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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aea/스토리/Sid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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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레테
2.1. 해금조건2.2. Ambivalent Vision
3. 사야
3.1. 해금 조건3.2. Absolute Reason3.3. Absolute Nihil
4. 코우
4.1. 해금조건4.2. Crimson Solace
5. 시라히메
5.1. 해금조건5.2. Divided Heart
6. 앨리스 & 테니얼
6.1. 해금 조건6.2. Ephemeral Page
7. 라그랑주
7.1. 해금조건7.2. Esoteric Order
8. 에토/루나
8.1. 해금 조건8.2. Binary Enfold
9. 마야
9.1. 해금 조건9.2. Lasting Eden
10. 혜안
10.1. 해금 조건10.2. Severed Eden
11. 카나에
11.1. 해금 조건11.2. Sunset Radiance

1. 개요

Arcaea의 Side Story를 기록한 문서.

2. 레테

2.1. 해금조건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5-1 Ambivalent-1 파일:charicon_Lethe.png 파일:Arcaea/Genesis.jpg 레테 Genesis 클리어
5-2 Ambivalent-2 파일:Arcaea/Moonheart.jpg 레테 Moonheart 클리어
5-3 Ambivalent-3 파일:Arcaea/vsキミ戦争.jpg 레테 Romance Wars 클리어
5-4 Ambivalent-4 파일:Arcaea/Blossoms.jpg 레테 Blossoms 클리어
5-5 Ambivalent-5 파일:Arcaea/corps-sans-organes.jpg 레테 corps-sans-organes 클리어
5-6 Ambivalent-6 파일:Arcaea/Lethaeus.jpg 레테 Lethaeus 클리어
18-I NULL APOPHENIA-1 파일:charicon_Lethe.png 파일:Arcaea/NULL APOPHENIA.jpg 레테 NULL APOPHENIA 클리어
18-II NULL APOPHENIA-2 파일:arcaea_lethe_apophenia_icon.png 파일:Arcaea/Genesis.jpg 레테Apophenia Genesis 클리어
18-III NULL APOPHENIA-3 파일:Arcaea/NULL APOPHENIA.jpg 레테Apophenia NULL APOPHENIA 클리어

2.2. Ambivalent Vision

====# 5-1 #====
파일:Arcaea/Story/5-1.jpg
절벽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생의 굴레에서 벗어난 이들은 소라게가 껍질을 버리듯 영혼을 두고 가는 법이며, 새로운 생명이 그로 말미암아 태어난다. 그들의 정신은 머리 위에서 찬란한 광채를 발하는 연못으로 승천한다.

마치 물처럼, 정해진 형태가 없는 영혼들. 그 새하얀 영혼들이 하늘을 꿰뚫은 강렬한 색채의 연못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회색으로만 가득 찬 세계에 비추는 형형색색의 빛깔.

이를 혹자가 보았다면 경이로운 광경이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녀에게 이는 일상의 풍경이자, 일감에 지나지 않았다.
“방금 왼쪽에서 뭔가 흔들렸나?”

소녀의 뒤쪽에서 동료가 물어왔다. 소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가 바닥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동료의 무릎 위에 얹혀 있는 넓고 얕은 검은색 그릇에는 물이 담겨있었다.

물 위에 물체를 떨어뜨려 그 파문으로 운명을 점치는, 일종의 주술에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아직 물 표면에 파문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막 점을 친 참이었다.

“아니, 왜? 뭔가 이상해?”

소녀가 가볍게 대답했다.

“땅이 조금 흔들린 것 같아.” 남자가 말했다.

“이런... 좋지 않은데. 더 가까이 다가가볼까?”

“흠... 균열이 벌어졌을 수도 있겠는데, 한 번 가봐.”

“그래.”

소녀는 그렇게 대답하고선, 절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빽빽하게 들어찬 영혼들 덕에 소녀는 천천히 낙하할 수 있었다. 소녀가 자신의 옷을 꽉 맞게 조이던 실을 찾아내 당기자 옷이 헐렁해지며 약한 빛을 발했다.

옷이 큰 소리를 내며 펄럭거리자 영혼들의 영향이 적어져 소녀의 낙하가 빨라졌다.

소녀는 착지함과 동시에 허리춤에서 낫을 꺼내들어 펼쳤다. 그리고 날을 위로 향하게 뒤집은 뒤 밑동 위에 올라타,
멀리 있는 목적지까지 미끄러지듯 날아갔다.

균열 내에 갇힌 영혼들을 구슬려 빼낸 후 균열을 닫는 것.

다시 절벽으로 돌아와 또다른 이상이 생기는지 감시하는 것.

그것이 소녀의 임무였다. 매일이 이런 일의 반복이었다.
임무를 수행하다 자신의 때가 오면 소녀 또한 영혼들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
사실, 소녀의 때는 이미 왔었다.

아주 오래전에 이미... 소녀가 알던 세상과 삶은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아있었다.

====# 5-2 #====
죽음이라는 게 이래서는 안된다.

죽음이란 결말이다. “다음 생” 따위는 없다. 태어나, 살아가고, 죽은 세계가 전부다.

소녀가 살아있을 적엔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천국이니, 지옥이니, 연옥이니, 모두 고대적 사람들이나 믿던 교훈적 허구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이 장소는 도대체 뭘까? 소녀는 어째서 이 정체불명의 세계에서 깨어나게 된 걸까? 대체 뭘까? 대체 뭘까...

이제 와서 그 질문에 의미가 있긴 한가?
“흠...”

소녀는 등대 위에서 무릎을 감싸고 앉아 사막을 살펴보았다. 하얀색, 하얀색, 끝없는 하얀색... 그 사이에 반짝이는 유리 조각. “아르케아”라는 이름이 붙은 물건이었다.

소녀는 턱을 괴고 나른하게 왼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다리가 있었다.

“휴우...”
소녀는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일어서서 허리춤에서 낫을 꺼냈다. 낫은 소녀가 살아있을 때만큼 효과적이진 않았지만, 여전히 훌륭한 이동 수단이었다.

소녀는 무의식적으로 앞머리를 가르마의 반대편으로 쓸어내렸다. 그러면서 손가락 끝이 소녀의 왼쪽 뿔에 닿았다.

그래, 나에겐 뿔이 있었지...
여태껏 아르케아에서 본 어떤 기억에서도, 뿔이 달린 인간은 본 적 없었다.
이 황량한 세계에서 유희라고는 그 유리 조각들이 비추는 기억밖에 없었기에, 소녀는 아르케아를 들여다보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그들을 분류했다. 마치 기록처럼.

그러나 그 어디에도 그녀와 같은 모습의 사람이 등장하는 기억은 없었다.

소녀와 같은 종족... 종족... 종족? 종족이라 해도 되는 걸까? 소녀는 살아있을 적 어떤 “민족”의 일원이었던 걸까?

살아있을 때에도 지금처럼 영혼들을 관리하는 민족의 일원이던 걸까? 이제 와서 의미 없는 질문이지만, 생전의 기억을 좀 더 떠올린다면 예전의 자신에 더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은, 소녀가 집으로 삼은 장소에서 어떤 유리 조각이 사라졌고, 남았으며, 새로 생겼는지 기록해야 한다.

소녀는 등대에서 내려와, 또 다른 일과를 준비했다.

====# 5-3 #====
낫은 여전히 잘 날았다.

마녀가 빗자루를 타듯 낫의 손잡이 위에 올라탄 소녀는 파괴된 거리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날은 그녀의 뒤에 위를 향한 채 꼿꼿이 서있다가, 모서리를 돌 때마다 기울어졌다.
소녀는 낫을 타는 것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는 모양새였다.

소녀는 날아가는 도중 한 유리 조각의 무리로 시선을 옮겼다. 마치 강처럼 도로를 따라 흐르는 모습이었는데, 적어도 이 무리를 발견한 이후로 그 어떤 조각도 벗어나거나 새로 합류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이는 매우 특이한 일이었기에, 소녀는 매일 이 조각의 무리를 확인하고 있었다. 오늘도 무리를 이루는 유리 조각에 변화는 없었다.

연극, 노래, 슬픔, 기묘하고 거대하며 재빠른 기계에 대한 기억들.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실로 특이한 조합이다.

그 사실이 소녀에겐 매우 흥미로웠다.

소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기억을 찾으려 눈을 굴렸다.
물론 기억의 무리에서 특정한 기억 하나를 찾아내는 일은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일과 같다. 하지만 그 기억은, 소녀에게 특별히 이끌리고 있었다.

한 유리 조각이 무리에서 벗어나 소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선, 낫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올려 조각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 기억에는 조그만 수제 피리가 만들어지는 최종 공정이 담겨 있었다. 악기를 완성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장인은 이 마지막 한순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낸다.

악기가 소리를 내는 그 순간을 위해.

장인이 플루트를 불어보았다. 그리고선 음이 안 맞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소리는 났다.
이 기억은 한 기나긴 여정의 끝이기도 했고, 더욱 장대한 여정의 시작이기도 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순간을 포착한 기억이다.

무리 속의 다른 기억들 또한 특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 5-4 #====
그 기억은 소중하다.

사실, 소녀가 "소중하다"라고 생각하던 기억은 적어도 한 번쯤 그녀에게로 날아온 적이 있는 것들이다.

첫 반려동물의 기억, 생존과 희생의 기억, 첫 말의 기억, 용기를 주는 연설의 기억, 중요하고 개인적인 대화의 기억...

가끔, 소녀가 기억의 무리 옆을 지나갈 때면, 이런 소중한 기억들이 그녀를 따라오곤 했다.

그럴 때면 기분이 썩 괜찮았다. 이렇게 특별한 기억들이 한 장소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쁘기까지 했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훨씬 더 좋은 일은 따로 있었다.

아르케아의 세계는 기억의 보관소다. 충치의 기억, 맛있는 식사의 기억, 승마의 기억, 우유를 엎지른 기억, 무엇이든, 기억되었다면 이 장소로 오게 되어있다.
그리고 그런 평범하거나 특별한 기억 하나하나가 사람을 이룬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기억이란 어떤 사람이 살아있었다는 유일한 증거이다.

사람들은 기억을 남기기 위해 기념비와 묘비를 세우기도 한다. 잊힌다는 것은... 아르케아의 세계에서 소녀가 경험하고 있듯, 어쩌면 죽음보다 더 비극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

소녀는 말없이 멈추어 서서 한때 광장이었을 장소에 발을 디뎠다. 이곳에선, 셀 수도 없이 많은 수의 유리 조각이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다.

소녀가 생각하기에, 이 장소는 마치... 정원과 같았다. 정원을 이루는 “식물”들은 여기서 자라난 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온 것이긴 했지만.

소녀는 어찌 됐든 이 정원을 가꾸었다. 이 조각들은 소녀가 이 아르케아의 세계에서 “집”으로 여기는 장소 주변에서 찾아낸 것들이다.

이 조각들은 소녀가 깨어났을 때 원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흘러들어온 것들이다.
“흐음...”

그녀가 콧소리를 내며 유리 조각들을 모았다. 조각들은 보통 떠나진 않지만, 가끔 무리에서 벗어날 때가 있다.

소녀는 그게 걱정이었다.

...아르케아가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형태를 한 것에 이유는 있는 걸까?

...생전에, 소녀는 질문은 많이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걸 깨달았었다.

====# 5-5 #====
“음?”

아르케아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흔들렸다.
... 왜 생전의 기억이 떠올랐지...?

소녀의 머릿속에 마치 손님처럼 나타난 것은, 조그만 기억의 편린이었다.

처음엔 자신의 기억이 맞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것이 자신의 기억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기억이 난다. 어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래된 나무 두 그루 밑에 조용히 앉아있던 소녀와 동료. 영혼의 강은 아래로 떠내려갔고, 밤이 하늘을 뒤덮었다.

“모순이야.” 남자가 입을 열었다. “모든 생명이 중요하다고? 이 일을 반복해 봐. 매일매일...

영혼은 숫자로밖에 안 보이지. 많냐, 적냐. 그게 다라고. 그런데 그게 우리가 인간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니야.

오히려... 인간성에 너무 매달려서, 차가운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지.”

“하지만 이런 걸 너무 신경 쓰지 마.” 남자가 영혼의 강을 보며 소녀를 다독이듯 말했다. “너무 깊게 생각하면 정신이 먼저 망가져버릴 테니까.

너, 글렌(Glen)에 갔을 때 이 길을 걷고 싶은 이유가 뭐라고 설명했지?”

소녀가 대답했다.

“역시, 다들 똑같이 대답한다니까.” 남자가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대답만 기억해. 그럼 괜찮을 거야.”
기억은 그렇게 끝났다.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소녀의 정신이 현재로 돌아왔다. 대답을 기억하라고?

대답... 대답... 내가 뭐라고 답했었지?

“기억이... 안나.”

소녀가 약하게, 그러나 무겁게, 속삭였다.

남자가 욿았다. 소녀는 그걸 이제야 느꼈다. 슬픈 사실을 깨달아버린 소녀의 눈이 흐릿하고 따스한 애도의 색으로 차올랐다. 새로운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너무 크게 조각나버린 기억은, 멋대로 질문을 던지고서 그 답은 주지 않았다. 소녀는 낙심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자신이 온전한 자신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의 고통. 이를 어떻게 말로 설명할까?
유리의 구름 아래에서 소녀는 눈을 감고서, 고개를 숙이고 손을 얼굴에 갖다 댔다. 울지 않을 것이다.

울 수는 없다. 여기서 울어버리면, 무시하기로 했던 현실이 자신을 덮쳐올 것만 같아서. 소녀는 가만히, 그 자세로 앉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울지 않을 거야. 절대로. 절대로!

새하얀 세계에 홀로 웅크려앉은 사신은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껴안았다.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한다.

돌리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진정시키는 동안, 피하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 고개를 든다. 만약, 이곳이 죽음 이후의 세계라면...

소녀는 차라리 모든 것을 망각하길 바랄 것이다.

====# 5-6 #====
파일:Arcaea/Story/5-6.jpg

소녀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혼란은, 침묵을 가져왔다.
원래 말이 없던 그녀지만, 그 정도가 더 심해져 며칠이고 이어졌다.

그 기억의 가장 중요한 부분, 질문은 많이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것. 소녀가 깨달은, 여태껏 지키려던 철칙이었다.

그러나 이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옛 기억의 맛은 너무나 달콤했다. 소녀는 그 기억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해낸 것보다 그렇지 못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자신이 반쪽짜리 인간임을 다시 깨닫게 될 뿐이었다.

이젠 그냥 잊어버리자.
소녀는 오늘도 형형색색의 기억들을 마을 광장으로 인도했다. 이 행위를 일과로, 습관으로, 결국은 본능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어쩌면 단순한 일만 반복하다 보면 마음속에서 자신을 잡아먹으려 주둥이를 벌리고 있는 절망의 구덩이로부터 멀어질지도 모른다.

감정을 가져서 느낄 수 있는 게 가슴이 찢어질 듯한 슬픔뿐이라면, 차라리 모든 걸 잊어버리는 망각을 택하겠다.

아르케아 조각들을 이끄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하늘에서 반짝이던 어떤 조각에 눈이 갔다. 소녀는 별생각 없이, 그 조각을 가까이 끌어왔다.

그것에 비친 것은 길가에 쭈그려앉아 손으로 무언가를 감싼 아이의 모습이었다. 개미들이 아이의 손을 피해 갔다.

하지만 그 손이 감싸고 있는 것에는 관심이 있어 보이는 모양이었다.

사신은 좀 더 집중해서 이 기억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숨기고 있던 것은 다친 딱정벌레였다. 잠시 생각한 후, 아이는 두 손에 딱정벌레를 담아 올렸다.

그게 기억의 전부였다.
소녀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이 얼마나... 아무런 의미도 없는 기억인가.

딱정벌레는 살아났나? 아이는 얼마나 오래 살았을까? 언제까지 이 일을 기억했을까?

바보같다...

소녀는 웃음을 내뱉었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기억을 떠올림으로 자신이 이 세계에 있는 목적을 잊어버리게 되다니.

아르케아는 기억의 세계다. 죽은 자의 기억인지, 산 자의 기억인지. 그런 건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아르케아는 모두가 잊어버려도 좋을 법한 이야기들을 기록한 곳이다.

영혼이, 몸이, 기념비가, 대지 그 자체가 소멸해버릴지라도,
어떻게든, 아르케아는 그들을 기록한다.
소녀는 여기선 혼자다. 동료도 곁에 없다. 깨어났을 때 무얼 하라고 시키는 이도 없었다. 그렇다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소녀는 지금 이 세계에 살고 있다. 옛 삶은 끝났다. 결말이 지어진 이야기다.

하지만 소녀에겐 아직 주체성이 남아있다. 아직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왜 영혼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싶냐는 물음에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아직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의 반쪽짜리 자신도, 당시의 완전했던 자신과 같은 답을 내놓았을 거란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삶도 기억도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선 다르다. 소녀 자신의 기억은 잊어버렸을지 몰라도, 이 기억들은 그렇지 않다.

“영혼의 관리자”에서 “기억의 관리자”로. 나쁘지 않은 울림이다.
그대들은, 내가 여기에 있는 한, 기억될 것이다.

영원히.

====# 18-I[1] #====
그 여자다. 틀림없다. 그 여자가 왔다.

레테는 낫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침을 삼켰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시 떠올리고서 각오를 다졌다.

그녀의 삶은 끝났을지라도, 의무는 끝나지 않았다.

하늘이 유리로 반짝인다. 그녀가 무릎 꿇은 고원의 땅이 흔들린다. 이윽고 뿔 달린 사신은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일어섰다.

그리고서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이해하려 노력조차 하지 않는구나.” 여자가 말했다.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괜히 애쓰는군.” 레테가 대답했다.

“말은 아직 연습 중이야. 예전보단 꽤 잘하게 된 것 같은데.”

“별로. 여전히 못하는걸.” 레테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여자는 말없이 평온한 얼굴로 땅을 바라보았다.

“내가 어지간히 싫나봐?”

레테는 말없이 낫을 꽉 쥐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유감이야…” 여자가 레테 쪽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난 너한테 전혀 관심 없는데.”
“네가…” 레테는 깨문 어금니 사이로 말하더니,

“날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 상관 없어!” 이윽고 소리쳤다.

여자가 말없이 레테를 바라보았다. 마치 “상관있으면서.”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런 식으로… 영혼을 더럽히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어!” 레테가 소리쳤다.

“영혼이라고? 저걸 영혼이라고 생각해? 영혼을 가진 건 우리들이고, 저것들은 죽은 자들의 기억일 뿐이야.”
여자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삐죽삐죽한 “구름”이 머리 위로 기이하게 일렁였다.

“못 알아듣겠지만…” 여자가 중얼거리며 다시 레테의 눈을 바라보았다.

“다시 말해줄게. 저것들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야. 우리는 저것들을 이용하기 위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거라고.”

“입 다물어!”

레테가 낫을 높이 들고 여자에게 달려든 뒤 내려쳤다.

하지만 그 칼날은 잔상을 가를 뿐이었다.
“이 장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유리를 ‘이용’하지도 못하는 거야.”

그녀의 왼쪽 귀가 움찔거렸다. 뒤로 돌아보자 여자가 고원의 반대편에 생겨난 빛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네가 대체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조각들을 모아 새로운 세계를 만들 거야.”

얼굴에 손을 얹은 채, 여자는 자세를 고치고서 사신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손을 거두자,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반짝이는 꽃이 보였다.

“왜냐면 지금조차 나는…” 여자, 사야가 자신을 증오하는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모두 이 세계에서 맡아야 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당연히 너는 빼고.”

분노한 레테는 다시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

분노.

둘 사이에 공통된 감정은 그것이었다.

====# 18-II #====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는 하늘이 하나였다.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는 하늘의 절반이 밤으로 물들어있었다.

그들이 만날 때마다, 대화를 나눌 때마다, 레테의 반감은 더욱 커져갔고, 결국 마음 속에서 들끓던 그 감정은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망자들을 납치하러 왔다.

줄곧 목적은 그것뿐이었다.

영혼을 하나 수집할 때마다, 인격을 하나 수집할 때마다…

저 여자는 신이 된 듯한 전능감에 젖는다. 망자들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망자의 안식은 신성한 것이다.

사신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 레테가 담담하게 서 있는 여자에게 돌진하자 여자는 또다시 사라졌다.
내가 여기에 서 있는 이유를 기억하라. 나를 구원한 게 무엇인지 기억하라.

유리 조각이 두 사람 주변에서 소용돌이친다. 그 와중에도 사야는 가만히 레테를 관찰하고 있었다.

심장의 아픔을 기억하라. 축복을 기억하라.
그 감정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명심하라.

레테의 공격이 땅에 박힌다. 저 멀리서, 사야는 레테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 감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 저 여자는 신념에 매달리고 있을 뿐이다.

“레테…” 사야가 말했다.

그러자 레테가 멈추었다.

“그게 네 이름인 건 알고 있어?”

레테가 등을 돌려 사야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나는 알고 있어… 기억에서 봤거든.” 사야가 말했다.

“거, 거짓말…”

“이름이 네 안에서 공명하는 느낌이 들어?”

레테가 움찔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난 내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마음속에서 그게 울려 퍼지는 느낌을 받았어.

우리 말고도 다른 아이들이 있는 건 알고 있어?
너는 그 아이들과는 달리 옛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레테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기분이 밀려 올라왔다. 레테는 애써 그 느낌을 눌러 담았다.

“난 네가 가야 할 방향을 잘못 잡은 순진한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해왔어.
기억에서 너를 보고 나서야 네가 그렇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아.
너, ‘자신’을 기억하고 있지? 그렇지? 아주 희귀한 사례야.”

“입 다물어.”
“...”

사야는 레테를 바라보았다.

“내 목소리조차 증오하는 거야?” 사야가 물었다.

“널 증오한다는 말은 한 적 없어.”

“말할 필요도 없었어. 뻔한걸.”

잠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레테를 지나치고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곧, 그녀는 웃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어떤지 안다는 거야? 네가? 하하! 정작 자기 마음은 얼음처럼 차가운 주제에,
네가 다른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알아!”

사야는 자신이 밟고 있는 대지를 바라보았다.

“... 알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맣게, 사야가 속삭였다.

“뭐?”

“안다고.” 사야가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레테를 바라보며 확실하게 말했다.

“난 마음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고 있어.”
“... 정말이냐?” 레테가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네 마음이 텅 비어있다는 증거 아니야?”

사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레테를 바라보았다.

“그 눈 대신 달린 꽃 뒤에 뭐가 있는지 상관하지 않는다고, 저번에 말했었지.” 레테가 말을 이었다.

“널 멈추고 말 거야.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금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면, 네가 이 장소의 망자들을 더럽히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란 것도 알겠지.”

사야는 여전히, 말없이 레테를 바라보았다.

“그게 내 의무니까.” 레테가 단언했다.

그 의무가 자신을 지탱한다고, 레테는 그렇게 느꼈다.

그녀는 낫을 돌려 잡아, 다시 공격할 자세를 잡았다.

“네 목적이 뭐든 간에, 너를 막고야 말겠어.”

====# 18-III #====
하늘에서 유리가 빛났다. 레테가 모아온 영혼, 사야가 모아온 기억들이 부딪히지만, 결코 섞이지는 않는다.

수천 개의 잊힌 삶이, 이곳에서 기억되고 있었다. 사신은 영혼의 우물을 떠올렸다.

이 길을 걷고 싶은 이유가 뭐라고 설명했지?
여전히, 그때 당시의 답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레테는 새로운 답을 내놓았다.
옳은 일이니까. 그것 외에 다른 이유는 필요 없었다.
그럼에도…

“—!? 너…!”

또다시, 레테는 사야를 향해 낫을 휘둘렀다. 이에 사야는 손가락을 들었다. 그 위에 놓인 유리 조각이 칼날을 받았다.

몸을 숙인 레테는 사야를 올려다보며 얼굴을 구겼다.
사야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레테를 내려다보았다. 이토록 영혼의 존엄을 경시하는 행위에, 레테는 분노가 몸을 가로지르는 것을 느꼈다.
“너…!” 레테가 포효했다.

“내 영혼들을 빼앗아가서 네가 얻는 게 뭐야?!”

레테를 막으며, 사야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얻는 것…?”

사야의 손끝에 놓인 유리 조각이 반짝였다. 그녀의 꽃이 한 번 더 반짝이더니, 또다시 사야의 모습은 잔상이 되었고,
레테의 낫은 허공을 갈랐다. 멀리 떨어진 빛에서 사야가 다시 나타났다.

“이렇게까지 함께 했으면 진작에 눈치챘어야 할 텐데. 난 단 한 번도 거짓말 한 적 없어.”

사야의 꽃이 다시 반짝였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뒤, 확실하게 강조했다.

“내가 이걸로 ‘얻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난 개인적인 이유로 움직이는 게 아니야.”

그 말이 진실임을 알고 있음에도, 레테는 믿기를 거부했다.
“네가 안다면… ‘나’를 안다면…” 사야가 계속해서 말했다.

하늘에서 유리 조각 열 개가 내려와 사야의 등과 어깨를 감싸고 반짝였다.

“미안해, 지금 좀 감정적이야. 그런데 정말로…”

사야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고서, 그 차가운 눈빛으로 레테를 바라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왜 나를 방해하는 거야?”

“몰라서 물어?!” 레테가 소리쳤다. “이제 진짜 자기가 신이라도 됐다는 거야?”

“신이 되겠다는 말은 한 적 없어.”

“신처럼 행동하려 들잖아! 안그래?”

“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야.”

사야가 천천히 손을 들어 레테를 가리켰다.
“이미 말했을 텐데. 이 세상엔 너와 나 외에 다른 아이들도 있다고.”

둘 사이에 침묵이 가라앉는다.
둘 사이에 펼쳐진 땅은 잿빛이었다.

“원한다면 이 세계가 죽도록 내버려둬.” 사야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난 이제 죽음은 지긋지긋해. 마지막으로 단 한 번, 무언가 죽어야 한다면… 너의 목숨으로 하겠어.”
사야의 주변을 감싸던 유리들 또한 레테를 가리켰다.

“기억들을 내놔, 사신. 그러지 않으면 강제로 뺏겠어. 이제 시간이 얼마 없거든.”

영혼을 내놓으라는 협박이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세계가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어. 어떻게든 고칠 방법을 찾을 거야.” 레테가 대답했다.

“멍청한 놈.” 사야가 저주했다.

“이 멍청하고 어리석은 놈… 이제 네가 하는 말도 지긋지긋해졌어.”

레테가 웃었다.

“우연이네, 나도 네가 하는 말은 더 이상 못 듣겠거든.”

레테는 일어서 낫을 들었다.

이 차갑고 매정한 여자를…

다음 공격으로, 반드시 죽일 것이다.

3. 사야

3.1. 해금 조건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3-0 Ab.Reason-5 파일:arcaea_char_23_icon.png 파일:arcaea_antithese_base.jpg 사야 Antithese 클리어
3-1 Ab.Reason-1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_antithese_base.jpg Antithese 클리어
3-2 Ab.Reason-2 파일:Arcaea/Corruption.jpg Corruption 클리어
3-3 Ab.Reason-3 파일:arcaea_char_23_icon.png 파일:Arcaea/Black Territory.jpg 사야 Black Territory 클리어
3-4 Ab.Reason-4 파일:Arcaea/Cyaegha.jpg 사야 Cyaegha 클리어
3-5 Ab.Reason-6 파일:Arcaea/Vicious Heroism.jpg 사야 Vicious Heroism 클리어
18-1 Ab.Nihil-1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In Vain.webp In Vain 클리어
18-2 Ab.Nihil-2 파일:Arcaea/Hypnotize.webp Hypnotize 클리어
18-3 Ab.Nihil-3 파일:Arcaea/Ashen 6oundary.webp Ashen 6oundary 클리어
18-4 Ab.Nihil-4 파일:arcaea_char_23_icon.png 파일:Arcaea/Hypnotize.webp 사야 Hypnotize 클리어
18-5 Ab.Nihil-5 파일:Arcaea/Ashen 6oundary.webp 사야 Ashen 6oundary 클리어
18-6 Ab.Nihil-6 파일:Arcaea/Judgement.webp 사야 Judgement 클리어
18-7 Ab.Nihil-7 파일:Arcaea/ALTER EGO.png 사야 ALTER EGO(이마이 유타) 플레이

3.2. Absolute Reason

====# 3-0 #====
사야가 처음 깨어났던 날.

이 세계에서 깨어나는 이들은 누구도 그전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사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가 느끼는 감각은 보통과는 달랐다.
소녀의 마음이, 정열적으로 요동쳤다.

점점 격렬해지는 그 감정에 낮은 신음 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자신의 복부를 덮은 옷을 꽉 쥐었다.
잠시 자신의 귀가 멀었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눈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응...?”

소녀는 기침을 한 번 하고 일어섰다. 오른 눈이 있어야 할 자리를 만져보자 장갑 낀 손 너머로 느껴진 것은, 단단한 물체를 감싼 부드러운 무언가였다.

소녀는 그제야 자기가 장갑을 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몸을 살피며, 왜 이런 옷을 입고 있는지 고민했다.

그다음 어째서 자기가 “옷”이라는 게 뭔지 알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소녀는 벽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었다. 주변은 그 벽과 같은 모양의, 하지만 심하게 부서진 벽이 3개 더 있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았으나 그곳에 지붕은 없었다.

그리고 소녀는 왜 자신이 저 위에 지붕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궁금해했다.
사실, 소녀는 이 장소를 아주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기대어 자고 있었던 벽을 따라 터덜터덜 걷다, 넘어갈 수 있을 만한 턱을 발견했다.

그곳에 쌓인 하얀 벽돌들을 넘어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 벽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하얀색이었다.

이 세상은 낡고 패배한 인류 사회의 흔적, 또는 여러 사회를 모방한 장소였다.

기묘하다... 그보다 더, 이 세상이 기묘하다고 생각하는 소녀 자신이 기묘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기억의 조각을 찾기 전까지, 소녀는 이 장소와 자기 자신의 정체에 관해 수십 개의 이론을 내놓았다. 혼자서, 자신의 이름조차 모른 채로,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냈다.

시간이 지나, 특히 그중 하나의 이론을 증명할 증거들을 찾아냈다.
소녀는 천성적으로 끈질기고 호기심이 많았다.
이 새하얀 세계는 수많은 질문을 던졌으나, 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수일이 지나도, 이 폐허 속에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수주가 지나도, 기억의 유리 속에 답은 없었다.

이 세상은 유리 조각으로 가득했다. 소녀를 놀리듯이, 이 세계보다 더욱 생생하고 다채로운 세상을 비추는 유리 조각들.

인류 문명의 모방으로 가득 찬, 현실 세계를 인쇄해낸 듯한 메아리의 세계. 아마 두 달, 어쩌면 그보다 긴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이론에 확신이 생길 것 같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 전 소녀가 깨어난 장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계단층 꼭대기에서, 소녀는 하늘의 일부분이 물결치며 조각조각 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음을 관찰했다.

그 무엇도 비추지 않는 깨진 유리 창문 같았다. 그 실상은 수백 개의 아르케아가 모여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그 순간, 소녀는 확신했다.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하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다. 증거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관찰만으로 결론을 내릴 순 없었다.
그렇게 소녀는 맹세했다. 질문만 던지고 답은 주지 않는 이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어내어, 존재 목적을 찾아내겠노라고.

이 세계의 유일한 주민으로서, 그것이 소녀의 첫 번째 의무가 될 것이다.

그렇게 소녀는 아르케아를 받아들였고,

아르케아도 소녀를 받아들였다.

드넓고 무한한 기억의 세계를, 단지 관찰할 뿐 아니라, 살아갈 것이다.

====# 3-1 #====
파일:Arcaea/Story/3-1.jpg

이른 저녁,
태양이 저물며 붉은 황혼의 빛으로 하늘을 물들였다.

초원을 둘러싼 장치들은 그 빛을 흡수해, 달빛과도 같은 색의 광선으로 탈바꿈시켰다.

파티장에는 어떤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비록 저택 밖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하나, 상류층에게 이미지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여자는 그걸 처음부터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햇빛으로 만들어진 조명이 미치지 않는 어두운 방에 앉아 조용히 그 의미를 곱씹고 있었다.

“라비니아.”

여자가 술잔에서 시선을 돌려 목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약혼자였다. 그는 답답해 보일 정도로 잘 차려입었으나, 몸짓에서 격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늘은 뭐 마시고 있어?”

“안녕… 도노반, 자두 주스야.”

여자가 멀쩡한 쪽의 눈으로 잔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잘 골랐네.”

남자가 미소 지으며 말하고선 방의 전경을 살펴보았다. 여자는 감정 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나 친척들은 크랜베리가 더 좋다고 하시더라... 건강에 더 좋다나. 그런데...”

남자가 여자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맛이 써서 난 별로야. 너도 그렇지?”

여자는 잠시 생각하다, 표정을 찡그렸다.

“나도 안 좋아해.”

“그럴 줄 알았어.”

남자가 한 번 웃더니 등을 돌렸다.

“난 모건이랑 이야기하고 있을게. 나중에 와.”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벽난로 옆에 서 있는 소꿉친구에게 다가갔다.
저택의 풍경은 좋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벽난로에서 나오는 불빛은 먼 거리를 가지 못하고 바닥에 설치된 조명장치로 흡수되었다. 이 때문에 방은 조금 어두웠지만 어딘가 포근하고 안도감으로 가득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천장의 조명들은 간신히 책을 읽을 정도, 또는 사람의 표정을 보거나 테이블 위의 음식과 술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만 빛나고 있었다.

반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방 밖의 풍경은 이른 밤의 푸르름을 감싼 야생화, 바위, 그리고 강이 꾸미고 있었다.

이 파티에 초대받은 손님은 약 스무 명, 그중 반은 이 방에 있고, 나머지는 홀, 또는 서재에 있을 것이다.

여자는 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

주스를 음미했다. 자두 주스를 마셔본 적은 별로 없었기에, 단 맛 이외에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마셨던 더 맛있는 음료가 생각나지만, 혀 위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해 보았다.

그럼에도 주스의 맛은 평범했다.
너무 평범해서 이게 싫은지 좋은지조차 정할 수가 없었다.

여자는 고급스러운 잔 받침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그 자리에 앉아서 백색소음과 같은 사람들의 말소리와 방의 풍경을 감상하다가, 불현듯 자신의 오른 눈에서 피어난 꽃의 잎을 만져보았다.
“이미 꽤 진행된 모양이야. 처음 그 소식 들었을 땐 솔직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도노반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찰스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모건이 아닌 나탈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랍지 않아?” 도노반이 머리 위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다니.” 그가 말한다. “인류는 대단해.”

====# 3-2 #====
여자의 시선이 반짝이는 조명의 불빛을 보았다가, 약혼자를 찾았다.

잔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 여전히 지극하게 평범한 맛이었다.

“인공 세계”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별로 없었기에 그다지 이야깃거리로 삼거나, 애초에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가 않았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제라곤 여자에겐 기억할 가치조차 없는 것들이었다.

짜증이 났다. 무슨 말을 하는지 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인내심이 떨어진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녁 빛으로 물들어 조금 더 화려해진 홀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아주 조금이지만, 이 저택의 방들을 알고 있었다.
여자는 저택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조명이 꺼진 칠흑 같은 복도, 열쇠구멍이 없지만 잠겨있는 문들. 잠겨있지 않은 방 안에는 남녀 몇 명이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의 존재를 눈치챈 사람들은 한 번 눈길을 슥 주고는 다시 대화로 돌아갈 뿐이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저택은 최신 기술의 보고와 같았으나, 동시에 낡아빠진 계급 의식을 표출하는 출구이기도 하였다. 빛 흡수 장치나 인공 자연도 놀라운 기술이었지만, 여자가 가장 흥미를 가진 것은 정원의 빛 변환 장치였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직접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궁금했다”.

파티 손님들과 한 시간이 천년처럼 느껴질법한 따분하고 시답잖은 대화나 하며 시간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우리 삶을 둘러싼 생명과 그 창조물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흥미로운 존재들이다. 그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정문으로 걸어가는 순간…

그 손이 문고리에 닿자 마자…

깨달았다. 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에 그녀가 있을 곳은 여기뿐이다.

여자의 자리는 기계장치들을 감상할 수 있는 초원이 아니라 약혼자의 옆, 이 저택의 방 안이었다.

“바깥”이란건 실체가 없는 개념일 뿐이었다.

이런건 깨닫지 않는 편이 차라리 좋았다.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샹들리에 밑에 섰다. 샹들리에의 조각 하나하나가 지금 이 순간 세계의 다른 장소를 비추고 있었다.

계속해서 변화하며, 그녀가 가볼 수 없는 장소의 이야기를 보여주었다.

흐릿한, 거의 우주에서 온 것만 같은 빛이 샹들리에 주변을 감싸며 비현실적인 광경을 자아내었다.

여자는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새로이 생겨난 조그마한 불만의 불씨를 가슴에 안은 채, 다시 저택의 깊은 곳으로 돌아갔다.

====# 3-3 #====
반 유리 벽 너머로 폭풍 바람에 꽃잎들이 휘날렸다.

눈을 사로잡는 백색과 사파이어색의 빛.
파티의 젊은 손님들이 풍경의 변화를 칭찬하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마법같이 신기하다.

여자도 라운지로 돌아와 인공 자연 풍경이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감상했다.

화려한 연극이다.

저 흩날리는 꽃잎들을 처음 보았던 때를 기억하다가,
이제 “기억” 하는 것조차 질린 듯 눈을 감는다.

여자는 몇 시간 동안 여러 가지를 시험했다.

창문은 잠겼고, 뒷문에는 빗장이 걸려있었으며, 환풍구는 막혀있었다.
이에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누군가 이 통로들을 막은 걸까? 아니면 내가 여기에 갇혀있기 때문에 막힌 걸까?”

비유와 감상은 소녀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정말로 그런 건지 알기는 힘들었지만.

저택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구석구석까지 살펴본 후,
여자는 지인 또는 친구로서 알고 있는 손님들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날씨가...”
“국왕 전하께서...”
“지난주에...”

지루하고, 아무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
질문을 해도,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의미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치 처음부터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자의 흥미 분야인 공학, 기술, 진보에 관한 이야기는
손님들에게서 한 조각의 흥미도 끌어내지 못했다.

짜증이 난 여자는 아무 말없이 대화를 듣고 있기로만 했는데, 이윽고 이 말을 들었다.

“지금은 그냥 흙공 같은 모양인데, 곧 테라포밍 할 거라더군.”

그 말에 질문을 던졌지만... 역시나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안 것만으로 충분하다. 여자는 다시 휴게실로 향했다.

그곳에 서서, 폭풍을 바라보며, 교감했다. 저 폭풍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여자는 자신을 향해 미소짓는 약혼자 옆을 지나갔다.

“라비니아, 어디 갔다 왔어.”라고 말한다. 여자는 그의 옷깃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이를 눈치채지 못한 낌새다.

이 세계의 주민들은 항상 그랬다.
눈에 띄고 특출난 것엔 관심이 없다.

여자가 아무리 대담한 짓을 해도, 언제나 자신들의 루틴을 따를 뿐이었다.

사교 파티라는 좋은 그림을 유지하기 위해.
여자는 묻고 싶어서 더이상 견딜 수가 없는 질문을 내놓기로 했다.

“그 인공 세계란 거... 혹시 유리로 만들어진 거 아니야?”

“음? 그게 무슨... 당연히 아니지. 싸구려 장식도 아니고.”

여자의 눈이 크게 뜨이고, 동공이 작아졌다.

찾았다.

도노반은 여자의 어깨 너머, 벽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아름답지? 꼭 당신처럼...”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의 답변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이제 행동으로 옮길 때이다.

꽃의 소용돌이가 고요하게 휘몰아치는 동안,
여자는 음식이 올려진 테이블 앞으로 가, 빵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세계에선 이런 멋진 쇼가 끝없는 골짜기에서 펼쳐질 거라더군.
지금은 황량한 폐허이지만 말이야.”
도노반이 계속 말했다.

여자는 그의 말을 들으며 어떤 물건의 손잡이를 잡았다.

“객석을 하나 잡을 수만 있으면, 정말 훌륭한 경험이 될거야.
거기다 그 잠재력을 생각해보라고.”

여자가 숨을 내뱉었다. 이번 여정도 의미가 없었다.
매끈한 나무 손잡이를 꽉 쥐었다.

등을 돌려 약혼자에게 다가가,
그 목으로 손에 쥔 것을 휘둘렀다.

빵칼의 날이 목을 깊숙히 파고들었다.

아무런 감정 없이, 단 한 줌의 적대감조차 지니지 않은 채, 여자는 말없이 남자의 목을 베고,

그곳에서 나오는 것을 조심히 살펴보았다.

====# 3-4 #====
피가 아니다.

그 무엇도 아니다.

남자의 목이 끔찍하게 잘렸으나… 이 기억에는 “끔찍함”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여자의 눈앞엔 피로 흥건한 끔찍한 광경이 아니라, 잘려서 구겨진 종이와 같은 모습을 한, 남자의 목이 있었다.

그 안은 “그림자”가 아닌 “무공간”, 아무것도 없는 공허가 채우고 있었다. 상처의 끝부분은 희미하게 하얀색으로 빛났고, 여자가 든 칼 주변으로 형형색색의 조각들이 부유했다.

도노반을 포함한 파티 손님들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있었다. 사람들이 쓰러지고, 여자들은 기절하며, 도노반은 자신의 목을 만졌다.

몇몇 남자가 여자에게 달려들어 팔과 목을 잡아 제압했다. >여자는 칼을 강하게 쥐고, 무표정으로 약혼자의 놀란 눈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구속하는 사람들에게 별다른 저항을 보이지 않은 여자는, 도노반 뒤에서 쓰러져 비명을 지르는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뒤틀리다가, 시끄러워졌다. 조용해졌다. 그 순간에 이미, 이 기억은 망가져있던 것이다.
이 기억의 원본은 이렇지 않았다. 시간의 풍파에 매우 달라져버린 기억조차 이 정도는 아니었다. 평화로운 파티에서, 예비 신부가 자신의 약혼자를 공격하다니...

여자는 어떤 형태로든 반응을 이끌어내고자 했으므로, 지금 상황에 만족했다.

방 안의 어떤 사람들은 이 상황을 인지조차 못했고, 어떤 사람들의 얼굴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긴 했지만. 이 정도의 기억 변조는 처음이었다.

최소한 성공이라 부를 수는 있을 정도의 성과였다.

세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바스러졌다. 공간이 구겨져 보일 정도로.
“휴양을 위해 세계를 하나 통째로 만들다니... 그것보다 훨씬 좋을 쓰임새가 있었을 텐데.”

여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손에 쥔 빵칼이 공중에 뜬 채 움직일 생각을 않자, 여자는 한숨을 쉬며 손을 놓았다.

“‘기억’도, ‘메아리’도, ‘반사상’도, 가장 중요한 ‘유리’도... 언급이 전혀 없었어.”

방이 줄어들었다.

“또 쓸모없는 꿈이었던 모양이네.”

행성이 갈라졌다.
풍경이 무너지며 하얀 빛이 사방에 나타나 눈을 쏘아붙였다. 이 기억에 존재했던 모든 소리가 한 번에 재생되었다.

여자는 그 유리 조각에서 눈을 감고 서서, 빛과 소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눈을 뜨자 보인 것은 희미하게 빛나는 텅 빈 세계였다.

마음속으로 명하자, 눈부실 정도로 찬란한 빛의 파도가 그녀를 덮치고, 이윽고 소녀의 앞에 펼쳐진 것은 가장 익숙하고, 가장 경멸스러웠던 세계.

하얀색 폐허의 세계. 아르케아, 기억의 세계였다.

“이번엔 예감이 좋았는데.” 소녀가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회전하는 유리 조각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기억에도 이 세계의 창조에 관련된 단서는 없었어. 기억을 볼 수 있다면, 없애버릴 수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소녀가 유리 조각을 떠나보내자 그것이 땅 위에 흐르는 반짝이는 강으로 돌아갔다. 사야라는 이름의 소녀는 아무것도 없는 지평선을 쳐다보고서, 무의식적으로 입술에 손을 대고는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방금 전 기억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다시 생각하며, 그전에 방문했던 수천 개의 기억과 비교했다.

====# 3-5 #====
“이 세계들에선 인간은 거의 신과 같아.”

소녀는 그걸 깨달았다.

오른 눈에 꽃이 핀 소녀가 머릿속에서 재생시키던 기억의 표지를 다시 덮었다. 완전히 무의미했던 여정은 아니었다.

거의 무의미했을 뿐.

처음엔 짜증이 났다. 그 세계는 아주 시시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 시시함 덕분에 인류의 잠재성에 대해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지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방법”에 대한 이론보다, “이유”를 설명하는 이론이 그녀의 원동력이었다. 이번 여정 또한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한,

적어도 그 일부라도 붙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언제나 그녀를 앞으로 향하게 만들어주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기억을 200개쯤 보았을 때, 다른 목적이 생겨났다.
“이론을 재구축해버릴 만큼 새로운 건 없었어.”

소녀가 유리 조각의 강으로부터 한 조각을 불러오며 속삭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가치 있는 정보는 얻었지.”

소녀는 그 조각의 빛을 바라보며, 그 너머에 비추어지고 있는 과거의 영상을 살폈다.

“거의 다 왔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속삭였다.

소녀는 손 위에 조각을 올리고서, 이젠 익숙해진 다리를 건넜다. 왼쪽으로는 한때 도시였을 건물들이 중구난방으로 무너져있고, 오른쪽으로는 유리와 돌이 혼란스럽게 섞여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따라 “태어났던” 장소로 돌아갔다.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는 상관없었다.

소녀는 오랫동안 걷다, 네 개의 무너진 벽 사이로 반짝이는 커다란 유리 구체가 있는 장소에 도달했다.

그 구체는 만들어지다 만 듯, 깨진 조개껍질과 같이 부서져있었다. 웃음, 눈물, 죽음, 그리고 축제의 기억이 구체의 일부분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꽃과 들판, 사막과 바다, 동물과 사람, 그리고 기계... 그런 기억들이 구체를 채웠다.
기억을 서로 이어 붙인다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을지는 소녀도 몰랐다. 이렇게 갖다 붙인다고 해서 기억끼리 “연결”되는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새로 가져온 조각의 빛을 보았다.

“너는 얼마나 많은 걸 보여줄 수 있을까.” 소녀가 말한다.

그렇게 조각이 열리고, 소녀는 새로운 시간대로 들어갔다. 곧, 인공조명과, 저녁놀로 물든 하늘에 뜬구름을 뚫을 정도로 높이 솟아오른 탑과, 공중을 나는 차량으로 가득 찬 세계를 마주했다.

불쾌한 공기가 폐를, 불협화음이 귀를 엄습했다.

그렇게 새로운 사람, 새로운 과거를 지니게 된 소녀는, 감정 없이 앞에 펼쳐진 광경을 살폈다.

수백 개의 질문이 떠올랐다.

무슨 대가를 치르든, 무슨 일을 해야 하든, 반드시 그 답을 찾으리라.

3.3. Absolute Nihil

====# 18-1 #====
신. 진리. 목적. 의미.

허무주의.

이것들은 인생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일까? 애초에 이런 멍청한 질문에 의미가 있기나 할까?

난 그런 생각에 잠겨있어.

나는 또 다른 신이 창조해낸 완벽한 정원에 사는 외로운 바보일 뿐이니까.


천국이자 지옥인 장소. 바스러질 정도로 연약한 사후 세계. 이곳에서 나는 '이유'를 찾아 헤매고 있어.

아주 오랫동안 나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지. 하늘에 별이 수 놓이기 전부터 말이야. 하지만 그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야.

그로부터 긴 시간이 흐르고, 난 내 이름을 알게 되었지. '사야'라는 이름을...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의미 없었어.

내 머릿속에 든 걸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내가 좀 더 순진했던 시절...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 이 세계에도 조금 익숙해졌을 무렵...
끝없는 일광 아래에서 눈을 떴던 어느 날, 나는 햇빛을 받으며 구름을 올려다보고 히죽댔어.

백색의 세계에서 시작하는 또 다른 하루였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은 아주 기분이 좋았어. 보통은 관찰하고 생각하느라 항상 답답하고 짜증 나는 기분만 들었는데 말이지.

그날도 항상 그랬듯이 유리 조각 '아르케아'가 내 주변을 맴돌며 기억을 보여주었어.

그 안에 비치는 것은 다양한 삶의 일면. 인생에 실감을 안겨주는 순간의 기억들이었지. 슬픈 일, 즐거운 일. 고통과 기쁨이 모두 존재해야 비로소 삶이라고 할 수 있어. 두 종류의 기억 모두 나에게 이끌리고 있었지.

왜냐면 이 새하얀 세계 아르케아에 떠도는 기억들은 자신과 닮은 영혼에게 이끌리는 법이거든. 내 영혼은 다른 영혼에 비해 더욱 강하게 '갈망'했어. 그래서 아르케아는 가능한 한 모든 걸 내게 주었지.

영혼뿐만이 아니야. 내 '정신'을 봐. 산만한데다 굶주려있지. 아르케아가, 유리 조각들이 내게 올 때면 마치 양식을 받아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
사방을 비추는 광휘. 분명 '신'의 빛이겠지. 온기와 힘을 지니고 만물의 위에 선 이 위대한 존재.

난 신에게 홀린 듯 이끌리고 있었어. 왜냐하면 신은 그런 상상조차 초월하는 존재일 테니까. 이 무한한 심상의 세계보다 위대한 존재...

아르케아는 마치 퍼즐과 같았어. 가장 거대한 수수께끼이자, 모든 종류의 폐허를 모아둔 공간...

도대체 여긴 왜 이럴까?
멸망 후의 세계인 걸까?
죽어버린 공간과 장소가 모이는 무덤인 걸까?
꿈일까? 천국일까? 감옥일까? 애초에 현실이긴 한 걸까?

대체 뭘까? 그렇게 나는 아르케아에 빠져들었어.
의욕과 열정을 가슴에 품고 나는 아르케아를 방랑했어. 이 광활하고 황량한 세계에서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건 나밖에 없었지.

사실, 너무나도 의욕이 앞서는 바람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만날 기회를 놓칠 뻔도 했어.

어리석고 고집불통인데다, 너무나도 싫지만, 내 인생을 영원히 바꿔놓은 그 여자와 만날 기회를 말이야...
====# 18-2 #====
오른 눈에 피어있는 꽃에 손을 가져다 댔어. 뺨이 얼얼했거든. 내 앞에 선 미련한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어.

내가 뭔가 말을 잘못했나 봐. 그래. 이 여자와는 처음부터 맞질 않았어.

첫 만남부터 이랬거든:
미련한 소 같은 여자가 뭔가 멍청한 말을 했어.

당연히 나는 그 여자를 멍청이라고 불렀지.

그러자 그 멍청이가 자기 입장을 설명하는 거 아니야?

당연히 나는 또 그 여자를 멍청이라고 불렀지.

그러자 내 뺨을 한 번 후려치고는 등을 돌렸어.

어리석은 야만인 같으니.
그 여자의 이름은 레테야. 소처럼 우둔한 자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지. 정말 소 같은 뿔이 머리에 나있거든.

레테와는 예쁜 자갈돌 길 위에서 만났어. 레테는 아름다운 유리 조각에 둘러싸여 있었지. 내가 전에 보지 못한 느낌으로 일렁이는 빛을 내고 있었어. 유리 조각들은 항상 빛을 내.

때때로는 주변의 빛을 흡수해 반짝일 때도 있지. 조각들이 모여 하늘과 공간을 수놓으면 그 광경은 마치 꿈처럼 아름다워.

하지만, 그 여자 주변에서 서성대던 유리 조각들은 무언가 달랐어. 보통 내가 유리 조각의 무리에서 느끼던 '온기'와는 다른 종류의... '따뜻함'이 있었어. 결코 신의 온기는 아니었어.

뭐라고 할까... 세계가 저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길 종용하기보다는, 세계 스스로가 유리 조각들을 향해 예를 표하는 느낌?

그 멍청한 여자는 지금도 싫어. 싫지만...
그 광경에 홀리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어.
그 기억들로 세계를 만들어보자.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아르케아에 태어난 목적이라고, 확실하다고, 레테에게 그렇게 말했어.

그 여자가 모은 유리 조각들은 특히나 특별했어. 그 조각들을 다루어 이어붙이면... 조각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어. 그 안에 들어가는 것도 가능할 거야.

그러자 그 암소가 유리 조각들은 사실 영혼과 같은 존재들이라고 했어. 내가 무슨 뜻이냐 묻자, 자기가 유리 조각이 아닌 형태의 영혼을 돌보던 시절 기억을 이야기해주더라.

웃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고서 그 여잘 멍청이라 불렀어. 그리고 뺨을 얻어맞았지.

그 여자는 아무 의미가 없는 세계에서 의미를 멋대로 지어내버린 거야.

절박하고, 멍청하고, 애석한 광경이었어.
그래. 이 몸께선 너무 대단하셔서 다르게 생각했지. 그렇고말고. 나는 '진리'를 알고 있었거든. 레테가 모아온 유리조각에 내 마음이 동한 것도, 내가 매일 숭배해온 세계가 오히려 레테의 유리 조각 무리에 충성을 바치는 듯한 느낌이 든 것도...

그래, 나는 믿었어. 한치의 흔들림 없이.

또 다른 신이 창조해낸 완벽한 정원에서도, 바로 우리 정원사들의 힘으로 또 다른 정원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나는 해야 할 일을 하겠어. 세계의 조각들을 모아 더 훌륭하고, 새롭고, 완벽한 세계를 만들어낼 거야."

난 그렇게 말했어. 그렇게 맹세했어.

내가 좀 더 순진했던 시절의 일이야...
====# 18-3 #====
나는 오만한 걸까?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기억을, 옛 세계를 뒤져보았어.

그 세계들의 한계를 비틀었어. 온갖 음료를 마시고, 불을 지르고, 하늘을 날고, 살인까지 저질렀어.

사람이 죽어가는 광경과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도 목격했고, 시체에 숨을 다시 불어넣거나 울던 아이도 뚝 그치게 해봤어.

왜냐고? '경험', 그게 저 유리 조각들의 용도니까. 행동의 결과 따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그저 '경험'일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저것들이 신이 만들어낸 것이든 아니듯, 창조의 화신인 나에게는 내 마음대로 다룰 권리가 있었어.

... 그럼, 나는 오만한 걸까?
우문이야. 답은 간단해.

나는 정말로 아르케아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했어.

내 세계는 처음엔 고목만큼 커다랗고, 표면이 일렁이는 유리 구체였지. 여기저기 여행하며 '경험'하기에 적당한 기억들을 골라 들어가 보고 구체에 더했어. 그러다가 레테와 종종 마주치고는 했지.

만날 때마다 마치 고양이들이 하악 대듯 서로에게 성질을 부렸어.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창조에 몰두했지.

이윽고 내 유리 조각들은 모여 말 그대로 산이 되었어. 지면 밑에 유리로 지은 도서관이었지. 그게 좀 더... 환상 속 이야기 같아서 마음에 들었어.

그리고 난 더 갈망했어. 더, 더욱더... 왜냐하면 구체가 될 정도로 모여서도 내 유리 조각들은 세계에게 바라는 것이 없는 듯했거든.

세계를 향해 소리를 지르지도, 속삭이지도 않았어. 기껏해야 지리멸렬한 단어들을 낮게 중얼대는 정도였지. 분명 내가 조리 없이 아무렇게나 긁어모은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거야. 더 모아야 해.

저 뿔 달린 여자의 유리 조각 무리와 같은 걸 만들어내려면, 조각을 더 모아야 해.
그래서 좀 더 질서정연한 공간, 도서관을 만든 거야. 여기에는 이 기억을, 저기에는 저 기억을... 등급과 상식의 정도에 따라 기억을 분류했어. 그렇게 기억의 보관소가 탄생했어...

내 최선을 다한 작품이었어. 그리고 실제로 결과가 따라왔지.

마침내 속삭이는 목소리가 종종 들리기 시작했거든. 나는 도서관이 속삭이는 불가해한 언어를 들으며 잠에 빠지곤 했어.

정말로...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가능했을 거야.

내 '목적'이었어.

그 도서관은 정말 환상적인 공간이었어. 내가 창조해낸 그 장소는 신이 그려낸 추상화와 같았어. 게다가 안을 돌아다닐 수도 있다니... 아니, 안이 아니라 '바깥'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네. 그 동굴의 광경은 마법 그 자체였어.

비록 유리 조각들이 서로 섞여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 그 안에서 걷거나 헤엄치거나 날아다닐 수는 없었지만.

이 '도서관'은... 오로지 나의 손으로만 창조해낼 수 있었던, 오로지 나의 정신으로만 설계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어.

미소를 짓는 일은 없었지만 그때의 나는 행복했어. '의미'가 있었으니까. 만족스러웠어.
아마도...

아니, 분명.

상황이 변치 않았더라면 나는 천년이 지나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을 거야.

끝없이 이 새하얀 광야를 헤매며 아무 보람 없이 내 '세계'를 바꾸고, 또 바꾸고, 또 바꾸고, 또 바꾸고...

왜냐면... 나에겐 그게 필요했으니까.

...

하늘이 둘로 갈라진 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 때, 나는 허름한 폐허 한구석에서 울고 있는 비타와 만났어.
====# 18-4 #====
"... 어린애인가?"

그래. 나는 반쪽짜리 금발에 루비색 눈을 가진 조그마한 인간을 '어린애'라고 부르는 부류의 사람이야.

훌쩍대는 소리가 들리길래 그 바보 레테인가 싶어서 와봤더니, 아니었어.

비타는 나를 보더니 눈물을 다시 삼키려고 했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천천히 다가갔어.

"언니는... 진짜예요?" 비타가 물었어.

"눈물 닦아. 이런 세계에서 울면 못쓰지." 내가 대답했지.

저... 저는... 그... 너무..."

무서워서, 그렇게 말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비타는 말을 잇지 못했어. 다시 울기 시작했거든.

나는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빠지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어. 이 상황에 대해서, 이 세계를 거니는 모든 소녀들에 대해서.
레테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 세계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건 몰랐거든. 레테를 만나고 나서도, 내게 있어 그 여자는 최악의 경우엔 적, 최선의 경우에조차 갈피를 못 잡는 우둔한 멍청이 소대가리일 뿐이었지.

분명 레테 외에도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어. 나와 레테만큼 신념이 강한 사람들이...

하지만 내 앞에 있던 건 그저 조그만... 어린애였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고칠 의무를 짊어진 일꾼이... 어린애라고?

... 정말인가?
나는 팔짱을 끼고 비타 옆에 있는 벽에 몸을 기댔어. 내가 두른 기다란 망토가 비타의 귀에 쓸리자 그 애는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어.

"닦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비타는 잠시 머뭇거린 뒤 망토에 얼굴을 묻어 눈물을 닦고 코를 팽하고 풀었어.

…그 그림자 진 흙투성이 폐허에서 나는 적당한 기억을 찾아 눈을 굴렸어. 되도록이면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기억으로.

딱 맞는 게 하나 있었어. 그걸 우리 쪽으로 불러냈어.

"일어나." 내 말에 비타는 벌벌 떨며 일어났어. 나는 우리 둘 사이로 유리 조각을 치켜올렸어.

"손잡아." 그렇게 지시하자 비타는 또 시킨 대로 했어. 그렇게 우리는 유리 속 기억으로 떠났어.
그 기억에서,

... 우리의 기억에서,

따스하고 고즈넉한 여관의 식당에 앉아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어. 거기서 비타가 자기 이름을 알려줬지.

그때는 나도 내 이름을 알아낸 지 얼마 안 된 참이라, 나는 깜짝 놀랐어.

"뭐 먹고 싶어?" 내가 물었어.

"뭐 하러요? 이건 기억일 뿐이잖아요." 비타가 대답했지.

비타의 대답에 나는 또 놀랄 수밖에 없었어. 조금 눈썹이 움찔댔어. 그래도 또다시 물었지.

"이 기억의 주인들은 뭘 먹었지?"

비타는 정확하게 대답했어. 기억에 들어오는 순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 둘 다 알고 있었거든.
그리고 나는 또다시 질문했어.

"그럼, 네가 먹고 싶은 건 뭐야?"
"다른 걸 시키면 어떻게 되는데요?"

"직접 해봐. 그러면 알겠지."

"기억이 망가질까요...?"

"왜 그렇게 생각해?"

"왜냐면 이 기억엔 다른 요리를 시킨 기억이 없으니까..."

"그게 무섭니?"

"아뇨, 그냥..."

"그냥 뭐?"

"... 그냥 아직은 이 기억이 끝나는 게 싫어서요."
...

과연 그 말대로, 우린 기억을 거기서 끝내지 않았어.

나는 그날 비타에 대해, 많지는 않지만 그 애가 알고 있는 걸 여러 가지 들었어.

물론, 그 꼬마 녀석도 나에게 질문했지. 아주, 아주 많이.

흐음.

기억이 끝난 후 우리는...

폐허를 뒤로하고 떠나갔어.

둘이서, 함께.
====# 18-5 #====
내게 남은 이름은 '사야'뿐이야. 그리고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후로, 우리는 전에 있던 존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사야는 죽었어. 그리고 사야는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어.

그 사실에 딱히 놀라지는 않았어. 어렴풋이 여긴 어떤 형태의 사후세계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거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이 모든 것에 이유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죽은 사람 모두가 이곳에 온 건 아니야. 아르케아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끝을 향해 걸어가. 우린 모두 다른 소원을 지니고 있지.

하지만 그 소원 때문에 이곳으로 끌려온 것은 아니야. 보통 죽어가는 사람은 살고 싶다 염원하는 법이지만, 그런 소원을 지닌 사람은 여기엔 거의 없어.

소원 없이 존재하는 사람도 있어. 예를 들어 비타의 마음속엔 그 어떤 소원도 들어있지 않아. ' 코우'의 마음속도 그래.

우리가 여기로 온 건 소원 때문이 아니야.
운명도 아니고.
사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야.

'신'때문이야. '신'의 기분대로 우리는 이 세계에서 깨어난 거야.

그 신은 웃지도 미소를 짓지도 않아.

그 신에겐 얼굴조차 없을 지도 모르니까.
비타와 함께한 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어. 조수... 아니, '동료'라고 부를 정도의 관계가 되었지.

힘든 시간이었어. 비타는 걱정이 많아서 툭하면 울곤 했거든

잘 때엔 나한테 꼭 붙어서 자고, 스스로 답을 찾기보다는 질문하기를 좋아했어.

재채기 소리는 엄청나게 커. 보기보다 몸무게는 나가는 편이고. 아주 날카로운 통찰력을 갖고 있어.

힘든 시간이었어. 하지만 난 단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아.
내가 후회하는 건...



나는 후회해. 그리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어.
"사야 언니, 저게 뭐예요...?"

종말의 순간에 비타가 내게 물었어.
대지에서 빛이 솟아오르고, 생명이 하늘로 빨려올라가는 모습을 함께 바라보았어.

아르케아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숨을, 그 생명력이 머나먼 어딘가에 있는 어느곳으로 모이는 모습을.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
다만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사건의 결과, 끔찍한 미래.
그런 미래가 도래할 것이란 걸 우리 둘 다 느낄 수 있었어.

나를 보고 저게 뭐냐고 물은 비타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했어.

"...특이현상이야. 이 세계에선 흔히 일어나는 특이현상."
그 후로 나는 더 필사적으로 내 세계를 완성시키려고 했어. 빛, 아르케아의 '종말'과 함께 대지가 무너지기 시작했거든.

처음엔 조금씩... 그러다가 더욱 격렬하게... 대지가 마치 모래성처럼 무너져 아래의 '무無'를 향해 떨어졌어.

영원히 세계의 끝자락을 할퀴는 심연의 공간...

공허를 향해.

...

내가 만들어낸 기억의 보관소는 여전히 안정적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안정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했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게 아니었어.

뭔가 더 필요했어. '저 너머'의 무언가가.

삶을 영위할 제대로 된, 완벽한 장소가 필요했어.

그런 장소를 만드는 건 더이상 나라고는 할 수 없겠지.
... 언제부터 나는 다시 '염원'하기 시작한 걸까.

가끔, 하루치 여행을 끝내고 나서, 그 꼬마 녀석이 나조차도 답을 모르는 질문을 할 때가 있었어.

질문, 질문, 질문...
하지만 이제 질문에 어울려줄 시간은 없었어.

그런 불편한 침묵 속에서는, 마음속으로 빈 소원조차 동굴에 울려 퍼지는 비명처럼 들리는 법이야.

하지만 종말 전에도 나는 염원하고 있었어. 나 스스로가 지닌 의문에 대한 답을…
...

나는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어. 오로지 스스로에게 되뇌일 뿐.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말라붙은 바다와 기울어진 언덕과 무너져내린 산처럼, 기억해 주는 이 없이. 알아주는 이 없이,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죽어갈 거야.

마지막에는, '허무'만이 남겠지. 공허하고, 허세로 가득 찬,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이야기. 화자 외에는 아무도 듣지 못한 이야기.

타인의 기회조차 뺏어버린 이야기. 집착의 끝에 소중한 사람을 익사시켜버린 이야기가...
알려줘. 나는 오만한 걸까?

답은 '그렇다'야.

난 나 자신을 믿어.

한계를 뛰어넘은 곳에 있을 발견을,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리라는 의지를, 무엇이든 '한다'라는 의미를.

미래를 믿어.

그리고, 미래를 염원해.

어디로 가든 나를 따라오며 똑같은 발자국을 밟는 소녀와 함께 이 대지를 걸으며…

나는 내 소원이 울려 퍼지길 원하고 있어. 비록 도저히 입 밖에 낼 수는 없지만.
마지막 저항, 이 세계가 머리를 조아리도록 만든 그 유리 조각의 무리를 믿어.

신이여, 레테, 그리고 비타...

나를 천국에서 추방해 지옥으로 떨어뜨려주오.

... 뿔쟁이 여자의 손에서 유리 조각을 빼앗아올 테니.
====# 18-6 #====
"비가 오네요..."
파일:Arcaea/Story/18-6_1.png
비타가 유리 도서관의 구석에 있던 나를 찾아와 말했어.
밝으면서도 어두운 동굴 안. 나는 앉은 채 한 번 비타를 올려다보고 고개를 돌렸어.

비...

아르케아에서 지낸 몇 년간, 단 한 번도 비를 본 적은 없었어.
하지만 이제는 지평선 너머로 비와 눈, 천둥과 번개를 보는 건 별난 일이 아니게 되었지.

지금은 비가 내리고 있었어.

나는 일어서며 말했어.
"비타... 가자. 따라올 때엔 뒤에 숨으면서 따라와."

"가자니... 어디로요?"

"레테한테." 나는 주저 없이 말했어. "그 여자를 죽일 거야."

나는 말없이 비타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
산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출구로 향했어.
비타는 머뭇거리다가, 시킨 대로 날 따라왔지.

"... 죽인… 뭐라고요?! 안 돼요!"

비타가 빗속으로 걸어가는 나의 뒤를 종종 따라오며 소리쳤어.

비타는 항의를 멈추지 않았어.

망토를 붙잡혔어. 나는 망토를 잡아당겨 뿌리쳤어.

돌을 집어 들어 내 등으로 던졌어.
그래도 난 멈추지 않았어.

"대체 왜요?!" 비타가 마침내 소리를 질렀어.
파일:Arcaea/Story/18-6_2.png
끝임없이 쏟아지는 비. 나는 등을 돌려 비타를 마주봤어.
비타는 반짝이는 붉은색과 하얀색의 눈동자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어.

"비타... 이 세계는 죽어가고 있어." 내가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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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요..." 비타가 작은 소리로 대답하자 나는 그때 깨달았어. 아, 비타도 알고 있구나.

"그래서... 그래서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려는 거예요?!"

"그 여자가 모은 유리 조각에서 무언가를 느꼈어.
우리가 만들어낸 이 도서관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한 무언가를." 나는 설명했어.

"모두를... 구하려면, 그 무언가의 정체를 알아내야 해. 그리고 빼앗아 이용해야 해.

그게 있으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낼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레테는 날 이해하지 못해. 그리고 이제 그 여자를 설득할 시간은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아."

"레테의 신념이...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거짓말이 설득의 여지조차 허락하지 않아.

그 여자의 마음속엔 불이 타오르고 있어. 그리고 그 불은 나를 향해 솟구칠 거야.

우린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야."
파일:Arcaea/Story/18-6_4.png
"그렇다고 설득할 시도조차 안 하겠다고요?" 비타가 나를 책망했어. 내 입이 비릿한 미소로 일그러졌어.

"말을 해보기는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비타는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어.

그리고, 다시 등을 돌렸어.

빗줄기가 점점 약해지다가 마침내 그쳤어.

나는 가볍게 말했지.
"그래. 한 번 이야기해볼 테니 안전한 거리에서 잘 보고 있어."

나는 유리 조각을 잔뜩 챙겨 레테가 있는 곳으로 향했어.
그곳에 가까워지자 레테의 유리 조각과 내 유리 조각들이 거의 닿을 뻔했지만,

두 무리가 결코 섞이지는 않았어.

절벽의 끝자락. 아주 밝은 곳이야. 유리의 빛으로 환하게 비치고 있어.

그 밑에 서있는 레테는 그림자에 감싸여 있어.
절벽 너머에서는 공허가 입을 벌리고 있어.

"야, 사신." 여자를 불렀어. "하찮은 다툼은 그만두자. 네 도움이 필요해."

"도와달라고?!" 레테가 쏘아붙였어. "이런 짓을 해놓고 할 말이야?!"

아.
핵을 부숴서 세상을 이 꼴로 만든 게 나라고 착각하고 있구나.
나를 향한 평가가 너무 박한걸.

나는 등 뒤를 보고 비타가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한 뒤,
다시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레테를 향해 고개를 돌렸어.

그 후의 '대화'는 생각했던 대로 흘러갔어. 참담하게 말이야.

귀가 떨어져라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내뱉고,
레테의 칼날이 번쩍거리고...

오른 눈에 핀 꽃 덕분에 쓸 수 있는 능력으로 나는 조각과 조각 사이를 이동하며 레테의 공격을 피했어.

자제했어. 아무것도 안 하고 레테의 주변을 맴돌기만 했어. 정말. 정말 노력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제는 한계야.

나는 레테를 향해 반드시 유리 조각을 빼앗겠다고 맹세했어.
레테는 나를 향해 아르케아의 조각난 핵을 고치겠다고 맹세했어.

역겹기 짝이 없어...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

유리에 칼날이 부딪히자 물방울이 촤악 튀었어. [2]

나와 레테가 자아내는 격렬하고 악랄한 춤.

나를 죽이려는 목적으로 낫을 휘두르는 레테.

그 얼굴을 향해 빛나는 유리 조각을 날리는 나.

머릿속이 울려. 역겨워서 뱃속이 뒤틀리는 것 같아.

나는 실패했어. 내가 여기서 뭘 하든 아무런 의미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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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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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싸움은 두 실력자의 장렬하고 근엄한 혈투 같은 게 아니야.

레테와 나는 발버둥 치고 있을 뿐이야.

내가 이기더라도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야.
내가 지더라도 아무것도 잃지 않을 거야.
알 수 있어.

우리는 더 나은 결말이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그릇된 믿음을 가진 두 여자일 뿐이야.

그런 결말 따위 어디에도 없는데도.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의 인생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래도 난 발버둥 쳐보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자 속이 메스꺼워.

레테가 한 번 물러섰다가, 초인적인 힘으로 낫을 끌고 다시 나에게 달려와,

그걸 보고 내가 유리 조각을 들어 올려 레테의 가슴을 향해 내려친 순간-

우리 둘 사이에 손가락이 하나 나타났어. 그리고 싸움이 멈췄어.

"?!"

"뭐...?!"

장갑을 낀 가느다란 손가락이 두 칼날이 부딪히려던 곳에 사뿐히 내려앉았어.

그 순간, 온몸에 격통이 엄습했어. 쓰러질 것만 같아.

내 유리 조각은 부서지고, 레테는 낫을 놓쳤어.
우리는 큰 충격을 받아 뒤로 날아갔어.

마치 거대한 막대가 두드리는 북처럼 대지 그 자체가 울리고 있어.

우리는 공중에 멈춰 섰다가...

대기가 격렬하게 움직이며 다시 우리를 빨아들이듯 땅으로 내동댕이쳤어.

땅에 부딪히는 순간 레테의 낫이 내 옆구리를 깊게 베어내고 내 뒤로 미끄러졌어.

레테의 왼팔에는 내 유리 조각이 몇 개 박혔어.

쓰러짐과 동시에, 우리는 머리를 조아리는 자세로 무릎을 꿇렸어.

몸이 전부 찢겨나갈 것 같은 고통이지만...
나는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들어 올렸어. 숙일까보냐.

길고 창백한 머리를 늘어뜨리고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을 지닌,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가 우리 사이에 서 있었어.

여자는 미소가 걸린 얼굴로
나를 한 번 보고, 고개를 돌려 레테를 보았어.

"어휴, 너희 둘, 적당히 하렴." 여자가 입을 열었어.

"너무 거칠게 놀다가는 소중한 걸 부숴버릴지도 모르잖니?"

나는 힘을 쥐어짜내 일어서려고 했지만 쉽게 일어설 수가 없어.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야.

숨이 점점 더 거칠어졌어.
저 말투... 불길한 예감이 들어.

여자는 다시 그 눈으로 나를 바라봤어.

"자, 그럼... 안녕, 이 고집불통들아." 여자가 말했어.

"만나서 안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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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코우

4.1. 해금조건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4-1 Crimson-1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Paradise.jpg Paradise 클리어
4-2 Crimson-2 파일:external/wikiwiki.jp/?plugin=ref&page=%A4%B3%A4%DC%A4%EC%CF%C3&src=charicon_Kou.png 파일:Arcaea/Party Vinyl.jpg 코우 Party Vinyl 클리어
4-3 Crimson-3 파일:Arcaea/Flashback.jpg 코우 Flashback 클리어
4-4 Crimson-4 파일:Arcaea/Paradise.jpg 코우 Paradise 클리어
4-5 Crimson-5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フライブルクとエンドロウル.jpg Flyburg and Endroll 클리어
4-6 Crimson-6 파일:external/wikiwiki.jp/?plugin=ref&page=%A4%B3%A4%DC%A4%EC%CF%C3&src=charicon_Kou.png 파일:Arcaea/Nirv lucE.jpg 코우 Nirv lucE 클리어
4-7 Crimson-7 파일:Arcaea/Diode.jpg 코우 Diode 클리어
4-8 Crimson-8 파일:Arcaea/GLORY : ROAD.jpg 코우 GLORY : ROAD 클리어

4.2. Crimson Solace

====# 4-1 #====
파일:Arcaea/Story/4-1.jpg
낮이 끝없이 이어진다면 결국 질리기 마련이다.
내려갈 생각을 않는 태양 아래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면 누구든지 제발 달을 보여달라고 빌게 될 것이다.

소녀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

“낮이 80일동안 쭉...”

“아니... 7개월인가?”
“1년이던가...?”

그녀가 집이라 부르는 건물의 벽 틈새로 햇빛이 또 새어들어왔다. 잠꼬대가 고약한 소녀는 자는 사이에 바닥을 굴러 마침 햇빛이 비치는 곳에 딱 들어맞게 누워버린 모양이다.

소녀는 낮은 신음을 냈다

“제발 누가 불좀 꺼줘...”
소녀는 마지못해 일어났다.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폈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문을 찾아, 끝없이 넓은 아르케아의 세계에서 일과를 시작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소녀의 모험은 즐거운 일만 가득한 건 아니었고, 긴 여정의 끝에 언제나 대단한 발견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소녀가 완전 백지의 상태로 이 세계에 깨어난 이후로 단 두가지, 절대로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하늘, 그리고 소녀의 열정. 이 둘은 계속해서 빛나고 있다.

“좋았어... 우선 준비운동부터 할까!” 혼잣말로 속삭였다.

소녀가 앞으로 손을 뻗자 커다란 유리가 소녀 쪽으로 날아왔다.
기억의 조각, “아르케아”가 아니다.

크기가 많이 클 뿐인 평범한 유리판이다. 소녀는 유리판에 올라다 또다른 유리판을 불러냈다.
이 세계를 수놓은 폐허 도시들과는 멀리 떨어진 섬의 해변에 있는 외딴 건물. 그것이 소녀의 집이었다.

해변이라고 해봐야 바다는 없었고, 그녀의 집과 같은 건물이 마치 가재가 버린 껍질처럼 해변 곳곳에 세워져있을 뿐이었다.

섬의 중심부는 하얗고 커다란 기괴한 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숲이었다.

소녀의 손에 집들은 성한 곳이 없었다. 손가락질 한 번에 벽과 창문은 임시 계단이 되었다가, 경주로가 되었다가, 터널이 되었다.

소녀는 반짝이는 터널을 순식간에 내달렸다. 이것이 준비운동이었다.

깨어난 후로 며칠이 되지 않아 소녀는 빠르게도 이 세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르케아의 세계는 그녀의 변덕에 맞춰 움직여주었다.

그 와중, 텅 빈 바다의 모래 위에서 무언가가, 한때 바다였던 드넓은 땅 위에 흩어져 있는 무언가가 반짝였다.

소녀는 그것에 한 번 눈길을 주고선 숨을 들이쉬고,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 4-2 #====
소녀는 자신이 올라탄 유리판은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었지만 아르케아만큼은 다룰 수 없었다.

이 기억의 세계에서 소녀를 따라오는 기억의 조각은 없었다. 관찰하거나 방문할 수 있는 게 고작이었다.

과장된 기합 소리를 내며 소녀는 유리판에서 뛰어내렸다. 소녀의 뒤에 있던 터널은 어느새 무너진 채였다.

그녀는 공중에서 오른손을 뻗어, 침대에 있던 이불을 불러와 자신의 몸을 감쌌다.

그러고는 무겁고 푹신한 어떤 물건을 불러냈다. 색이 바랜 커다란 흔들의자가 날아와 아직 공중에 있던 그녀를 받았다. 나태한 자의 옥좌와 같았다.

그렇게 소녀는 옥좌에 앉은 채 집 위로 날아가, 묘비와 같은 고층건물로 가득 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숨을 내쉬었다.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오늘의 “아침”도 완벽했다. 그러나 수평선을 바라보는 소녀의 마음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 세계는 얼마나 큰 걸까? 대체 뭐가 있는 걸까? 내가 여태껏 보아왔던 게 전체의 3분의 1은 될까? 16분의 1일까?

이 세계는 거대하고, 거대한 만큼 흩어져 있는 기억의 조각도 많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평화로운 날씨를 만끽하며 흔들의자에 앉아 몸을 부드럽게 앞뒤로 흔들던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여긴 무지막지하게 거대한데다 이치를 알 수 없는 세계다. 이 경이로운 세계가 소녀, 자신 한 사람만을 위해 존재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소녀가 눈을 떴다. 하늘을 여전히 빛으로 반짝였다.

세상 반대편 어딘가의 하늘은 별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 하늘 아래에선 다른 소녀가 태양을 보고 싶다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붉은 옷의 소녀는 이불을 잡아끌어 어깨까지 덮었다.

낮이 끝나지 않는다는 건, 매일매일이 새로운 시작이라는 뜻이다.

이 여정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 4-3 #====
“흐음... 그런데...”

소녀가 안락의자로 몸을 더 파묻으며 혼잣말로 속삭였다.

“저 위에 태양이 있긴 한 건가?”

소녀가 눈을 찡그리며 하늘을 쳐다보고선 조용히 생각한다.

태양이라 할 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이리도 고르게 빛이 퍼지는 이유가 뭘까?

여태껏 소녀는 땅 위에서만 움직였다... 하늘로 올라가 보는 건 어떨까?
악동같은 미소가 소녀의 얼굴에 퍼졌다.

소녀는 의자 위에 서서 이불을 내던졌다. 떨어지는 이불 옆으로 나무 기둥이 날아올라왔다.

소녀는 의자에서 뛰어내려 날아오던 기둥에 달린 조그만 철막대를 잡았다. 기둥의 옆면에 단단히 발을 고정하고,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소녀는 이 기둥이 다른 세계에선 전기를 전달하는 용도로 쓰였던 구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밑 쪽에 있는 다른 철막대에 소녀가 발을 갖다 대자, 기둥에 한 발, 한 손으로 매달린 모양새가 되었다. 옛 세계의 흔적에 매달려있는 소녀에게 두려움은 없어 보였다.

소녀는 한 번 더 수평선 너머의 도시를 바라보고선,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까지 날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타고 오를 것이 필요하다 느꼈다.

소녀의 집을 제외한 해변의 건물들이 또 해체되기 시작했다. 벽, 침대 뼈대, 수납장, 무너진 터널의 파편들이 모래를 박차고 일제히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것들이 한곳에 모여, 서서히 어떤 물체의 모양이 되어갔다. 그러나 소녀는 건축에 재능이 없었다.

소녀가 만든 탑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으며, 서서히 하늘을 향해 쌓아 올려지다가 이따금씩 이상한 각도로 뒤틀렸다.
아쉽게도 소녀가 사는 섬에 자원이 무한정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재가 모두 쓰고도 반밖에 완성되지 않은 탑을 보며 소녀는 표정을 구겼다. 아직 높이가 1킬로미터도 되지 않았다.

소녀는 짜증을 내며 수평선 너머의 도시를 바라보고선 손을 뻗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잡아당겼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소녀는 강력했지만 신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 4-4 #====
소녀는 힘없이 손을 다시 떨구고 다른 해결책을 강구하기로 했다. 그래, 탑 대신 나선 계단은 어떨까? 한 시간이 지났다.

또 한 시간, 또다시 한 시간, 마지막으로 두 시간이 더 지났다.

마침내 완성된 작품을 소녀는 자랑스레 바라보았다.

아직 뒤틀리고 뒤죽박죽인 생김새지만 아까 전의 탑보다는 훨씬 괜찮은 만듦새였다. 적어도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자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소녀는 지체 없이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떨어질 때를 대비해 안락의자를 옆에 동행시킨 채로, 소녀는 한 걸음 한 걸음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일정 높이에 다다를 때마다, 소녀는 가장 밑에 있는 계단을 뜯어내 위에 붙였다.

영원히 파괴와 재조립을 반복하는 무한 계단의 완성이었다. 안개를 뚫고 세상의 정점을 향하는 계단을 소녀는 계속해서 올라갔다.
여정의 끝은 보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밤”이 되어 잠을 자야 할 정도였다.

4일 정도 지났을 때 즈음, 마침내 “천상”이 소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제야 소녀는 “천상”이란 뚫을 수 없는 거대한 구름의 천장임을 깨달았다.

아무리 소녀가 계단을 그 위로 올려보려 해도 구름은 뚫리지 않았다. 소녀는 일단 계단을 물렀다.

곧, 소녀는 결의에 찬 표정을 짓고 계단의 가장 윗단까지 올라갔다.

소녀는 계단의 가장 윗단을 해체해 커다란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서서 손을 위로 들어 구름을 밀어내려 했다.
아무리 밀어도 구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까치발을 들고 밀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구름 너머의 광경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소녀는 실패했다.
“말이 되냐고...”

소녀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그렇게 낙담하던 와중, 무언가가 그녀의 시선을 빼앗았다.

소녀의 오른편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마치 나무를 흔들었을 때 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소녀가 힘껏 밀었던 구름의 천장에서 반짝이는 물체들이 떨어졌다.

아르케아다. 어림잡아 스무개의 아르케아가 소녀를 향해 날아오고 있다.

그리고 붉은 옷을 입은 소녀는 깨달았다.

태양이 없는 아르케아의 하늘까지 와서야, 마침내 자신에게 이끌리는 기억의 조각을 찾아냈다는 것을.

====# 4-5 #====
향이 타는 냄새가 고르게 퍼진 공기.

널리 울려퍼지는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의 목소리.

밝고 활기찬 분위기.

거리로 새어 나오는 향기로운 요리의 냄새까지, 소녀는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자, 텅 빈 푸른 하늘에 태양이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소녀가 본 적 없는 기억의 세계다. 소녀는 가만히 서서 이 모든 것을 만끽했다.

이 기억은 한 장인의 조수가 지녔던 기억이다. 이 아이는 지금 심부름 중이었다.

소녀는 이 아이가 아직 무엇을 만드는 장인의 조수인지는 몰랐으나, 딱히 흥미가 생기지는 않았다.


이 세계는,

“멋져...!”

마치 환상과 같았다.

눈을 반짝거리며 입을 헤벌레 벌린 소녀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머리 위로는 색색의 종이와 천이 묶여 옥상과 옥상을 이었다. 마치 전깃줄에 장식을 해놓은 모양새였다.

축제 같은 분위기를 풍겼기에 전깃줄은 아니겠지만. 판석으로 포장된 길, 붉은 벽돌로 지은 집, 검은 연기를 뿜어대는 굴뚝을 보아하니 이곳은 오래된 마을이거나 도시겠구나

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가판대의 상인들이 신기하게 생긴 장신구를 팔고 있다. 태양을 모티브로 한 목걸이, 부적, 반지들이 길을 수놓고 있다.

어떤 가판대는 다른 기억의 책에서 본 적 있는 생물의 인형을 팔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복장은 소녀의 것과 비슷했다.
마치 축제 의상과도 같지만, 지나치게 화려하지는 않은 느낌의 의상. 따뜻한 계열의 색으로 가득 찬 세계지만 이따금씩 보이는 푸른색이 눈을 사로잡았다.

소녀는 돌아다니다 한 무리의 음유시인들과 마주쳤다. 그들의 노래는 청자들에게 교훈과 경고를 번갈아 주다, 마지막으로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소녀는 거리를 활보하며 과자를 마구 시식했다. 너무 큰 주의를 끌지 않도록 조심하며, 눈에 보이는 과자 매대의 시식품을 모두 입에 넣었다.

그렇게 시식을 하며 돌아다니는 사이에 특히나 소녀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한 붉고 매혹적인 조각 과자였다. 딸기 타르트, 그렇게 불리는 듯했다.

조수가 지니고 있던 동전으로 소녀는 타르트를 사 한 입 베어 물었다. 그와 동시에 소녀는 실감했다.

이 세계는 실로 경이롭다! 경이롭도록 멋진 세계다! 달콤한 간식이 인생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환상적인 세계다.

소녀는 이 기억의 세계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의욕이 충만해진 소녀는 더욱 빠른 걸음으로, 거의 깡총깡총 뛰어다니며, 가끔씩 빙글빙글 돌기도 하며 거리의 구석구석을 탐험했다.

====# 4-6 #====
달리면 안 된다. 달렸다가는 이 거리의 사소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감상할 수 없게 될 테니까.

소녀는 광장의 건물앞에 세워진 간판들을 읽었다. 이곳 사람들은 미신을 믿고 있었다.

신, 악마, 요괴 따위의 정령과 요정을 믿고 있었다. 무대에 선 예술가들은 “허구적이고”, “기묘하고”, “불가능한” 공연을 펼쳤다.

그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마법”을 행하고 있다 믿고 있었다. “주문 외우기”는 손에 색색의 가루를 쥐고 불꽃과 연기를 내는 트릭이고, “운명 점치기”는 고인 물에 말을 건 뒤 파문을 해석하는 점치기고, “다른 존재와의 소통”은 조명을 이용한 어떤 마술인데 소녀가 한눈에 봐서는 트릭을 알 수 없었다.

이러한 믿음으로 가득 찬 세계였다. 놀랍고 경이로운 마법과 신앙의 세계. 그 누구도 의심 한 톨 없이 그 모든 게 사실이라 믿고 있다.

이런 진기함으로 가득 찬 거리를 걸어가던 소녀는 이윽고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일종의 공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가치 있는 전통이지만, 절대로 사실은 아니다.
소녀는 도시의 외곽에 다다랐다. 이는 이 기억의 한계선이기도 했다. 이 선을 넘는 것은 몇 번을 시도해도 불가능했다.

낮은 나무 울타리 너머로, 푸르른 언덕과 몇 개의 떡갈나무, 그리고 반짝이는 호수가 보였다. 소녀는 어떻게 이 세계의 주민들이 그렇게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을 수 있는지 이제서야 이해했다. 그녀 자신도 유리가 날아다니는 기묘한 세계에서 왔다.

이런 세계에 요정이 있다고 한들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자연과 논리를 뛰어넘는 존재가 있다 한들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소녀는 지금 한 장인의 조수가 지녔던 기억 속에 들어와있다. 그 장인은 자칭 마법사로, 요정과 같은 환상의 존재를 연구하는 자다.

소녀가 빌리고 있는 몸의 주인은 그 마법사의 연구가 모두 마땅한 결과를 내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소녀가 생각하길, 장인의 목적은 환상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신앙을 더 굳게 하고, 그로 인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그것이 마법사의 목적이다.
붉은 옷을 입은 소녀는 미소 지으며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생각에 빠졌다. 참 웃기네. 기둥에 손을 기대고 머릿결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던 소녀는, 서쪽에 있는 아주 오래된 숲을 보았다.

심부름 한 번의 분량에 불과한 기억에 들어온 지금은 멀리 나가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직접 가볼 순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다른 기억을 통해 이 세계로 돌아오리라 소녀는 다짐했다. 이 마법과 눈속임의 세계는 소녀의 성미에 아주 잘 맞았다.

그리고 하늘에서 찾아낸 아르케아의 무리는 분명 이 세계의 다른 장소들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소녀는 드레스의 앞자락을 쥐었다.

너무 좋아서 믿을 수가 없다. 소녀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움찔거렸다. 여태껏 이렇게나 큰 기쁨을 소녀는 느낀 적이 없었다.

====# 4-7 #====
파일:Arcaea/Story/4-7.jpg
스무 번인지, 그보다 많은지, 소녀는 진작에 세기를 그만두었다.

“영...차...”

소녀는 아직 마무리가 덜 된 목재로 만들어진 상자 앞에 쭈그려 앉아, 상자를 위로 손을 스윽 흘려보았다.

먼지 무리가 휘날려 땅으로 가라앉았다.
곧 자물쇠를 풀어, 상자를 열어보았다.

소녀는 이번엔 고고학자의 몸에 들어와, 홍수로 망해버린 고대의 성을 탐험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상자 안에 들어있던 종이들은 상자의 방수 기능 덕에 젖지 않고 살아남아있었다.

오래된 경첩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자, 소녀의 동료가 무엇을 찾았냐 물었다. 소녀는 제4시대의 두루마리들을 찾았다며 대답했다.

하나를 꺼내 펼쳐보자,
그곳에는 소녀의 민족과 언실리(Unseelie) 사이에 있었던 대립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소녀는 이런 이야기들에서 큰 즐거움을 느꼈다.
과거의 사람들이 무엇을 요정과 같은 환상의 존재로 착각했는지 추측하는 것은 특히나 재미있었다.

어제의 소녀는 이야기꾼이 되어서 조상들에게서 오래전부터 내려온 이야기를 풀어냈다.

한 남자가 머나먼 해변에서 수많은 보물을 모았는데, 집으로 돌아가려 호수를 건너던 와중 바람의 요정 실프가 남자의 쪽배를 바람으로 흔들고, 지나가던 물의 요정 나이아데스가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에 결국 쪽배가 뒤집어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두 요정이 보물을 모두 가져가버렸다고 한다. 그냥 배의 조작이 서툴렀다고 하면 될 것을, 참으로 장대한 변명이다.

그래도 소녀는 그렇게 못돼먹은, 또는 착한 요정이 실제로 있다 믿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고고학자로서의 하루가 끝나고 소녀는 아르케아의 세계로 돌아와, 이제는 임시 숙소가 된 발판 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 후 학교 선생의 기억으로 들어가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이 혼돈스럽고 위협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쳤다.

사람들이 마법의 존재를 믿으니, 이러한 수업들은 소녀에게 매우 흥미로웠다. 참으로 즐겁고 매력적인 세계다.
매번의 방문이 즐겁다.

아르케아를 방문할 때마다 점점 익숙해지는 사람들의 얼굴, 이제는 기억에 확실히 새겨진 장소들,
소리와 풍경, 모든 것이...
놀랍도록 아름다우며, 그립다.

하늘에서 찾은 모든 조각을 방문해, 적어도 그녀가 생각하기에 갈 수 있는 모든 장소를 들러본 후, 소녀는 마지막으로 사람으로 가득 차 떠들썩한 축제의 밤을 비추는 조각으로 들어갔다.

악한 정령들을 몰아내고, 신들께 탄생과 추수에 감사드리는 축제다.

소녀는 란캐스터와 시아라는 이름의 주민을 발견했다. 신사스러운 건축가들이었다. 소녀가 마지막으로 그들과 만난 기억에서 몇 년 정도 나이를 더 먹은 모습이었다.

그들이 소녀에게 사과 사탕을 건네주자 그녀는 그 무엇을 받았을 때보다 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신사들이 하늘을 보라며 손가락을 뻗었다. 수천 가지 아름다운 빛깔의 불꽃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신과 삶에게 보내는 헌사였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서도, 소녀는 감동하지 않았다.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았다. 소녀의 표정은 새로운 경험에 대한 즐거움도, 사색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어딘가 그리운 기억들이 보여주는 마지막 밤에, 소녀는 만족한 채 불꽃놀이를 바라보았다.

눈물을 머금고, 가슴 한 편에 아픔을 안은 채,
소녀는 기쁘게 불꽃놀이를 바라보았다.

====# 4-8 #====
그 세계의 기억들은 소녀에게 힘을 불어넣어주고, 친숙한 곳처럼 편안했다. 소녀는 기억들 안에서 몇 개월을 지냈다.

떠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끝이 있음을 알면서도, 보고싶지 않았다.

기억 속에 미래는 없었다.

다시는 기억 속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소녀는 이 새하얀 세계로 돌아왔다.


지나간 세월이란 그런 것이다.
결말이 지어진 이야기이며, 끝난 삶이며, 헤어진 사랑이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았다. 소녀는 천천히 땅으로 내려가며, 다시 한번 구름을 바라보았다.

그 기억 속에서 보냈던 모든 순간,
매분 매초가 그녀에게 값진 선물이었다.

그녀가 품지도 않았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은 듯한 기분이었고, 그것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한순간 마치 하늘이 무너지고 있는 듯했다.
소녀가 잠시간 머물렀던 숙소가 무너지며 땅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소녀는 가슴에 약간의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그때, 하늘이, 진짜 하늘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유리판 위에 선 소녀의 머리칼이 얼굴 옆으로 휘날렸다. 반짝이는 기억의 조각들은 아직 제자리에 있었다.

그 조각들의 뒤로, 소녀가 본 적 없는 새로운 밤하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구름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반짝거리는 점의 무리가 수놓은 어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끝없이 펼쳐진 어둡고 비단결 같은 풍경을 짙은 보랏빛 파도가 넘실거리며 빛냈다.

별이다.
낮이 끝났다.

소녀의 가슴이 갑자기 아파왔다.

이름을 속삭여보았다.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이름. 소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소녀가 울라탄 유리판이 구름층을 뚫고 낙하했다. 복잡한 회색 지형이, 시야가 닿는 곳에 끝없이 펼쳐져 있다.

소녀는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이것이 소녀의 새로운 삶이다. 소녀는 손을 뻗었다. 언젠가, 저 지평선 너머에 있는 누군가가, 이 손을 잡아주리라 믿을 것이다.

언젠가, 그 손으로 위대한 일을 이룩할 것이다.

그때까지, 소녀는 앞을 바라볼 것이다.

아르케아에서, “현재”를 살아갈 것이다.

5. 시라히메

5.1. 해금조건

{{{#fff 스토리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S-1 Divided-1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Blue Rose.jpg Blue Rose 클리어
S-2 Divided-2 파일:shirahime_icon.png 파일:Arcaea/First Snow.jpg 시라히메 First Snow 클리어
S-3 Divided-3 파일:Arcaea/Blue Rose.jpg 시라히메 Blue Rose 클리어
S-4 Divided-4 파일:Arcaea/Blocked Library.jpg 시라히메 Blocked Library 클리어
S-5[3] Divided-5 파일:Arcaea/nέο κόsmo.jpg 시라히메 nέο κόsmo 클리어
S-6 Divided-6 파일:Arcaea/Lightning Screw.jpg 시라히메 Lightning Screw 클리어

5.2. Divided Heart

====# S-1 #====
본인조차 모르는 소녀의 이름은 “시라히메”였다.

시라히메는 깨어났을 때 지니고 있던 왕관과 홀이 어떤 물건인지 단박에 눈치채고, 자신이 분명 고귀한 핏줄의 출생이리라 생각했다.

“머리를 조아려라!”

“...뭐?”

“...이 녀석도 아닌가.”

자신이 공주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시라히메가 팔짱을 끼고 눈을 홱 돌리고선 ‘옥좌’(식탁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눕혔다.

그런 시라히메를 “친구”가 당혹해하며 바라보았다.
시라히메 본인의 친구가 아니라, 유리 조각에 새겨진 기억의 주인 되는 사람의 친구였지만.


오늘은 네 개다.

시라히메가 출생의 비밀을 찾기 위해 뒤져본 유리 조각이 오늘은 네 개째다. 분명 어딘가에 그 진실이 숨어있을 것이다.

깨어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왕관과 홀의 의미, 자신의 말투와 세계관... 시라히메는 이 “아르케아”의 세계에 자신이 나타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생각했다.

그 의혹을 제쳐두고서라도, 시라히메는 백색의 세계에 가득 찬 혼돈이 아닌 무언가 확실한 것을 바랐다. 조각이 비치어주는 기억의 세계처럼.

“잘 들으라, 하무...”

“내 이름은 하루야.”

“하토.” 시라히메가 팔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짐은 짐의 성이 있는 기억을 찾고 있노라. ‘성’이니라. 알겠느냐?”

“성? 뭐야, 지금 여왕님 놀이라도 해?”
시라히메는 손을 입술 위에 올리고 잠시 생각했다.

“여왕보다는 공주에 가깝지.” 그리고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대답했다.

“...어디 머리라도 부딪혔니, 안리?” 하루가 대답했다.

기분이 언짢아진 시라히메는 눈을 내리깔았다.
얼굴에 기분이 그대로 나타나는 성격이었다.

안리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기 이름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안리가 아닌 것은 알았다.

곧 이 기억은 무너져내릴 것이다. 딱히 나쁜 일은 아니었다. 재빨리 무너지는 편이 시간도 절약되니까.

하지만, 이번 기억에서도 아무 단서를 얻지 못했다는 점은 거슬렸다.

“기억이 뭐 어쨌다고?” 하루가 말했다. 기억의 침입자인 시라히메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네 개.

여태까지 총 쉰세 개.

시라히메는 조금이라도 느낌이 오는 기억이 있다면 반드시 들어가 보았다.

그녀는 하루의 멍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런 표정은 수없이 보아왔다.

4초가 지나자, 세상이 멈추었다.

금이 가는 소리가 나고, 곧 세상이 무너져내렸다.

그렇게, 그녀는 다시 아르케아의 세계로 돌아왔다.
시라히메는 앉아있던 연석 앞에 높인 홀을 집어 들고 일어서서 잠시 휘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걸어갔다.
진실을 찾기 위한 여정은 계속된다.

하지만 시라히메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진실을 찾는 것은 자신이 아닐 것이란 걸...

====# S-2 #====
어떤 가설이든, 일단 세워보면 맞을 가능성도 있다.

아르케아의 세계에서 깨어난 수많은 소녀들이 결국 자신들의 과거를 찾았으니까.

하지만 시라히메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른 소녀들이 그랬듯, 그녀 또한 이 유리의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은 자기뿐이라 믿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뭔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더욱 강해졌다. 시라히메는 자신이 처한 이 곤경을 다시 되돌아보았다.

이 세계에 나 혼자뿐이라면, 나는 추방당한 왕족인 걸까? (아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훌륭한 지도자였겠지! (아니다)

하지만... 어느 날 반란이 일어난 거야! (안 일어났다) 백성들이 여왕, 공주, 그리고 국가에 반기를 들고일어나 내 기억을 모두 지워버린 거야! (스케일이 너무 크다) 마법으로!

왕관과 홀을 지닌 소녀는, 마법을 믿었다.
하지만 하나는 인정해야 했다. 이 백색의 세계가 마법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단 말인가?

소녀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기묘했지만, 이 세계 그 자체는 더욱 기묘한 것이었다. 그 어떤 기억에서도, 아르케아의 세계처럼 유리 조각이 날아다니는 세계는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유리 조각에 비치는 기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니, 이게 마법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기에 시라히메는, 자신이 마법의 세계에서 왔음을 확신했다.

‘마법의 세계에서 추방당한 왕족’... 틀린 가설이다. 하지만 그것이 시라히메가 현재 가장 가능성 있다고 생각하는 가설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특별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존경받아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멋진’ 장소에 ‘멋진’ 기억이 모여있는게 아닐까?” 무채색의 세계를 바라보며 시라히메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탑을 찾아보자!”
그렇게 시라히메는 전진했다.

그렇다.

그녀는 돌머리였다.

====# S-3 #====
시라히메는 또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녀는 매번 하듯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귀한 혈통을 선언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사람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시라히메는 아주 격렬한 수치심이 전신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온 사방으로 기억의 세계가 무너지는 와중, 그녀의 볼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다시 유리의 세계로 돌아온 시라히메는 손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질끈 감았다.

손 사이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으으으으... 뭐냐고, 이 기분은...”

...시라히메가 말했다.

“내 성은 어디 있는 건데!?”

계속해서 말했다.

“내 백성들은!? 동포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발을 구르며 주먹을 쥐고 이를 깨물었다.

“한 번 더!”

시라히메는 그렇게 소리 지르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기억으로 뛰어들었다. 무슨 기억인지는 몰랐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그 식당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짓던 표정을 잊고 싶었다.
세계가 소용돌이치며 형태를 갖추었다. 밤하늘이 나무에 가려져 달이 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숲속의 빈터에 그녀는 앉아있었다. 등 뒤로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냈다.

“보여?” 어린아이가 말했다.

이 기억 속에서, 이 아이는 시라히메의 “동생”이었다. 꼬마 소녀를 바라보며 시라히메는 생각했다.

이 기억의 주인인 꼬마의 언니는 어떤 별자리를 찾고 있었다.

“아니, 안 보이네.” 백발의 소녀가 말했다.

“계속 찾아보자.” 동생이 말했다.

그에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은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시라히메는 가까이 다가가 그 물건을 자세히 살폈다.

옆면에 버튼이 달린 화면이었다. 화면에서는 영화, 아니, 애니메이션이 흐르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시라히메는 동생의 옆에 앉아 함께 화면을 바라보았다.

다른 아르케아에서 보았던, 여느 창작물들과 비슷했다.
특별한 힘을 지닌 소년이 친구들과 함께 괴물과 싸우는 내용의, 특출난 것 없는 만화였다.

“...이거 충전한 거 맞지?” 시라히메가 기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 물어봤잖아.” 동생이 대답했다.

“...그래서 충전했다고?”

“했어!”

“다행이네…”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정말로 진심을 담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왕족은 만화 같은 걸 보면 안 된다. 왕족은 정치가이자 지배자이며, 백성을 지도하는 존재이다.

시라히메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말없이 앉아 집중하며 만화를 보는 것이, 그 무엇보다 훨씬 친숙하게 느껴졌다.

시라히메는 동생의 어깨에 자기 어깨를 기댔다.
동생도 반대로 자신에게 기대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편안한 기분이었다.

아까 전까지 몸을 지배하던 수치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올라오는 분노 속에서 그녀는 생각했다.

인생이란 때때로 아주 끔찍한 것이라고.
유리 조각 안에서 목격한 끔찍한 일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인생은 끔찍한 것이었다.

좌절감, 탈력감, 상황을 바꾸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무력감...

그게 인생이었다.

이 유리 감옥에 갇히기 전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고독한 옥좌에 앉은 고독한 지배자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금 이 기억이, 그녀의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랬다면, 인생도 조금은 괜찮지 않았을까.

시라히메의 “동생”이 조그만 담요를 들고 와 자신과 “언니”의 어깨에 둘렀다.

그녀는 동생을 바라보고서 조그맣게 “고마워.”라고 속삭였다.

그렇게, 기억이 서서히 사라질 때까지, 시라히메는 말없이 만화를 보았다.

====# S-4 #====
그때부터, 시라히메의 목적의식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숲에서 소중한 사람과 함께 만화를 보며 몇 시간이고 녹였던 기억이... 그녀의 열정도 완전히 녹여버린 것이다.

그녀에겐 성은 고사하고 집이라 부를 곳도 없었다. 성이나 집을 찾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억에 불과할 것이다.

버려지고, 잊히고, 단명할 기억, 그것이 진실이었다.

앞으로 나아간다 하더라도, 결말에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끝이 없는, 합리적이지 못한 여정일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녀가 걸어갈 길이 텅 비어버렸다는 것이다.
“가슴이 아파...” 시라히메가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영원히 계속되는 햇빛을 바라보았다. 입은 굳게 닫혀있었고, 눈은 촉촉했다.

설령 그녀가 머나먼 왕국의 공주, 추방당해버린 위대한 지배자, 왕족이라 할지라도...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았으며, 완벽한 인간은 없었다.
소녀는 조용히, 자신의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감정과 생각들을 곱씹었다.
보이지 않는 태양 아래에서, 눈을 감은 시라히메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꼈다.

소녀는 훌쩍였다.

햇빛을 머금은 눈물방울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 방울이 땅에 닿기 직전에, 머금고 있던 빛이 사라졌다.

하늘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시라히메의 얼굴을 비추던 아르케아의 햇빛이 마치 썰물처럼 사라져갔다. 그녀가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자, 그림자와 밤이 세상에 내려앉고 있었다.
“엑...?”

시라히메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찢어져 있었고, 붉은 혜성이 떨어지고 있었다.

“응...!?”

혜성은 1분 정도 낙하하더니, 시라히메의 앞에 착지하며 바람을 일으켰다. 모래와 함께 시라히메의 양갈래 머리가 휘날렸다.

어안이 벙벙한 시라히메는 입을 벌리고, 자신의 앞에 떨어진 “혜성”을 바라보았다.

그 “혜성”은 망가진 의자 더미 위에 앉아 머리를 흔들어 모래를 털어냈다. 머리를...?

“혜성”은 여자 아이였다.
그녀는 아주 크게 눈을 떴다. 곧, 크게 뜬 눈만큼이나 커다란 미소가 그 얼굴에 번졌다.

하늘로 날아올랐던 적색의 소녀.

그녀의 이름은 코우였다.

====# S-5 #====
“만나서 반가워!”

생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코우가 인사했다. 시라히메는 그 자리에 굳어서 얼굴에 핏기가 빠졌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코우는 의자 더미에서 내려와 거의 넘어질 정도로 강하게 시라히메의 품에 뛰어들었다.

이에 자칭 왕족의 입에서 전혀 왕족답지 못한 “우와악?!”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너 진짜 사람 맞지?! 그렇지?” 코우는 시라히메를 껴안은 팔을 풀고서 그녀의 얼굴, 귀, 머리카락, 옆구리를 마구 만졌다.

시라히메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코우는 시라히메의 새빨간 볼을 쭈욱 잡아당기며 웃었다.

“이거 기억 아니지?” 코우가 물었다.

“나 사람 맞아!”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공주”가 대답했다.
“그렇구나! 너 자기 이름은 알고 있니?” 코우가 물었다.

“나는 내 이름 모르거든. 아, 이제는 기억났을지도?!”

코우는 그렇게 말하며 희망에 찬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가,

“으응... 아니네... 아직 모르겠네...” 고개를 떨구고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자, 잠깐만...! 좀 천천히...” 시라히메가 애원하듯 말했다.

“그, 그... 너, 그 뭐냐... 너, 다, 다친 덴 없는 거냐?”

더듬거리며 질문을 하는 시라히메를 보며 코우는 웃었다. 질문보다는 대답을 요구하는 명령에 가까운 억양이었다.

“없어, 괜찮아.” 코우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시라히메가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뭐, 그렇긴 한...데...” 코우가 하늘을 바라보더니 말을 흐렸다. 허리에 한 손을 얹고, 다른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서, 시라히메를 보며 소리쳤다.

“밤이네!”

“그걸 이제야 눈치챘어?!”
“떨어지면서 뒤는 안 돌아봤거든.” 코우가 두 손을 모두 허리에 얹고서 말했다.

“하늘에서 뭘 하고 있던 거야?”

“기억들을 보고 있었어.”

“너도 기억을 볼 수 있어?” 시라히메가 묻자, 코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하늘도 날 수 있는 거야?”

“그건 아니고…” 이번엔 고개를 저으며 코우가 대답했다. “물건을 공중에 띄울 수는 있어.”

그렇게 말하며 코우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찬장을 향해 손가락을 휘두르자, 찬장이 그녀의 방향으로 날아왔다.

“넌 못 해?”

시라히메는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양갈래 머리가 앞뒤로 흔들리는 모습에 코우는 크게 웃었다.

시라히메는 가슴에 손을 얹고, 선언하듯 말했다.

“나는 ‘인간’이니까.”
아르케아의 세계에서는,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나의 운명, 또는 두 운명의 결합에 따라 시간과 공간이 뒤틀리곤 했다.

하지만, 이 두 소녀의 만남은 순수한 우연이었다.

둘은 대화를 나누었다. 유리 조각, 목적, 그리고 하늘에 대해서. 그 뒤로는 실험이 뒤따랐다.

코우는 마법으로 시라히메를 들어 올릴 수 있는가? 시라히메는 코우의 마법을 배울 수 있는가?

전자는 성공이었고, 후자는 실패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둘은 자신들 외에도 이 세계에 사람이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두 소녀는 저 멀리 사라져가는 햇빛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어쩌면, 자신들 외에도 하늘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운명에 묶이지 않은 두 소녀는, 함께 걸어 나갔다.

====# S-6 #====
파일:Arcaea/Story/S-6.webp
시라히메를 만난 지 몇 주, 아니면 몇 개월이 지났는지, 코우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밤하늘 아래에서, 두 소녀는 어둠의 장막에 덮인 폐허를 헤쳐왔다. 코우가 앞장서면, 시라히메는 비틀거리며 따라갔다.

시라히메는 화사하게 웃는 코우의 등에 손을 얹고 따라갔다. 쉽사리 부끄러워하는 “공주님”의 성격은 기억 바깥의 현실 세계에서도 발현되었다.

넘어지거나 말을 더듬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코우는 이 자칭 왕족이 덜덜 떠는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시라히메는 말을 할 때나 행동할 때나, 떨림이 확실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이 기나긴 여정이 두 사람을 묶어주었다.

하지만, 이 인연도 영원하진 않을 것이다.
여행을 시작하고 얼마쯤 지났을까. 두 소녀는 낮과 밤의 경계선에 도달했다.

구름은 조각나있고 아직 별들이 떠 있었지만, 아침의 햇빛이 하늘에 분명히 스며들어있었다.

소녀들은 말없이 감동에 가득 찬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감탄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곳은, 낮과 밤이 나누어지는 곳이니까.
“예쁘다...” 시라히메가 속삭였다.

“그러게.” 코우가 동의했다.

밤의 별들은 연보랏빛으로 반짝였다. 낮의 하늘은 새하얀 금빛이었다.

그 두 하늘이 만나는 곳에서는 기억의 조각들이 프리즘으로 만들어진 뱀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치 서툴게 넣은 봉제선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 광경을 보고 있자, 마치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세계의 정체를, 이 세계가 생겨난 이유를.

코우는 먼저 시선을 내렸다. 시라히메는 여전히 하늘에서 눈을 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제 어떡할까? 결국 사람은 한 명도 못 찾았네.” 코우가 물었다.

“그러게...” 시라히메가 대답했다.

“계속 찾아볼까?”
시라히메도 시선을 내렸다. 소녀들의 앞에는 밤과 빛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아르케아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시라히메는 코우를 바라보고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저 경계선을 따라가 사람을 찾아보겠어. 너는 하늘로 다시 돌아가서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찾아봐.
코우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기나긴 여정에서, 코우는 시라히메가 어떤 사람인지 완전히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고압적이고 우아하지만, 그건 모두 유약한 마음을 숨기기 위한 연기에 불과한, 서투른 사람.

“...명령하는 거야?” 놀란 코우가 물었다.

“물론.” 시라히메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 왕관이 보이지 않느냐? 짐은 왕족이니라!”

“잘 보입니다, 전하.” 코우가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시라히메는 다시 시선을 낮추어, 앞에 펼쳐진 유리의 산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건 장난이었고... 갈라지자는 말은 진심이야.”

시라히메는 그렇게 말하며 코우와 눈을 맞추었다.

“하늘로 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줘.”

잠시 침묵의 순간이 지난 후, 코우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발밑의 콘크리트를 커다란 원판 모양으로 떼어내 그 위에 올라탔다.

“그럼, 나는 밤하늘로 올라갈게.” 코우가 말했다.

“만날 수 있을 때 다시 만나자!”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응, 반드시.”

시라히메도 웃음을 지어주며 대답했다. 곧 코우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저 백발의 소녀에게 또 한 번 놀라움을 느꼈다.

코우는 분명 다시 만나자는 그 말을 굳게 믿었다. 그 믿음에, 코우의 얼굴은 이윽고 다시 빛을 되찾았다.
코우는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빛을 향해 날아갔다. 시라히메는 앞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왕국을 되찾겠다는 야망은 잊어버렸다.

이 세계에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세계가 얼마나 광활할지라도, 언젠가 다른 사람을 찾아내고 말 것이다.

왕관과 홀은 왕족의 상징이다. 그리고 왕족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안식처와 같은 존재이다.

어쩌면 시라히메의 혈통은 전혀 고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하나는 확실했다. 자주 불평하고, 곧잘 흔들리고, 유약한 마음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시라히메의 영혼은, 고귀했다.

6. 앨리스 & 테니얼

6.1. 해금 조건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7-1 Ephemeral-1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Alice à la mode.png Alice à la mode 클리어
7-2 Ephemeral-2 파일:alice&tenniel.png 파일:Arcaea/Eccentric Tale.png 앨리스 & 테니얼 Eccentric Tale 클리어
7-3 Ephemeral-3 파일:Arcaea/Alice à la mode.png 앨리스 & 테니얼 Alice à la mode 클리어
7-4 Ephemeral-4 파일:Arcaea/Alice's Suitcase.png 앨리스 & 테니얼 Alice's Suitcase 클리어
7-5 Ephemeral-5 파일:Arcaea/Jump.png 앨리스 & 테니얼 Jump 클리어
7-6 Ephemeral-6 파일:Arcaea/Felis.png 앨리스 & 테니얼 Felis 클리어

6.2. Ephemeral Page

====# 7-1 #====
숲과 꽃밭 사이에 숨어있는 어두운 정원.

유리 조각의 모퉁이에서 은색 거미줄이 반짝였다. 유리보다는 돌에 가깝다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기묘한 세계. 유리 조각이 떠다니며 다른 현실을, 형형색색의 기억을 폐허와 백색의 세계에 흘려 넣는 곳. 자수정 기둥이 바닥의 빛을 반사하며 반짝인다.

소녀는 조그마한 옅은 녹색 테이블 앞에 놓인 고급스러운 옅은 녹색 의자에 앉아, 옆에 세워둔 여행 가방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 가죽 가방을 괜히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이제 가야 합니다, 앨리스.”

다른 사람은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곤.
남자가 있었다. 항상 그랬듯, 앨리스가 안 보는 사이에 준비한 찻잔을 든 남자가.
앨리스는 손을 가방 위에 다시 올렸다.

“뭐 소리 들려?”

남자는 고개를 기울여 귀에 신경을 집중하고선,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라 대답했다.

소녀는 허리를 숙이고서 다른 쪽 팔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턱을 괴었다.

“그래, 이 기억도, 다른 기억들도… 전부 너무 조용해.”

“그러면 안되는 겁니까?”
“마지막으로 소리를 들은게 언젠진 기억해?!”

앨리스가 어이없다는 듯 조금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래, 테니얼, 조용하고 평온한 정원 좋지… 이 풍경이 참 아름답긴 해.”

그녀는 가방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들어 자신들의 앞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어두운 숲과,
그림자 아래에 성기게 피어있는 하늘색 꽃을 가리켰다.

“그렇죠, 아름답습니다.” 테니얼이 찻잔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치 저처럼.”

그 뻔뻔함에 앨리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아, 좀… 닥쳐, 제발.” 앨리스가 질렸다는 듯 테니얼 쪽으로 손짓하며 말했다.

“무례하군요. 아주 무례해요.”

앨리스는 머리를 한 번 털고는 투덜거리며 다시 의자로 몸을 묻었다.
이 세계에 갇혀 다른 세계로 가지 못하게 된지 얼마나 되었나?

거의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테니얼은 “당신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면서 앨리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앨리스에게 있어선 고통이었다. 그녀는 다시 테니얼을 바라보았다. 오렌지색과 검은색의 날개를 가진 나비가 그의 눈 앞을 지나갔다. 나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테니얼은 들고있던 찻잔을 한 번 쳐다보더니,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차를 그대로 땅에 쏟아부었다. 기묘한 행동이지만, 테니얼이 매번 하는 짓이었다. 그가 입을 벌렸다. 찻잔에 남은 찌꺼기를 핥아먹으려는 게 아니라, 말하기 위함이었다.

“정말 가야 한다고...” 테니얼이 말하기도 전에 앨리스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
“알고 계시면, 어서 갑시다.” 그가 말했다.

그래도 테니얼의 말이 항상 헛소리는 아니었기에, 앨리스는 그의 말을 따랐다. 그녀는 일어서 새하얀 지평선을 향해 테니얼을 따라 걸었다. 그들이 지나치는 기억이 사라져갔다. 녹아 흘러내려, 소멸했다. 단 하나, 앨리스를 따라오는 나비를 제외하고서. 테니얼은 그 나비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저 나비도 사라지리라.

모든 기억이 그렇듯이.

====# 7-2 #====
그래서, 여긴 어디고, 무엇이 “현실”인가?

앨리스에겐 세계 사이를 오가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확실했다.

그녀에게 있어 그 능력은 식사를 하거나 물을 마시는 것 만큼이나 평범한 일이었다. 이 세계에 도착한 이후부터는 음식도 물도 필요없어졌지만. 아르케아에 오기 전까지 소녀는 수도 없이 새로운 세계를 찾았고, 기괴한 식물을 발견했으며, 이상한 사람들을 만났다.

동화 속의 괴물이나 마법,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간에, 소녀는 보고 기록해왔다.
“다차원 백과사전”... 그녀는 그 기록물을 그렇게 불렀다 (지금은 잃어버렸다).
매일이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이 세계엔 특별한 성질이 있었다. 다른 세계의 기억들이 이 곳으로 흘러들어왔다. 소녀는 그 기억들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소리, 냄새, 맛, 감촉까지 마치 현실로 느껴질만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현실”인가? 아르케아만큼이나 이상한 세계에 있을 때엔, 그 질문이 아주 중요했다.

잠깐 뿐일지라도, 기억을 완전하게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은 환각인가 현실인가?
온갖 세계를 여행한 앨리스조차도, 아르케아와 같은 세계는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장소인가?
“현실이라는 게 뭘까, 테니얼? 여기가 현실이라는 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앨리스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물었다.

“이 곳은 현실입니다.”
테니얼이 찻잔에서 차를 부어내며 말했다.

“당신의 모든 감각이 이곳이 현실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고민을 하시나요?
두 손으로 직접 만지고 느끼며 알 수 있는 것을, 왜 궁금해하십니까?”

“됐어.”

앨리스가 단호하게 답했다. 이런 테니얼은 도움이 안된다.

“그렇다면, 저걸 보아주십시오.”

그가 땅을 가리키며 말했다. 캠프파이어의 기억으로 걸어들어온 모양이다. 테니얼이 부은 차 때문에 불은 사그라들어 있었다.

“저게 어떻게 가능한걸까요?”

“나한테 묻는거야?” 앨리스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제가 저 캠프의 분위기를 망쳐버렸습니다.”

“이 기억도 곧 사라질건데, 뭘 그렇게 풀 죽어있어?”
“앨리스, 저희들이 보는 모든 것이 현실입니다. 보지 않는다고 해서, 물건이 사라지나요? 아니지요. 저 불은 제 손으로 사라지게 했지만요.”

“그러면 아무데나 차를 쏟지 말든가.”

“사죄의 쪽지를 두어야겠군요.”

“아무도 안 볼텐데? 여기엔 아무도 없다고!”

테니얼은 히죽대며 수첩과 펜을 꺼냈다. 앨리스도 투덜대면서도 웃지 않으려 애썼다.

이런 순간이 바로 앨리스가 테니얼의 동행을 그닥 싫어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최근엔 그 빈도가 줄었지만… 최근엔...

처음엔… 달랐었나?

소녀는 잠시 그 생각에 잠겨있다가, 새롭게 등장한 풍경에 기가 쏠려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하루가 또 흘러갔다.

====# 7-3 #====
테니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 숨 쉬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알듯이, 테니얼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에 확신했다.
하지만 그에겐 숨을 쉴 필요가 없었다.

아니면,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는 방법을 알듯, 하지만 그는 먹고 마시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니면, 앨리스의 옆에서 그녀를 지키는 방법을 알듯…

흔들 수 없는, 생생한 편안함이, 현실에는 있었다.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현실임을 안다는 것은 그 명제가 진실이라는 뜻이다.
진실을 알면 마음이 편해진다. 진실이 없다면 미지가 그 자리를 채우고, 곧 공포가 엄습한다. 최악의 경우엔,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이 덮쳐온다.

상처를 입히는 진실. 되고 싶은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아는 것. 피할 수 없는 끝이 있음을 아는 것.
그러한 진실을 사람을 고통에 몸부림치게 한다.

하지만, 테니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앨리스를 지켜보아 왔다.

“그”는 항상 앨리스를 자유로이 두어, 가장 신나고, 새롭고… 다른 곳들로 그녀를 인도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지금조차도.

그녀의 미소를 보는 것이 그에겐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앨리스가 그보다 더 많은 걸 원한다는 것을. 지금 보이는 풍경 너머에 있는 것을 찾으려 한다는 것을. 그것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했다.

“...그걸 숨기고 있었습니까?” 정원의 기억에서 꺾어온 꽃을 내미는 앨리스를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색이 마음에 들거든. 창백해서…”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듯 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꼭 다른 세계에서 본 하늘같아. 무슨 꽃인지 알아?”

그는 알고 있었다.
“모릅니다. 다른 것들과 같이 그 꽃도 사라질 겁니다. 갖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앨리스.”

“...그럴지도, 그래도 마음에 드는걸. 왠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앨리스가 말했다.
그렇게 말할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또다시 차를 쏟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앨리스가 옳다. 저 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게 문제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앨리스…”

“그럴 거야!” 앨리스가 활기차게 대답하고선 그 꽃을 귀에 꽂았다.

“네가 안 시켜도 내 맘대로 할 수 있거든!” 괜히 젠체하며 그녀가 말했다.

테니얼은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치고서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불행하게도…

앨리스의 그 말 또한, 옳았다.

====# 7-4 #====
앨리스는 언제나 세계가 일렁이며 뒤섞이는 모습에 감탄했다. 그러나 테니얼은 관심이 없어 보였다.

“테니얼, 넌 감성이라는 게 없니?”

공중을 나는 기계들이 일으킨 대화재의 기억에서 빠져나오며, 앨리스는 테니얼에게 물었다.

“네, 다행히도.” 테니얼이 비웃듯 대답했다.

이에 앨리스는 그를 심드렁하게 바라보았다.

분명 저 꾹 닫은 마음속에 뭔가 숨어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선, 테니얼이 아름다운 것을 바라볼 때마다 앨리스는 그가 눈을 반짝이거나 숨을 삼키는지 주의 깊게 관찰했다.
어느 날 (비록 이 세계엔 밤이 오지 않아 “하루”의 구분이 없지만), 두 사람은 오래된 공방의 기억을 발견했다.

앨리스는 그곳에서 장난기가 들었다. 웬일로 테니얼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곳을 보는 사이에, 조심스레 문 뒤에 숨었다.
그녀가 사라진 것을 알아챈 테니얼은 주변을 둘러보다

“앨리스…? 음… 어차피 주변에 있겠지.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라며 중얼거렸다.

앨리스는 그대로 숨어 테니얼을 관찰했다. 그는 먼지 쌓인 탁자와 의자 옆을 걸어가, 캔버스가 놓인 이젤 앞에 멈추어 섰다.
그러고선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탄 연필 하나를 찾아, 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선 스케치를 시작했다.
테니얼을 “골려먹는다”는 장난스러운 즐거움은 이미 앨리스에게서 사라져, 그녀는 어느새 그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앨리스가 처음 이 세계에서 깨어났을 때…

테니얼은 곧잘 앨리스와 모자를 바꾸는 장난을 치곤 했다. 그렇게 앨리스를 놀리면서도, 그녀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언제나 물어보곤 했다. 시나 산문을 낭송하기도 했다. 이 감옥 같은 세계에서 깨어나 혼란스러울 때 그는 언제나 앨리스의 중심이 되어주었다. 더 아이같고, 더 즐거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앨리스가 한때 알았던 테니얼은 가면을 쓰고 말았다. 그 가면이 새로운 얼굴이 되어, 앨리스는 그의 옛 모습을 잊어버릴 뻔했다.

그래, 테니얼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었다. 기억에서 미술관을 찾을 때마다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지금, 그는 주변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실제 풍경과 달리 의자가 있는 자리에 찻잔을 그려 넣긴 했지만.

“잘 그린다.” 앨리스가 문 뒤에서 말했다.

스케치를 그리던 테니얼의 손이 멈추었다. 그는 목탄 연필을 내려놓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모작일 뿐입니다.”

이라 말했다.
“그래도 저거, 찻잔은 상상한 거잖아.” 앨리스가 캔버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죠, 제 상상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저보다 훨씬 뛰어난 상상력을 지니고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앨리스.”

그가 또다시 미소지었다.

“오빠, 괜찮아. 그 솜씨를 내 완벽한 두뇌에 비교하는 건…”

갑자기 앨리스는 말을 멈추고서, 테니얼의 눈을 바라보았다. 앨리스가 지금 한 말이 무엇인지,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 7-5 #====
“완벽한 두뇌에 비교하는건… 무엇이죠?”

“...테니얼…”

“제 이름은 대답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에 비유하려고 했던 거죠?” 테니얼이 놀리듯 말했다.

“테니얼!” 앨리스가 소리치며 발을 굴렀다.

“방금 내가 뭐라고 했지?”

“제 이름…”

“‘오빠’라고?!”

“테니얼, 입니다.” 그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니!” 앨리스가 발을 구르며 주먹을 쥐었다. “우리… 남매야?!”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

테니얼이 의자 위에서 빙글 돌았다. 짜증날 정도로 만족스러워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한 후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더니, 또다시 생각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 말도 안할거야?” 앨리스가 물었다. “그랬어… 역시 그랬어… 네가 이렇게 된건 최근인걸.”

“잘생겨진거요? 전 항상…”

“테니얼, 나 지금 진지해.” 그녀가 차갑게 테니얼의 농담을 끊었다.

“저도 진지하게, 지금 이 대화를 끝내고 싶군요.”
“왜? 뭐 걱정되는 거라도 있어?”

앨리스는 포기하지 않고 화를 머금은 어투로 그를 쏘아붙였다.

“내가 널 ‘오빠’라고 불렀어.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대체 뭐 때문일까? 너 알고 있잖아, 테니얼.
나한텐 다 보여. 어서, 뭐라도 말해보라고!”

“싫습니다.” 거의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테니얼이 대답했다.

“테니얼!”

“그만하세요!”

“나도 다 큰 어른이야. 불편한 진실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내 부모도 아닌 주제에!”

“부모나 다름없었을지 누가 압니까!”
표정을 찡그린 앨리스는 한 발을 내디딘 채로 멈추어 섰다. 그 눈은 의자에서 일어선 테니얼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한 말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기라도 한 듯.

“...뭐?”

“아… 이런… 말해버렸군요.”

테니얼이 속삭였다. 그의 눈이 잠시 반짝였다. 테니얼은 서둘러 고개를 돌려 모자의 챙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닙니다, 앨리스… 저는, 당신의 오빠가 아닙니다. 다만 그를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계속 말해.”

테니얼은 조끼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반짝이는 유리 조각. 아르케아였다.

“기억이야?”

“당신의 기억입니다.”

앨리스는 말없이 테니얼의 손 위에 놓인 아르케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도 이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진 못합니다. 다만 기억이 이 세계로 흘러들어오는 건 당신 때문입니다.
비록 제 기억이 완벽하지 못하고는 하나… 잠자는 당신 주변을 맴돌던 유리 조각들은 아직 기억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그”의 기억이었습니다. 마치 제가 “그”가 된 듯한… 당시 제 정신은 좀, 이상하긴 했지만요.”

테니얼은 말을 잇기 전에 미소를 지었다.

“그 기억을 보고 나서는… 전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있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괜찮아, 말해. 테니얼.”

반짝이는 구슬이 테니얼의 뺨을 타고 흘러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괜찮지 않을지도 모른다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테니얼은 유리 조각을 쥔 손을 앨리스에게 뻗었다.
그녀는 조각을 받아서 들었다.

그 조각 안에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살랑이는 커텐과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앨리스의 모자 위로 테니얼이 손을 얹었다. 소매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 안을 바라보면 분명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앨리스…”

대답하기 전 앨리스는 조각을 꽉 쥐었다.

“응.”

“저는 모조품입니다. 그래도…”

테니얼은 말을 흐렸다.

“그래도…”

“응.”

“부디, 조심하세요. 앨리스.”

“말이 안 이어지는데… 네가 모조품인 거랑 무슨 상관이야?”
테니얼은 질문을 무시하듯 가볍게 숨소리를 내고선 앨리스의 모자를 벗긴 후 자신의 모자를 씌워주었다.
그리고 앨리스가 얼굴을 바라보기 전에 등을 돌렸다.

“저는 모조품입니다. 하지만 제 말을 듣고, 부디 조심하세요. 제가 할 말은 이게 다입니다.”

거짓말이다.

앨리스는 굳이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유리 조각을 바라보고서, 작동시켰다.

색채가 주변을 휘감는 와중, 테니얼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모조품은 소원을 이룰 수 없는 법이죠.”

그 말의 뜻을 묻기도 전에, 앨리스는 전에 와본 적 있는 장소에 서 있었다.

====# 7-6 #====
파일:Arcaea/Story/7-6.jpg
그 풍경은 평범하다 못해 칙칙하기까지 한 하얀 벽과 천장이 감싼 병실이었다. 창문 밖으로 주황색 나비가 나풀거리는, 조용한 병실. 그리고, 앨리스가 이 장소를 알아봄과 동시에,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기억들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밖에 공원이 하나 있었다.
간호사들은 상냥하고 친절했다.
날씨는 언제나 맑고 완벽했다.
자신은 거의 평생을 이 곳에서 살았다.

갑작스러운 기억의 범람에 앨리스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 뒤 쪽에서 나는 발소리에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지퍼가 열린 후드티를 입고 수국을 든 사람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후드티 밑에는 티셔츠를 입고, 하의는 슬랙스, 신발은 단순한 디자인의 편한 운동화… 그리고, 얼굴. 앨리스는 저 얼굴을 알고 있었다. 테니얼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 하지만 그의 이름은…
“...세드릭.”

창문 옆의 침대에서, 나약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청년은 앨리스의 옆을 지나가며 예의 바르게 묵례를 한 뒤, 그 환자 옆으로 걸어갔다. 반짝이는 금발, 가느다란 체격. 얼굴을 보지 않고서도 앨리스는 알 수 있었다. 환자는 앨리스 자신이다. 이건 본인의 기억이었다.
저 환자의 이름은 앨리스다.

세드릭은 꽃을 화분에 꽂았다. 그 화분은 다양한 꽃들로 화려한 부케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다.
그는 찻잔을 들고 있지도, 차를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다.

“세드릭…”

소녀가 다시 그 이름을 부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화실에 있는 줄 알았어.”

“나 일하는 시간 자유로운 거 알잖아, 앨리스.”

테니…세드릭이 말했다. 목소리조차 비슷했다.
“좀 어때? 몸은 괜찮니?”

두 사람이 앨리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앨리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말을 뱉었다. 생각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자신이 모르던 진실이 담긴 세계.
그리고 자신은 이 기억의 관찰자로서, 당시 자리에 있던 누군가의 말을 반복하고 있는 듯했다.

“글은 쓰고 있니?” 세드릭이 물었다.

“오빠는 그림 그리고 있어?” 병든 소녀가 살짝 놀리듯 웃으며 되물었다.

“당연하지.” 청년이 천장을 바라보고 눈을 굴렸다.

“그러면서 여길 왔어?” 소녀가 웃었다. “난 오빠 엄청 바쁜 줄 알았는데!”
“세 페이지 그렸어.” 청년이 자랑스레 웃으며 답했다.

“잘됐네!”

“넌 한 페이지도 못 썼어?

“썼어! 엄청 썼지!”

“그럼 한 번 읽어보자. 여기 다른 책도 가져왔으니까…”

“그래!”

소녀는 침대 옆의 선반으로 손을 뻗었다. 공책과 문방구, 그리고 타블렛을 두는 곳이었다.
청년은 가방에서 책을 하나 꺼냈다. 그래… 우린 세계 사이를 여행하던 게 아니야.
전부 지어낸 이야기였어… 지어낸… 몽상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었다.
4일이다.

4일 후에, 이 모든 것이 끝난다. 두 사람 모두, 비록 영원한 시간은 아닐지라도 앞으로 1년 정도는 더 남았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소녀는 청년을 보지 못했다. 아주 이른 아침에 소녀는 엄습하는 고통에 시달리다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간호사들이 어서 가족에게 전화하라며 소리를 지르는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게 다다.

테니얼은 그걸 알고 있었다.

이 기억은 길었다. 앨리스의 마지막 며칠을 모두 담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보고 싶지 않았다.

강인한 마음을 지닌 앨리스라도, 마지막을 마주한다는 것은 너무나 두려웠다. 기억을 바꿀 수는 없었다. 자신의 건강은 악화일로였고, 자신과 오빠에겐 서로밖에 없었으며, 오빠는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어 줄 수 없었다. 이야기와 몽상은… 아무리 강하게 염원해도 현실이 될 수 없다.

그렇게, 두 사람이 아직 웃고 있을 때, 앨리스는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저 순간이 둘이서 함께 보낸 마지막 시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았다.
난 죽을 것이다. 난 이미 죽었다.

공방의 기억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앨리스는 그걸 떠올렸다.

“테니…”

앨리스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없었다.

그렇게, 공방의 기억도 사라져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테니얼이 말했듯, 그는 모조품이다.
진실이 밝혀지면 사라지는 모조품.
아르케아가 없는 공허에서, 앨리스는 서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을 바라보았다.

세상만물이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이 “차원”은 허구다. 이 “몸”은 껍데기다. 이 “기억”은 왜곡되었다. 그녀의 “인생”은 네 것이 아니다.
그녀의 삶은 굴곡 없이, 절정 없이, 곁에 있어줄 오빠 없이, 끝났다.

넌 혼자야, 앨리스.

넌 외롭게 죽었어.
앨리스는 무릎을 꿇었다. 장갑을 낀 손이 흙을 파고들었다.

너무나 추웠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감각이 있었다…

감정이 있었다.

‘이곳은 현실입니다. 당신의 모든 감각이 이곳이 현실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테니얼의 말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손이 보였다.

장갑을 벗었다. 감촉이 느껴졌다.

귀 뒤에 꽂아둔 꽃을 빼자 줄기가 피부에 쓸리며 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 꽃의 향기를 맡았다.
입을 벌려 꽃잎의 향기를 만끽했다.

현실이란 무엇인가? 보이는 것이 현실인가? 맛볼 수 있는 것이 현실인가? 만질 수 있는 것이 현실인가?

그렇다면…

“앨리스”는 죽었다, 그리고 앨리스는 살아있다.

테니얼이 기억일 뿐이라면, 그도 앨리스처럼 살아있어야만 한다.

현실에서, 그녀는 세계를 방랑하는 자였다.

실제로 이 세계에 오지 않았나. “진실”이 어떻건 간에.

그렇다면… 분명 여기서 나가는 길도 있을 것이다.
그 길을 찾아낼 것이다.

자신과 다른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돌아가는 길을.

설령 여정 도중에 그를 찾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그녀의 마음속에 언제나 그가 살아있음을 명심할 것이다.
어쩌면 차를 끓이고 버리는 기행을 따라 해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앨리스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번졌다.

앨리스는 그 자리에서 결정했다. 두 발을 단단히 땅을 디디고 “진실”의 조각을 손에 쥔 채, 언제나 앞을 보고,
새로운 시작을 부르는 지평선을 향해 나아갈지라도…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게 무엇인지, 절대 잊지 않겠노라고.

7. 라그랑주

7.1. 해금조건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9-1 Esoteric-1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Paper Witch.png Paper Witch 클리어
9-2 Esoteric-2 파일:Arcaea/Crystal Gravity.jpg Crystal Gravity 클리어
9-3 Esoteric-3 파일:Arcaea/Far Away Light.jpg Far Away Light 클리어
9-4 Esoteric-4 파일:Arcaea/Löschen.jpg Löschen 클리어
9-5 Esoteric-5 파일:Lagrange_icon.png 파일:Arcaea/Aegleseeker.jpg 라그랑주 Aegleseeker 클리어
9-6 Esoteric-6 파일:Arcaea/Far Away Light.jpg 라그랑주 Far Away Light 클리어

7.2. Esoteric Order

====# 9-1 #====
풍경이 바뀌었다.

매 걸음마다 풍경이 변했다. 라그랑주의 걸음이 땅을... 그리고 공간을 움직였다. 태피스트리로 다가갔다.

실이 완전히 꿰여 있지 않았다. 유리 조각이 그녀를 소리 없이 지나쳤다가 놀란 듯이 갑작스럽게 웁직였다.

주변의 세계는 백색이 아닌 흑색이었다. 허공에 별들이 걸려있었다. 가야 할 길은 조각이 나있었다.

기억으로 만들어진 태피스트리, 아르케아. 그 실은 풀려 닳아가고 있었다. 방치되고 잊힌 실가닥.
그 앞에, 그리고 그 안에 서있는 소녀는 이의 첫 번째 목격자였다.

진정으로, 혼자인 소녀.

"아무래도," 라그랑주가 속삭였다. 사실을 다시 확인하듯이.
"다른 누군가가 이곳에 도달하려면..." 그녀가 먼지투성이의 뒤틀린 길을 밟으며 말했다.

"나와는 다른 길을 걷겠군. 내가 걸었던 길은 부서져버렸고, 앞에 난 길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으니까."

그녀가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자 마침 그 말대로 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하얀 나선형의 길이 위로, 그리고 아래로 움직이다 작은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그 조각들이 허공에 둥둥 떠서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조각들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또 하나." 라그랑주가 말했다.

"너는 할 말 없니?" 그녀가 카론에게 물었다.

카론은 움직이지 않았다.

"말해봐." 소녀가 카론의 쓸모없는 머리를 토닥이며 명령했다.

답이 없는 카론의 주변으로 삼각형의 광륜이 둥둥 떠다녔다.
"그런건가…" 그녀가 스스로 대답했다.

라그랑주는 카론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돌려 텅 비어버린 세계를 바라보았다.

“이⋯ ‘가장 낮은 세계’에 오면 네 기억이 돌아오거나, 최소한 성격 같은 게 생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구나, 카론.”

실패한 실험의 결과물은 천천히 꼬리를 흔들며 S 모양을 그렸다. 생각에 잠긴 듯이 귀가 움직인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귀여우니 됐나."

라그랑주는 카론에게서 손을 떼며 인정하듯 말했다. 일견 장난스러워 보였지만, 라그랑주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세계가 완전히 백색이었던 적에 라그랑주가 만들었던 유리 사역마, 카론은 그녀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벌써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특이하게도 그 길은 라그랑주가 여태 보아온 길보다 훨씬 넓었다. 길이라기보다는 한 구획에 가까울 정도로.

아르케아 몇 개가 라그랑주의 오른쪽으로 옹기종기 모였다. 마치 라그랑주가 자신들의 것인지 확인이라도 하는 양.

그녀가 조각들을 지나가니, 그렇지 않음을 깨달은 듯 흩어졌다.

라그랑주의 목적은 기억이 아니었다. 기억의 땅은 과거의 것이다. 경계를 넘어선 공간에, 새로이 연구하고, 새로이 발견할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닳아빠진 태피스트리의 끝자락, 그녀는 이 끝없이 바뀌는 길을 따라가며, 언젠가 이 태피스트리를 짠 장인을 만나길 바랐다.

그 손으로 하여금 다시 이 천을 만지게 하도록.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 선택한 세계로 걸어나아갔다. 흑색의 세계로, 공허 속으로...

====# 9-2 #====
이 세계에는 상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이곳 공허뿐 아니라, 아르케아의 세계 그 자체에 해당되는 말이었다.

이러한 경계 밖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부터, 아니, 라그랑주가 깨어난 후 보아온, 아르케아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우선, 라그랑주는 깨어난 후 자신이 누군지 알기도 전에, 아르케아의 개념을 먼저 깨우쳤다. 그리고 아직도 라그랑주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아르케아는 완고하게 자신의 존재를 라그랑주에게 밀어붙였다. 마치 ‘안녕. 넌 이 세계에 갇혔고, 여긴 이런 곳이야.’ 라고 말하듯이.

이 세계는 기억만을 위해 존재하는 도서관이었다. 마구잡이로 이어지는 폐허와 의미 없는 이름, 이름 없는 외로운 소녀만이 존재하는 도서관.

그리고 도서관에 왔을 때 우선해야 하는 일은 비치된 장서를 읽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유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책 사이에 공통된 주제는 없었다. 그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었다. 제대로 된 도서관이란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그녀가 봐온 기억들을 통해 그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반면 아르케아의 세계에 존재하는 책, 기억들은 놓여있는 위치도, 둥둥 떠다니는 모습조차 제멋대로였다.

이 세계 속 그녀의 존재 역시 너무 우연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깨어남과 동시에 아르케아가 무엇인지는 깨달았어도, 왜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정말," 라그랑주가 갑자기 말을 내뱉었다, "내가 봐온 세계들을 떠올려봐, 카론."

그 말에 카론은 라그랑주를 바라보았다. 카론의 눈동자 안에서는, 지성의 조각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주인과 반려⋯유리는 공허 속을 걸어나갔다.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길을.
"너를 구성하는 세계들을 떠올려봐," 라그랑주가 반려 유리의 귀를 살짝 만지며 계속해 이야기했다.

"그 기억들에선 ‘존재’가 어떤 개념이었지? 여기 공허는 내가 보아온 그 어떤 세계와도, 너를 이루는 그 어떤 기억과도 달라… 만들어진 목적이 있으면서도, 아무런 목적이 없는 듯한…”

그녀가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다.

"어떻게 생각해?" 라그랑주가 물었다.

카론의 시선은 앞에 놓인 하얗게 굽이진 길에 고정되어 있었다.

라그랑주는 품에서 카론을 놓아주었다.

"난 너무 애매하다고 생각해."

라그랑주가 말했다. 카론이 자기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고 멋대로 생각하고선, 말없이 길을 따라 걸어갔다.

과거의 풍경을 생각하며…
그러자 과거가 라그랑주의 앞에 나타났다.

...아니면 현재인가...?

"뭐...?"

소녀가 혼란스러워하며 말했다.

구름이다.

둥둥 떠다니는 길만 있던 곳에 구름이 나타났다.

허공에 어른거리는 꿈같은 형상이 경고 없이 라그랑주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사이로 다시금 보였다. 새하얀 폐허와 부유하는 유리 조각의 세계. 라그랑주가 기억하는 유일한 세계.
그녀가 뒤로 놓고 온 세계가…

====# 9-3 #====
이 풍경은 현재다.

만약 이것이 기억이라면, 그녀가 깨어나서 봐온 기억들과는 전혀 다르다. ‘차지’할 수 있는 시점이 없었다.

단지 오래되고 척박할 뿐인 세게.

“...”

라그랑주는 그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 장소가 나를 놀리는 걸지도 모르겠군..." 소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계속해 나아갔다.
라그랑주는 처음으로 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기억은 스스로 라그랑주의 앞에 나타났다.

그래, 그런 건가. 라그랑주는 공허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길을 더 나아가자 백색의 세계로 향하는 창문이 더 많이 생겨났다. 대부분 텅 빈 광경을 비출 뿐이었지만, 이따금씩 다른 소녀의 모습이 비치기도 하였다.

예상했지만, 시시했다. 라그랑주는 시험 삼아 창문에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역시나 보이지 않는 장막에 가로막혀 창문을 통해 저 세계로 다시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굳이 아르케아의 세계를 떠올리거나 그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면, 그냥 거기 머무르지 않았겠나?

그러한 내면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라그랑주는 잠시 자신의 삶이 어땠는지 생각해 보았다.
소녀는 많은 기억들을 보아왔다. 세계의 진실을 밝힐만한 기억이 있으리라 짐작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주로 찾은 것들은 매우 평범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저 평범한 일상.

이미 사라져버린, 반복되던 일상들. 많은 것을 배웠지만 자신이 깨어난 이 세계에 대해서는 단 한 가지도 배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경계를 넘어가 더 많은 것을 알아내고자 결심했을 때, 처음으로 본 세계의 일부를 자신과 함께 가져가기로 했다. 그 기억에 어떤… 의미를 주고 싶었다.

라그랑주는 카론을 바라보았다. 두고 온 세계의 창문이 주변에서 빛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단지 카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론을 만든 것도, 단순한 변덕이 아니었나?
“만약에”가 머릿속을 스쳤다. 만약에 사람도 도시도 사라져버린 이 기억의 세계를 이용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면?

그녀는 아르케아의 조각들을 끌어다가 온 노력과 의지, 그리고 바람을 쏟았다. 그리하여 카론이 탄생했다.

“...”

카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

그럼에도 카론은 마치 위성이 모성 옆을 지키듯 그녀의 주변에 남아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르케아의 세계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카론은, 그 의미 없는 세계를 나타내는 거울이었다.

====# 9-4 #====
말없는 소녀는 말없는 파트너와 함께 어둠 속으로 전진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일이 떠올랐다.

그 끈질긴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이 모든 것을 만든 신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적어도 신이라 불림에 부족함이 없는 어떤 존재.

그것이 그녀가 여행하는 이유였다.

신을 찾고 싶었다.
“흔히들 지적 설계라고 하지...” 라그랑주는 어떤 기억에서 보고 배웠던 것을 다시 되새겼다.

“하지만…” 무언가 말하려다 말을 흐렸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놓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세게의 뒤틀림이 극심해졌다. 가로선이 사선으로 변했고, 수평은 뒤집혔다.

나아가려면 가고 싶은 곳으로 발을 내디디면 되었지만, 걷다가 잠시라도 집중이 풀리면 어디론가 떨어져 버리거나, 위로 떠오를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마치 창조자를 대신해, 라그랑주의 바람대로 세계가 움직이는 듯했다. 투명한 땅 위에 밟히는 투명한 발자국을 터덜거리며 말했다.

이로 인해 그녀가 생각한 것이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그녀는 위를 쳐다보았다.

"이 세상은, 감정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어."

이토록 분별없이 만들어진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이곳에도 태양이 있다. 백색의 세계에서는 하늘 그 자체가 빛났지만, 이곳에서는 어둠 속에 숨은 태양이 잊힐 정도로 약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르케아의 끝나지 않는 낮에게 빛을 빼앗겨버린 걸지도.

"뭐, 그 영원한 낮도 최근에 끝나버렸지만." 그녀는 앞에 놓인 광경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구름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별빛은 언제나 그렇듯 하늘에 가득했다.

몇 시간 전부터, 어쩌면 며칠 전부터, 소용돌이가 공허 속 현실을 찢어버리기 시작했다. 구름 대신 시선을 사로잡는 새롭고 기이한 현상이었다.

잊히고 만 태양과 미완성의 세계에는 무언가 의미가 있었다. 소용돌이도 마찬가지며 구름도 그렇다. 이 공간 전체가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백색의 세계에서도 때때로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도 있고, 모든 곳에 있었다. "그것"이 나타나면 존재 그 자체가 뒤틀린다.

‘이상현상Anomaly’이었다.
그녀는 백색의 세계에서도 이상 현상과 몇 번 조우한 적이 있었다. 아까 전까지 존재하던 창문을 통해서도 이상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이상 현상이라는 이름의, 모든 것을 뒤틀어버리고 파괴하는 현상은, 라그랑주에게 있어 일상이었다.

이 공간은 그 현상들이 집중된 장소였다. 그녀가 보기로는 이상 현상에겐 전혀 의도나 목적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세계를 만든 신은...
“...”

라그랑주가 검은 소용돌이 앞에 멈추어 섰다. 이 공간에 몇 남지 않은 기억의 유리조각이 미끄러지듯 그 속을 통과하며 몇몇 조각은 얇아지거나 갈라졌다.

이 태피스트리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라그랑주는 손을 들어 올렸다...

단지 인격과 세상에 대한 단순한 상식만을 지닌 채, 라그랑주는 선입견도, 기억도, 사상조차 없이 깨어났다.

...그 사실이 구역질났다.
여태껏 말하고 생각해온 것들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아르케아의 세계가 무의미할 리 없다고, 라그랑주는 그렇게 짐작했다.

그 세계엔 의미가 있다. 넘쳐흐를 정도로.

의미뿐만 아니다. 기억도, 건물도, 유리도 있다.

그리고, 소녀들도...

어째서일까?
"...카론."

그녀는 자신이 만든 위성에게 말을 걸었다. 말을 알아들은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라그랑주는 아랑곳 않고 계속해 말했다.

"아직 스스로는 아무 생각도 못 하는 거야? 그러면서도 나는 잘 따라다니네... 날 주인으로 여겨주는 거니, 카론?"

소녀가 카론의 이름을 다시 부르자 그 머리에 박힌 눈이 반짝였다.

"너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나 역시 그래. 그리고… 그 사실 덕분에 무언가 깨달은 것 같아."

별일 아니라는 듯, 라그랑주는 눈앞의 소용돌이로 팔을 집어넣었다.

... 카론은, 라그랑주의 팔이 유리의 실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 어때? 이건 마술일까, 카론? 아니면 너와 나는 같은 존재일까? 네 안에는 피가 없지. 나한테는 있을까?"
라그랑주의 몸이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 그녀에겐 심장이 있고, 박동한다.

그녀에겐 생각이 있고, 존재한다.

그렇다면 라그랑주는 왜 이 세계에 있는 걸까? 다른 소녀들은 왜 있는 것일까?

... 소녀의 현관 속에 피가 흐를지 몰라도, 볼 수는 없었다.

라그랑주의 “몸”은 기억에서 보았던 그 어떤 것과도 달랐다.

한때 팔이었던, 한때 자신의 가슴이었던 은색 실가닥...

드디어 확실한 증거를 찾았다. 이 육체는 창조된 것이다.

“...!?”
카론이 라그랑주의 옆구리를 치자 소녀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졌다. 순식간에 실이 다시 모여 그녀의 몸을 이루었다.

라그랑주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고서. 카론을 슬쩍 쳐다보았다. 여전히 말이 없다.

...개의치 않으며 그녀는 가슴을 폈다.

...카론의 주인은 자신이니까.

카론과 눈을 마주치며, 소녀는 말했다.

"...끝자락을 보러 갈까?"

====# 9-5 #====
파일:Arcaea/Story/9-5.jpg

언제 일어난 일일까?

언제 어둠이 떨어져 나가... 이것이 됐지?

어둠이 떨어져 나갔다. 세상이 떨어져 나갔다.

아르케아 바깥에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입을 움직여도 말소리를 전할 대기가 없다.

이곳에선 그 무엇도 진동하지 않았다. 완벽한 침묵만이 공간을 채웠다.

라그랑주의 눈에 희미하고 기이한 평면이 비치었다.

마치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공간이 새어나가는 듯했다.

마치 내가 이 모든 걸 보지 못하도록 막는 듯해...
잠시 돌아갈까 생각도 했었어. 여기에 와서 얼마 안 됐을 때 좀 더 그 가능성을 고려했으면, 탈출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제 난 길을 잃어버렸어.

아니...

길을 "잃는다"라는 건 “장소”가 존재한다는 말이잖아?

위, 아래, 왼쪽, 오른쪽... 방향.

더 이상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오래전에 사라져버렸지. 아직 나는 실감이 잘 안 나… 사실, “나”라는 존재 자체도 사라져버린 것 같아.

봐, 손도 없고, 발도 없고, 다리도 없고, 혀도 없어.

나에게 남은 건 두 눈과, 희미하게 일렁이는 뇌의 흔적뿐이 아닐까?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움직임도 감각도 모두 빼앗겨버린 사람의 정신은 얼마 안 가 갈가리 찢겨버려. 집중해야 해.
이 세계를 만든 신은 집중하지 않았으니까.

......

...흠.

그래... 이 세계는 아무 생각 없이 만들어진 거야. 설계도 없는 건물과 같지. 두루뭉술한 인상뿐.
땅이 있고, 햇볕이 있지. 태양이 저문 후엔 별을 머금은 밤하늘이 찾아와. 밤하늘마저 떠난 후엔?

아무도 몰라. 잘난 신께서도 모르는 모양이지?

솔직히 말할게.

너. 뭘 하겠다고 이런 세계를 만들었어? 왜 날 여기로 데려왔어? 왜 내가 예전엔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주지 않았어?

나한텐 삶이 있었어. 네가 빼앗아가버린 삶이.

......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죽은 거야?

오빠를 좋아하던 그 아이처럼? 아니면 붉은 옷을 입은 그 아이처럼?

내가 그 사실을 무서워할까 봐?

이... 하아.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응?

네 이기심으로 만들어낸 이 세계에 갇혀서 내가 뭘 해야 하냐고. 너 자신을 위해 만든 세계잖아, 아니야?

네가 도피할 낙원이잖아. 어떻게 만든 거야? 아니, 그게 중요한가?

중요한 게 뭔데?
또 몸이 풀려나가.

어이가 없어.

그 아이가 왜 이 세계를 그토록 싫어하는지 드디어 이해했어.

진실을 알게 되면 누구든지 이 세계를 없애버리고 싶어 할걸.

날 구원한 거라고 생각해? 틀렸어. 설령 그렇다 해도... 난 다시 파멸했어. 이 모든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대체 어떡하면 좋냐는 말이야?

카론...
여기에 카론은 없지? 내 몸은? 나...

나를...

나를 없애줘... 카론은 그때 왜 나를 막은 거지? 되돌아보면...

나 지금 되돌아보고 있는 건가?

내 눈이 어디갔지?

아무것도 안 보여.
여기가 어디였지?
아니... 아냐... 아니야...
아니, 안돼. 정말 되돌아갈 수 없다고?
벗어날 수 없다고?
움직일 수조차 없다고?
아니, 정말로, 아무것도 못 한다고?
아직 손톱이 있었으면 뿌리까지 닳도록 씹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있지...

비록 너는 껍데기를 모아 날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나는 고작 껍데기가 아니야!

나한텐 감정이 있어. 이런 일 따위 원하지 않아.

들려? 내 생각이?

이런 건 싫다고!
나는 알고 싶었을 뿐이야.

그 대가가 이거야?

아무것도 없잖아…

......

...모든게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나니...

가슴 속에 찌꺼기가 쌓이는 느낌이야... 가슴, 가슴 어디갔지...? 또 내 손은?

맞아… 사라졌지…

——
이건 빛이 아니야.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

그 새하얀 폐허의 세계를 떠나 공허에 도착했을 때엔, 어둠이 반가웠어.

모든 게 달랐어. 눈부시지도 않았고. 그 무엇도 “당연” 하지 않았지.

빛, 어둠, 수많은 세계에서 보아온 아주 기초적인 개념. 빛은 따뜻하고 상냥하며, 어둠은 무섭고 불가사의하지.

그래도, 나는 어둠을 알고 싶었어.

......
대략적으로 느끼고는 있었어. 그리고 그 느낌은 확신으로 바뀌었지. 이 세계는 약한 마음을 지닌 자들의 피난처라는 것.

하지만 난 달라.

난 이 피난처를 만든 겁쟁이와는 달라.

내가 만들었으면 이것보단 훨씬 좋은 곳이었겠지.

카론이 보여줬듯... 보여주고 있듯.

모든 게 괜찮을 거라는, 그런 더 나은 진실을 찾고 싶어서 난 어둠 속으로 전진했어.

하지만 결국 찾아낸 진실은 내가 생각했던 대로 씁쓸하고 무자비했어.

이 상태로 너무 오래 있었어. 시간의 개념조차 잃어버렸어.

그리고 가끔, 저 멀리에서 반짝이는 게 보여.

빛, 진정한 빛이.
......

저 빛이 나를 인도해온 걸지도 몰라.

아무한테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평생 비판해온 것에 몸을 맡기는 건 지는 기분이 들어.

하지만 분명 저 빛은 나를 부르고 있어.

내가 두고 온 세계의 빛이, 나를 원하고 있어.

그 빛 속에서, 나는 구원받아...
......

알았어, 손을 잡을게.
빛에 가까워지니, 손가락에 감각이 돌아와. 입김마저 보이는 듯해.

돌아가는구나.

그렇다면, 이 진실은 두고 갈게.

절대로 잊진 않겠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하도록 여기에 두고 갈 거야. 난 진심으로 생각해.

신보다 내 솜씨가 더 좋을 거란 거.

그런데 뭔가 만들려면 일단 손부터 되찾아야지.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길 거야. 정말로 할 거야. 무언가 창조할 거야.

하지만... 이 감정은 자신감이 아니야.

복수심에 가깝지.

이 세계를 바꾸겠어. 더 나은 곳으로.

네가 망가뜨린 채 내버려둔 세계잖아. 뭐든 가능하지 않겠어?

아마도 그럴 거야.

아니...

그럴거라 확신해.

——

====# 9-6 #====
아르케아의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 라그랑주는 아르케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으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점은 많았으나, 별문제는 아니었다.

온전한 몸으로 돌아온 라그랑주는 다시 카론과 함게 공허로 찾아왔다.

그 끝자락에 어떻게 도달했었는지, 아직 자신도 몰랐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단 하나의 진실은 확실했다. 연약한 영혼이 만들어낸 이 기묘하고 망가진 감옥에선… 그 어떤 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끝자락에서 돌아오는 것도. 공허에서 돌아오는 것도.

다른 소녀들을 만나는 것도. “창문” 너머로 건너가는 것조차도.

존재가 불가능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면, 그 무엇이든 가능하지 않겠나?
라그랑주가 두 손으로 카론을 들어 올렸다. 카론의 눈이 반짝였다.

"... 네가 나의 등대였던 거야?" 소녀가 카론과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아둔한 카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 그러나 그녀는 미소 지었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조심하라고 말하지 않았냐’같은 표정이네. 아무 말도 안 하는 주제에.”

그 말에 카론은 귀를 씰룩씰룩 움직였다.

"하하..."
라그랑주는 앞을 향해 걸어갔다.

카론을 놓자 날아올라 그녀의 어깨 위에 자리 잡았다.

이제 그들은 아르케아를 향해 걸었다. 길을 수놓는 빛의 구름을 바라보며.

하나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른 구름들과는 다른 특이한 반짝임. 일렁이는 표면. 그 안에 비추는 세계의 시간은 뒤로 돌아갔다가 다시 앞으로 뛰는 등 혼란스러웠다.

현실의 분열이다. 또다시 하늘이 갈라진다. 하지만 붉은 옷을 입은 소녀가 일으킨 그 사건과는 다르다.

그림자에게 쫓기는 소녀...

그리고 빛으로 감싸인 소녀.
그렇다...

또다른 “끝자락”이 나타날 것이다.

저 틈새 사이로 빠져버릴 것 같다는 느낌을 안은 채, 라그랑주는 그 끝을 바라보았다.

결말을 향해가는 소녀들을. 몰락해가는 이야기를.

소멸을.

라그랑주는 또다시 미소 지었다. 그 끝이 비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것은 빛과 대립의 춤.

아르케아다.

8. 에토/루나

8.1. 해금 조건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10-1 Binary-1 파일:arcaeachar_11_icon.png 파일:Arcaea/next to you.jpg 에토 next to you 클리어
10-2 Binary-2 파일:arcaeachar_12_icon.png 파일:Arcaea/Silent Rush.jpg 루나 Silent Rush 클리어
10-3 Binary-3 파일:arcaeachar_11_icon.png 파일:Arcaea/Strongholds.jpg 에토 Strongholds 클리어
10-4 Binary-4 파일:arcaeachar_12_icon.png 파일:Arcaea/next to you.jpg 루나 next to you 클리어
10-5 Binary-5 파일:Arcaea/Memory Forest.jpg 루나 Memory Forest 클리어
10-6 Binary-6 파일:arcaeachar_11_icon.png 파일:Arcaea/Singularity.jpg 에토 Singularity 클리어

8.2. Binary Enfold

====# 10-1 #====
잠들었구나.

잠든 네 얼굴을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나네.

이 세계에서 우리가 만든 추억을 수정에 담을 수 있다면, 난 지금 이 순간과 같은 기억만을 모을 거야.

이 얘길 들으면 넌 웃을까? 유리 조각을 주울 때마다 항상 날 놀리곤 하잖니. 아마 이해할 수 없는 거겠지.
그래도 괜찮아.

너를 기억 속에 완전히 담을 수는 없는 거겠지. 지금도 앞으로도, 너는 영원히 너 일 테니까.

하지만… 잠든 네 얼굴을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네.

기억 속의 그 공연장과, 그 연주회…
너는 매서운 화염, 강렬한 폭풍이었어.

네가 발을 구를 때마다 건물이 통째로 흔들리는 듯했지.

대기가 진동하고, 땅이 요동쳤어.

그런 너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벅차올라 견딜 수가 없었어.
네가 연주하는 멜로디로 공연장이 가득 채워진 것 같았어.

그 놀라운 노력과 집념… 감탄스러웠어.

울리는 박자, 환한 너의 미소… 현을 켜는 네 모습, 이마에 맺힌 땀, 터져 나오는 웃음…
그 순간 떠올렸어.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영광의 순간에도, 투쟁의 순간에도,

나는 언제나 널 사랑했어, 루나야.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연주가 끝났어. 상대방 연주자는 명예롭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지.

너는 악기를 들어 올리고선 허리 숙여 인사했어.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치고 무언가 말을 했지. 박수 소리에 묻혀 들리진 않았지만, 입술 모양으로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어.

“언니보다 내가 잘하지?”

나는 미간을 구기고 눈을 한 번 굴렸어. 기억은 거기서 끝나.
백색의 세계가 주변의 광경을 감쌌어. 네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어. 네 손에 들려있는 건 악기가 아니라 검이었지.
나는 너를 바라보며 말했어.

“한 번 이긴 걸로 그렇게 좋아할 일이니?”

“이긴 건 이긴 거지. 자, 얼른 세봐.”

“숫자 적을 곳도 없는데 어떻게 세?”

“직접 세면 되잖아.” 너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어. “머리로 세.”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루나야.
세 번이네. 네가 나보다 더 멋진 연주를 한 횟수. 세 번… 굳이 내가 알려줄 필요도 없겠지만.

내가 이긴 횟수는… 음, 그래. 다섯 번이군. 머릿속에서 셈을 끝낸 나는 한 손을 완전히 펼치고, 다른 쪽 손으론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어.

그리고 넌 네 손을 내 손바닥에 짝 하고 부딪혔지.

“다섯 번?!” 어찌나 신이 났는지 아주 소리를 지르며 네가 말했어. “별로 차이도 안 나는구만!” 그렇지.

넌 그래도 손가락을 접어 내 손에 겹쳤어. 조금씩 흥분을 가라앉힌 너는 여전히 미소가 번진 얼굴과 작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지.

“한 판 더?”
나는 거절했어. 좀 슬프잖니. 검을 가리켜서 주변에 있는 아무 기억에나 들어가도 너보다 내가 훨씬 잘할 텐데.

하지만 넌 어찌나 신이 나는지 그것조차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넌 내 손을 더욱 꽉 쥐었어.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겨우 진정했지.

평소의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온 너는 나에게 물었어.

“그럼 다음은 어디로 갈까?”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저번에 말했던 탑을 가리켰지.

그래, 맞아. 루나야.

난 네가 알면서도 굳이 물어봐주는 게 기뻐.

====# 10-2 #====
깨어났니?

난 꿈속에 있는 것 같아. 하다 하다 이젠 언니 꿈을 꾸는 지경이 됐는지.

언니의 얼굴, 언니와의 기억, 언니의 모습이 무수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 내 넋을 빼놓을 만큼 아름다운 연주.

세세한 움직임 하나까지도 완벽하게 통제하는 절제력. 언니를 생각하면, ‘완벽하다’라는 말이 떠오르곤 해.

짜증 나는 건, 언니의 면면을 보면 도저히 ‘완벽하다’고는 또 못 하겠다는 거야.

길도 잘 못 찾아서 곧잘 헤매고, 틈만 나면 어디 걸려 넘어지고… 그리고 솔직히 있잖아. 언니는… 좀 이상한 사람이야.
있지, 난 이 세계에서 깨어난 게 너무 싫었어.

그도 그럴게, 언니랑 나에게는 너무 일렀잖아. 삶의 종착역이 이런 곳일 거란 걸 누가 알았겠어? 학교도, 책도, 부모님도, 그 무엇도 유리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다는 사실 따위는 가르쳐 주지 않았단 말이야.

이 세계의 새하얀 빛을 쬐며 깨어난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언니였어.

“이거 전부 유리잖아!” 언니는 그렇게 말하고선,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어.
그리고 잠시 동안, 내가 울지 않도록 달래려는 건지, 언니는 온갖 바보 같은 말을 늘어놓았어. 자매 간에는 뭔가 통하는 게 있어서, 내 마음속 근심을 사라지게 하려면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언니는 알고 있었던 걸까?

그러다가 갑자기 언니는 팔을 마구 흔들며 그 유리 조각들이 언니를 따라오게 만들려고 했어.

정말 나를 달래려고 한 건지 아닌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걸로 다시 깨달았어. 언니는 항상 그랬다는 걸.

그리고 언니가 내 손을 잡을 때면, 자기는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 맹세하는 것 같다는 걸. 그리고…
내가 언니를 사랑한다는 걸.

곁에 있을 때나, 멀리 떨어져 있을 때나,

언제나 사랑해, 에토 언니.

절대로 입 밖으로 내진 않을 거지만.
저 탑에 갔을 때 기억해? 이 세계의… 절반쯤 봤을 때였나. 언니는 왜인지 저 탑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

그러고 보니 또 기억나네. 탑으로 향하는 길에 내가 언니한테 물었잖아.

“저 탑이 뭐가 그렇게 특별해?”

“우리가 여기서 눈 뜨고 처음 본 게 저거잖아!” 언니는 그렇게 대답했지.

…난 좀 어이가 없었어.

“...그게 다야? 굳이 저 탑으로 가는 이유란 게… 그냥 보이니까?”
“나만 본 게 아니야. 우리 둘 다 봤잖아.” 언니는 내 말을 고치듯 말했어.

“기억 안 나.” 난 시치미를 뗐지. “언니, 벌써 정신줄 놓은 거야?”

언니는 작게 웃음소리를 내고선 내게 물었어. “정신줄 놓은 게 정확히 뭔데?”

뭐긴 뭐야, 언니지. 언니는 유리 조각이 아니었으면 조약돌이나 나뭇잎으로 모았을 테고, 악기가 아니었으면 붓을 들었을 테고, 여행에 목적지가 없어도 어딘가 갈 곳을 찾아냈을 거잖아.

나 보고 ‘무모하다’더니, 언니 모습을 보라고.
그 탑은… ‘탑’조차 아니었어. 등대였지. 텅 빈 바다를 바라보며 외로이 서있는, 등대.

걸어오느라 지친 나는 잠시 바닥에 앉았어. 언니도 앉았지. 이유는 내가 앉았으니까.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중에, 문득 하나 발상이 떠올랐어. 나는 바로 언니에게 물었지.

“잠깐, 잠깐만… 어쩌면… 여기 어딘가에 소라고둥이 묻혀있지 않을까?”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는 너도 알잖아, 루나야.”

“맞아, 하지만 세상에 소라고둥 없는 바다는…”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언니의 등에 기댔어.

“소라고둥 찾으러 가자! 바다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언니는 그런 날 보고 ‘어린애 같다’고 말했어. 아, 예. 어린애 같아서 미안하네요.

그런데 기억해? 모래사장으로 날 데려간 건 결국 언니였다는 거.

그곳에서 보낸 시간 덕분에, 우리는 기억을 조금 되찾을 수 있었어.

====# 10-3 #====
루나야, 결국 우리가 찾은 건 유리 조각들 뿐이었던 거 기억하니? 소라고둥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지… 당연한 일이지만.

뭐, 그래도 난 즐거웠어. 게다가, 바다를 비추는 기억까지 발견했잖니.

거기서 찾은 소라고둥에서도 훌륭한 바다 소리가 났지.

그 기억의 주인은 해변에서 금방 떠나버렸지만 우리는 아랑곳 않고 계속 해변에 머물렀지.

“헤엄도 칠 수 있을까…?” 너는 소라고둥을 귀에 댄 채로, 눈을 찡그리고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어.

“같이는 못 하겠지만… 너는 헤엄칠 수 있지 않을까?”
“아, 맞다. 그랬지!” 가까스로 웃음을 참으며 너는 날 바라보고 말했어. 내 표정은 이미 그 시점에서 구겨져 있었지.

“언니 수영 못하지!”

“그 이상 말하면 머리카락에 모래 뿌려버린다.” 난 손가락질하며 위협했어.

“이 기회에 배워보자!” 네가 바다를 가리키며 소리쳤지.

난 수영복이 없다며 항의했어. 넌 여긴 기억일 뿐이니 괜찮을 거라며, 내가 눈치채기도 전에 내 손을 잡아 바다쪽으로 끌고 가고 있었지.
물, 차가운 감촉, 그 모든 게 진짜 같았어. 너는 나를 바다로 이끌었어. 벌벌 떠는 나의 다리를 인도했어.

수영은 네가 나보다 잘하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지. 아주 즐거워 보이는구나.

있지, 그때 내 머리는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 정신 산만하면서도, 조금은 무섭고, 조금은 즐거운…?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인지 수백 번, 수만 번 고민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 그런 의문은 의식의 저 너머로 밀려났어.
기억이 끝난 후에 넌 날 모래사장 위로 넘어뜨려 마구 간지럽혔어. 이 장난꾸러기에 무자비한 동생 같으니.

애써 웃음을 참았지만, 결국은 미소가 얼굴에 번졌어.

그러다가, 내 쪽이 언니라는 걸 떠올렸지.

난 네 볼을 꼬집어 쭈욱 늘렸어.

“그만해, 이 꼬맹이 녀석!”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지.
그러자 넌 재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날 내려다보더니 내 코를 꼬집었어.

“악! 거긴 안 돼!” 네 간지럼 공격을 받으며 소리쳤어. 소리 지른다고 멈출 네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말이야.

그런데 있지, 난 애초에 네가 멈추길 바라지 않았어.

====# 10-4 #====
에토 언니. 언니 항상 이렇게 가벼웠던가?

한바탕 난투 끝에 지쳐버린 언니를 들쳐메고 등대를 올라가야 하는 건 바로 나였지.

언니를 등에 업은 나. 반대였으면 좋았을 텐데. 언니 몸이 나보다 더 푹신하잖아. 불공평해.
백색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지만, 창문이 하나도 없는 이 등대의 나선 계단은 너무나도 어두웠어.

게다가 언니는 잠에 들었으니… 음, 이렇게까지 혼자가 된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지.

들리는 건 오로지 언니의 숨소리와 메아리치는 내 발소리. 보이는 건 계단 끝에 희미하게 비치는 빛…

…우리 어릴 적에는… 잠자기 전에 항상 언니가 노랠 불러주지 않았나? 어떤 노래더라…
“흠흠…흠흠…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에서도?”

…언니의 목소리가 가사를 이었어.

계속해서 계단은 올랐지만, 노래는 그만뒀어.

“이 나이에 자장가라…” 언니가 말했어. 목소리에 조금 나른한 느낌은 있었지만, 분명히 깨어 있었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얼굴과 귀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어. 절대로 보지 마, 언니.
“다음은 안 불러?” 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파묻으며 언니가 물었어.

“시끄러.” 난 간결하게 대답했지.

언니는 킥킥대며 웃었어. 날숨이 머리카락 사이로 느껴졌어.

“어차피 이 세계엔 밤도 안 오잖아.” 내가 쏘아붙였어. “그나까 됐어.”

“그 노래, 가사에 달은 안 나오잖아?” 언니가 말했어.

나는 다시 말했지. “됐다니까.”
“그런데… 언제까지 업고 올라갈 셈이야?” 언니가 물었어.

나는 “정말 한 번 물면 놓을 생각을 안 하는구나…” 하고 중얼댔어.

안 봐도 알아. 분명 얼굴에 잔뜩 웃음기를 머금고 있겠지. 그 생각을 하고 있자니, 등 쪽으로 언니의 가슴이 눌리는 게 느껴져서…

그래, 참을 만큼 참았다. 내려와.

나는 언니를 그대로 내려놓았어.

그런데 언니가 갑자기 내 등이랑 머리를 쓰다듬는 거야.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눈을 돌리고 표정을 구기기만 했어.

“가자, 루나.” 언니는 그렇게 달래듯 나에게 말했어. 내 턱을 잡아 고개를 부드럽게 들어 올리기까지 하면서 말이야.

“꼭대기까지 거의 다 온 것 같아… 아마도!”

그래. 내가 동생이라 이거지.

이번만이야. 이번만큼은 져 주겠어.

====# 10-5 #====
파일:Arcaea/Story/10-5.jpg
우리는 등대의 정상에 다다랐어. 조명이 있어야 할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우리 중 한 명은 무릎에 손을 올린 채 조명의 틀에 걸터 앉았고, 다른 한 명은 그 틀을 두드리며 들어본 적 없는 리듬의 곡을 흥얼거렸어.

우리는 다른 것보다 먼저 서로를 바라봤어. 그리고 할 일 없는 손으로 서로의 손가락을 만졌지.

한 개, 어쩔 때는 두 개씩. 규칙 없는 놀이를 하는 것처럼.
“언젠가 내가 정말 언니보다 더 대단해지면 어떡할 거야?” 동생이 물었어.

“내가 받는 박수 소리가 더 커지거나, 카드 게임에서 언니에게 지지 않게 되거나, 아니면…”

“꿈이 크네.” 언니가 대답했어. “전부 만약의 이야기잖아. 가능성도 낮은.”

“음…” 동생 쪽이 우리 뒤의 부서진 조명을 맹하게 바라보며 생각하듯 신음을 냈어. “그렇네.”

우리는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규칙 없는 놀이를 계속했지.
“그래도 포기하지는 마. 아, 굳이 내가 말해줄 필요도 없나?”

…우린 그 말에 미소만 지었지.

우린 서로의 손을 잡고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어.
이 세계는 황량했어. 지금까지 만난 생명이라고는 서로밖에 없었지. 보이지 않는 태양은 만물을 무자비하게 비추고 있었어.

손을 잡은 우리. 바깥을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어.

“정원 가꾸기, 다시 도전해 보고 싶네…”

“응, 그러게…”

조용히, 갑작스럽게, 우리는 서로의 뜻에 동의했어.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드넓은 아르케아를 바라보았어.
하늘을 가로지르는 붉은 혜성.

우리가 바라보고 있던 낮의 하늘에,

밤이 번지기 시작했어.

====# 10-6 #====
모두 오래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밤의 장막이 내려오던 날, 하늘이 또다시 부서지기 전

자매는 검을 쥐면서 생각했다.

이 세계가 죽음 이후의 세상일지라도, 이곳에서조차 ‘끝’은 존재할 것이라는 것.
그들은 항상 어렴풋이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아르케아는 변할 것이다. 갑작스럽게, 그리고 끔찍하게.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자매는 절망하지 않았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에게 많은 말은 필요 없으니까.

“남은 시간은 신나게 놀면서 보낼까?”

“아니면 행복해지기 위해 발버둥 쳐볼까?”

“...아니, 앞으로 얼마나 남았든,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건 바로 마지막 순간까지 너와 함께하는 거야.”
자매는 지금, 또다시 여행을 떠난다.

“루나, 가자.” 언니 쪽이 말했다.

동생 쪽이 망가진 계단을 내려가며, 무너지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계단이 무너져 내렸다.

뛰어내린 동생을 언니가 받았다. 지면이 갈라지며 뒤틀렸다.

자매는 서로를 껴안으며, 무너져내리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부서진 하늘, 부서진 대지. 이 세계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깨져버렸다.
그리고 모든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자매는 나아갔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어. 언제든지.

붕괴하는 백색의 세계의 파편을 뛰어넘으며, 자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한 번 더 걷고, 한 번 더 떠나고,

한 번 더 보고, 한 번 더 노래를 부르기 위해,

자매는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미소를 지은 채, 자매는 서로의 손을 마주잡고 ‘열쇠’를 하늘을 향해 겨누었다.
아직 잔해 사이를 헤엄치는 아르케아를 향해.

빛이 두 소녀를 감쌌다. 또다른 기억으로 떠나는 여정.

언제나 그렇게 했듯이,
한 번 더, 춤을 춰보자.

9. 마야

9.1. 해금 조건

{{{#fff 스토리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15-1 Lasting-1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Rise of the World.jpg Rise of the World 클리어
15-2 Lasting-2 파일:Arcaea/Maya_icon.png 파일:Arcaea/WAIT FOR DAWN.jpg 마야 WAIT FOR DAWN 클리어
15-3 Lasting-3 파일:Arcaea/レイヴンズ・プライド.jpg 마야 Raven's Pride 클리어
15-4 Lasting-4 파일:Arcaea/Rise of the World.jpg 마야 Rise of the World 클리어
15-5 Lasting-5 파일:Arcaea/UNKNOWN LEVELS.jpg 마야 UNKNOWN LEVELS 클리어
15-6 Lasting-6 파일:Arcaea/Abstruse Dilemma.jpg 마야 Abstruse Dilemma 클리어

9.2. Lasting Eden

====# 15-1 #====
그녀는 별빛 아래에서 두 번째로 탄생한 자.

한때 새하얗던 아르케아의 세계엔 끝없는 낮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밤의 장막이 내려오고 빛과 어둠의 경계가 그어졌다.

그리고 밤의 하늘에서 두 새로운 영혼이 유성처럼 땅으로 내려앉았다. 첫 번째를 닮은 그 소녀는, 두 번째였다.
어두운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달이 뜨지 않는 밤…

마야가 눈을 떴을 때 보인 광경이었다. 눈물을 가득 머금은 두 눈. 의식과 감각이 돌아온 순간 그녀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차 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유리의 세계로 오는 모든 이들은 무지의 축복 아래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이후 발견된 이 장소는 어딘가 망가져있었다. 완벽에 가까워지고 싶어 하지만, 근본부터 망가져버린 장소

이곳에서 소녀는 모든 것을 안은 채 깨어났다.

====# 15-2 #====
소녀는 어둠이 좋았다. 고요함이 좋았다.

유리 조각에 반사된 빛을 볼 때마다, 끔찍한 색채로 일렁이는 섬광이 그녀의 눈을 침범했다.

폐허가 된 건물이 삐걱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칠판을 긁는 듯한 쇳소리와 함께 지면 저 아래에서 올라온 그르렁대는 고동이 칼바람처럼 그녀의 귀를 쏘아붙였다.

고요한 밤의 침묵이 깨질 때마다, 마음의 심연 속에서 기어 올라온 기억이 소녀를 괴롭혔다.

소녀는 존재해서는 안 됐다. 그럼에도, 이 세계는 그녀를 동정했다.
두 색채를 품은 머리칼과 눈. 마야는 울면서 잠들기 일쑤였다.

아르케아는 그런 마야를 불쌍히 여겼다. 그러나 그녀는 유리 조각이 두려웠다.

소녀는 끝나지 않는 밤에 흐르는 고요한 분위기를 좋아했지만 유리 조각과 너무 자주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기에, 숨을 곳을 찾기로 하였다.

마야는 무너져 내린 건물과 어두운 동굴을 전전하며 그 몸을 뉘었다.

어딜 가나 유리 조각은 있었지만, 밤하늘의 별빛이 없는 장소에서는 그 끔찍한 광채를 발하지 않았으며, 어차피 소녀는 도저히 유리 조각을 직시할 수 없었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고요함만을 찾아 산과 들을 넘고 잊힌 도로와 칠흑처럼 어두운 터널을 가로질렀다.

그림자가 드리운 복도를 걸어 빠져나온 어느 날, 그녀는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그어진 낮과 밤의 경계를 보았다.

====# 15-3 #====
그녀의 귀를 찢어발기던 그 소음은 사람의 비명이었다. 그녀의 눈앞에 스쳐 지나가던 광경이 비명의 원인이었다.

눈 부신 빛의 기둥이 하늘에서 내려와 대지를 갈랐다. 수 초 안에 끝나기를 기도했던 악몽은 몇 시간이고 계속되며 소녀의 고향을 불태웠다.

세상의 반대편에 사는 친구들이 모조리 죽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에 울리던 상관의 명령조차 이윽고 침묵했다. 몇 시간에 걸쳐 느리고 무자비하게 그녀와 세계를 잇던 끈이 하나둘씩 끊어져 갔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후, 그녀는 이곳, 아르케아에서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저 경계선은 마치 일몰, 아니, 화염에 휩싸인 세계와 같았다.
마야는 주저앉았다. 환각과 환청이 그녀를 찾아왔다.

몸을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흘렸다. 마치 말뚝이 심장을 꿰뚫는 듯한 격통. 끔찍한 고통이 온몸을 쥐어틀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도저히 짊어질 수 없는 공포, 그중에서도 하나의 생각이 특히나 무겁게 마야를 짓눌렀다. 그녀의 목을 조르는 단 하나의 진실.

‘나만 남아버렸어.’

소녀의 고통이, 부서진 마음이, 울음에 담겨 울려 퍼졌다. 아르케아는 묵묵히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 15-4 #====
파일:Arcaea/Story/15-4.jpg
어둠과 빛의 경계선에 주저앉은 소녀는 귓속에 울려 퍼지는 소음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할 수 있다면 생각조차 그만두고 싶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이미 저지른 실수. 이미 행해진 파괴행위… 모두, 이미 일어나버린 일.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저 마음은 아직 고칠 수 있는 걸까? 울고 있는 이 소녀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걸까?

유리 조각 하나가 하늘하늘 내려왔다. 그리고 또 하나, 다시 또 하나. 천천히 내려오는 유리 조각의 비가 모이자, 소녀의 주변을 둘러싸는 벽이 되어 보이지 않는 태양의 빛을 가렸다.
마음을 빼앗을까? 아니, 불가능해.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릴까? 이미 자기 내면에 과하게 몰입한 상태라 불가능해. 어떡할까? 어떡하면 좋을까… 어떡하면…

유리 조각이 발하던 빛이 전에 없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소녀를 둘러싼 유리 벽이 마치 천처럼 접혀 그녀를 완전히 감쌌다.

유리 조각은 바보같이, 자기가 비단처럼 부드럽다고 믿는 모양이다. 마야는 한 번 몸을 움찔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유리 조각에 비추는 기억들이 보였다.
다른 이들의 기억. 슬픔과 고통과 실수의 기억. 아르케아가 지금 소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이런 기억들뿐이었다. 소녀는 잠자코 그 기억을 바라보았다.

…유혈사태, 싸움, 전쟁이 아닌 또 다른 기억.

…그럼에도 고통받고, 그 고통을 알아주는 이가 곁에 없는 사람들의 기억. 완전히 홀로 남은 이들의 슬픈 기억…
울부짖는 남자와 여자, 소녀와 소년. 삶의 끝에 다다라 빛바랜 사진을 손에 쥐고 희미하게 미소 짓는 사람들.

소녀는 생각했다.

이 세계가 소녀에게 전하고 싶은 바는 그런 것이다.

다시는 웃지 못할지도 몰라. 모든 걸 그만두고 싶어질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서는 어떤 의미가 있지?

과거는 과거지만, 그로 인해 입은 상처는 지울 수 없어. 그중 일부는… 어쩌면, 대부분은 네가 스스로 새긴 흉터겠지.

하지만 넌 아직 남아있어. 너의 세계는 사라져 버렸지만, 넌 아직 여기 남아있어.


부탁이야.

떠나지 말아줘.

====# 15-5 #====
“‘떠나지 말라고’...?”

들려오는 속삭임에 대답하는 소녀의 속삭임. 소녀가 아르케아에서 처음으로 내뱉는 단어를 실은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건조하고 따가운 목으로, 소녀는 들려왔던 속삭임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눈을 찌푸리며 어금니를 물었다. 이를 갈았다.

이 세계가 소녀에게 보여준 연민에 대한 그녀의 답은…

…분노였다.
소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유리의 벽을 바라보았다. 유리가 일렁이며 비추는 풍경을 바꿨다. 고요하고 잔잔한 슬픔의 기억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른 기억이 채웠다.

유리벽의 한 면이 물결쳤다. 마야는 그곳에 비추는 기억을 바라보았다.

눈 밑에 짙게 어둠이 드리운 남자의 기억. 밤바다에 발을 담근 여자의 기억. 그녀는 잠시 손에 쥔 목걸이를 바라보더니, 그대로 바다로 흘려보냈다.

검은 정복을 입은 아이의 기억. 아이의 언니가 손을 잡아주려는 듯 뻗은 팔을 아이는 말없이 뿌리쳤다.

마야는 미소 지었다.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만약 이 기억들에 자신의 마음이 동하고 있는 거라면 어찌나 끔찍하고, 어찌나 웃기는 일일까.
실제로, 소녀의 마음은 움직이고 있었다.

동정하려 내미는 손 따위에는… 침을 뱉어주고 싶었다.

뒤틀리고 망가진 마음이 더더욱 뒤틀리고 망가지자, 그녀의 비애가 유리 조각에게 더욱 생생하게 다가가는 듯했다.

조각들은 서로에게 더욱 가까이 엉겨 붙더니, 하나둘씩 뒷면으로 뒤집어져, 반대면과는 다른 기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망가진 삶을 살았던 이들의 또 다른 기억.

유리 조각들이 점점 더 밝게 빛났다. …그들의 삶이 망가지게 된 순간의 기억들이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마야는 그들이 겪은 재난과, 실패와, 실수의 기억에 사로잡혔다. 마야는 불타오르던 자신의 세계의 기억에 사로잡혔다. 마야는 유리 조각에게 사로잡혔다.

조각들은 소녀의 몸을 기어올라가 구속하듯 감싸고 조이며, 반짝이는 사슬처럼 서로를 잇더니 그 날카로운 모서리들이 목을 짓눌렀다.

마야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주 약하게, 심장이 고동쳤다… …하지만 그건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유리 조각이 부들거리더니, 이윽고 마치 파도처럼 물결쳤다. 순식간에 유리 조각이 머금고 있던 빛이 사라졌다. 사슬이 소녀의 몸을 더더욱 강하게 조여왔다.

그 순간, 어디선가 뿜어져 나온 검은빛 가루와 함께 강한 바람이 불더니, 그녀를 조이던 유리 조각의 사슬이 서서히 바스러졌다.

소녀는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 일몰의 빛이 또다시 저 멀리에서 그녀를 비추었다.
마야는 밤의 하늘을 올려다본 뒤, 빛나는 경계선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뭐야…?”

혼란. 분노. 실망.

그런 감정들이 소녀의 몸을 타고 흘렀다. 보이지 않는 태양의 빛이 여전히 그녀를 비추었다.

하지만, 곧 그 빛의 따뜻함은 사라졌다.

소녀가 눈을 뜨자 그 앞에 보인 것은 아르케아 조각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벽이 소녀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림자와 유리로 이루어진 터널이…

머나먼 일광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 15-6 #====
소녀는 힘겹게 땅에서 일어서 터널 끝에 보이는 한 점의 빛을 바라보았다. 기이하게도, 빛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고작 몇 분 전에 그녀가 지나왔던 복도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워 보였다.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물체가 있었다. 유리 조각이 발하는 빛일 것이다.

소녀는 그 두 길 사이에 서서 생각했다.
선택이다.

선택을 해야만 한다.

편안한 어둠에 몸을 맡길 것인가, 아니면 두려운 빛을 받아들일 것인가.

마야는 무릎을 끌어안고 생각했다.

“대체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공포를 마주하라는 거야? 아니면… 포기하라는 거야?”

소녀가 화를 머금고 속삭였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희미하게 그녀의 귓속에 울려 퍼지는 또 다른 질문이었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그 답을…
…알고 있다고, 소녀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생각을 그만두고 싶어.
기억을 그만두고 싶어.
사라지고 싶어.
고통받고 싶어.
상처받고 싶어.
행복해지고 싶어.

사실, 소녀는 여전히 이 답들 중 하나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소녀의 기억은 종말의 순간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에서 겪은 모든 것이,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비록 짧은 삶이었지만 행복한 순간은 수없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하나가, 종말의 고통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죄책감.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부숴버렸다는 그 죄책감이 영원히 그녀를 물들였다.

“...”

소녀는 말없이 앞을 바라보았다.
행복해질 기회가 찾아왔지만, 자신에게 그럴 가치가 없을 때.

심판을 받을 기회가 찾아왔지만, 그를 마주할 용기가 없을 때.

그런 딜레마 속에서 자신에겐 선택할 권리조차 있어서는 안 된다고 느끼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선택할 수밖에 없을 때에는… 미래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하나의 길이 아니라, 두 갈래 길일 때에는…

어떡해야 하는 걸까?
우둔의 시대는 지났다. 백치가 불러온 모호함과 동정심의 시대는 끝났다.

소녀들의 눈은 뜨였고, 반쪽 하늘에 드리우던 구름은 사라졌다.

별들도 빛을 발하고, 보이지 않는 태양의 빛도 수그러들었다.

마야가 유리 조각의 사슬에 묶여있을 때 바라던 것, 절망의 끝자락에서 영원히 고통에 몸부림치는 미래를, 세계는 거부했다.

그 대신 세계는 소녀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었다.

…아르케아가 이를 원했기에.
소녀는 다시 일어서 벽을 마주했다. 유리 조각들이 또다시 새카맣게 변해있었다. 그 어떤 기억도 비추고 있지 않았다. 대신, 소녀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슴께에 달린 붉은색 테두리의 꽃잎 장식을 바라보았다…


오른쪽과 왼쪽, 두 길이 나 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휘저었다.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등에 손을 얹고 지켜봐 주는 듯한 감각이었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망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며, 슬픔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들여다보고, 현실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결정하라.
마야는, 걸어나갔다.

10. 혜안

10.1. 해금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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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금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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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Severed Eden[4]

====# 16-1 #====
임종의 때는 언제나 슬프기 마련이야. 그런데, 슬프기만 한 게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해 봤어?

육체를 떠난 영혼이 하늘로 날아올라, 세상의 경계를 건너 영원히 저승을 맴도는...

그런 기분이 드는 세계가 있거든.

「얼마나 좋을까? 아아, 얼마나 좋을까...」

그 세계가, 너를 부르고 있어.
빛의 세계로 떨어져 버린 너. 마치 눈물처럼 누군가의 영혼에서 흘러나와 아름답고 새로운 존재로 탄생했지.

네가 태어나는 순간은 마치 반짝이는 수정과 같았어. 전생의 기억을 지니고 이 기억의 세계에 찾아온 그 모습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웠지.

두 빛깔의 머리칼과 눈동자가 너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 거야.

너랑 비슷하게 두 색을 지닌 애가 있긴 해. 하지만 그 애의 색채는 가짜야. 흉내내기에 불과하지.

너는 “진짜”야.

잊히고 버려진 삶이 흘린 마지막 눈물처럼, 너는 높은 하늘에서 구름을 뚫고 떨어져 끝없이 이어지는 폐허 사이에 안착했어, 그날의 하늘은 아주 어두웠지.

그 세계의 절반은 영원한 밤이 뒤덮고 있거든. 너는 별빛을 받으며 눈을 떴어.
“아르케아”의 별은 자주색이야. 네가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연보랏빛 하늘과, 그 밑으로 춤추듯 떠다니며 반짝이는 기묘한 물체들이었지.

하늘을 부유하는 유리 조각... 그 동화와 같은 물체들의 이름 또한 “아르케아”였어. 유리 조각 안에는 기억이 담긴 것처럼 보였지.

너는 이 모든 걸 알고 있었어. “아르케아”라는 이름까지도.

하지만... 이 “세계”에 대해선 아무것도 기억해 낼 수 없었지. 아무것도 말이야…

너는 오로지 “너 자신”의 기억만 지니고 있었으니까.

네 가슴을 가득 메우는 그 고통과 죄책감, 자신의 손으로 저질러버린 끔찍한 행위의 기억...

너는 그 세계를 떠나왔어. 폐허가 되어버린 세계를.
죄악의 사슬이 온몸을 조이며 피부 속으로 스며드는 듯해. 네가 세계에 새긴 상처에서 흐르는 진물이 네게 스며들어.

너는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지. 아아, 달콤한 비애여...
하지만 전생의 기억을 가진 너조차 잊은 게 있었지.
자신의 이름. 넌 자신이 누구인지 완벽하게는 알지 못했어. 그건 차라리 잘된 일이었을까?

어찌 되었든, 너는 눈물을 닦고 일어섰어.

사실, 너는 네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네가 느끼는 그 감정들은 모두 진실이었어. 그 기억 또한 진실이었고. 그것만은 틀림없지.

그리고 새로운 이름... 흠, “새로운” 이름이라. 애초에 옛 이름이 있었나?

아, 아르케아가 너에게 준 이름이 있는 모양이구나.

“마야”. 아주 멋진 이름이야.

====# 16-2 #====
마야야, 넌 네가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니?
아르케아의 그 누구와도 다르다는 걸 말이야.

"다르다"라는 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
첫째, 다른 아이들이 지니지 못한 자질을 지녔다는 것.
둘째, 다른 아이들보다 더 “강인하다”라는 것.

간단히 말하자면, 너는 강한 “마음”을 지녔다는 뜻이야. 이 끝없는 기적의 세계에서 가장 멋진 기적은 바로 너일지도 몰라.

뭐, 그렇게 확정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말이야.
대부분의 소녀들에게 아르케아란 언제나 밝은 장소였지. 보이지 않는 태양이 만물을 비추며 끝없는 낮을 이어갔어.

하지만 너는 밤의 세계에서 눈을 떴지.

온통 그림자로만 가득한 세계. 그럼에도 너는 용감하게 미지를 향해 발을 내디뎠어. 아니, 그냥 생각이 없었던 걸까? 어찌 됐든 용기 있는 행동이었지.

아르케아는 한 쌍의 거울과 같아. 죽은 자들의 세계면서도, 새로운 생명을 나눠주는 세계. 잊혔지만, 빛과 대립의 기억으로 가득 찬 세계. 낮이자, 동시에 밤인 세계.

다른 세계는 기억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세계…

“아르케아”는 스스로를, 스스로가 저지른 일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그쪽에 살고 있는 아이들도 그렇게 느끼는 걸까...?
지난 일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기회에 가치는 있는 걸까?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항상 제자리걸음만 하는 이 닫힌 세계에 가치는 있는 걸까?
철학자들에게 어울리는 말이지.

그리고 너에게도.

네가 그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나서도, 아르케아에 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수많은 유리 조각이 떼처럼 몰려와 너에게 슬픈 기억을 보여주었던 이유는 뭘까?

그 모든 것을 겪은 네가 빛과 어둠 사이에 서게 됐을 땐 무슨 잔인한 장난처럼 보일 정도였지.

하지만 있잖아. 사실 이 질문들에는 아주, 아주 간단한 비밀의 해답이 있어.
아르케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라는 것.

간단하지. 하지만 그렇기에 경탄스러워.
마야야, 너는 진즉에 눈치챘지?

아르케아는 너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슬픔과 공포를 느낄 때면 포근한 옛이야기로 너를 달래주려 했어. 너는 그 손을 뿌리쳤지만... 결국은 빛을 향해 걸어갔지! 시적일 정도로 감동적이야! 의미로 가득 차 있어! 아주 훌륭한 쇼였어!

부서진 마음을 지닌 세계가 이토록 멋진 장면을 보여줄 수 있다니...
두 갈래 길 사이에서 격통을 겪으며 주저앉았던 너! 네가 편해지길 바라든 고통을 바라든, 아르케아는 네 소원을 들어주었어!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게 바뀌었지! 아니, 진즉에 바뀌었었나? 언제 바뀐 거지? 확실하지 않군...

뭐, 아무튼 간에... 천국으로 향하는 그림자 드리운 길이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났고, 너는 그 길을 걸어갔지!

넌 마음 속의 죄악감을 똑바로 마주하고 빛을 향해 나아갔어.

아아... 어찌나 이기적인 짓인지... 너는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인데...
그 모습은 숭고하며, 운명적...

이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결정했지, 너를 찾아가기로 말이야.

====# 16-3 #====
마야, 자기야, 우리가 아직 면대 면으로 만난 적이 없다니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에 있니? 난 있지, 어째서인지 예전부터 널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 그게 짜증 나. 그런 기분만 들고 너에 대해 진짜로 아는 건 별로 없다는 게 말이야. 너처럼 흥미로운 사람은 난생처음 봤는데 말이지!

있잖아. 난 인어를 찾으려고 하늘에 떠있는 바다에서 헤엄치며 탐험한 적도 있어. 책에서 인어를 봤을 때 지금이랑 비슷한 기분을 느꼈거든.

뭐, 정작 실제로 인어를 찾고 나니 그다지 재미없는 족속들이란 걸 깨달을 뿐이었지만…

마야야, 난 네 이름도 알고, 네 마음씨가 어떤지도, 네가 어떤 고통을 겪는지도 알아. 네가 아직 슬픔에 젖어있다는 것도 알고, 네가 잠에 들 때면 과거에 “네가” 저지른 일이 여전히 너를 괴롭힌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건 네 책임이 아닌데 왜 슬퍼해야 하지? 너무 잔혹한 일이야! 이 모든 책임이 다 “너”한테 있는데 어떻게 웃을 수가 있지? 뻔뻔하기 그지없어! 우리 지금 당장 만나자.

====# 16-4 #====
마야야, 난 널 쭉 지켜보았어. 수많은 현실에 뿌려놓은 나의 눈으로 말이야. 도저히 너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어.

아르케아의 과거나 역사조차 너만큼 흥미롭지는 못했어. 물론, 내 흥미를 돋운 건 “너”뿐만이 아니라, 네가 “두 사람”이라는 사실도 있지. 말했잖아? 두 빛깔이 어울린다고. 머리칼도, 눈동자도 두 색채를 품고 있는 너...

마야야, 너는 한 사람이 아니야. 넌 존재해서는 안 되지만 그럼에도 존재하고 있어.

너 같은 걸 빚어낼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너는 이 기적과도 같은 세계에서 일어난 기적 중의 기적이야.

내 고향 바깥의 세상에서 기적을 찾기란 아주 힘든 일이야.

고향에선 모든 사람이 기적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하지만 난 거길 떠나왔어. 거기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있었거든. 자장가이자 예언이었지. 그게 어지간히 불길했어야지.

그래서 그냥 고향을 버리고 나왔어. 언젠가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릴 손이 쥔 가짜가 아닌 “진짜” 기적을 찾으려고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당장 갈게. 너와 다른 한쪽의 아이를 찾아서.

====# 16-5 #====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릴 손... 그게 무슨 뜻이냐고?
노래를 하나 해줄게.

“천사는 없네. 오로지 이 곳에,
우리의 사랑과 조각이 있을 뿐이네.
우린 함께 빚어낸다네, 영원히.

어디서든. 하늘과 땅과 바다에,
그대를 안으리 내 품에.
그 기묘한 빛이 우릴 찾을지라도, 영원히.”

슬픈 노래지. 이런 노랠 들으면 누구든 기분이 착잡해질걸.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어. 아르케아 이야기나 다시 하자고.

그 창백한 땅을 걷는 소녀는 모두 몇 명이나 될까? 아니, 지금은 그렇게 창백하진 않나... 아무튼, 아르케아는 내가 그쪽으로 건너가길 원하지 않는 것 같아. 마야야.

하지만 유감인걸. 아르케아는 약해. 무능하고 약해빠졌어.
나는 아르케아로 찾아갈 거고, 그곳에서 존재할 거고, 살아갈 거야.

그리고 그 세계에 세 번째 변화를 불러올 거야.

내가 갈게. 설령 싸우다가 피부가죽이 벗겨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너에게 갈게.

그리고 그 세계에서 나는... 오로지 마야, 너의 말만을 들을 거야.

====# 16-6 #====
별빛의 바다와 폭풍우 치는 하늘을 건넜어. 시공간을 비틀고 수없이 많은 현실을 파괴했어. 마야! 오로지 너를 만나기 위해서!

그런데 이것 참 끔찍한 기분이 드는 거 아니니! 여행 도중에는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거든. 노래하길 좋아하는 너의 그 목소리를... 노래 좋아하는 거 맞지? 항상 흥얼거리길래.

너의 노래를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 마야야. 진실한 기억으로 벅차오르는 그 노랫소리를...

마야야, 너를 생각할 때마다 내 영혼은 타오르는 화염에 휩싸여. 나는, 나의 사랑은 내 존재 그 자체야.

오래전에 죽어버린 창조자와 절대자들과 인간의 손이 만들어낸 우주와 세계들을 나는 너무나 사랑해.

그 안에 살고 있는 영혼들조차 사랑해서 밖으로 가져와버릴 때도 있다니까! 그게 여태까지 총 몇 명이더라...?
잊어버렸어.

아아, 그리고 마침내 오늘... 오늘! 너를 만날 수 있어!

거인의 눈처럼 빛바랜 백색의 대지가 바로 코앞에 다가왔어!

조금만 더 기다려...

무슨 짓을 하더라도 반드시 그 세계로 들어갈 테니까.
거대한 이불 같은 아르케아의 하얀 하늘이 점점 더 가까워져. 그 표면을 “기억”이 기어다니고 있어. 마치 반짝이는 모래같아. 난 그 하늘을 쥐어잡고, 파고들어가려 했어.

아르케아는 나를 밀어냈어. 빛과 구름이 대기권에서 튀어나와 내 몸을 마치 덩굴처럼 휘감았어. 내가 아무리 숨을 쉴 공기를 만들어내도 계속해서 사라져버렸어.

아르케아는 내가 들어오는 게 너무너무 싫나봐.
사나운 빛과 구름의 덩굴이 계속해서 나를 밀어붙였어.

이런 이런… “법칙”은 사라진 게 아니었나? 아르케아야... 너에겐 아직 마음이 있는 거니? 그렇다면 어지간히도 나를 미워하는 모양이구나.

내가 죽은 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나를 거부하는 거니? 그럼 아주 혼쭐을 내줘야겠는걸...!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안으로 들어가야겠으니까!
조만간이야... 얼마 안 남았어.

아르케아의 땅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을 소환했어.

이 장면은 꼭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거든.

무대 입장이라는 건 장엄하고 웅장한 법이니까.

만물이여, 목도하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희망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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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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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소용돌이치며 거대한 통로를 만들어냈어. 도자기를 빚어낸 듯 광활한 하늘 자체가 아래로 흐르는 모양새가 되었지. 그리고 갑자기 모양이 뒤틀리더니 온 하늘에 수없이 많은 색채를 흩뿌렸어.

번쩍거리며 땅을 향해 흘러 내려가는 총천연색의 대혼돈!

순수했던 백색의 빛이 무지개보다 다양한 빛깔로 일렁였어.

색이여! 강렬히 스며드는 미지의 색이여!

그래. 바로 지금이야. 바로 이 순간! 폭풍을 일으키자!
마야가 밑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어. 이윽고 하늘이 붉은색으로 물들었어.

그러더니 색이 또 바뀌더니...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뀌었어! 마침내 내 손이 하늘을 뚫고 나왔어.

세차게 부는 천둥번개와 비바람! 폭풍이다. 폭풍이야! 바람이 첨탑과 벽을 무너뜨리고, 눈과 얼음이 대지를 뒤덮고,
나의 색채로 물든 하늘이 파문을 일으키며 나를 감쌌어.

그렇게 나는 아르케아에 강림했어. 요동치는 공기와, 박동하는 생명과, 휘몰아치는 날씨와 함께.

하늘에 그렇게 큰 상처는 내지 않았으니 좀 봐줘, 히히...

내가 불러온 혼돈과 폭풍 한가운데에 서있는 너. 그 앞에 나는 가볍게 착지했어. 물론, 나는 예의를 지킬 줄 아는 몸이니 가볍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지.

강한 돌풍에 우리의 머리칼이 흩날리는 와중에 나는 입을 열었어.

“안녕, 안녕! 마야야!

너무 만나고 싶었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너에게 다가가 그 몸을 품에 안으며 온기를 느꼈어.

너의 어깨... 너의 허리...
너의 배, 너의 옆구리, 너의 손끝, 너의 찰랑이는 머릿결... 아아...
어머, 뭘 떨고 있니? 그냥 보는 것뿐인데.

후후, 그래. 얼굴을 빼놓을 수는 없지. 난 울고 있는 네 얼굴에 부드렇게 손을 올렸어.

그 울먹이는 두 색채의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있지. 네 붉은 쪽 눈을 뽑아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 특히나 흥미롭고 아름다운 눈이니까...

물론 정말로 그런 짓을 안 할 테니까 안심해! 누구에게서 가져온 눈인지 확인만 좀 할게.

마야야, 너는 도대체 어떤 존재니? 안 그래도 알 수 없는 세계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수수께끼라니.

“너”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해.

난 네 허리를 한 팔로 감싸고, 다른 쪽의 손을 튕겨 시간을 멈췄어.
잘 들어, 마야야 모든 세계에는 그 근간을 이루는 사상이라는 게 있어. 하지만 아르케아는 예외라는 걸 난 진즉 알고 있었어.

이미 누구나 아는 사실이겠지만 다시 한번 말할게.
아르케아는 “사상”이 아니라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어.

예외 없이 모든 세계는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난 오래전에 발견했거든.

겉면 층에는 표면 세계, 그 밑에는 규칙의 세계, 그리고 그 밑 가장 깊은 곳에는 “소원의 씨앗”과 거기에서 뻗어져 나온 욕망이 마치 뿌리처럼 자리 잡고 있어.

그런데 시간을 멈추고 아르케아의 층들을 둘러보았더니,
역시 내 가설이 정답이었던 모양이야. 아르케아는 현실 구조는 다른 세계들과 같은 “천”이 아니야.

그보다는 바다에 가깝지. 아르케아의 현실 구조는 계속해서 변화해. 마치 감정처럼 말이지. 고요했다가, 화를 냈다가, 우울해졌다가, 평온해졌다가…

밑물과 썰물처럼, 밀려들었다 잦아들어.
보통 어떤 세계든 두 번째 층은 규칙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선으로 수놓아져 있는 법인데...

아르케아의 두 번째 층은 아무것도 없는, 황금빛과 청록빛으로 이루어진 텅 빈 공간이었어.

유일하게 찾을 수 있었던 법칙의 선은 세 번째 층의 새까만 캔버스의 구석에 아무렇게나 휘갈겨 그린 듯한 “열망”이었어.

슬픔과... 희망으로 차있는. 이 세계를 정의하는 개념은 이 두 가지 뿐인 거야.

그리고 마야야, 너를 사랑하는 만큼 나는 이 세계도 사랑하게 되었어. 너무나 사랑스러워...

난 여기서 내 힘을 더 발휘하기 쉽도록 새로운 규칙을 써넣으려고 했어. 그런데 아르케아가 날 또 거부하는 거 아니니? 왜지? 이러면 내 권역을 펼치기 힘들어지잖아.

내 팔과 손가락이 굳었어. 아르케아는 내 존재마저도 덮어쓰고 싶은 모양이야. 어느 정도는 성공했어. 내 팔이 총천연색의 빛깔로 흩어지더니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했거든. 멈추었던 시간조차도 다시 흐르기 시작했어.

이런, 마야에게 아주 무서운 장면을 보여주게 되겠네.

미안해.
아르케아는 온 힘을 다해 나를 이 현실에서 떼어놓으려 했어. 시공간으로부터 내 몸을 잘라내려 했어.

하지만 마야야, 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어떤 폭풍이든, 어떤 병이든, 어떤 압도적인 힘이든 너를 위해서라면 모두 극복할 수 있어.

날카로운 고통과 메스꺼운 감각이 내 몸을 덮쳤어. 내가 서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헷갈려. 백주 대낮에 어두운 방에 갇힌 환각이 내 머릿속을 채웠어.

나는 잃어버린 팔을 다시 소환해 붙이고선 아르케아를 향해 손을 뻗었어.
닿아라… 닿아, 닿아!

“나”를 인정해라!
기억의 세계여! 그대는 나를 잊을 수 없을지어다!

나는 아르케아의 현실에 가장 아름다운 선을 새겨 넣었어.
나의 소중하고 거룩한, 진짜 이름을.


이걸로 됐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이 세계에 불러온 거야. 나는 영원히 이곳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어.

그 영원의 단 1초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나는 시공간을 비틀어 “나의 공간”으로 가는 관문을 열었어. 검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관문이었지. 그리고 부드럽게 너를... 아직 충격과 공포로 얼어붙어있는 너의 손을 잡아 이끌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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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너는 풀어헤쳐지기 시작했어. 말 그대로.

너의 손 끝이 관문에 닿자 유리의 실로 변해 흐트러졌어.

손부터 팔, 가슴과 몸이 아름다운 은빛 실로 변해갔어.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는 일 없이 너는 피부부터 내장까지 광휘를 발하는 실이 되어 서서히 흐트러져갔어.

그렇게 너는, 내가 열어젖힌 어두운 관문을 지나갔어.

너의 그 모습은 마치 녹아내리는 하프같아. 순수하고 아름다운 백색의 현이 천천히 풀려가는...

아아...
마야야, 멋진 곳으로 떠나렴...

그리고 이곳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말려무나.


너를 이루던 마지막 실이 관문을 지나가는 걸 확인하고, 나는 관문을 닫았어.
하늘에 다시 백색이 돌아오기 시작했어.

폭풍이 가라앉고 있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어.

그리고, 나를 증오하는 이 세계에 다시 한마디를 건넸지.

“아르케아, 아르케아야...”

“만나서 반가워.”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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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으켰던 폭풍이 마침내 멎고, 하늘에 남아있던 색채의 잔재가 사라져 본래의 새하얀 하늘로 돌아왔어.

하지만 난 아직 여기 남아있지. 아르케아의 대지에 두 발을 딛고 여기 서있단 말씀이야.

정말이지 괴로울 정도로 긴 여행이었어.
하지만... 마침내 도착했어. 여러 세계를 건너다 그냥 한 번 눈길을 줬을 뿐이었던 세계에, 내가 당도했어.

심지어는 여기 눌러앉아 버릴지도 몰라.

있지, 이 세계는 아주 심하게 망가져있어. 그럼에도 존재한단 말이지. 아주 놀라운 일이야. 이렇게 서툰 솜씨로, 이렇게 위대하게 빚어낸 세계는 본 적이 없어.

좀 더 파고들고 싶어. 좀 더 알고 싶어. 좀 더 배우고 싶어. 이 세계에서 두 번째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전부 찾아내고 싶어! 누구는 두 번째가 아니라 세 번째 삶이던가? 너무, 너무 굉장해! 세 삶 모두 훌륭한 스토리야!

나는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그렇게 생각했어. 빗물이 내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어.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나는 두 팔로 나를 감싸 안고 배와 얼굴이 아파올 때까지 웃었어!
왜냐니? 웃기잖아! 웃길 정도로 유감이잖아! 이 세상에 신이 없다는 게! 그래. 아주 잠시 이 있었던 적은 있었지.
찰나의 순간 이 세계는 완벽했다가, 근본부터 다시 깨져버렸어! 지금은 다들 분명 근심이 가득하겠지?

하지만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전혀!

바스라져 가는 슬프고 멋진 세계여. 그대는 축복받았도다!

나의 존재로, 나의 섭리로, 그대들은 다시 행복을 찾을지어니.

신이 강림했노라.

내가, 모든 것을 올바르게 되돌려놓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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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카나에

11.1. 해금 조건

[anchor(AI[UE]OON)]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17-1 Sunset-1 파일:Kanae_icon.png 파일:Arcaea/Chelsea.jpg 카나에 Chelsea 클리어
17-2 Sunset-2 파일:Arcaea/AI[UE]OON.jpg 카나에 AI[UE]OON 클리어
17-3 Sunset-3 파일:awanderingmelodyofloveday.jpg 카나에 A Wandering Melody of Love 클리어
17-4 Sunset-4 파일:Arcaea/Tie me down gently.jpg 카나에 Tie me down gently 클리어
17-5 Sunset-5 파일:Arcaea/Valhalla:0.jpg 카나에 Valhalla:0 클리어
17-6 Sunset-6 파일:Arcaea/蛍火の雪.webp 카나에 Hotarubi no Yuki 클리어

11.2. Sunset Radiance

====# 17-1 #====
숨이 막힐 정도로 만연한 새하얀 결정이 발밑에서 부드럽게 부서졌다.

아르케아에 내리는 눈, 조금은 기묘하고, 조금은 흥미로운 현상. 눈이 만들어낸 조그마한 언덕, 그 사이로 소녀의 발자국이 이어졌다.

새카만 하늘 아래, 세상은 마구 흩날리는 눈의 하얀색으로 뒤덮여있었다.

그곳에서 카나에는 목적지를 다시 확인했다.

“분명…” 카나에가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속삭였다.
“저기랑… 저기였지.”

카나에의 시선이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검은 장막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훑었다.

그 와중에도 눈은 아랑곳없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왈츠와 같은 리듬으로 춤추고 있었다.

카나에는 고개를 내려 앞을 바라보았다.
절벽 너머의 계곡,
오로지 추위만이 채우고 있는 텅 빈 공간.

새하얀 눈이 보라색 별빛으로 반짝이며 머나먼 지평선 위로 아지랑이를 피워내는 듯했다.

이 밋밋한 공간을 덧칠하는 보랏빛 광채.
상황이 달랐다면, 카나에는 멈춰서 이 풍경을 잠시 즐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소녀는 묵묵히 결의에 찬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뽀드득, 하는 발소리와 춤추는 바람이 고요한 밤공기를 장식했다.
새하얗게 피어오르는 입김이 시야를 가리며 얼굴을 데웠다.

카나에는 이 풍경의 그 무엇에도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라보며 감탄할 것이다.

아르케아에 내리는 두 번째 눈을.

====# 17-2 #====
칼바람에 코가 빨개지는 것이 느껴진 카나에는 한 번 어깨를 털며 눈을 찡그렸다.

그렇게 조금 구겨진 표정으로 얼어붙은 코를 살짝 매만졌다. 낮과 밤을 가르는 경계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탓에 어느샌가 주변은 조금 더 어두워져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계곡을 채우는 바람의 속삭임과 고함, 그리고 눈발이 더욱 거세게 카나에를 덮쳤다.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카나에는 즉시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의 희미한 반짝임을 응시했다.

그러나 카나에게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량이 너무 적었다.

천천히, 소녀는 손을 들어 올렸다.
조그맣게 반짝이던 빛들이 점점 더 강해지더니, 이윽고 시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던 외로운 빛들은 확실하게 그 모양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찬란한 빛을 뽐내기 시작했다.

그 빛들은 유리 조각, 일곱 개로 나누어진 아르케아의 조각이었다.

조각들이 카나에에게 다가와 제각각의 속도로 천천히 빙글대다 공중에 멈추어 섰다. 눈밭에 스며들던 보랏빛을 그 조각들도 머금고 있었다.

카나에는 천천히 조각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카나에가 눈에 담은 것은 조각 안의 기억이 아니라, 이 일곱 개의 조각이 이루는 하나의 형태였다.

카나에가 손가락을 굽혔다. 펼치자 조각들이 일제히 움직이며 재빨리 어떤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처음엔 얼굴이었다가, 그리고 검이었다가, 방패였다가, 휘감는 덩굴줄기였다.

구체적이진 않지만, 알아보기에는 충분한 모양들을 조각들이 공중을 춤추며 자아내고 있었다.

이윽고 하나의 조각을 제외한 여섯 개의 조각의 빛이 점점 약해졌다.

카나에는 그 조각을 바라보고서는 천천히 다가갔다.

카나에의 기묘한 힘과, 그로 말미암아 탄생한 더욱 기묘한 길잡이.
아니, 길잡이는 바로 카나에 본인이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가짜 별과 별빛을 이용해 앞길을 밝혀줄 ‘나침반’을 만들어내는 힘.
카나에는 이 세상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줄곧 이 힘을 갖고 있었다.

조각이 가리키는 길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는, 카나에는 다시 전진했다.

그와 함께 그녀의 주변을 몰아치는 바람이, 조금 더 매서워졌다.

====# 17-3 #====
카나에는 자신의 앞에 놓인 폭풍을 아랑곳하지 않고 헤쳐 나갔다.

귓불을 때리는 바람과 흐트러지는 머릿결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눈보라 안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을 향해 전진할 뿐이었다.

카나에는 옷을 더 단단하게 여미고는 잠시 눈을 감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다.

미간을 구긴 채 자신의 앞과 위를 맴도는 유리 조각의 대형에서 결코 눈을 떼지 않았다.

강한 바람에 밀려 길을 잘못 잡을 것 같았다.
무릎 위까지 쌓인 눈이 걸음을 방해했다.
옷이 점점 더 얕아지는 듯한 느낌.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점점 더 얕아졌다.

마치 바람이 귀를 잘라내는 듯, 코가 얼어붙은 듯했다.

그럼에도 나아갔다.
“정말… 갈 수 있을까?” 카나에가 자신에게 물었지만, 그 목소리는 가혹하게 불어오는 눈보라에 묻히고 말았다.
“가야만 해.” 그래도 카나에는 다시금 의지를 다졌다.

그런 카나에의 의지에도 바람은 무심하게 카나에를 내려쳤다. 무릎이 꿇렸다. 반사적으로 뻗은 한 손이 눈 속으로 쑥 파묻혔다. 새하얀 결정의 무리가 어깨까지 닿았다.

옷의 소매 안으로 눈이 들어와 팔을 감사며 재빠르게 체온을 빼앗아 갔다. 튀어나오는 기침과 함께 얼굴에 묻었던 눈이 떨어졌다.

완전히 눈으로 덮여버린 카나에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서려 해보았지만, 다시 넘어지고 말았다.

“일어서…” 카나에가 힘겹게 말했다.
“일어서야 해…!” 끈질기게.

그렇게 일어선 카나에는 갑작스레 기력을 너무나 쓴 탓인지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쉬고 싶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따뜻한 입김을 느끼며, 카나에는 왼쪽 눈을 감았다.

오른쪽 눈으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의식이 있었다. 아직, 생각할 수 있었다…
그 눈에 자유로이 떠다니는 유리 조각의 모습이 보였다.
카나에는 입을 닫고 코로만 숨을 쉬며, 벌벌 떠는 몸을 움직여 그 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작은 가능성, 아주 조그마한 가능성이었지만…
제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믿었기 때문에, 카나에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모든 게 괜찮을 것이라 카나에는 맹세했다. 그렇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다.

카나에가 손을 뻗자…
…유리 조각이 다가오며 기억의 새하얀 빛으로 소녀를 감쌌다.
카나에의 눈앞에 새로운 장소가 펼쳐졌다. 다만 시간대는 새롭지 않았다. 창밖으로 밤의 장막이 내려온, 어딘가의 산장. 카나에는 그 바닥 위에 누워있었다. 가파른 숨. 따뜻해지는 얼굴과 귀… 따뜻하다고?

카나에가 고개를 들자, 벽난로가 타닥거리며 새빨갛게 장작을 태우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과 머리에 점점 온기가 돌자 눈이 크게 뜨였다. 따뜻한 감각을 비롯해 모든 게… 너무나도 생생했다.

마치 진짜인 것처럼… 그래, 이건 진짜다.
몸에 생기가 돌아온 카나에는 벽난로 쪽으로 기어가 그 불 앞에 앉았다.

“...”

불로 몸을 데우는 카나에의 입술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눈보라 한가운데에서 찾아낸 기억 속에 놓인, 고요한 밤의 고요한 산장…

시적인 광경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지 않은가.

조그마한 기적 속에 앉은 카나에는 자신이 이 여정을 시작한 이유를 다시 되새겼다.

====# 17-4 #====
충분히 잠과 휴식을 취한 카나에는 광휘에 휩싸여 유리 조각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새로운 풍경이 조용히 그 눈앞에 펼쳐졌다. 카나에가 기억 안에서 쉬는 동안 여기까지 날아온 모양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아주 깊은 균열이 보였다. 눈과 얼음이 반짝거리며 대지를 덮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위를 새롭게 덮을 눈은 내리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밤의 어둠이 조금은 밝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카나에는 등을 돌려 자신을 품어주었던 유리 조각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마치 그 말에 만족하기라도 한 듯, 유리 조각은 훌훌 떠나갔다. 그리고 카나에는 자신의 충신 일곱 조각을 불러냈다.
아직 눈보라가 멎어 든 것은 아니었다. 카나에는 ‘친구’에게 실려 그 밖으로 나왔을 뿐.

등 뒤로 여전히 세차게 바람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카나에를 집어삼킬 뻔했던 거대하고 칠흑 같은 눈의 소용돌이는 여전히 멈출 기색이 없었다.

카나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채, 일곱 조각의 대형을 움직여 가장 밝게 빛나는 조각을 바라보았다.

‘나침반’이 가리키기를, 카나에는 저기 보이는 균열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생각한 것이 그대로 입으로 나왔다. 이제 그 목소리를 묻을 칼바람은 없었다.
카나에는 계곡 밑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면을 타고 내려갔다.
대지가 만들어낸 자연의 회랑. 카나에는 자신을 인도하는 조각이 발하는 빛으로 돌벽에 그림자가 지는 것을 바라보며, 가야 할 길을 따라 걸어갔다.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갑자기 눈앞이 팽하고 돌았다. 공기가 무거워지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카나에는 시선을 내려 이 여정의 목적, 자신이 찾던 ‘그것’을 바라보았다.

유리 조각들이 그것으로 향하고 있었다. 주변의 돌벽들이 부자연스럽게 흔들렸다. 낮게 울리는 소리가 마치 세상 만물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이 현상의 원인은 자리에 부동 없이 서서, 마치 기쁘다는 듯 주변의 공간을 마음껏 주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한 것보다는 미약한 힘이었다…
마치 상처를 입은 것처럼.

정말로 그렇다면, 정말로 저것이 힘을 잃은 것이라면, 안전할지도 모른다.



저 변칙적인 조각이 바로 카나에의 목적이었다.

저 미력한 조각이…

카나에는 개의치 않고,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 17-5 #====
저 조각에 가까워지자 점점 더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카나에 본인이 원하지 않음에도 심장은 더욱 빠르게 박동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심장뿐.

경험으로 단련된 카나에의 몸과 마음은 조각의 영향력에도 굴하지 않았다. 카나에는 알고 있었다. 이 세계가 낳은 저런 ‘괴물’은, 누구라도 그냥 피해 가는 것이 신산에 이로운 일이다.

저 ‘괴물’은 불편한 잠을 자고 있는 모양이다.

공간이 더욱 뒤틀렸다. 카나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조각에 다가갔다.

저 조각은 이 세계조차 잊어버린 ‘오류’. 더 이상 현실 구조의 이음새를 풀어헤칠 힘조차 없는 미력한 괴물이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해서…

카나에의 눈에,
수많은 “성좌”가 비쳤다.

카나에의 부름을 기다리며 춤추듯 일렁이거나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리 조각의 대형들이.

이럴 땐 어느 걸 써야 할까?

그렇지, 날개의 성좌다.
카나에가 저 유리 조각들을 불러오려 하자 괴물이 그들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카나에는 얼굴을 구기고서 굴하지 않고 다시 날개의 성좌를 불러냈다. 열 개의 조각이 괴물의 힘에 뒤얽혀 하늘에서 내려오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단호히 조각들을 부려 저 뒤틀린 조각의 주변을 마치 창끝처럼 겨누며 포위하도록 했다.

순식간에, 그리고 동시에, 열 개의 조각이 변칙적인 조각을 향해 달려들었다. 보이지 않을 듯이 희끗거리며 흐르는 힘의 파동이 공기를 채우며 솟아올랐다.

그리고 성좌의 조각들이 제 위치에 자리를 잡자, 조금 전까지 공간을 비틀던 변칙적인 힘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평온한 공기가 채웠다.

그렇게 기이한 조각과 그 힘은 구형 감옥에 갇혀 격리되었다. 카나에가 변칙적인 조각을 가까이 부르자, 우리가 둥둥 뜨며 카나에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카나에는 그 안에 든 기억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저 격리된 조각과 함께, 길을 나설 뿐이었다.
“폭풍이 아직도 안 멈췄네…” 계곡을 벗어난 후, 다음으로 향할 장소를 알아내기 위해 하늘을 바라보며 카나에가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간담? 음, 어쩌면…”

시선을 내리고 그 아름다운 풍경을 둘러보다가 익숙한 것을 발견한 카나에는 말을 흐렸다. 한 번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미소를 지었다.

‘친구’가 다시 돌아왔다. 카나에는 그 유리 조각을 자신 쪽으로 불렀다.
마치 자신을 기다리던 것처럼 나풀거리던 산장의 기억이 다가오자, 카나에는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고민했다.

정말로 할 수 있을까? 괴물을 담은 우리를 들고 기억 안에 들어가는 게 가능이나 한 걸까? 그리고 이것 안에서 저 유리 조각이 날아가는 방향을 조종할 수는 있는 걸까?

…일단 해보지 않으면 절대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용감한 소녀는 하늘 위에 떠있는 모든 ‘성좌’를 부르며 괴물을 담은 우리와 함께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마치 천상과 연결된 듯한 느낌.

그렇게 따스한 기억 속에 도착한 카나에는, 천상의 힘을 부려 유리 조각을 인도했다.

…눈보라를 뚫고, 날아가도록.

====# 1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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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을 담아 목표를 이루고 귀환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3일 정도일까.

여정의 끝은 출발점과 같은 곳. 눈이 내리는 고요한 풍경 한가운데.

카나에가 땅을 밟고 착지하자 숨이 막힐 정도로 만연한 새하얀 결정이 발밑에서 부드럽게 부서졌다.

산장의 기억 속에서 나올 때 찬란하게 번쩍이던 빛이 이제 멎어가고 있었다.

카나에는 조각에게 또다시 감사를 표하고, 걸어나갔다.
언젠가는 또다시 만나리라.

격리한 괴물은 여전히 카나에의 곁에 있었다.

어쩌면, ‘친구’를 인도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변칙적인 조각의 힘 덕분이었던 걸까…?

어찌 됐든, 카나에는 목적을 이루었다.

카나에는 출발지였던 절벽 쪽을 향했다. 재빠르게 척척 절벽을 기어올라갔다.

빨리 가고 싶었다.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절벽 위에 오르자 익숙한 황무지가 보였다.

그리고, 두 쌍의 날개가 퍼덕이는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두 마리의 박쥐가 있었다.
하얀색과 검은색, 그리고 주황색과 초록색으로 이루어진 박쥐가 서둘러 카나에에게 다가왔다.

검은색과 하얀색, 그리고 초록색과 주황색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박쥐가 그 뒤를 따라왔다.

두 박쥐는 걱정과 기대로 날개를 퍼덕이다, 카나에의 곁에 있는 우리를 보았다.

“그거야!” 한 박쥐가 말했다.
“그거야!” 다른 쪽 박쥐가 말했다.

“이거야?” 카나에가 말했다.

“그거야!!” 두 박쥐가 동시에 소리쳤다. “그거야! 그거야!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자,” 카나에가 격리된 기이한 조각을 박쥐들에게 건네며 말했다. “ 그 아픈 친구를 고치려면 이게 필요한 거지?”
“응! 맞아!!” 한 박쥐가 말했다. 두 박쥐 사이로 괴물이 담긴 우리가 빛을 발하며 둥둥 부유했다.

“분명 이걸로 고칠 수 있을 거야!” 다른 쪽 박쥐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여자애, 나도 만나볼 수 있을까?”
카나에가 부드럽게 물었다.

“으응… 안 보는 게 좋을걸…” 조금 어른스러운 쪽의 박쥐가 말했다.

“으응… 좀 위험할지도 모르고…” 조금 아이 같은 쪽의 박쥐가 말했다.

“그래… 그럼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꼭 알려줘!”
“그래! 우리가 찾아갈게! 알겠지?!”

두 박쥐 중 하나가 강조하듯 카나에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그 날개와 움직임이 이어진 구형 우리의 조각도 마구 움직이는 탓에 다른 쪽 박쥐의 신경이 조금 긁혔다.

“응.” 카나에가 부드럽게 미소 짓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대답했다.

“고마워, 누나! 누나가 최고야! 저, 정말로…큽…”

박쥐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 불분명한 형태의 고개를 휙 돌리고서 ‘얼굴’을 구기더니, 눈이 있을 자리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울기 시작한 것이다.

“드렘아, 가자.” 다른 쪽 박쥐가 뒤로 물러서며 말하고는, 카나에를 향해 다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고마워.” 또다시, 감사의 말을 남기며.

“별거 아닌걸, 뭐.”

그렇게 두 박쥐는 훌훌 떠나갔다.
파일:Arcaea/Story/17-6_2.webp
“...”

카나에는 두 박쥐의 모습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미소를 지은 채 등을 돌려 절벽 끝으로 걸어가 걸터앉았다.

아르케아에서 눈을 뜬 지 얼마나 됐을까?
아마 수년은 되었겠지…

하늘이 갈라지고, 부서지고, 빛을 잃고…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서도, 카나에는 여태껏 다른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저 박쥐들의 ‘얼굴’조차… 추상화에 가까웠으니까.

“...망할…” 카나에가 허탈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코가 빨개지며 입가의 미소가 움찔댔다. “망할… 하하핫…”

붉어지는 눈시울을 하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듯, 카나에는 얼굴을 가렸다.

그 슬픔을 털어내듯 몸을 한 번 떨고서, 카나에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기가 구한 그 아이를 만나볼 수는 없지만…
…저 박쥐들을 도운 건 옳은 일이었다고.
“언젠가는…”

카나에는 무언가 말을 하려 하다가 멈추고서 눈밭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바라보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나의 빛이 저 검은 캔버스를 가로질렀다. 카나에의 눈이 반짝였다. 흔들리던 미소가 다시 힘을 되찾았다.

“제 소원은…”

고요한 반쪽짜리 밤. 색이 바래가는 낮의 하늘 아래, 잿빛 대지 위로 내리는 새하얀 눈,

이 풍경 속에서 카나에가 자신에게, 하늘에게, 모두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속삭였다…

부디, 이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1] v5.9 업데이트 이전에는 18-I, 18-II, 18-III이 모두 5-?였다. [2] 이 문구를 기점으로 나오는 BGM과 함께, 이후의 문구들은 터치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계속 넘어간다. [3] 이 파트부터는 4-8을 완료해야 진행이 가능하다. [4] Irruption 곡을 해금하기 전에는 Lasting Eden Chapter 2로 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