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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도시 خوی 코이 | Kho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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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서아제르바이잔주 | |
인구 | 198,845명 (2016년) | |
주 인구 | 3,265,219명 (2016년) | |
해발고도 | 1,148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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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어 خوی
아르메니아어 Հեր
쿠르드어 خۆی
영어 Khoy
1. 개요
이란 서북부 서아제르바이잔 주의 도시이다. 타브리즈에서 서쪽, 우르미아에서 북쪽으로 각각 100km씩 떨어져 있다. 인구는 약 20만이고, 코카서스의 기독교 중심지로써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소금 광산이 위치하여 과거부터 실크로드를 따라 번영하였다. 이란 고원에서 찾기 힘든 드넓은 비옥한 농경지를 바탕으로 코이는 과일 생산 등 농업 기반 경제를 지니고 있다. 시내에는 고즈넉한 옛 건물들이 많다. 주민들은 대부분 쿠르드인과 아제리인들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 순니 이슬람과 쉬아 이슬람을 신봉한다. 그외에 소수의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한다. 시가지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코이 공항이 있다. 우르미아 호와는 약 30km 떨어져 있다. 별명은 이란의 해바라기 도시이다.2. 역사
4세기에 세워져 11세기에 중건된 성 세르키스 성당
기원전 714년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가 우라르투 원정을 위해 지나간 기록이 있을 만큼 유래가 깊다. 아르메니아 왕국 시기에는 아쉬카라추이츠라 불렸고 이후 파르티아에 속하였다. 기원전 36년 로마-파르티아 전쟁 당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이곳을 지나 아트로파테네로 행군하였다. 천년이 흐른 후 1022년에는 바실리오스 2세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이 진군하여 일대의 복속을 얻기도 하였다. 11세기 말부터 셀주크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210년 조지아 왕국이 점령하였다. 다만 13세기 중반 일 칸국을 거쳐 사파비 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1724년 5월 6일에는 러시아-사파비 전쟁을 틈타 오스만 제국군이 점령하였다. 같은해 콘스탄티노플 조약으로 러시아는 이를 인정하였다.
2.1. 코이 칸국
18세기 후반 코이 칸국 시절에 지어진 카툰 교
13세기부터 코이 일대는 아이유브 왕조의 일파인 쿠르드계 돈볼리 부족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아미르 이브라힘 돈볼리는 일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세력을 키웠고, 15세기에는 백양왕조의 번국으로써 하카리 산지를 지배하였다. 사파비 왕조의 성립 후에도 핫지 베그가 소크마나바드 총독이 되는 형식으로 세습을 이어나갔다. 다만 1548년 핫지 베그가 암살당한 후 타흐마스프 1세가 토벌군을 보내 수백의 돈볼리 가문원이 학살당하였고, 결국 오스만 제국으로 도피하였다. 그러다 17세기 초엽 사파비 조가 일대를 수복하자 돈볼리 가문은 마란드, 살마스 등지의 총독으로 봉해지며 복귀하였다. 18세기 초엽 사파비 조가 쇠락하자 사바즈 칸 1세를 시작으로 칸을 칭하며 '코이 칸국'이 성립되었다.
2.1.1. 짧은 번영과 멸망
1779년 코이에서 주조된 카림 칸 잔드의 금화
코이 칸들은 이후 나디르샤와 카자르 왕조의 창건주 아가 모하메드 칸에 충성하였다. 5대 칸인 호세인 콜리는 후자를 도와 1787년 쉬라즈 부근에서 로프트 알리 칸이 이끈 잔드 왕조 군을 격파, 1만 8천을 전사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에게는 타브리즈 칸국이 주어졌다. 1797년 아가 모하메드 칸이 암살되자 사디크 칸 샤카키가 반란을 일으켜 아제르바이잔 지방을 석권하였는데, 호세인 콜리가 출전하여 그를 축출하였다. 1798년 재차 거병한 사디크 칸은 일부 돈볼리 가문을 반란에 동참시켰다. 이에 카자르 조의 2대 샤한샤 파스 알리 샤는 1798년 여름 대군을 파견해 우르미아를 점령하였고, 콜리를 점령해 자파르 콜리 칸을 폐위한 후 호세인 콜리를 복위시켰다.
다만 1799년 봄 호세인 콜리가 의문사하자 자파르 콜리 칸이 복위하였다. 이에 파스 알리 샤는 재차 압바스 미르자 휘하의 토벌군을 파견했고, 6월 타브리즈에 이어 9월 17일 코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자파르 콜리는 오스만 제국으로 도주하였고, 호세인 콜리의 아들 마흐무드 칸이 총독으로 선임되었지만 얼마 후 폐위되며 코이 칸국은 멸망하였다. 자파르 콜리는 후일 러시아에 귀순하여 셰키 총독이 되었고, 러시아-카자르 전쟁 당시 전자의 편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손자인 파타일 칸은 1918년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초대 국무총리가 된다. 한편 마흐무드 칸은 1813년까지 아제르바이잔 총독을 지내다 사망한다. 약 반세기 가량 이란 서북부를 지배한 코이 칸국은 수도인 코이에 바자르를 포함한 여러 건물을 남겼다.
2.2. 근현대 (터키 vs 러시아)
러시아의 영향 하에 지어진 시청사
고대부터 19세기까지 코이 주민의 다수는 아르메니아인이었다. 다만 1828년 투르크만차이 조약 체결 후 러시아의 보호를 구하며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령 동부 아르메니아로 이주하였고, 그 결과 소수만이 남았다. 20세기 초엽 오스만 제국이 재차 코이를 점령했으나 1911년 러시아 제국군이 그들을 축출한 후 계속 주둔하였다. 러시아인 보병과 코사크 기병대로 구성된 수비대는 이란에게 반환된 후에도 상주하였고, 1차 대전 초엽 철수했다가 1916년에 돌아왔다. 다만 러시아 혁명을 틈타 오스만 군이 재점령했다가 종전 후 철수하였다. 2차 대전 시기에는 소련군이 점령하여 1946년까지 주둔하였다. 잠깐동안 아제르바이잔 인민 정부의 영토였으나 소련군이 철수한 후 팔레비 왕조에게 수복되어 현재에 이른다.
3. 갤러리
코이의 12개 성문 중 하나인 스톤 게이트
코이 칸국 시절 세워진 바자르
칸 카비리 고택
성 세르키스 성당 내부
일칸국 시대에 지어진 모탈렙 칸 모스크
13세기의 수피 성인 샴스 앗 딘 모하메드 타브리지의 영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