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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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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1. 개요

경남대학교의 역사, 주요연혁을 다룬 문서이다.

2. 상세

1946년 ' 국민대학관'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1952년에 '해인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였고 1956년에 마산시 완월동으로 이전했으며 1961년 마산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고 1971년에 경남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73년에 현 월영동 부지로 이전하였다. 1982년에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여 '경남대학교'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때 청와대 경호실장을 역임했던 박종규가 오너였고, 2019년 현재 11대 총장은 그의 친동생인 박재규 총장이다.[1]

참고로 서울특별시에 있는 국민대학교와 창학 뿌리가 같다. 국민대학관이 정규대학으로 승격되기 위해서는 재단이 필요했고, 조선 불교 총무부장이었던 최범술이 해인사 사찰재산을 기부하겠다고 나서면서 1948년 최범술을 재단 이사장으로 선임했다. 그런데 최범술 재단이 국민대학의 설립자이자 초대 이사장, 초대 학장이었던 신익희를 임의로 해고하자,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반발하여 '학장 유임운동'을 벌여 재단을 축출한다. 해공 신익희 학장의 국민대학에서 떨어져 나간 최범술 재단은 마포에 똑같이 '국민대학관' 간판을 달고 학교를 운영하다가 1952년 '해인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변경, 현재의 경남대학교가 되었다. 관련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1979년 10.26 사태의 기폭제가 된 부마항쟁(10.16-20)에서 마산 항쟁의 진원지로 민주화운동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10월 18일 경남대학교 학생 1,000여 명이 기동 경찰 300여 명과 대치하였고, 이후 장소를 옮겨 3·15 의거탑에서 시민이 합세하여 1,000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 및 언론 자유를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항쟁이 시작되었다.

1946년 9월 국민대학관(國民大學館)[2]으로 발족하여 2023년 기준 개교 77주년을 맞이하였다.

1982년 3월에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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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대중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을 역임. [2] 그렇기 때문에 국민대학교와 창학 뿌리가 같다. [3] 이는 당시 경상남도 소속이었던 울산광역시 소재 울산대학교에 비해 3년이나 앞선 시기다. [4] 여러모로 울산대학교와 비슷하다. 울산대학교는 현대그룹 후광을 업고 재계의 지원을 받고, 경남대학교는 정계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역사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