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1 00:55:04

후쿠치 오우치

1. 개요2. 생애
2.1. 막부시대2.2. 메이지 유신 후2.3. 연극 & 문학활동
3. 인물/일화4. 매체에서

1. 개요

[ruby(福地, ruby=ふくち)] [ruby(桜痴, ruby=おうち)]
1841~1906.

일본 막말~ 메이지 시대의 무사, 언론인, 작가, 정치인.

오우치(桜痴)는 호로, 이름은 겐이치로(源一郎). 하타모토 신분까지 올라간 무사이나 대정봉환 이후 기자로 전업하였다. '도쿄 일일 신문(東京日日新聞, 현 마이니치 신문의 전신)' 주필 사장으로 언론계에서 활동하였고, 연극계에 나아가 가무극장을 건립했다.

2. 생애

2.1. 막부시대

1841년에 나가사키에서 의사인 후쿠치 구안(福地苟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한학을 배우고 15세 때 나가사키에서 통역사인 나무라 모토요시(名村元義)에게서 난학(蘭学)[1]을 배운다. 1857년에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長崎海軍伝習所)[2]의 야타보리 코(矢田堀鴻)를 따라 에도에 정착했다. 이후 2년 정도 모리야마 에이노스케(森山栄之助)로부터 영국의 학문과 영어를 배우고 에도 막부에서 번역 관련 사무에 종사하였다. 1861년에는 시바타 히나타모리(柴田日向守)를 따라 통역으로서 서양에 파견되어 러시아 제국과의 국경선 확정 협상에 참여했다. 1865년에는 다시 막부의 사절로 유럽에 파견되어 프랑스어를 배우고 서양 세계를 시찰했다. 그는 런던 파리에서 간행된 신문들을 보고 깊은 관심을 가졌고, 서양 연극이나 문학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1866년 3월에 귀국한 후 대정봉환이 일어났을 때에는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직접 대통령이 되어 천황 중심의 정부에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 의견은 어느 정도 공감을 얻었지만 요시노부가 머뭇거린 탓에 채용되지는 않았다.

2.2. 메이지 유신 후

도쿠가와 요시노부 메이지 정부에 항복한 1868년 5월에 에도에서 '강호신문'(江湖新聞)을 창간했다. 다음달 창의대(彰義隊)[3]가 우에노(上野, 현 도쿄도 다이토구 우에노)에서 패배한 뒤 강호신문에 "강약론"(強弱論)을 게재하였다. 그는 강약론에서 "'에에자나이카'[4] 메이지 유신이나, 단지 정권이 도쿠가와에게서 삿초(薩長)[5]로 바뀌었을 뿐이지 않느냐. 단지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삿초를 중심으로 한 막부가 생겨났을 뿐이다"라고 메이지 정부를 정면으로 공격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신문을 발간 금지하고 후쿠치를 체포했지만, 기도 다카요시의 선처로 인해 무죄 방면될 수 있었다. 이것은 메이지 시대 최초의 언론 탄압 사건이며 이 사건 이후 일본 정부는 신문 검열에 나섰다.

후쿠치는 이후 도쿠가와 가문의 종가가 시즈오카로 이주하는 것을 따라 시즈오카로 내려갔지만 그 해 말에 도쿄에 되돌아왔다. 무사였으므로 메이지 시대의 법에 따라 사족(士族) 신분이었지만 스스로 사족 신분을 포기하고 평민이 되었다. 그는 도쿄에 거주하면서 희작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 후 개인 학원(私塾, 사숙)을 열고 영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1870년에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소개로 이토 히로부미와 의기투합해 대장성(현 일본 재무성의 전신)에 들어갔다. 당시 이토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회계법 등을 조사하고 귀국하였다. 1871년에는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등 서기관으로 미국·유럽 각국을 방문하였고, 1873년에는 사절단과는 별도로 터키를 시찰하고 귀국했다. 1874년에는 대장성을 사임하고 친정부 신문인 '도쿄 일일 신문' 발행소인 일보사(日報社)의 주필이 되어 사설을 썼으며 지면을 개량해서 발행 부수를 늘렸다. 그는 정치적으로 점진주의(漸進主義)를 주창하며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어용신문, 보수주의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메이지 정부의 정치인들은 호의적으로 대했다.

1877년에 세이난 전쟁이 발발하자 스스로 전쟁터에 나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서기 역할도 얻어 타바루자카 전투 등에 종군기자로서 현지에서의 전쟁 보도를 하여 언론인으로 크게 이름을 올렸다. 전쟁이 끝나 도쿄로 돌아갈 때에는 메이지 덴노를 알현하기도 했다.

1878년에는 시부사와 에이이치 등과 함께 도쿄 상법 회의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도쿄 부의회 시타야구(下谷区)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도쿄 부의회 의장이 되었다. 1881년에는 대일본제국 헌법 제정에 대한 건의를 위해 사적으로 만든 헌법안인 국헌의견(国憲意見)을 저술하고, 군인칙유의 제정에도 관여했다.

1882년에는 입헌제정당(立憲帝政党)을 창당하여 천황 주권론과 흠정헌법[6]을 주장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정당정치에 무관심했고, 이에 따라 존재 의의를 잃어 그 다음해에 자진해산했다.

2.3. 연극 & 문학활동

1879년 프랑스와 영국의 희곡과 소설을 번안하였고, 그 뒤 연극 개량론(演劇改良論)을 쓰기 시작하는 등 연극개량운동(演劇改良運動, 가부키 근대화 운동)에 나섰다.

1888년에는 일본에서 관보가 발행되어 자신이 주필로 있던 도쿄 일일 신문 경영난을 겪었다. 후쿠치는 이를 계기로 주필을 그만두고, 소설 저술을 시작해 정치 소설, 풍자 소설, 로맨스 소설, 역사 소설을 집필했다.

1889년 11월에는 도쿄 긴자에 가부키 극장을 개장했다. 그러나 후쿠치는 빚 문제 때문에 극장 경영은 포기하고, 그 대신 가부키 극장의 전속 작가가 되어 각본을 다수 집필하여 극장에 내걸었다.

1891년에는 야마토신문(やまと新聞)에 소설을 연재한 것을 계기로 회사의 고문이 되어 평론 활동을 계속한다.

1904년에는 중의원 선거에서 도쿄부 도쿄시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최하위 당선되었다.( 중선거구제로 인해 2등 이하여도 당선 가능)

1906년에 의원 재직 중 사망하였다.

3. 인물/일화

  • 사회라는 번역어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1875년 1월 14일의 지면에서 사회에 "ソサエチー"(소사이어티)라는 후리가나를 붙인 적이 있는데 이것이 사회라는 용어의 첫 사용례이다.
  • 1901년 2월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죽음을 애도하여 쓴 "분우 후쿠자와 유키치 군을 통곡하다"(奮友福澤諭吉君を哭す)은 메이지 시대의 명문으로 알려졌다. 후쿠자와가 죽었을 당시에는 "후쿠치는 재주가 능하다. 하지만 강한 의지에 있어서는 후쿠자와가 훨씬 뛰어나다고" 평가되었다.
  • 게이샤를 첩으로 삼았는데, 그가 회중 시계의 뚜껑을 여닫을 때의 소리를 좋아하여 간병 중에 시계를 몇 번이고 여닫았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 머리맡에는 뚜껑이 망가진 회중 시계가 20개 이상 나란히 있었다.

4. 매체에서



[1] 직역하면 '네덜란드의 학문'으로,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에서는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 학문을 받아들였으므로 난학은 곧 서양 학문을 의미했다. [2] 쿠로후네 사건 이후 에도 막부에서 해군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학교. [3] 에도 막부 말기에 쇼군 호위 목적으로 창설된 부대. [4] ええじゃないか. '좋지 아니한가'라는 뜻으로, 당시 일본 곳곳에서 민중들이 '에에자나이카'를 외치며 소동을 벌였던 것에서 유래한다. 당대에도 현대에도 "썩어빠진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새 세상을 이루자"는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해석되지만, 정확한 목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5] 조슈(長門) 번과 사쓰마(薩摩) 번을 합쳐 이르는 말. 나가토 번과 사쓰마 번 출신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을 일컫기도 한다. [6] 황제, 국왕 등 임금이 신민에게 수여하는 형태의 헌법. 대일본제국 헌법이나 대한국 국제가 흠정헌법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