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이 마사오의 수상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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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B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
1999 |
1999년 퍼시픽리그 최다 홀드 투수[1] | ||||
1998년 요시다 슈지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21홀드 |
→ |
후지이 마사오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26홀드 |
→ |
2000년 후지타 소이치 ( 치바 롯데 마린즈) 19홀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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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cc800><colcolor=#000000>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No.15[2] | |
후지이 마사오 [ruby(藤井, ruby=ふじい)] [ruby(将雄, ruby=まさお)] | Masao Fuj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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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8년 10월 16일 |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3] | |
사망 | 2000년 10월 13일 (향년 31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사가 현립 카라츠 상고 |
신체 | 177cm | 72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94년 드래프트 4라운드 (다이에) |
소속팀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5~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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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前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소속의 야구 선수. 현역 시절 포지션은 투수였다.불꽃의 중간 계투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중간 계투로서 뛰어난 활약으로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큰 공헌을 하였으나,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 비운의 투수.[4]
2. 선수 시절
2.1. 아마추어 시절
1968년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에서 태어났지만, 11살 때인 1979년 부모의 별거로 누나, 여동생과 함께 어머니의 출신지인 사가현 카라츠시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 뒤 그곳에서 자라며 카라츠 상고를 졸업한 후, 사회인 야구팀 닛산 자동차 규슈 지부에 입사.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1994년 팀을 창단 이후 최초의 도시대항야구대회 출장과 사회인 야구 일본 선수권대회 출장으로 이끌고 본인도 도시대항야구대회 베스트8에 선정될 정도로 맹활약한다. 그 뒤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어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수상한다. 그렇게 그해 드래프트 4라운드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입단한다.2.2.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시절
호크스에 입단한 후지이는 1년차부터 선발 투수로 뛰기 시작, 세이부 라이온즈를 상대로 완봉승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데뷔 후 2년간 5승 7패라는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둔 이후 3년차 부터 중간 계투로 보직을 전환하여 뛰게 된다.보직을 전환한 첫 해인 1997년에도 고작 15경기 1승 평균자책점 5.32이라는 영 좋지 않은 성적을 찍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8년부터 48경기 4승 3홀드 평균자책점 3.05이라는 기대 이상의 호성적을 거두게 되며 팀의 핵심 불펜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거기에 소속팀인 다이에 호크스가 리그에서 공동 3위를 기록하며 난카이 호크스 시절인 1978년부터 찍던 20년 짜리 비밀번호를 끊고 20년 만에 A클래스 진입에 성공했다. 1999년엔 59경기 3승 1패 3세이브 26홀드 평균자책점 2.89로 작년보다 훨씬 더 좋아진 성적을 거두며 이 해 최다 홀드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소속팀 다이에 호크스가 난카이 호크스 시절인 1973년 이후 26년 만에 퍼시픽리그 우승, 그리고 1964년 이후 무려 35년 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3. 사망
그러나 후지이는 이해 여름 부터 어딘가 건강이 좋지 않은 듯한 모습을 보이며 주변의 우려를 샀고[5], 이 해 일본시리즈 개막 직전의 신체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되어 일본시리즈 종료 후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그리고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본인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있었지만, 사실 후지이는 이미 3개월 시한부의 폐암 말기에 걸려 있었다.
이 사실을 알았던 건 가족들과 구단 프런트, 그리고 오 사다하루 감독을 포함한 코치진 일부, 후원회, 친구 와카타베 켄이치 등의 일부 팀 동료들 뿐이었다. 이때 가족들이 "마운드에 어떻게든 올라가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 기력으로 병을 극복해낼지도 모른다"라는 부탁을 해서 후지이 본인에겐 간질성 폐질환이라고 거짓말을 했고, 구단은 이 해 팀의 우승에 큰 공헌을 한 것을 높이 사 그의 연봉을 2500만엔에서 4800만엔으로 올렸다.
이듬해인 2000년, 후지이는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2군에서 연습을 계속했고, 2군 경기에 6경기 등판을 할 정도까지 회복되기도 했다[6]. 하지만 점점 병세가 심해졌고 결국 10월 13일, 향년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7].
죽기 직전에도 계속 인터넷에 일기를 올리며 리그 2연패를 향해 나아가는 코칭스태프들과 동료들을 응원하기도 하였고, 죽기 6일 전이었던 10월 7일에 리그 2연패를 확정지었을 때 그 모습을 TV를 통해 지켜보기도 했다.
출관 때의 모습. 쿠도 키미야스[8]와 아키야마 코지, 고쿠보 히로키, 조지마 겐지, 오미치 노리요시, 와카타베 켄이치, 마쓰나카 노부히코 등 그의 팀 동료들이 후지이의 관을 나르며 그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후지이 사후 그의 등번호 15번은 2024년 현재까지도 결번으로 남아있어 사실상 준영구결번 취급을 받고 있으며, 후쿠오카 돔의 15번 게이트는 후지이 게이트로 명명되어 입구에 그의 이력과 성적이 적힌 기념 플레이트와, 후지이가 생전에 팬들에게 남긴 마지막 메세지를 적은 플레이트가 설치되어 있다.
후지이 게이트의 모습.
4. 기타
- 어렸을 때 가정사가 좋지 못하였다. 부모는 후지이가 11살때 별거했고, 아버지와 누나가 각각 1985년에 급병으로, 1994년에 교통사고로 일찍이 세상을 떠났었다.
- 1997년, 프로야구 탈세사건에 휘말려[9] 일본프로야구 커미셔너로부터 1998년 시즌 개막 이후[10] 3주간 출장정지, 벌금 50만엔의 징계를 받은 흑역사가 있다.[11] 1997년의 부진한 성적은 이 사건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
그가 생전에 팬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메세지는 일명 "여러분들께(皆様へ)" 메시지로 유명하다. 그의 사후 공개된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여러분들께
제가 지금의 저로 있을 수 있는 것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알게 되고 만나왔던 모든 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 누구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지금처럼 행복한 제 자신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프로야구 선수는 주위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직업으로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제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꿈과 희망, 에너지를 받아왔습니다. 그것이 정말 기뻤습니다.
6년 전 입단 발표 때, " 오 사다하루 감독님께 헹가래를 쳐드리고 싶다" 라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그 소원을 작년 리그 우승과 일본제일[12]로 무사히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팀원 전체가 열심히 노력해서 V2[13]를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멋진 야구선수였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병으로 인해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외로움이나 친절, 배려심, 불안함 등등 사람 본연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저는 겉모습으로만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깨달은 모든 것은, 이 병이 가르쳐 준 것입니다.
요번 1년 동안, 푹 쉴 수 있었습니다. 새롭게 힘내서 야구를 하자는 마음으로 만들어 주신 나카우치 타다시 오너 대행[14]을 비롯한 구단 임직원분들, 오 사다하루 감독님, 팀원 모두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살아갈 희망을 주신 팬 여러분,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다이에 호크스를 응원해 주십시오.
후지이 마사오
5. 관련 문서
[1]
이 당시엔
퍼시픽리그에서만
홀드를 도입했고 우세 상황에서 등판할 때만 홀드를 줬다. 그래서 이 시기의 홀드 기록은 비공식 기록으로 공식 선수기록엔 등재되어 있지 않다.
[2]
공식적인 영구결번은 아니고 준영구결번 처리가 되어 있는 수준이긴 하지만 그의 사망 이후 현재까지 호크스 프랜차이즈에서 15번을 달고 뛰는 선수는 아무도 없으니 실질적인 영구결번이라 봐도 무방하다.
[3]
출생은 후쿠오카에서 했지만 11살때 부모의 별거로
사가현
카라츠시에서 자랐다.
[4]
똑같이
투수로써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전성기에 큰 공헌을 했지만 병으로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츠다 츠네미와 비슷한 예라고도 할 수 있다.
[5]
당시까지만 해도
혹사로 인해 많이 지친 거 아니냐는 말이 많이 나왔다.
[6]
작년 일본시리즈가 그의 마지막 등판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오 사다하루 감독이 "어서 빨리 1군에 올라와라" 라고 1군 등판을 권고하기도 했지만 본인이 "(2군에서) 결과를 내지 못했는데 (1군 시합에서) 등판할 수는 없다"라고 거절했다.
[7]
공교롭게도 후지이 마사오의 32번째 생일까지 불과 3일 남은 상황이었다.
[8]
쿠도는 후지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99년 시즌 후 2번째 FA를 선언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상태여서 다른 선수들과 달리 혼자 양복을 입고 왔다.
[9]
프로야구 선수들이 대규모로 탈세를 한 것이 적발되어 논란이 된 사건. 후지이의 동료 선수
고쿠보 히로키와 게다리 타법으로 유명한
타네다 히토시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프로야구 커미셔너로부터 징계를 받은 흑역사가 있다.
[10]
1997년 시즌 당시엔 이 형벌이 적용되지 않고 다음 해인 1998년부터 적용되었다.
[11]
이때 후지이는 824만엔을 탈세한 것이 적발되었으나,
불기소처분으로 형벌은 받지 않았다.
[12]
일본에서
일본시리즈 우승을 일컫는 말.
[13]
2000년 퍼시픽리그 우승. 호크스 사상 최초의 리그 2연패.
[14]
당시의 모기업 다이에의 회장이었던 나카우치 이사오의 차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