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ZELDA(ゼルダ)는 70년대 말부터 90년대 중순까지 활동했던 일본의 록밴드이다. 1920년대 미국의 화려하고 세련되면서도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메인 컨셉으로 했으며 펑크나 록에만 구애되지 않은 다양한 시도를 보여준 밴드로 걸즈 밴드로는 사실상 일본 최초의 걸즈록 밴드이자 기네스북 공인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여성 록밴드'에도 이름이 올라가 있다. 밴드명의 유래는 리더였던 코지마 사치호가 좋아하던 소설인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아내 젤다.2.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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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 : 타카하시 사요코(高橋佐代子. 사요)
: 1964년생으로 밴드 최연소자. 화과자가게 딸로 긴자 출신. 중학생 시절부터 밴드에 합류했던 터라 심야에는 라이브를 하지 않았으며 수학여행을 갈 적엔 밴드활동을 쉬었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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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리스트 : 이시하라 후키에(石原富紀江. 후키에)
: 1960년생. 호세이대학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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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시스트 : 코지마 사치호(小嶋さちほ. 치호)
: 1958년생. 밴드의 리더. 치바현 마츠도시 출신. 변화무쌍한 헤어스타일의 소유자로 아마도 여성 뮤지션 중 최초로 드레드 헤어를 하고 공개 음악방송에 나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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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머 : 오자와 아코(小澤亜子. 아코)
: 1963년생. 일본여자대학 이학부 중퇴. 프로그레시브 밴드 신게츠(新●月)의 최후기 멤버였다.
- 전 멤버
보컬 : 케이(ケイ) - 후일 PTA'S로 활동
기타 : 스즈키 쇼코(鈴木洋子. 요코), 모토무라 나오미(本村直美)[1]
드럼 : 노자와 쿠니코(野沢久仁子. 마루)
키보드 : 토요 (トヨ)
3. 역사
3.1. 인디즈 시절
BOYS BOYS라는 여성으로만 구성된 아방가르드 계열 인디밴드의 베이시스트였던 코지마 사치호가 드러머의 미국 이민으로 인한 밴드 해체 후 다시 주축이 되어 ZELDA를 결성한다. 초대 멤버는 보컬의 케이(ケイ)와 기타리스트 스즈키 요코(鈴木洋子), 드럼 노자와 쿠니코(野沢久仁子), 키보드의 토요(トヨ)였지만 곧 케이와 토요가 탈퇴한다.다음해 도쿄와 관동의 펑크 밴드들이 모여 펑크 뉴웨이브라는 흐름을 만들어냈고 펑크 밴드들이 모여 콘서트를 개최한 적이 있는데 그 콘서트에 참여한 코지마가 배포한 동인지에 낸 멤버 모집 공고를 본 여중생 타카하시 사요코(高橋佐代子)가 보컬로 가입한다. 코지마와 타카하시는 이미 어느정도 면식이 있는 지인이었으며 그렇게 1980년 12월에 인디즈 첫 싱글인 ASH-LAH를 발매하고 다음해 EP인 ZELDA를 발표한다.
3.2. 일본 포노그램
메이저 데뷔 싱글인 미라쥬 러버(ミラージュ・ラヴァー) |
1982년 8월 일본 포노그램[2]과 계약한 ZELDA는 치호와 면식이 있던 펑크 록 밴드인 LIZARD의 보컬, 기타리스트였던 모모요[3]가 프로듀서를 맡은 셀프타이틀의 첫 앨범 ZELDA와 메이저 데뷔싱글인 미라쥬 러버(ミラージュ・ラヴァー)를 필립스에서 동시발매한다. 메이저 첫 앨범인 Zelda는 펑크 록, 뉴웨이브 밴드 출신 프로듀서의 성향과 엄한 지도에 힘입어 당대 트렌드였던 뉴웨이브 성향이 많이 묻어나오는 앨범이 되었다. 세계적으로 펑크 록이 유행하던 시절이었지만 일본은 그 시절까지도 유독 트렌드가 여성 아이돌에 머물러 있었던 차에 젤다가 포문을 열고 나오자 레베카나 프리프리 쇼야를 비롯한 수많은 걸즈록 밴드들이 탄생하며 젤다 역시 걸즈록의 선구자로 알려져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후일 서적으로 출간된 ZELDA 이야기(ZELDA 物語)에 따르면 퍼스트 앨범의 레코딩은 초기에 악보를 찍어놓은 다음 모모요와 세션 드러머가 기타, 드럼 파트를 모두 연주하고 나서 멤버들이 연주를 따라갈 때까지 식사도 안 하고 잠도 안 재우는 식의 굉장한 공포정치 속 레코딩이었다고 사요코가 밝혔다.
1983년 신생 ZELDA로 첫 라이브를 갖기 직전 멤버들의 탈퇴로 기타리스트가 스즈키 요코에서 이시하라 후키에, 드러머가 노자와 쿠니코에서 신게츠의 드러머였던 오자와 아코로 교체된다. 프로듀서를 문라이더즈의 시라이 료메이로 교체하고 낸 앨범인 세컨드 앨범 CALNAVAL은 문라이더즈 쪽 인맥들이 게스트로 여럿 참여했는데, 뉴웨이브 장르를 시도했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느낌이 강했던 첫 앨범과는 달리 녹음에 오케스트라와 신디사이저를 적극 기용했고 문라이더즈 특유의 팝 성향과 재즈적인 필링이 가미되어 좀더 밝고 대중적인 노선을 택하며 상당한 인기를 끌어 1984년엔 밴드의 핵심인 베이스의 사치호와 보컬 사요코 2인의 어쿠스틱 유닛인 마네키네코 카게키단(招き猫カゲキ団)을 결성해 4곡이 수록된 미니 앨범을 발매해 히트시킨다. 기존 젤다의 색과는 전혀 다른 동요나 쇼와 레트로 느낌의 곡들이 특징. 대충 2집 정도까지를 암흑 젤다라고 일컫는 경우가 있는데 마네키네코 카게키단은 그런 평가가 무색하게 귀엽고 밝은 분위기라 많은 인기를 끌었다.
3.3. CBS 소니
젤다의 '신비한 소녀' 노선을 대표하는 곡인 3집의 수록곡 Water Lover |
싱글로 발매된 곡인 黃金の時間 |
1985년, 일본 포노그램에서 CBS 소니로 소속사를 이전한 젤다는 다시 시라이 료메이의 프로듀스로 밴드의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세번째 앨범인 하늘색 모자의 날(空色帽子の日)을 발매한다. 밴드 내 두 문학소녀들인 코어 멤버 코지마 사치호와 타카하시 사요코의 신비한 소녀 노선의 가사와 좀더 조근조근해지고 얌전해진 분위기 속에서도 더욱 다채로워진 밴드의 일면을 보여주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이 앨범의 히트로 다음해 소니와 세이부가 투자하고 당대 인기배우였던 미카미 히로시가 주연한 영화 빌리 더 키드의 새로운 새벽(ビリィ★ザ★キッドの新しい夜明け)의 주제가를 맡아 황금의 시간(黃金の時間)을 싱글 발매, 멤버 전원이 영화에도 출연하는 경사를 맞는다. 새로운 성과에 경도된 ZELDA는 다음해인 1987년 요닌바야시, 플라스틱스를 거쳐온 실력있는 프로듀서 사쿠마 마사히데를 프로듀서로 맞아 4번째 앨범인 C-ROCK WORK를 발매한다. C-ROCK WORK앨범은 젤다 커리어 사상 최후의 뉴웨이브 성향 앨범으로 버블시대 말기답게 앨범재킷부터 기존의 황량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에서 일신한 트렌디하고 밝은 분위기에 짙게 화장한 멤버들의 모습이며 돈을 들인 사운드에 걸맞은 퀄리티를 보여주었다. 이제까지 보여주었던 초기 문학적 감수성의 펑크소녀나 신비주의 분위기에서 탈피해 월드뮤직, 에스닉 계열의 분위기로 음악적인 흐름이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1988년엔 리더인 치호가 당시 교제하던 BO GUMBOS(보 검보스)의 보컬 톤토(쿠토미 타카시)의 영향을 받아 레게적인 음악성과 포스트 펑크에 경도되기 시작하면서 음악적 색이 완전히 바뀐다. 라이브 앨범을 녹음할 당시부터 밴드 역시도 분열의 조짐이 서서히 보였는데 프로그레시브 밴드인 신게츠 출신이었지만 박자감각을 타고난 편인지라 16비트 정도는 가볍게 소화해내던 아코는 무리없이 활동했지만 8비트 위주의 하드록부터 음악커리어를 시작한 기타리스트 후키에의 실수가 잦아지고 밴드 내에 점점 불협화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결국 후키에가 힘겹게 밴드 전체에 스타일을 맞춰나간 5번째 앨범인 'SHOUT SISTER SHOUT' 이상으로 고생 끝에 발매해낸 여섯번째 앨범 DROPS 발매 후 라이브 투어 중에 후키에가 탈퇴하고[4] 밴드는 1년간 활동을 정지한다. 음악성의 변경은 가령 밴드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었던지라 수많은 찬반양론 끝에 C-ROCK WORK부터 판매량이 서서히 감소해나가던 밴드는 결국 1990년 CBS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Cutting Edge로 소속사를 이전한다.
3.4. Cutting Edge, 그리고..
신생 ZELDA의 LOVE LIVE LIFE앨범 수록곡인 MAMAREAJA 라이브. 3년만에 상전벽해가 일어났음을 느낄 수 있다(...). |
후키에가 탈퇴하고 소속사 이전 후 새로운 기타리스트인 모토무라 나오미가 가입했는데 후키에와는 달리 좀더 표현력이 넓고 여러 장르를 포용하고 연주할 수 있는 기타리스트였던 모토무라의 가입으로 젤다는 에스닉, 월드뮤직 위주의 밴드로 성향이 완전히 변해[5] 3년만에 발표한 1992년의 7집 LOVE LIVE LIFE는 아예 자메이카에 가서 레코딩하기에 이른다. LOVE LIVE LIFE부터는 아예 비주얼부터 버블 시절을 탈피한 월드뮤직의 에스닉함과 인도음악의 느낌이 강하며 라이브에서는 사요의 댄스(...)가 추가되었고 그 와중에도 안정성을 잃지 않는 아코의 매우 독특한 드럼 플레이와 블루지함을 유지한 16비트의 커팅, 퍼즈톤 위주의 모토무라의 기타 등등 변경점이 넘쳐난다.
밴드의 마지막 싱글인 금목서(金木犀) |
3.5. 그 후의 ZELDA
보컬의 사요코는 1996년 솔로앨범 발표 후 APE라는 유닛을 결성해 활동하다 해체하고 현재는 サヨコオトナラ라는 월드뮤직 밴드를 결성해 활동중이다. 음악활동은 그만두지 않았으며 가끔 사치호의 라이브에 게스트로 출연한다.베이시스트 사치호는 1987년부터 동거하기 시작한 남성 보컬리스트 돈토(쿠토미 타카시)와 1995년 결혼해 오키나와로 이주했으나 2000년에 쿠토미 타카시가 부부동반 하와이 여행 중 뇌출혈으로 사망한다. 음악활동도 그만두지 않았고 현재까지 오키나와에 거주중이며 두 자녀 모두 뮤지션으로 활동중.
기타리스트 후키에는 밴드 탈퇴 이후 Flowers of Romance, LIPSTICKS 라는 밴드로 활동하다가 음악계 은퇴.
드러머 아코는 해체 후에도 코이즈미 쿄코나 다른 밴드의 세션으로 음악생활을 계속했으며 가끔씩 사요코의 라이브에 게스트 출연을 한다.
4. 평가
젤다는 걸즈 밴드의 선구자격인 밴드였고 단순히 여성 프론트우먼을 내세운 밴드의 영역을 벗어나 문학 걸즈록 밴드라 불릴 정도였던 사요코와 사치호의 도시적이고 독특한 문학소녀 감성의 가사, 전성기 기타리스트인 후키에의 절묘한 하모나이저 운용을 통한 맑고 독특한 톤이 어우러진 이국적인 솔로와 출중한 작곡실력, 아코의 탄탄한 박자감각을 기반으로 한 타이트하고 신출귀몰한 드러밍과 신디사이저까지 다룰 수 있는 다재다능함을 선보이며 당대 웬만한 남성 연주자들 수준의 연주실력과 세계관을 보여주었다.비록 후기 걸즈 밴드들인 쇼야나 레베카, 프리프리만큼의 판매량엔 미치지 못했지만 젤다는 한 장르나 흐름에 안주하지 않는 음악적인 시도와 진보를 보여주며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끊임없이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일본 음악사에 유니크한 존재로 남았다. 초기의 펑크, 뉴웨이브에서 중반의 팝과 포스트 펑크, 최후반기의 월드뮤직, 레게로 음악성을 바꿔가며 팔색조의 매력을 뽐내던 젤다의 모습은 마치 여성이 성장해서 변화해 가는 모습을 계속 보여준다는 극찬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판매고가 따라주지 못해 고전했던 AVEX시절의 후기작들 역시 현재는 재평가되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을 통해 신선한 시도를 한 양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5. 여담
- 팬클럽 이름은 전젤연(全ゼル連)이었다(...).
- 상술하다시피 프리프리나 쇼야에 비해 활동은 빨랐지만 판매량이나 인기는 약간 뒤처졌던 차에 어느 쇼프로에서 같이 출연했을 때 사회자가 프리프리를 보고 걸즈 밴드의 선구자라는 얘기가 나오자 젤다 멤버들이 저희가 먼저인데요 라고 말하고 프리프리 멤버들이 웃으며 사과한 적이 있었다.
- 사요는 중딩 시절부터 밴드활동을 했던지라 결국 밴드활동 때문에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 모리타카 치사토가 학창시절 젤다의 곡을 많이 카피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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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5ch에 젤다의 전성기와 그 시절을 추억하는 아주머니 팬들이 많고 스레도 세워져 있지만, 범세계적으로 유명한
젤다의 전설 시리즈의
젤다가
링크와 혼동되어 히로인인줄도 모르는 감은 있긴해도지명도가 훨씬 유명한데다 밴드 젤다도 어느덧 40년이 되어가는 연식이라 언급은 떨어지는 편. 때문에 젤다 밴드 관련 정보들로 검색해봐도 게임 정보와 뒤섞이거나 묻히는 등 자료 찾기가 무척 어렵다. 참고로 젤다 시리즈의 첫작인 젤다의 전설 출시보다도 7년 앞서 밴드가 결성되었으니 오히려 밴드쪽이 원조다.
[1]
후기 ZELDA의 핵심인물로 후키에나 아코를 제외하고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 수준이던 타 멤버들에 비해 탄탄한 연주력을 자랑하던 멤버였던지라 사요와 치호 모두 모토무라에게 엄격한 지도를 받았다는 회고를 남겼다.
[2]
후일의 머큐리 뮤직으로 유니버설 레코드에 합병
[3]
モモヨ.본명 스가와라 요스케
[4]
시부야 라이브에서 후키에가 기타를 파괴하는 퍼포먼스를 한 직후라 팬들은 터질 게 터졌구나 하는 반응을...
[5]
후일 인터뷰에서 드럼의 아코가 밝히길, 밴드가 이렇게라도 노선을 변경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곧바로 해체했을지도 모른다는 회고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