된 670년대의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요서의 영주를 탈출한 유민들이 훗날 다시 고구려 부흥 운동을 재개하지만 그것은 30여 년 후의 이야기이다.

2.3. 보덕왕

문무왕 신라로 투항한 안승과 고구려 유민들을 옛 백제 땅인 서쪽 금마저(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거주시켰다. 왜 하필 고구려 고토와 가까운 곳도 아닌 백제 영역인지에 대해서는 고구려 유민의 보덕국으로 백제 유민들을 견제하기 위한 신라의 이이제이 전략이라는 설도 있고, 혹은 7세기 고구려가 기자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과 기자의 후손(으로 당시에 알려져 있었던) 준왕 위만에게 찬탈당한 뒤 평양을 떠나 마한 땅으로 남하해서 '한왕'이 되었다는 전승에 근거해서 이에 연결시켜 고구려 피난민들에게 익산 지역의 땅을 내준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16] 674년 9월, 문무왕은 안승을 보덕국의 왕인 '보덕왕'(報德王)에 봉했다.[17] 이어서 680년 문무왕으로부터 으로 만든 그릇과 비단 100단을 예물로 받고, 문무왕의 여동생의 딸과 결혼했으며[18] 교서를 받았다. 안승은 이후 10여 년간 보덕국을 통치했는데 비록 괴뢰국으로 평가받지만 태대형(太大兄) 같은 고구려 시절의 관직 체계를 그대로 이식해 사용했고, 일본에 고려의 이름으로 사신을 보내는 등 어느 정도 국가 체계를 갖추고 통치했다.

2.4. 이후

676년 결국 나당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끝나고, 한반도가 어느 정도 안정된 683년, 신라 신문왕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소판(蘇判)[19] 벼슬을 얻었으며 김씨(金氏) 성을 사성받고 진골 귀족이 되었다. 하사받은 소판직 자체가 6두품 이하는 오를 수 없는 진골의 관등이다.[20] 이로써 안승은 신라의 중앙 귀족이 되어 경주의 큰 저택에 머물게 되었고, 익산에 있는 보덕국과는 격리되어 버렸다.

보덕국 설치를 허락했던 문무왕이 어떤 의도에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들인 신문왕은 고구려 유민들을 흡수하기 위해 만들었던 보덕국을 이 시점에서 없애버리기 위한 밑작업의 일환으로 삼았을 것이다.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김흠돌, 김군관 삼국통일전쟁에서 공을 세운 공신 귀족들을 숙청하고, 녹읍 폐지로 왕권을 강화했다. 이렇듯 결정과 시행이 확실한 철혈 군주 신문왕에게 신라의 통일성을 해치는 구 시대의 잔재인 보덕국도 마찬가지로 제거 대상이었음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684년 보덕국에서 안승의 조카뻘 친족(族子)이었던 장군 대문(大文)이 신라 진골 귀족으로 안승이 편입된 것에 불만을 품고, 신라 조정을 상대로 모반하다가 대문은 처형되었고, 고구려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터졌다. <김영윤 열전>에 따르면 반굴의 아들 김영윤을 황금서당(黃衿誓幢) 보기감(步騎監)으로 삼아 토벌군으로 보냈는데 황금서당은 옛 고구려인들로 구성된 부대였으니 고구려인의 반란을 고구려인으로 진압한 셈. 이후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이들은 대문이 죽은 이후로도 관리들을 살해하며 읍성을 점거했는데 김영윤은 전사했지만 곧 토벌되었다.
이로써 보덕국은 완전히 소멸되었으며, 신라는 보덕국이 있었던 지역에 금마군을 설치하여 신라의 행정 구역에 완전히 편입했다.

보덕국 사람들이 익산에서 싸울 때 경주에서 살고 있었던 안승이 어떻게 살았는가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김씨 진골로 편입되어 중앙 귀족의 수준으로 살았거나 혹은 이미 죽지 않았다면 반란에 연루되어 처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왕족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횡성 고씨 족보》에 따르면 안승의 형 인승 횡성에 살기 시작하면서 횡성 고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21]

3. 평가

안승에 대한 평가는 좀 애매한 편이다. 결과적으로는 당나라에 제대로 저항하지도 않고, 신라로 달아나려고 했던 점과 함께 고구려부흥운동을 주도하였던 검모잠을 살해했던 일 등, 유능한 신하를 죽인 것도 모자라 보덕국도 결국 반란으로 망해버리는 결과로 인하여 조금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편이다. 심지어 "고구려 유민들의 편입을 위하여 신라 조정에 의해 이용만 당했다"면서 박하게 평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검모잠을 죽이고 고구려 부흥을 말아먹은 꼭두각시 군주"로 모는 고구려 사관론자들은 물론 신라 사관론자들도, 대문의 반란을 일으킨 그 안승 일파를 역적으로 꼽는다. 백제 사관론자들 입장에서도 안승 일당들이 백제 유민들을 밀어냈다고 욕한다.

박하게 평가한 원조가 《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인데, 안승을 부각시킨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추정된다. 첫째는 고구려의 혈통적 정통성을 가지고 신라에 흡수된 안승의 존재로 통일신라론의 명분을 쌓기 위해서다. 고구려는 엄연히 고씨 왕조국가였고, 현대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당시에는 대씨 같은 생판 다른 성씨보다는 보장왕 직계로 보이는 안승이 가장 높은 고구려의 정통성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22] 둘째는 고구려 폄하용인데 그래서 검모잠 참살과 덤으로 안승 일당들의 반란도 부각시켰다. 하지만 정작 안승을 받아들인 장본인도 문무왕이기 때문에, 더 이상 부각하다가는 문무왕의 영웅화에도 금이 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 삼국사기》를 보게 되면 신문왕의 태자 때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문무왕과 엄청난 갈등을 빚은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 이후 문무왕 이후 신문왕이 철혈군주가 되어 문무왕이 만든 보덕국마저 토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자면 이미 일부 고구려 부흥군의 힘으로는 당나라 군대에 맞설 수가 없는 형편이었으니, 당나라에 투항하기보단 신라에 의탁하고자 했던 안승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평도 만만치 않은 편이다. 고구려 왕족인 안승이 신라 편을 든 덕에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에 협조하여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이기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안승을 따라 신라로 투항한 고구려계 귀족들이 신라로부터 6두품을 하사받고, 신라 귀족 사회에서 살아갔다는 점을 상기해보자면 안승이라는 사람 본인의 외교적인 안목은 그리 나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점은 경순왕이 처신을 잘 해서 신라계 가문이 고려시대와 그 이후까지 번성한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안승을 따라 신라에 투항한 자들은 훗날 '고려'를 재건하게 되는 패서 호족들과는 무관하다. 보덕국 사람들은 서라벌이나 남원 및 익산 남쪽 전라남·북도에 전원 분산 배치되었으며, 이 때문에 끝내 고구려 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운좋게 6두품을 받았던 이들은 거진 서라벌에 살았던 이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이들은 그냥 서라벌 주민으로 동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한국 역사상 한 인물을 통해 이렇게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이 일어난 사례는 후삼국시대 호족 세력의 등장 이전 그야말로 처음 있는 일이다. 또 그만큼 가장 미스테리하고 어찌보면 가장 믿음없는 인물이 안승이기도 하며, 옛 고구려인과 신라인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 인물의 중심이 안승이고, 당시 옛 고구려, 백제인들과 나당연합이다. 후삼국시대 이전만 놓고 보면 역사상 가장 의심스럽고 흥미로운 시대와 인물인 셈이다. 어찌보면 드라마에 주역으로 나올 인물이기도 하지만, 사료가 지나치게 부족하므로 가상시대의 가상인물로나 가능할 것이다.[23]

4. 대중매체

드라마 대조영에서 등장한다. 안승 배우는 강지후.[24] 역사적 평가대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데, 신라에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유약하고 나약한 성격으로 등장하며 자신이 고구려의 군주인지 신라의 신하인지 구분을 못하고 검모잠이나 대조영 등 고구려계를 의심하고 신라를 맹목적으로 추종한다. 결국 스승이었던 검모잠을 죽이고 대조영 일행을 당에게 넘기는 군주로서 존재할 수 없는 이적행위와 동시에 고구려국을 해체하여 그대로 신라로 귀부한다.

5. 같이보기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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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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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식 묘호 시호가 없는 군주는 왕호로 그냥 휘호가 사용됐다. [2] 설인귀 문무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승이 나이가 어리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역산한 출생년도이다. [3] 출처: 임기환, 《고구려 정치사 연구》 [4] 박씨 족단은 진번국 일대 고조선계로 추정되고, 김씨 족단은 3세기 초중반 낙랑군 또는 대방군 일대에서 남하한 예맥인이 처음에는 충주 금릉동에 내려가 마한 거수국을 세웠다가 4세기 초반 백제에게 멸망하자 다시 사로국으로 이주한 사례로 여겨지며, 제일 출신이 불명인 석씨 족단은 일단 배 타고 동해를 내려와 신라에 정착한 건 확실하다고 하다. 박씨와 석씨는 기원이 고조선계로 추정되어 그나마 가깝지만, 석씨 족단은 예맥인이 맞는지도 불확실하다. [5] 정확히는 부여 시조 해부루/ 동명왕의 대에서 우태와 주몽의 후손이 갈라졌고, 소서노가 먼저 우태와의 사이에서 고이왕계의 조상 비류를, 나중에 동명왕의 후손 주몽과의 사이에서 초고왕계의 조상 온조를 둔 것으로 보고 있다. [6] 부여 대소왕의 동생 갈사왕의 손녀. 갈사왕은 부여 왕자 출신이므로 부여 해씨의 분가인 고구려 고씨와 동성이 된다. [7] 일본 제3왕조에서 여왕이 8명 즉위하고 사위, 외손 계승이 수차례 일어나도 어디까지나 부계 조상을 공유하는 안에서만 인정되었던 것과 유사하다. [8] 공교롭게도 고구려의 후계국인 고려에서 초기에 태조 왕건이 호족들과의 연합을 공고히 하려던 탓으로 너무 많은 정식 왕후를 들인 탓에 비슷하게 왕자들끼리의 권력다툼이 터진 적이 있다. [9] 현재도 남아있는 횡성 고씨의 경우, 보장왕 직계를 자칭하기는 했지만 그게 정말로 사실이라고 해도 전란을 피해 아예 꽁꽁 숨어있던 일족으로 보인다. [10] 예시: 고선지. [11]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 연남산의 묘지명에는 남생, 연남건, 남산만 확인된다. 딸이 아예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642년 시점에서 모두 시집간 뒤였던 모양이다. [12] 현재 인천광역시 덕적면 소야도. [13] 한강 변의 서울이 아니라 오늘날의 황해도 재령군 일대에 설치되었던 고구려의 부수도. [14] 신라의 변경 방어를 책임지겠다는 뜻. [15] 검모잠을 살해한 후 신라로 투항한 것으로 보아 상대적으로 검모잠은 반신라 강경파였고, 안승은 친신라 온건파였다고 유추할 수도 있다. 다만 검모잠 역시 670년 6월 속내야 어떻든 신라의 군사 지원을 받기 위해 문무왕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완전히 신라에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16] 이전에는 보통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청당동 일대의 목지국이 준왕 집단이 남하해 세운 나라로 여겨졌지만 현대에는 고고학의 발달로 익산 일대의 건마국이 준왕 집단의 나라로 유력해졌다. 마한 초기에는 건마국이 마한연맹을 주도하다가 후기에는 목지국이 주도했던 걸로 보이는데 이 때문에 기록도 별로 없는 두 세력이 혼동되어 왔던 걸로 보인다. [17] 이미 고구려왕으로 책봉한 바 있는 안승을 다시 보덕왕으로 책봉한 것은 당의 공격 명분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보여진다. 674년 1월, 당은 군대 파견과 함께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동생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임명하였는데, 문무왕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한 것이 그 이유였다. 고구려 고지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영역화하려던 당에게 있어 신라의 안승 책봉은 그러한 기미주 지배에 대한 부정이었던 것이다. 안승의 보덕왕 책봉은 이런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김종복, 「7~8세기 나당관계의 추이」, 『역사비평』 127, 역사비평사, 2019, 249쪽.) [18] 혹은 잡찬(迊湌) 김의관(金義官)의 딸과 결혼했다고도 한다. 만약 두 기록이 동시에 진실이라면 김의관이 문무왕의 여동생과 혼인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김의관은 열조 원성왕의 증조부이다. [19] 신라 17관등 중 3번째 잡찬과 동일. [20] 폐쇄적인 골품제를 시행했던 신라 역사상 외부 인사를 진골 취급해 준 것은 김유신을 비롯한 금관국 왕족,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안승 이렇게 세 번뿐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신라 김씨 왕족도 똑같은 진골이기 때문에 외부인인 안승이 진골이 된 것은 신라치고는 굉장히 높은 대우를 한 것이다. [21] 다만 숭조 사업으로 작성된 족보의 기록이기에 정사와의 교차기록이 없는 한 신빙성은 떨어진다. 그렇지만 강원도 횡성군의 명칭 기원이 고구려 명칭의 횡청현이었으며, 또한 당시 전란을 피해 고구려계 인물들이 변방으로 피란을 갔던 경우가 흔했던 걸 생각하면 산골짜기가 많은 강원도 지방에 유력자들이 피신해 있었을 확률은 높다. 물론 상기한대로 그 중 한 명이 정말로 안승의 형이었을지는 불명이지만, 왕족이 한두 명이 아니었던 만큼 다른 고구려 방계 왕족이었을 가능성까지도 고려해볼 수는 있다. [22] 연정토 가계라는 다른 기록도 있지만, 어쨌든 당시 고구려인들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추대할만한 사람이라고 인증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정통성을 인정받은 사람인 건 확실하다. [23]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검모잠과 같이 고구려 부흥에 힘쓰지만 현실적으로 신라에 기댄 것에 불과하기에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한다. 검모잠이 그의 비겁함을 일갈하자 흔들리는 말투로 원한 자리가 아니고 자신에게는 버겁다고 토로한다. [24] 무인시대에서 김사미 선덕여왕에서 임종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