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8 01:10:54

게오르그 쿨렌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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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01월 23일 ~ 1948년 10월 4일
시대를 잘못 타고난 바이올리니스트
독일 브레멘에서 태어난 바이올리니스트. 1930~40년대의 바이올린 거장들 중 한 명이었다.

1. 생애

게오르그 쿨렌캄프는 1898년 독일의 브레멘에서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부터 바이올린에 관심을 가져 6살 때였던 1904년부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악장에게 , 나중에는 지휘자였던 에른스트 벤델에게 개인 레슨을 받았다. 그 이후에는 레오폴드 아우어[1]을 사사하고 1912년에 리사이틀을 열어 데뷔했다. 그는 베를린의 호흐슐레에서 음악 공부를 했고, 호흐슐레 오케스트라의 악장까지 맡았다.

이후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그의 고향인 브레멘에 돌아와 브레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되었으나, 결국 솔리스트로서의 활동에 더 중점을 두게 되었고, 솔리스트로 전향한 이후에는 그의 모교인 베를린의 호흐슐레에서 상임 강사로 근무했다. 1935년에는 피아니스트 에드윈 피셔와 첼리스트 엔리코 메나르디와 트리오를 만들어 1948년까지 활동했다.[2] 이 시기에 그는 피아노 듀오 활동도 활발히 진행했는데, 특히 게오르그 솔티 그리고 빌헬름 켐프와 많은 활동을 했다.[3]

1937년에는 새롭게 발견된 로베르트 슈만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를 세계 초연해 많은 호응을 얻었고, 이어 세계 최초 녹음까지 진행했다. 이 외에도 그는 여러 작품들의 세계 초연을 진행했는데, 오토리니 레스피기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 그리고 시벨리우스의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세계 제2차 대전 발발 직전에 그는 나치 독일의 치하에 있었음에도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거기다가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카덴자로 녹음했다.[4]

개인적으로 나치의 사회진화론을 믿지 않았던 그였음에도 "아리아인" 음악가로서 나치 독일 시기에 엄청나게 바쁜 삶을 살았고 공연 문의가 빗발쳤는데, 그는 오히려 이것을 역이용해 그 당시 연주 금지곡들을 연주할 기회로 삼았다. 그가 아리아인 음악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용서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40년에 포츠담으로 이주하였고, 1943년에 베를린에서 열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의 시벨리우스 협주곡 공연을 마지막으로 1944년부터는 나치 정부의 계속되는 불만족스러운 요구에 대응해 스위스로 이주해 솔리스트로서의 커리어를 계속 진행하고, 루체른의 콘세르바투아르에서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48년 스위스의 샤프하우젠에서 뇌염으로 52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2. 사후 평가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1악장. 반주는 게오르그 솔티이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연주자

그가 녹음을 남긴 지 거의 80년이 다 되어감에도 아직까지도 그의 멘델스존, 글라주노프, 브루흐 그리고 베토벤의 연주는 최정상급의 연주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 연배의 음악가 치고는 음반도 많이 녹음한 편이지만, 그 시기가 나치 제국의 시기와 거의 전부 겹쳤고, 이후 그의 명성을 회복시킬 시간이 없이 1948년에 일찍 사망한 것 때문에 그의 이름이 현재 잘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

그의 녹음은 계속해서 리마스터링되어 나오고 있는데, 한번쯤 들어보자. 모노임에도 소리가 명확하게 전달되어 아주 좋은 연주이다.

여러모로 불쌍한 음악가.


[1] 나단 밀스타인, 미샤 엘먼 등의 스승 [2] 그가 퇴단하고 나서 그의 자리는 훗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되는 볼프강 슈나이더한이 맡았다. [3] 게오르그 솔티와 한 녹음은 2016년 엘로퀀스 레이블에서 복각되었는데, 상당히 좋다... [4] 둘 다 유대인이었다는 이유로 나치에게 연주 금지를 당한 음악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