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6 22:15:18

황비홍(무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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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황비홍
간체자: 黄飞鸿|정체자: 黃飛鴻
광동어: Wòhng Fēihùhng
Wong Fei-hung
파일:Wong_Fei-hung_-_Kwong_Kei-tim.jpg
2005년경에 발견된 황비홍으로 추정되는 사진
개명 전 이름 황시샹 (황석상)
黃錫祥|Wong Sek-cheung
출생 1847년 7월 9일
청나라 광둥성 불산부 난하이현 시차오 루저우촌
(現 중국 광둥성 포산시 난하이구 시차오)
사망 1924년 3월 25일 (향년 76세)
중화민국 광둥성 광저우
(現 중국 광둥성 광저우시)
직업 무술가, 의사
배우자 나씨 (1871년 – 1871년, 사별)
마씨 (1896년 – ?, 사별)
잠씨 (1902년 – ?, 사별)
모구이란(막계란(莫桂蘭):1892~1982) (1915년 결혼)
자녀 4남 2녀

1. 개요2. 생애3. '무영각'
3.1. 송휘당 전래설
4. 여담

[clearfix]

1. 개요

청나라 말기에서 중화민국 초기의 무술가이자 의사. 그리고 중국 남파 무술 홍가권의 종사이다.

2. 생애

어려서부터 광동십호(廣東十虎)[1]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 부친 황기영에게 홍가권을 익혔고, 이후 철선권과 무영각(無影脚)을 익혀 홍가권의 종사가 되었다.

일찍이 무관을 세워 제자를 받았고, 의술도 뛰어나서 보지림의관()을 세웠다. 또한 사자춤을 잘춰서 광주사왕(廣州獅王)이란 별명을 얻었다. 특이하게도 별다른 무용담이 전하지 않는다.

연구가들의 추적에 따르면 현재 전하는 무용담은 황비홍이 유명세를 얻은 뒤로 타 무술가의 무용담을 차용한 것이 대부분이라 한다. 즉 행적에 관한 믿을 만한 자료가 없다. 하지만 빈민층에 대해서 무료 혹은 저렴한 진료비만 받고 치료해준 행적만은 사실이다.[2] 의료 행위에 대한 민중의 호감이 무술가로서의 무용담까지 갖다 붙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광동 사자춤이 큰 사자탈[3]을 쓰고 2인 1조로 춘다는 걸 생각하면 체력도 일반인 수준은 넘었던 듯하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최근 ' 광둥성을 빛낸 116인' 선정에서 탈락하면서 논란을 빚었다. 116인 가운데 무술인은 2명이 있는데, 1명은 채리불권의 창시자 진향공이고 다른 1명이 황비홍의 제자 임세영.[4] 임세영은 홍콩에 홍가권을 전파한 인물로, 사실상 황비홍이란 인물은 임세영의 입을 통해서 전한 만큼 과대포장이라는 의혹도 있다.

다른 이야기로는 홍가권 문도들 사이에서 황비홍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당시에 황비홍이 행한 행동 때문이었다. 무협지에서도 자주 나오듯이 자기 문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의 문파에 가르침을 받는 행동은 무술계에게 금기였는데 황비홍은 아직 불완전했던 홍가권에 아버지의 친우들인 광동 십호들의 기술을 하나 하나 연마해 홍가권에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사실 광동 십호의 경우 그 실존성 여부가 불투명하지만 근래에서는 작은 문파들이 하나로 모여서 만들어진 게 홍가권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또 하나는 당시 곽원갑이 세운 무술 협회의 정무 체육회가 무술인 사이에서는 별로 호응을 받지 못했지만 황비홍이 이 단체에 가입하면서부터 정무 체육회의 크기가 커졌다는 썰이 있기도 하다. 그도 그런 게 정무 체육회에 가입하면서 홍가권이 광동에서 영향력이 비상식적으로 커진다.

3. '무영각'


영화 매체에서 묘사 된 무영각[5] 1:49 무렵 기술명을 말하는데 無影脚의 광동어 발음인 "모우잉궥" (mou4 jing2 goek3)이다.

이연걸 주연의 영화 "황비홍" 시리즈를 시작으로 하여 이후 매체에도 황비홍의 주특기, 비기였다는 "그림자 없는 발차기" 무영각(無影脚)은 하나같이 굉장한 고속의 연속발차기로 묘사가 된다. 아마 자료에서 그 이름만을 접하고 "그림자가 없을(=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발차기로 막 차나보다"하고 상상한 결과인 듯.

하지만, 무영각의 실상은 다르다.


홍가권 도장의 무영각 수련 영상


서양인 홍가권사의 무영각 설명 영상

위의 영상들에서 볼 수 있디시피, 기본적으로 여느 무술에서도 다 볼 수 있는 로우킥 계열의 공격이다. 위의 영상들이 뭔가 잘못된 문헌 해석의 결과라든지, 이름없는 짭고수가 그냥 지어낸 얘기라든지, 아니면 독자연구를 통해 중국권법을 이상하게 해석하거나 적용하려는 서양인의 견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래의 설명도 한번 보자.

취재자: 우리 서양에서는 'No Shadow Kick', 즉, 무영각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듣지만 그게 뭔지 잘 모릅니다.
이찬와(李燦窩) 노사: 아니야 아니야…그것(무영각이란 이름)은 그냥 故 황비홍 사부가 지은 멋진 기술명일 뿐이야. (…)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아나? 왜냐하면 황 사부는 키가 굉장히 컸어. 음…7피트였어.[6]
취재자: 정말요?
이 노사: 그래, 키가 굉장히 컸지. 그리고 당시에는 긴 상의, 장삼(CheongSam: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에 자리잡게 된 양식의 한푸의 한 종류)을 입었어.
취재자: 네, 아주 길었단 말이죠?
이 노사: 그러니 그가 발차기를 하면 아무도 볼 수 없었던 거야. 그러니 누가 시비를 걸기라도 하면…팍!
취재자: 아…그러니까 긴 옷 아래 숨겨진…….
이 노사: 긴 옷 아래 다리가 숨겨져 있었으니까 언제 공격할런지 볼 수가 없었던 거야.
취재자: 그러니까 긴 옷 아래 다리가 숨겨져 있어서 그대로 상대방을 찬다는…?
이 노사: 그래서 원래는 중국어(광동어)로 '콴다이거(군저각 裙低脚: 치마 아래의 발차기, 즉 '옷자락 아래 숨겨져있다 나오는 발차기')'라고 불리웠었어. 그런데 그걸 아무도 모르지. 그냥 그뿐인데. (…) 그래서 그 이후에 사부님이 멋진 이름을 지은 거야. '무영각'이라고.
홍가권 전문 유튜브 채널에서 인터뷰한 이찬와라는 사람은 1939년 홍콩 태생이고, 그의 스승이 (영상 배경의 영정사진에 있는 노년의 여성인) 막계란(莫桂蘭:1892~1982), 바로 황비홍의 아내다. 이찬와가 막계란의 대자(代子, 즉 막계란은 이찬와의 대모)이기 때문에 홍가권을 배웠던 것. 즉, 이찬와는 황비홍의 적전제자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그리고, 영상에서 이찬와 노사가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무영각은 일종의 로우킥이며, 이것이 특히 효과적이었던 이유는 당대 중국인 치고는 황비홍은 키가 훤칠하게 컸기 때문에, 청말 남성용 한푸 양식에 따라 앞섶에 길게 드리운 두루마기를 입고 있으면 다리가 가려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키가 큰 황비홍이 옷자락으로 가려져있어서 공격이 나오는 게 보이지도 않는 낮은 발차기로 상대방의 쪼인트를 까고(…) 다녔다는 것이다.

즉, 맨 위의 견자단 주연 영화 영상에서는 "이제부터 필살기가 나간다!" 같은 느낌으로 옷 앞섶을 옆으로 젖히기 일부러 다리를 드러내지만, 실제 황비홍은 공격 나간다고 상대방에게 예고해 줄 이유가 없으니까 옷에 다리가 가려진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해 그대로 상대방 하체를 걷어찼다는 것(…).


중국권법/실전 문서의 "비전" 항목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실상을 알게 되면 "이게 무슨 무술의 비전, 오의냐???" 며 허탈감을 느낄 수 있겠으나, 원래 비전이란 이런 것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간단하면서도 유용하여 실전에 쓸모있는 숨은 기법, 요령인 것.

짐짓 우스워보이지만 이는 사실 격투기에선 당연한 것이다. 이를테면 잽으로 페인트를 주고 예상하지 못한 하단 차기가 나온다면 이건 속는 사람 잘못이지 공격하는 측에서 당연한 속임수요 이지선다다.

3.1. 송휘당 전래설

이는 이 인터뷰가 나오기 이전까지 시중에서 떠돌고 있던 무영각의 이야기와 크게 배치된다.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는, 무영각이 황비홍의 오리지널 기술이 아니라 명성을 막 얻기 시작하던 무렵 찾아온 송휘당(宋輝鏜:?~?)이라는 사람이 비무를 신청하자 그가 선보인 놀라운 발차기에 큰 인상을 받아 전수 받았다고 한다. 송휘당 본인도 무영각의 원래 사용자가 아니며, 무술단련을 지켜보던 어느 처자가 송휘당의 무술을 보고 "왜 발차기가 부실한가"라며 비웃기에 그에 발끈하여 그녀와 겨룬 송휘당이 오히려 그 처자의 놀라운 발기술에 당해버렸다고 한다. 이에 감복한 송휘당은 그녀로부터 그 발기술을 배워 자신만의 무술을 완성했고, 그녀와 결혼까지 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어느 신비한 스승"이 갑자기 등장해 기술을 가루쳐주는, 기연x2로 이루어진 동화같은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소림혈투록"이라고 알려진 90년대 무술 서적에 실려있었고, 이 "소림혈투록"의 단편적 번역들이 90년대 말 한국 PC통신 시절에 각종 무술커뮤니티에 번역되어 올라오면서 중국무술과 관련 된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퍼지게 되었다. (특히, 불법번역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시절, 부산의 팔극권애호가 동아리인 부팔소 사이트에서 단편적 번역본들이 부정기적으로 연재 되었었다)

이 책의 저자인 카사오 쿄지(笠尾恭二)는 90년대에 중국무술관련 서적을 아주 많이 썼는데, 이 사람은 "중국무술연구자"로 소개되어 있으나 무술인이 아니다. 즉, 마쓰다 류지와 비슷한 부류로, 당시 일본에서 성행했던 중국무술 애호인이며, 이 사람이 모은 자료들은 출처, 전래처 등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카더라류의 이야기들이 엄청나게 많이 실려있다. 즉, 애호하는 무술에 대해 중국 항간에서 떠도는 소문이라는 소문, 이야기, 카더라는 죄다 모아서 이야기로 낸 책이며, 그가 쓴 다른 저작물들도 무수하게 많은 오류와 카더라가 포함되어 있다.

"송휘당이 전래한 무영각"의 이야기만 봐도 중국무술과 관련 된 전형적인 카더라의 구조를 띄고 있는데, 일단 송휘당이 누구인지, 언제 나고 죽었는지, 실존인물인지에 대해서 알 길이 없다. 중국쪽 자료에서도 이 인물은 오로지 황비홍과의 일화에서만 등장하며 심지어는 그가 수련한 남파권법이 무엇인지도 알려져있지 않다. 또, 당연하게도 그를 비웃었다는 처자가 누구인지, 그 처자의 무술은 무엇이었는지도 없으며, 애초에 "무술을 연마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와서 조롱하길래 발끈해서 한 판 붙었더니 아뿔싸 ... 상대가 초고수라 발려버린 이후 스승으로 모셔서 절기를 배우게 되었다"는 "기연"의 구조는 그냥 전형적인 무협물 클리셰다. ("누군가가 도발하길래 발끈하여 대응했더니, 알고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라 가르침을 청한다"는 기연의 이야기는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진나라 말기 한고조 유방의 책사 장량 황석공을 만난 기원전까지 가는, 중국민담의 클리셰 of 클리셰다... )

더구나, 무영각의 이야기는 한 번의 기연도 아니고, 송휘당이 기연으로 얻은 무영각을 황비홍이 송휘당과의 기연으로 (당연히 해당 비무가 언제 어디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얻게 된다.

특히, 몇 백년 전도 아니고 1800년대 말의 황비홍의 이야기이며, 위에서 봤듯 그 부인에게서 배운 황비홍계열 근대 홍가권 제자가 바로 다음 대인 2대인데도 정작 이야기에는 "무영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냥 뭔가 엄청 신비하거나 강력한 기술이라고 알려져있지만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거론되지 않는다. 이는 무술에 대해 그 이름이나 카더라만 전해 듣고 실체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상상만 해서 이야기를 꾸며낼 때 종종 보이는 현상.

그에 비해, 이찬와 노사의 증언이 더 신빙성이 높다고 볼 이유는 매우 확실하다.
  1. 일단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 본인이 누구인지, 경력이 어떤지가 알려져있고, "누구의 누구의 누구의 누구로부터 전해들었다"라는 식의 한 다리 두 다리 건너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황비홍 본인의 마지막 부인이었던 막계란 사모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즉, 확실하게 주장되는 출처가 밝혀져 있고, 심지어 그 출처가 대상과 가장 가까운 배우자였다는 것.
  2. 해당 기술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그 용법이 무엇인지, 어떻게 쓰는 기술인지가 고증이 된다. 그리고, 해당 문파 (해당 권법 종사의 2대 도장)에서 그런 식으로 수련을 한다. 애매하게 강하다거나 신비하다거나라는 얘기만 하고 정작 무슨 기술인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 카더라통신과는 매우 다르다.
  3. 해당 기술의 특징을 보면 실전적이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을만큼 현실적이다. 뭔가 하늘을 날아다닌다든지, 다리가 몇 개로 늘어난 듯 착각이 든다든지, "오묘하고 신통방통하여 대응할 수 없다"는 식의 신비주의적 요소가 전혀 없이 매우 심플하게 왜 그 기술이 (시중에서 그 기술에 대해 신비한 카더라가 돌 정도로) 유명해질 수 있었는지의 실전성이 손쉽게 납득이 된다. 무슨무슨 기술이 "단 한 방에 적을 끝내는 것으로 유명했다"는 식의 전형적인 중국무술 허풍과는 달리, 이 "무영각"이라는 것이 왜 실전에서 유용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바로 납득이 된다는 것.
  4. "무영각"이라는 기술명이 붙기 전의 본래 이름까지 분명히 제시한다. 즉, 누군가가 외부에서 전래해 준 신비스러운, 실체를 알 수 없는 허풍스러운 기술이 아니라 "군저각"이라는 이름으로 황비홍이 쓰던 기술이라고 그 이전의 명칭이 제시되고, 그 이름을 "무영각"으로 바꾼 것이 황비홍 본인임을 확실하게 밝힌다.
이러한 내용들을 고려해본다면 어느 설이 진실에 가깝고, 어느 설이 걍 전형적인 카더라인지 판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는 매우 재미있는 일이기도 한데, 중국권법/실전 문서에서도 소개되어 있는 것처럼, 중국무술에 대한 이야기들 중 매우 드물게도 세간에 전래되는 카더라진실로 추정되는 이야기가 둘 다 알려지게 된 매우 드문 케이스이기 때문. 즉, 이 양자를 비교해본다면 이찬와 노사가 설명해 준 매우 심플하고 현실적인 "무영각"의 실제 유래가 세간에서 온갖 카더라 풍문이 돌면서 대체 어느 수준까지 뻥튀기가 되어버렸는지가 한 눈에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국무술계에서 허풍과 신비주의가 대체 현실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체감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일 것이다.

또, 무술판타지가 상식인양 이야기되던 과거에는 송휘당과의 기연으로 인해 배우게 된 무영각의 전설이 사람들에게 훨씬 더 인상이 깊게 와 닿았을런지는 모르지만, 무술과 격투술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오늘날에는 오히려 무영각의 "진실" 쪽이 황비홍이 그래도 어느 정도 인정받을만한 실전적 무술가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에 훨씬 더 도움이 되는 아이러니도 있다.

왜냐하면, 비록 황비홍의 실제 무술 실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가늠할 길도 없고 그의 행적 상당수가 부풀려진 것이라고 가정을 한다고 해도 이런 실전적인 기법으로 유명했던 걸 보면 그가 어느 정도는 실제 싸움에 익숙한 사람이었음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어느 정도 무술에 대한 식견이 있다면 그 사람이 쓰는 기술만 봐도 어느 정도 실력인지 가늠할 수 있는데, "~~참교육" 영상 등에서 나올만한 가짜무술가들이 쓰는 엉성한 폼, 부정확한 자세, 괴상한 묘기같은 기법 등을 보면 한 눈에 "전혀 싸움을 모르는 아마추어"임을 알 수 있는 반면, 숙달된 격투가 쉐도우복싱을 하면서 쓰는 주먹질을 보면 어느 정도 단련이 된 사람이라는 것이 확 드러나기 때문. 그렇게 놓고 본다면 높지 않은 낮게 나오는 발차기의 실전성이라는 것이야 이미 유명한 얘기이고, 거기에 '옷을 이용한 눈속임'의 요소가 아예 기술의 특징으로 제시되어 있다는 것은 탈의하여 싸우는 시합환경이 아니라 길거리 싸움에서 훨씬 더 유의미한 기법임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여담

  • 임세영의 제자 가운데 유담(劉湛)이 있고, 유담의 아들이 홍콩 영화계의 그 유명한 유씨 삼형제다. 유가영, 유가량[7], 유가휘[8] 삼형제는 황비홍의 계승자인 셈.
    임세영의 또 다른 제자로는 조교(趙敎)가 있는데, 그의 아들이 쿵푸허슬에서 재단사 역할을 한 조지릉이다. 실제로 조지릉 또한 홍가권의 고수이고, 그가 영화에서 시연한 무술 또한 홍가철선권이다.
  • MBC에서 2000년대 초반에 방송됐던 모 전생 체험 프로그램에서는 가수 이지훈의 전생이 이 사람이었다고 나왔었다. 이 이야기가 방송되면서 영화 속의 인물이라고만 알고있던 황비홍이 실존인물이란 것이 대한민국에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9] 여기서 이지훈이 황비홍의 최후에 대해 말하기를, 황비홍을 적대하는 세력이 몰래 약에 탄 독을 먹어서 사망했으며, 이 때 가족들에게 남긴 "저 XX들에게 원수를 갚아라"였다고 한다.암만 봐도 이서문 내지는 곽원갑인데...
  • MBC 애니메이션 트리팡 파이터에 등장하는 주인공 3인방 중 한 명인 리오씽의 모티브가 황비홍이다.
  • SNK의 대전격투게임인 월화의 검사의 등장하는 인물인 이열화도 황비홍을 모티브로 하고있다.
  • 황비홍 본인의 생애를 다룬 전기영화가 1948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는데 홍콩의 후펑(胡鵬) 감독이 제작한 영화인 황비홍:편풍멸촉(鞭風滅燭)이 최초의 영화로 전해진다. 주연은 당대 홍콩 최고의 배우인 관더싱(關德興, 1905.06.27~1996.06.28)이 맡았다. 그는 본래 광둥(廣東)의 전통극인 월극(粵劇)의 배우였던 관계로 정식으로 무술을 배우지 못했으나 무예에 심취해서 홀로 홍가권을 연마했다. 그후에 첫 황비홍 영화를 촬영할 때 무려 4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홍가권을 꾸준히 연마해서 무극강유권(無極剛柔拳)이라는 독자적인 유파도 창시할 정도였다. 그 뒤 관더싱은 1950~70년대에 홍콩에서 제작된 80여 편의 황비홍 영화와 드라마의 주연을 대부분 꿰찼다.


[1] 백학협가권(白鹤俠家拳) 왕은림(王隐林), 구룡권(九龍拳) 황징가(黄澄可), 소림흑호문(少林黑虎門) 소흑호(苏黑虎), 홍가권(洪家拳) 황기영(黄麒英), 칠성권(七星拳) 여인초(黎仁超), 취권(醉拳) 소찬(苏灿) -소걸아-, 철선권(鐵線拳) 양곤(梁坤) -철교삼-, 금강지법(金刚指法) 진장태(陈长泰) -철지진-, 담가삼전권(譚家三展拳) 담제균(譚济均), 팔괘곤(八卦棍) 주태(周泰) -주철두- [2] 출처: 廣東採掠欽書 [3] 목재틀에 종이를 바른 것이기는 하지만 무게는 20–30kg. [4] 영화나 드라마에서 저육(돼지고기)영이라고 나오는 황비홍의 제자가 바로 이 인물이다. [5] 해당 영화에서 시전자는 황비홍이 아닌 그 아버지 황기영의 역을 맡은 견자단. 이 영화에서는 무영각이 황씨가문에 가전되는 비법이라는 설정 [6] 아마 동양 관용적 표현인 '7척'을 그냥 대충 '피트' 단위로 얘기한 듯 하다. 19세기 말에, 그것도 동양에서 210㎝ 신장은 '키가 큰' 정도가 아니라 거의 괴물 취급을 받을 키다. 그러나, 동양에서 관용적으로 사람의 몸집·키를 표현할 때 쓰는 '7척'이나 '8척' 같은 표현은 한~동진 시절의 1척=23~25㎝ 기준이기 때문에 황비홍은 163~175㎝ 사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175㎝ 정도면 그 시대 영양부족에 시달렸던 동양의 환경치고는 꽤나 큰 셈이긴 하다. [7] 전설적인 무협 영화감독으로 2013년 6월 25일에 타계했다. [8] 참고로 처음부터 유씨 성은 아니었다. 본명은 승금희(冼錦熙). [9] 이 방송에서 제작진이 직접 인터넷 검색 후 황비홍이 실존인물임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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