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월지(月池)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목간 200여점.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2. 내용
과거 안압지라고 불리던, 경주시 월지(月池)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목간들이다. 종이가 귀했던 고대에는 얇게 깎은 나무쪽에 글씨를 써서 편지나 문서로 사용했는데, 이를 목간(木簡)이라 한다.1975년 안압지 유물 발굴 과정에서 51점(묵서 45쪽)의 목간이 최초 출토된 이후 지속적으로 목간이 발견되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목간/木簡> 2006년 기준으로 102점이 발견되고, 이후 계속 발굴조사하여 200여 점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들 목간 중 몇 점을 제외하고는 안압지 북서편에 위치한 임해전지의 통칭 제4건물지에서 제5건물지로 통하는 이중 호안석축 밑 개흙층에서 수습되었다.
경주 월지 목간은 나무판의 위쪽에 홈을 내거나 구멍을 뚫어 끈을 묶어 어디에 걸거나 매달 수 있도록 하였으며, 서체는 주로 예서체이나 간혹 초서체로 쓴 것도 있으며, 칼로 글자를 새긴 것도 있다.
이러한 경주 월지 목간들은 당시 신라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데 예를 들어 목간 중에 '세택'(洗宅)[1]이라는 글자는 당시 신라 관청 이름을 알려주며, 8세기 중엽 중국 당나라(唐)의 연호를 사용한 '보응사년'(寶應四年·765년), '천보십일재'(天寶十一載·752년) 등 구절은 목간의 제작연대를 보여준다. 궁궐 문을 경비하는 보초의 근무상태를 점검한 내용을 기록한 목간도 있어 당시 궁궐의 구조와 경비인원 등을 알 수 있다.
8세기에 작성된 목간들로, 당시 신라의 사회상 연구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으로는 부족한 기록들을 보충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3. 주요 목간들
6세기 금석문인 단양 신라 적성비에서 등장하는 지방관의 명칭인 ‘당주’가 목간에서 처음 등장한다. 경향신문 : 1000년 고도 경주 월성의 연못터에서는 무엇이 쏟아져나왔나
당시 신라인들의 식료품 유통 시스템이 기록되어 있다. 동아일보 : 목간은 고대史 비밀 푸는 열쇠
신라 향가로 추정되는 시가가 적힌 목간들. 연합뉴스 : "경주 출토 목간에서 신라향가 1수 발견" 경주 출토 목간에서 신라향가 1수 발견
기러기와 꿩, 오리와 같은 새들을 비롯해 산양과 노루, 말과 사슴, 개, 멧돼지 같은 포유류들을 모아 동물원을 만들고 관리한 모습을 보여주는 목간. 840. 경주 안압지에 동물원이 있었다.
당시 신라인들이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것처럼 문관들끼리 모여 설전을 통해 박식함을 겨루는 유희의 일종인 책사(策事)를 즐겼음을 보여주는 목간. 연합뉴스 : 안압지 '책사' 목간
일(壹), 삼(參), 팔(捌)과 같이 위·변조 등의 부정 행위를 막기위한 갖은자 체계를 사용한 모습 경향신문 : '일(壹) 삼(參) 팔(捌)…' 신라인들이 변형 숫자 글자 쓴 이유
신라 특유의 독특한 이두 체계를 보여주는 목간.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보다 중국식 한문표기법을 먼저 받아들여 6세기 말부터 차자표기법(이두)이 정체 또는 퇴조한 것과 달리 신라는 6세기 말~7세기로 접어들며 이두 표기가 더욱 발전했는데, 이에 대해 국어학계 일각에서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한자를 100여 년 늦게 도입한 신라는 상대적으로 한문 이해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자국어 표기(이두)를 발전시킨 것" 아니냐는 시각이 있었지만, 오히려 역사학계에서는 "오랫동안 구두 전달 위주로 행정명령을 내린 신라의 특수성이 한자 도입 이후 문서에도 반영돼 한국어 만의 구어체를 살릴 수 있는 이두 개발로 이어진 것"이라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오히려 신라의 이러한 점 덕분에 중국식과는 다른 고대 한국식 독자 표기법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알 수 있는 셈. 동아일보 : 신라 이두 발전의 비밀, ‘제2의 사서’ 목간(木簡)에서 찾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우리말의 옷, <문자, 그 이후-한국고대문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