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5:52:32

1992학년도 후기 대학입학 학력고사 문제지 유출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전개3. 여파4. 범인 검거 및 경찰 수사5. 사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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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신학대학교에서 보관 중이었던 1992학년도 후기 대학입학 학력고사의 학력고사 문제지가 시험을 하루 앞둔 1992년 1월 21일에 유출된 것이 발각된 사건.

2. 전개

학력고사가 진행되던 시절 대입 모집군이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어 각 한 군데씩만 지원이 가능했다.[1] 전기에 모집하는 학교가 더 많았으며 전기와 후기에 걸쳐 분할 모집하는 학교도 있었다. 선 시험 후 지원 시기에는 1년에 한번, 11월~12월에 시험을 본 후 그 점수로 전기에 지원, 전기에 탈락하면 후기에 지원했으며 선 지원 후 시험 시기에는 대입 지원이 먼저이고 시험과 채점이 대학에서 진행되다 보니 그에 따라 시험도 전기(12월)와 후기(다음해 1월)로 2번 시행되었는데 1992년 1월 21일 당시 상황은 후기 학력고사를 하루 앞둔 시점이어서 수험생들의 예비 소집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비소집일이었던 1월 21일 서울신학대학교에서 보관 중이던 학력고사 문제지 포장 박스 겉면이 뜯겨져 있는 것을 당시 경비원이 발견하여 신고했다. 경찰 조사 결과 문제지가 각 교시별로 1부씩 없어진 것이 확인되었고 이에 교육부에서는 부랴부랴 전국 각 대학에서 보관 중인 문제지를 긴급 회수하여 파기하는 한편 1월 22일로 예정되어 있던 후기 대입 학력고사를 2월 10일로 연기했다.
이로 인하여 21일로 예정된 예비 소집을 위해 올라와 있던 수험생들은 헛걸음을 치고 되돌아가야 했고 22일 학력고사 실시와 함께 연금 상태에서 풀려날 예정이었던 학력고사 출제 위원들은 20일을 더 붙잡혀서 문제를 재출제해야 했다.[2] 세상에... 결국 많은 수험생들 및 출제 위원들은 2월 2일~5일로 이어지는 설 연휴에도 쉬지 못하고 수험 공부 및 문제 출제에 매달려야 했고 후기대 입시 관계자들 역시 합격자 발표 예정일인 2월 15일까지 불과 5일 안에 입학 사정을 끝마치고 합격자를 발표해야 했기에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전문대학 입시도 예정된 2월 19일에서 1주일 연기되는 바람에 전문대 입시 관계자들도 불과 3일이라는 촉박한 시간 안에 입학 사정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 탓에 입학관리팀들은 입학 사정이 끝날 때까지 매일 야근에 시달려야 했던 것은 물론이고 타 부서 직원들까지 동원하였다. 게다가 많은 대학들이 편입학 시험을 취소, 연기해야 했다. 하지만 서울산업대(현 서울과기대)와 개방대학, 추계예술대학교는 대학에서 별도로 문제를 만들어 치렀기 때문에 예정 그대로 시험이 진행되었다.

3. 여파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당시 교육부 장관 윤형섭이 경질되고 후임으로 조완규[3] 서울대학교 총장이 임명되었다.

정부의 공공기관 출근시간을 평소처럼 정상시간대로 바꿨고 원래 늦게 시작하려고 했던 증권시장과 은행도 평소처럼 정상 시간대로 개장 및 개점했다. 당시 기사

4. 범인 검거 및 경찰 수사

이후 경찰 수사 결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최초 신고자이자 당시 야간 당직을 맡고 있던 경비원 정 씨가 지목되었다. 해당 경비원은 평소 알고 지내던 교회 집사의 딸인 황 양이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 있도록 도울 생각으로 이런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며 정작 시험지는 해당 수험생에게 전달하지 않고 바로 불태워 버렸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후 이어진 수사에도 물증을 잡아내지는 못했고 도울 생각이었다던 황 양은 이미 합격권이었던 데다 결정적으로 이 학교에는 장학금 제도가 없다는 게 드러나 정 씨의 진술 내용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시험지를 불태우지 않고 찢었다고 하는 둥 진술을 번복하였기 때문에 경찰은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 판단하고 공범의 여부를 수사했다. 경찰은 정 씨의 ‘수상한 행적’을 제보했던 경비과장 조 씨를 용의선상에 올렸으나 조 씨가 28일에 자살하여 수사의 난항이 이어졌고 끝내 증거는 발견하지 못한 채 “조 씨가 정 씨를 시켜 범행하였다”로 결론짓고 사건은 미결로 남게 되었다. 정 씨는 이후 기소되었는데 이 사건과 무관한 1989년에 다른 회사에서 재직했을 때의 횡령 사건으로만 기소됐고 도난 사건에 대한 혐의인 특수절도죄는 제외됐다. 정 씨는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기사1, 당시 기사2, 당시 기사3, 관련 기사

5. 사건 이후

이 사건을 계기로 1993학년도 대입 학력고사부터는 시험지를 시험 당일 새벽에 고사장으로 이송하게 되었는데 이는 1994학년도부터 시행된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선지원 후시험제가 실시되던 1988학년도 학력고사 이후 시험 출제 및 인쇄를 제외한 모든 고사 관리 책임이 각 대학으로 이관되면서 끊임없이 불거진 고사 관리의 공정성 문제와 함께 과도한 눈치 작전으로 인한 입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소정의 목적마저도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함께 대두되면서 가뜩이나 폐지 수순이 머지 않은 학력고사가 시행 11년만에 막을 내리는 데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전기대에 비해 모집 및 응시 인원이 상대적으로 적은 후기대 입시에서 일어난 이번 사태로도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힐 정도였는데 만일 이게 전국 주요 대학들이 몰려 있고 거의 모든 수험생이 응시하는 전기대 입시에서 일어났다면 그 후폭풍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이 사건이 터지고 나서 1992년 1월 27일에 방송된 한바탕 웃음으로 봉숭아학당에서 당시 반장 역을 맡았던 배동성이 이를 패러디했다. 시험지 가져와!!! 경비원!!! 해당 영상
이 사건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022년 12월 9일 방영분에서 '1992년 대입 시험지 도난 사건: 정답 없음'이라는 제하에 소개되었다.[4]전국을 발칵 뒤집었던 초유의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로 석연찮은 점이 많았던 사건이라 해당 방영분을 본 시청자들의 반응도 전반적으로 뒤끝이 상당히 찝찝한 에피소드였다는 평이었다. 특히 당시 일부 기레기들이 수사관들에게 "경비원 정 씨를 고문해서라도 자백을 받아 봐라, 그래야 우리도 보도를 할 게 아니냐"라는 망언을 했다는 사실이 언급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많은 시청자들이 '그 때나 지금이나 기레기들은 여전하구나'라며 개탄하기도 했다.[5] 여담으로 이 때 도난 신고를 접수받은 사람이 당시 경위였던 표창원인데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과 더불어 본인 인생을 바꾼 두 가지 사건 중 하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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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니까 전문대를 제외하면 전기 대학, 후기 대학 2개 대학밖에는 지원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수능은 가군, 나군, 다군 등 대학 세 곳과 산업대/전문대 제한 없이 넣을 수 있었지만 학력고사는 무조건 많아야 두 군데였다. [2] 다음 해인 1993년에 적발된 학력고사 정답 유출 사건 같이 정답만 유출되었을 경우 파장은 더 클지 몰라도 문제까지 유출되지만 않았다면 문제 순서나 선택지 배열을 바꾸고 주관식만 재출제하는 것으로 넘길 수 있겠지만, 문제가 유출되었으니 전면 재출제를 해야 했다. [3]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교수(동물학)를 역임했으며 한국일보 타임-라이프에서 1980년(개정판은 1991년)에 출판했던 "세계의 야생동물(오리지널 타임라이프판 제목은 Wild,Wild World of Animals)" 한국어판의 자문을 맡기도 했다. 현재는 서울대학교의 명예교수. [4] 다만 사건당시 보도영상은 KBS영상을 사용한 점으로 보아 SBS에서 취재한 뉴스영상은 유실된듯 하다. [5] 해당 방영분에서는 당시 담당 수사관의 인터뷰도 나왔는데 이 때 경비원 정 씨는 수사관에게 도대체 시험지 한 장이 얼마기에 온 나라가 이렇게 난리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 수사관은 그 질문에 대해 차마 답을 주지 못했다면서 30년이 지난 지금도 정 씨의 그 질문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