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주요 선거·투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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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인도 총선 | |||||||||
선거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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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선거 | → | 1977년 선거 | → | 1980년 선거 |
선거일 | 1977년 3월 16일 ~ 3월 20일 | |
선출 대상 |
로크 사바(하원) 의원 총 544석 일반 의원 542석 대통령 임명 의석 2석 |
|
투표율 | 60.5% | |
선거 결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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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color=#006E46,#ff671f> 정당 | 의석수 | 비율 |
[[자나타당| 자나타당 ]]
|
295석 | 54.2% |
[[인도 공산당| 인도 공산당(M) ]]
|
22석 | 4.1% |
아칼리 달
|
9석 | 1.6% |
농민노동당
|
5석 | 0.9% |
[[인도 국민회의| 인도 국민회의(O) ]]
|
3석 | 0.5% |
[[드라비다 진보당| 드라비다 진보당 ]]
|
2석 | 0.3% |
<rowcolor=#fff> 반 인디라 간디 연합 | 336석 | 61.8% |
[[인도 국민 회의| 인도 국민회의(R) ]]
|
154석 | 28.3% |
[[전인도 안나 드라비다 진보당| 안나 드라비다 진보당 ]]
|
18석 | 3.3% |
[[인도 공산당| 인도 공산당 ]]
|
7석 | 1.2% |
혁명사회당
|
4석 | 0.7% |
<rowcolor=#000> 친 인디라 간디 연합 | 183석 | 33.6% |
그 외 정당
|
14석 | 2.6%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9석 | 1.6% |
대통령 임명 의원
|
2석 | 0.3% |
1. 개요
1977년 치러진 인도의 총선. 1977년 3월 16일부터 20일까지 194,263,915명이 투표했으며 총 542명[1]의 제6대 로크 사바 의원을 선출하였다.1975년-1977년 비상사태 이후 치러진 총선으로, 인디라 간디 정권에 대한 찬반투표 양상이 짙은 선거였으며 최초로 인도 국민회의가 아닌 정당이 승리한 전국 단위 선거이다.
2. 설명
1966년 인디라 간디의 총리 취임은 인도 정계에 큰 파장을 몰고 왔으며, 대통령 선거를 두고 인디라 간디와 당 지도부가 지지 후보에서 이견을 보이며 친서방 보수파는 인도 국민회의(O)를, 당내 좌파 및 친소련파는 인디라 간디를 중심으로 인도 국민회의(R)을 구성하여 당이 분당되었다. 초기에는 중진의원을 중심으로 구성된 인도 국민회의(O)가 앞섰으나, 인디라 간디에 대한 민중의 확고한 지지와 인도 국민회의(O)의 자중지란으로 예상을 뒤엎고 1971년 인도 총선에서 인도 국민회의(R)이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하지만 여전히 인디라 간디와 그의 당은 중앙 정치에서 기반이 확고하지 못했으며, 설상가상으로 1975년 인도 대법원은 총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간디를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 판결을 내리고자 하였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인도에서 간디의 의원직 상실은 곧 총리직 상실을 의미했다. 판결에 불복한 간디 총리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야당 세력을 탄압하고, 총선 일정을 중단시키는 것으로 화답했다. 사실상 독재자가 된 것이다.
비상사태가 2년간 이어지면서 야당 세력이 지리멸렬해지자, 인디라 간디는 자신에 맞설 수 있는 세력이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비상사태가 민중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는 착각에 빠졌고, 자신의 독재를 이어갈지에 대한 신임 투표 성격으로 총선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생존의 위기를 느낀 인도의 야권 세력은 간디 총리와 갈등하다 사임한 모라르지 데사이 전 부총리 겸 재무장관을 중심으로 결집해 자나타당을 결성했다.[2] 자나타당은 여러 정당의 연합체였는데, 사회주의 성향의 인도사회당부터 오늘날 인도 인민당의 모체가 되는 힌두교 보수 정당 BJS당까지 여러 정당이 통합하여 결성한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당은 특정한 목적이 있는 정책을 내세우기 보다는, 독재냐 민주주의냐, 인디라 간디냐 민주주의냐라는 단일쟁점을 중심으로 선거 운동을 펼쳤다.
자나타당은 더 확실한 승리를 위해 인도 공산당(마르크스주의자)가 중심이 되어 여러 사회주의 정당이 연합한 좌파전선(LF)과 선거연대를 결성했다. 이리하여 좌로는 공산주의자, 우로는 힌두교 근본주의자가 뭉친 반-인디라 간디 연합이 맺어졌다.
반면 인디라 간디는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와 마하트마 간디 등 독립영웅과 자신을 연결짓는 내셔널리즘적 선거운동을 펼쳤고, 재임 기간 도중의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 치적을 내세웠다. 또 실질적인 수권능력이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인디라 간디는 인도 국민회의(R)외에도 전인도 안나 드라비다 진보당, 인도 공산당, 혁명적 사회주의자당 등 여러 중도~좌파 정당을 끌어모아, 반-인디라 간디 연합에 맞서는 친-인디라 간디 연합을 맺었다.
그렇게 선거는 인디라 간디 정권에 대한 찬반투표, 신임투표 형태를 띄게 되었다.
3. 선거 결과
선거 결과, 예상을 뛰어넘는 자나타당 및 반 간디 연합의 압승으로, 인도 공화국 성립 이래 최초로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다만 일반 득표 기준으로 보면 격차가 아주 크게 난 편은 아니었다. 반 인디라 간디 연합은 50.8%, 친 인디라 간디 연합은 40.6%, 기타 정당 및 무소속이 8.6%로, 약 10.2%p의 차이로 반 인디라 간디 연합이 앞섰다.[3]
3.1. 반 간디 연합
자나타당은 북인도를 중심으로 크게 선전했다. 특히 수도 델리와 우타르프라데시주에서는 전 의석을 석권했다. 라자스탄주에서는 1석을 제외한 모든 의석을 차지했고, 비하르- 자르칸드 주에서도 2석을 제외한 모든 의석을 차지했다. 구자라트, 오디샤 주에서도 선전하였다.그 외에 자나타당과 연합하고 있는 인도공산당(마르크스주의자)는 인도 국민회의의 분당으로 인한 조직력 붕괴의 수혜를 톡톡히 봐, 서벵골주에서 압승을 거두고 22석의 의석을 차지해 3당으로 부상했다.
시크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아칼리 달은 푼자브 주의 의석 13석 중 9석을 휩쓸며 압승했는데, 때문에 인디라 간디가 더 가열차게 시크교 탄압에 나서게 되었다는 가설이 있다.
반면 반 간디 연합에 참여한 드라비다 진보당은 전인도 안나 드라비다 진보당에 크게 밀려, 2석을 얻는 참패를 당했고, 인도 국민회의(O)도 3석을 얻는데 그쳤다.
3.2. 친 간디 연합
인도 국민회의(R)은 말 그대로 참패했다. 겨우 154석을 차지하는데 그쳐, 무려 198석을 잃은 것이다. 심지어 인디라 간디 본인도 재선에 실패했다. 우타르프라데시 주 라이 바렐리 선거구에서 겨우 36.9%를 얻어, 53.5%를 얻은 자나타당 후보에게 완패했다.[4] 현직 총리가 자기 지역구에서 떨어져 자동으로 재선에 실패한 것은 인도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5]인도 최대의 주인 우타르프라데시에서 모든 의석을 잃은 것은 물론, 북인도에서 20석 남짓 밖에 얻지 못하며 참패해, 북부 한정으로는 당의 존망까지 의심되는 지경까지 내몰렸다.
동맹 정당인 전인도 안나 드라비다 진보당은 그나마 제 지역에서 경쟁 정당인 드라비다 진보당을 몰아내며 18석을 차지했지만, 인도공산당은 공산당(M)의 22석에 한참 못미치는 7석을 얻었고, 혁명사회당도 4석에 그쳐, 전체 친 간디 연합은 183석의 의석만을 사수하였다. 개헌저지선만 간신히 지킨 것.
4. 같이 보기
[1]
대통령 임명 의원 2석까지 포함해 총원은 544석.
[2]
한국어로 직역하면 "국민당" 혹은 "인민당"이다.
[3]
물론 소선거구제 하에서 양당 구도로 10%p 이상 차이면 무시할만한 격차는 아닌데, 가령 한국의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의석수로는 민주당이 압도적이었지만 양당의 득표율은 9%p 정도의 차이를 보였다. 당시 인도도 그정도의 격차가 났다고 보면 될듯.
[4]
이 지역구는 현재 인디라 간디의 손자인
라훌 간디의 선거구이기도 하다.
[5]
세계적인 차원으로 넓혀보자면, 일본의
가타야마 데쓰, 호주의
존 하워드 등의 사례도 있긴 하다. 전임 총리까지 포함하면
영국의
램지 맥도널드,
리즈 트러스 등의 사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