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03:01:29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YMO에서 넘어옴
Yellow Magic Orchestra
호소노 하루오미 사카모토 류이치 타카하시 유키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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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folding [ 디스코그래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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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LLOW MAGIC ORCHESTRA
1978.11.25
Solid State Survivor
1979.9.25
X∞MULTIPLIES
1980.6.5
BGM
1981.3.21
TECHNODELIC
1981.11.21
NAUGHTY BOYS
1983.12.14
SERVICE
1983.12.14
TECHNODON
199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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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프로필 이미지.jpg
왼쪽부터
사카모토 류이치 타카하시 유키히로 호소노 하루오미
<colbgcolor=#D43D2C,#010101><colcolor=#FFFFFF,#DDDDDD>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イエロー・マジック・オーケストラ
Yellow Magic Orchestra
장르 일렉트로닉 뮤직, 신스팝
리더 호소노 하루오미
활동 기간 1978년 10월 18일 ~ 1983년 12월 27일
데뷔 1978년 정규 1집 《イエロー・マジック・オーケストラ》
(데뷔일로부터 [dday(1978-11-25)]일째)
레이블 commmons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1. 개요2. 멤버3. 역사4. 영향력5. 기술적인 면에서
5.1. 사용 악기 목록
6. 기타7. 주요곡8. 공연 영상&음원9. 디스코그래피
9.1. 앨범9.2. 싱글9.3. 비디오

[clearfix]

1. 개요

파일:YellowMagicOrchestra.jpg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1978년 11월 25일에 데뷔한 일본의 3인조 음악 그룹이다.

참신한 사운드로 일본 가요계에 충격과 반향을 일으키며, 일본 팝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그룹. 약칭으로 'YMO'로 부르기도 한다.

2. 멤버

3. 역사

일본 록의 전설로 불리는 핫피 엔도 베이시스트로 예전부터 명성을 떨치던 호소노 하루오미[2] 사디스틱 미카 밴드[3]의 드러머인 타카하시 유키히로와[4] 훗날 마지막 황제의 사운드트랙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해 널리 알려진 키보디스트 사카모토 류이치와 합심해서 1978년 결성되었다.

1983년까지 5년 가량 활동하였으나 1993년 깜짝 재결성 이후 2007년 본격적으로 재결성되었다. 실질적으로 3인이 모인 유닛인 현재의 Human Audio Sponge(HAS)와 과거의 YMO(Yellow Magic Orchestra)를 합쳐서 HASYMO라는 이름으로 다시 활동했었다. 유럽 투어의 기타 서포트로 코넬리우스로 알려진 전 플리퍼즈 기타의 한 축이자 시부야계의 중핵인 오야마다 케이고가 참여했다고 한다.

크라프트베르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신스팝 (일렉트로닉 팝)을 주로 다루었으나 영미 신스팝 밴드와 달리 아시아풍의 독특한 분위기를 추구했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불어닥친 뉴 로맨틱 열풍을 타고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자국 내에서도 올타임 넘버원 수준의 국민 밴드로 대접받고 있으며, 비슷하게 올 타임 레전드로 꼽히는 국민 밴드 사잔 올 스타즈보다도 높은 위상을 가졌다는 평가가 많다. 그만큼 현대 일본 음악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이렇게 YMO로서도, 팀으로서도 활발히 활동해왔으나 2023년 1월 14일 타카하시 유키히로가 오연성 폐렴으로 향년 70세를 일기로 가장 먼저 사망하고, 뒤이어 사카모토 류이치 또한 각종 암들이 겹처 발병하며 투병 도중 2023년 3월 28일 향년 71세로 사망하면서 YMO의 역사는 이렇게 마감되었다.

3인 최후의 공연은 2012년 8월 12일 World Happiness 2012, 합주는 2019년 12월 1일 호소노 하루오미 데뷔 50주년 기념 쇼에서 Cosmic Surfin'/Absolute Ego Dance를 연주한 것이 되었다.[5]

4. 영향력

내 인생 최대의 충격, 'YMO'
그들은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렸다.
게임의 서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이노 켄지[6]의 자서전 ' 게임'의 내용 中[7]

일본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슈퍼밴드답게 그 영향력 또한 막대하다.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던 80년대 버블 최전성기의 경제 상황 덕에 돈 걱정이 없던 야마하, KORG, Roland 등 양질의 신디사이저를 만들어내는 일본 악기 업계의 융성이 함께 만들어낸 일본 최초의 수퍼스타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지금처럼 전자음악 강국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이들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크라프트베르크의 음악적 스타일을 받아들이고 여기에 자신들의 팝적 감각을 덧붙여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확보하였다. 이러한 이들의 업적은 덴키 그루브, 플리퍼즈 기타 등으로 상징되는 시부야계 음악의 시조로 평가받는다.

또한 90년대 일본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프로듀서인 코무로 테츠야가 가장 좋아하는 밴드로도 유명하다.[8] 90년대 중반에는 YMO의 이니셜을 거꾸로 해 만든 Oriental Magnetic Yellow라는 카피밴드도 나왔는데 카피밴드라고 얕봤다가는 큰 코 다칠 정도로 YMO의 스타일을 잘 살렸다. OMY 말고도 미디/일렉트로닉 계열의 능력자들은 대부분 YMO의 음악을 기본적으로 카피한다.

access의 리더이자 일본 최고의 키보디스트로 언급되는 아사쿠라 다이스케도 고딩 시절에 YMO의 노래를 듣고 컬쳐 쇼크를 받아 본격적으로 키보디스트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5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현재는 영화음악 등의 활동으로 사카모토 류이치가 대내외적으로 가장 유명하지만, 일본어로 록을 부른다는 개념을 정립시켰다고 평가받는 호소노 하루오미, 일본 프로그레시브 록 성립에 큰 기여를 한 타카하시 유키히로 모두 일본 내에서 상당한 거장이다. 사카모토 없이 이 두 멤버의 커리어를 따라가기만 해도 20세기 일본 대중 음악을 거의 섭렵할 수 있는 수준이며, 그만큼 YMO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일본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9]

5. 기술적인 면에서

YMO와 신디사이저는 뗄려야 뗄수 없는 관계인것은 분명하다. 라이브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한번에 엄청나게 많은 신디사이저를 무대에 들고 갔다. 그런데 그 많은 신디사이저를 어떻게 다 다루었냐 하면 시퀀서를 이용한 자동 연주를 도입한 것이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신디사이저나 해먼드 오르간을 뮤지션이 직접 연주해야 했고, 그마저도 신디사이저는 모노포닉만 가능했고, 효과음을 넣거나 다른 악기의 대용으로 쓰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반면 이들은 MC-8 시퀀서를 사용함으로써 이런 상식을 깨버렸다. 이러한 시도는 적어도 아시아권에서는 매우 참신한 시도중 하나였다. 그리고 음악·음색에 대한 탐구심도 강하고,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이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이들의 라이브는 신종 악기 전시회와 같은 양상을 띠고 있었다.

5.1. 사용 악기 목록


아날로그 신디사이저만 사용한 것은 아니다.

6. 기타

일본이 낳은 세계적 음악그룹인 YMO의 색다른 위엄. 일렉트로니카,신스팝이라는 당시 첨단 장르의 음악을 하는 딱딱한 아저씨들 이미지라고 하기엔 멤버들 모두 생각보다 유머감각이 꽤 있는 편이다.
  • 예나 지금이나 이 세 멤버가 함께 뭉쳐 다니지만 전성기 시절 월드투어 돌 때는 멤버들 뿐만 아니라 세션 몇몇도 함께 움직였다. moog 엔지니어인 마츠타케 히데키(松武秀樹)[12], 키보디스트인 야노 아키코(矢野顕子)[13] 등과 함께했다. 그 밖에 필요에 따라 기타 세션을 구하는 식으로 투어를 다녔다. 함께 작업했던 유명 기타리스트로는 퓨전 재즈 계열에서 명성이 높은 기타리스트인 와타나베 카즈미(渡辺香津美), Stratocaster의 명인으로 유명한 오오무라 켄지[14]( 무도관 미국 투어 멤버) 등이 있다.
  • 최근에 재결성한 유닛 HASYMO가 2012년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No Nukes!'(반핵운동) 집회에서 공연했다고 한다. 이 공연에는 일렉트로니카의 아버지인 크라프트베르크도 참석했다고.
  • 과거 팀의 해체 사유가 "지나치게 인기가 많은 것이 두려워서"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도 사카모토 류이치는 자신의 지나친 인기로 인해 대인기피증이 잠시 생기기도 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맴버들이 M/V에 게임 플레이 장면을 삽입하거나 스페이스 인베이더 칩튠을 활용하는 등 비디오 게임에 관심이 많았으며, 재결성 공연 때에도 포켓몬스터의 원로 개발자 마스다 준이치를 메인 패널로 세우기도 했었다. 애초에 마스다 준이치도 이들의 팬이였으며, 음악에 눈뜨기 시작한 계기가 이들이였다.

7. 주요곡

Computer Game
  • 데뷔앨범 첫 트랙으로, 지금보면 꽤 촌스러운 느낌을 풍기지만, 백남준의 영향을 받은 전위적인 뮤직비디오임을 예상할 수 있다.[15] YMO 1집의 <Computer Game 'Theme From the Circus'>와 <Firecracker>를 한데 이어붙였는데, 제작사의 오기로 인해 이런 되도않는 제목을 갖게 되었다.
원곡(YMO) 제니퍼 로페즈의 "I'm Real"
Tong Poo[17]
  • 당시 초창기 전자오락음이 뮤직 비디오에서 사용되고 있어 특이한 느낌을 준다. 곡의 실질적인 작곡가 사카모토 류이치가 독주회에서 자주 연주하는 곡이며 YMO 버전 뿐만 아니라 피아노 버전도 많이 퍼져있다. 리듬감과 몽환감을 동시에 살린 YMO의 대표곡 중 하나이다.
Behind The Mask 마이클 잭슨의 보컬이 추가된 버전
  • 2집 'ソリッド・ステイト・サヴァイヴァー ( Solid State Survivor)'에 수록된 곡으로, 당시에 생소하던 전자음이 주가 된 전위적인 음악이었음에도, 특유의 적인 사운드 덕에 영미권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에릭 클랩튼 마이클 잭슨 등의 뮤지션에 의해 커버되기도 했는데, 세상에 나온 건 에릭 클랩튼의 락 버전이었지만, 실제로 먼저 만들어진 건 마이클 잭슨의 댄스 버전이라고 한다.[18] Thriller 앨범에 수록하려고 했으나 마이클과 YMO의 저작권 분쟁 사유로 제외되고 결국 마이클 잭슨의 사후 기념 앨범 Michael에 되어 신곡으로 포함되었다. Thriller 40에서 YMO의 원곡에 마이클의 보컬이 추가된 버전이 공개되었다.
Rydeen
  • 국내에서 YMO 노래 중에서 나름 유명한 곡으로, 제목의 어원은 애니메이션 용자 라이딘이라고 한다. 본래는 전설의 스모선수인 라이덴 타메에몬(雷電 爲右エ門)의 이름에 착안해 '라이덴'으로 표기했으나, "요즘은 미국에서 '용자 라이딘'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인기라니까, 라이딘으로 하자!" 라는 호소노의 제안으로 라이딘이 되었다고 한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작곡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타카하시 유키히로가 작곡하였다.
Seoul Music
  • 국악 리듬이 담긴 'Seoul Music' (일본명 ' 경성음악')이라는 곡이 앨범에 실린 적이 있다.[19]
원곡(YMO) 마리아홀릭 1기 ED (아메노키사키 여자합창단)[20]
  • YMO의 또다른 대표곡인 '君に、胸キュン'(너에게 가슴 두근)은 당시 오리콘 차트 2위 곡이자[21] YMO 싱글 최다 판매 곡으로, 당시 가네보 화장품 광고 음악으로 쓰이기도 했고 지금도 일본 내에서는 자주 리메이크되는 유명한 곡이다. 사실 곡은 평범하게 명곡이지만 팬들 사이에서 유독 회자되는 이유는 맴버 3명이 직접 등장한 뮤직비디오의 임팩트 때문이다. 지금은 세계적 거장이 된 아재 3명이 도수체조를 연상케 하는 댄스를 하고 고혹적인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귀욤뽀작한 포즈와 함께 "큥(두근)!"을 읊조리는 어마어마한 항마력을 요구하는 뮤직비디오. [22] 진중한 전자음악을 구사하던 그룹이 갑자기 깨는 모습으로 나왔다는 것에 당시에도 상당한 충격을 줬던 걸로 알려져 있다.당장 바로 위의 RYDEEN 뮤직비디오와 비교해보면..

참고로 곡은 아니나 2006년에 나온 공각기동대 S.A.C. 3기의 부제인 'Solid State Society'는 이들의 앨범인 'Solid State Survivor'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제작진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물론 차용 외의 관계는 하등 존재하지 않음.

후일 라제폰 음악감독과 카미나 마야 성우, 그리고 루카스아츠 제작의 어드벤처 게임 LOOM 일본판 음악 감독으로 유명해진 하시모토 이치코가 당 밴드의 서포트 멤버로도 활동하기도 했다.

23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하츠네 미쿠 오케스트라 라는 하츠네 미쿠 패러디 음반에서 뮤직비디오가 나왔는데...

이게 넨도로이드로 나왔다! # 지갑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엥? 하츠네 미쿠가 DX7이 아니라 TRITON EXTREAM이잖아?

8. 공연 영상&음원

1978년에도 공연을 하기는 했으나 유튜브에는 영상이 없다. 음원만 있다. 특이사항으로 공연에는 쓰이지 않는 곡인 Mad Pierrot를 연주했는데 이땐 앨범이 하나뿐이라 그런건가 싶다. 1979년 투어 당시 보조 세션이었던 와타나베 카즈미와 야노 아키코 이 두명은 이당시부터 있었다.
https://www.mixcloud.com/autumnleafprojekt/yellow-magic-orchestra-live-at-roppongi-pit-inn-22-12-78/
1979년 Greek Theatre (미국 LA)[23]
1979년 HURRAH (미국 뉴욕)[24]
1979년 Theatre Le Palace (프랑스 파리[25])
1979년 The Bottom Line (미국 뉴욕)[26][27]
1980년 NHK홀 (일본 도쿄)[28]
12월 27일
1980년 일본무도관 (일본 도쿄)[29]
1980년 A&M studio (미국 LA)
1981년 신주쿠 코마극장(일본 도쿄)[30]
1983년 일본무도관 (일본 도쿄)[31]
1993년 일본도쿄돔 (일본 도쿄)
2011년 Warfield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연 자체는 상당히 많이 했으나, 영상으로 남은 것이 많지 않다.

9. 디스코그래피

9.1. 앨범


2010년 10월, 한국에 아래 디스코그래피에 굵게 강조된 앨범이 발매되었다. 2015년에는 YMO의 주요 앨범들이 네덜란드에 위치한 'Music On CD'라는 업체[38]를 통해 발매되었다. 슈퍼 쥬얼 케이스가 기본 사양이며 가격은 일본판에 비해 저렴하니 일본원판이 아니라도 괜찮다면 구입을 고려해 보는 것도 괜찮다. TECHNODON 음반은 Music On CD에서 아직 발매를 안했으니 주의.

9.2. 싱글

9.3. 비디오


대부분의 라이브 영상은 DVD 또는 Blu-ray Disc로 리마스터되어 발매되었다.


[1] 본 팀의 일원 중 유일한 생존자 [2] 최근 애플 시드 엑스 머시나 음악 감독과 영화 감독 잇신 음악 파트너로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상승했다. 2018년에는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장편 영화 어느 가족의 음악을 맡기도 했다. [3] 7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록밴드 중 하나. 멤버들의 뛰어난 연주력과 창작력은 후대 밴드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참고로 밴드명은 존 레논의 백업 밴드인 플라스틱 오노 밴드의 패러디이다(…). 이 밴드의 리더인 가토 카즈히코(加藤和彦)는 국내에서도 알려진 임진강의 일본어판을 부른 포크 크루세이더스의 멤버이기도 하다. [4] 당시 로맨틱한 보컬과 일본인답지 않게 꽤 유창한 영어발음을 구사했다. 2010년대에도 죽지 않은 로맨틱한 보컬을 뽐내면서 토와 테이의 곡을 피쳐링해주는 등 괜찮은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세월이 지날수록 영어 발음이 더 좋아짐을 느낄 수 있다. [5] 하지만 호소노 50주년 때는 사카모토가 한창 투병중이어서 직접 공연 장소에 못가고 이원생중계로 공연을 했다. [6] 비디오게임 ' D의 식탁'과 ' 에너미 제로' 등으로 유명한 크리에이터. 2013년 향년 43세(만 나이)의 나이로 작고했다. [7] 이노 켄지가 자신을 홀로 기르신 아버지 다음으로 비틀즈랑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YMO를 좋아했다. 또한 YMO로 인해 디지털과 컴퓨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훗날 YMO가 해산하자 이노 켄지는 그 충격으로 한 동안 컴퓨터를 멀리 했다고. [8] TM NETWORK를 결성 시 YMO같은 스타일의 음악을 하고 싶었으며 약칭인 TMN도 YMO에서 유래했음을 코무로가 밝힌 바 있다. [9] 사실 밴드 초창기에는 갓 데뷔한 사카모토 쪽이 가장 덜 알려졌고 호소노와 타카하시가 더 유명했다. 상술했듯 호소노는 핫피 엔도 등의 활동으로 일본 음악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고, 타카하시도 사디스틱 미카 밴드를 통해 전설적인 활약을 남겼기 때문. 반면 사카모토는 그때 갓 데뷔한 뮤지션이었기 때문에 YMO가 인기를 끌 때는 나머지 둘과 달리 처음 인기를 받아보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한동안 대인기피증을 겪었다. [10] 마츠타케 히데키가 사용하고 있던 대형 모듈러 신디사이저이며 옷장이라는 별명이 있다. [11] 사카모토의 개인 소유물로, 첫번째 앨범과 라이브에서 사용했다. [12] 지금은 유튜브에서 활동 중이지만 이 사람도 일본 키보디스트계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고 방송 나올 때도 가끔씩 있다. [13] YMO 세션으로 활동 중에 사카모토 류이치와 결혼(야노로서는 재혼)하여 슬하에 사카모토 미우(坂本美雨)를 낳았고, 그 후 사카모토 류이치가 그의 매니저와의 교제로 아들을 낳은 이후로 1992년 별거한 후에 2006년에 사카모토 류이치와 협의이혼을 했다. YMO 멤버들의 프로듀싱으로 솔로가수로서 아트 팝, 테크노 가요 장르에서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14] 1998년 사망 [15] 사카모토 류이치가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고 1984년에 그를 실제로 만나서 'ALL STAR VIDEO'를 만드는 데에 협업을 했고, 'A Tribute to N.J.P.'라는 그를 위한 음악까지도 만들었다. [16] 사실 머라이어 캐리가 먼저 만든 Loverboy표절하여 선수치기로 발매한 곡이다. 다만 우리가 아는 지금의 Loverboy는 다른 버전인데, 이에 대한 뒷사정은 Loverboy 문서에 자세히 쓰여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룬 적이 있다. [17] 뮤직비디오에 수록된 버전은 Special DJ Copy 버전이다. [18] 추가된 가사와 보컬 멜로디는 마이클 잭슨이 직접 만든 것이다. [19] 나름 친한(親韓) 아티스트에 속하는 사카모토가 5.18 민주화운동 소식을 듣고 만든 음악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점이 사실인지는 불명확하지만, 2017년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과 한국이 EU와 같이 여권이 없이 자유로이 왕래하는 사이가 되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20] 카나코,마리아,마츠리카 [21] 이 시기에 호소노는 지금으로 비유한다면 음원차트 킬러 레전설급 아이돌인 마츠다 세이코에게 곡을 주기도 했었는데, 웃기게도 이 노래가 2위하는 동안 1위는 호소노가 작곡한 마츠다 세이코의 노래에 빼앗기고 말았다.이 노래도 결국은 콩라인 [22] 사실 이러한 컨셉은 전년 Taiso(体操)의 뮤직비디오로 맛보기선보인 바 있다. 미국의 뉴웨이브 밴드인 토킹 헤즈가 제작 감독을 맡았는데 체육복을 입은 여성는 당시 타카하시 유키히로의 매니저이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캐릭터는 호소노가 직접 그린 것이다. [23] 전성기 시절 영상중 화질과 음질이 가장 좋다. [24] DVD 또는 레이저디스크를 립 떠서 올린 영상으로 추정된다. HURRAH는 70년대의 나이트클럽인데 현재 폐업했다. [25] 풀영상이 없으므로 오디오만 기재. 영상이 있기는 하나 화질이 매우 나쁘고, 곡별로 끊어놓았다. 나중에 이 음원을 사용한것으로 추정되는 라이브 앨범 PUBLIC PRESSURE이 발매되어서인지 Tong Poo 커버영상의 경우 대다수가 이 공연의 음원을 기반으로 한다. [26] 소규모 음악 공연장이다. [27] 1974년 개장해서 2004년 폐업했다. [28] 라이브 이름이 'TECHNOPOLIS 2000-20'인 이유가 라이브 년도가 2000-20인 1980년도에 했기 때문이다. [29] 공연일자에 따라3가지 바리에이션이 있다. 영상으로 남은건 하나. 대략 이시절부터 모듈러 신디사이저가 두대가 되었다. 날짜순으로 배치하였으며, 27일 공연은 유튜브에서만 재생가능하다. 단순히 YMO곡만 공연한 것이 아니라, 사카모토의 솔로곡인 'Riot in Lagos'나 세션멤버였던 야노 아키코의 '재광동소년' 과 기타담당인 오무라 켄지의 'Maps'를 연주하였다. [30] 2020년 리마스터링 되어 블루레이로 발매되었다. [31] 君に、胸キュン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32] 일본반에만 Acrobat (アクロバット) #이 수록되어 있다. Mad Pierrot의 음색이 부드럽고, 피아노 효과음이 없다 [33] Rydeen과 Technopolis, 그리고 마이클 잭슨, 에릭 클랩튼 등에 의해 리메이크되기도 한 명곡인 Behind The Mask 수록 [34] YMO 첫 라이브 앨범이다. [35] 君に、胸キュン 수록 [36] YMO 두번째 라이브 앨범이다. [37] 도시바 EMI(현재는 EMI 레코드 재팬)으로 이적한 후 나온 앨범인데 YMO와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의 권리가 전 소속 레이블인 Alfa Records에 있었던 탓에 YMO(YMO에 가위표, Not YMO라고 읽는다.)라는 이름으로 발매되었다. # 합의가 된건지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로 2011년 재발매 되었다. [38] Music on CD 와 같은 계열인 Music On Vinyl에서도 YMO 주요 LP가 발매되었다. [39] 베타맥스, VHS발매 [40] 유일하게 베타맥스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매된 라이브이다. [41] 레이저디스크발매 [42] 블루레이발매 [43] VHS 발매 [44] 레이저디스크발매 [45] VHS, 레이저디스크 동시발매 [46] VHS, 레이저디스크 동시발매 [47] VHS, 레이저디스크 동시발매 [48] VHS 한정판 으로 발매되었으며, 구성품은 93년 일본 도쿄돔 라이브 VHS와 Not YMO로고가 있는 시계(!)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