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0 02:10:32

황보정걸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황보정걸
皇甫正桀
파일:황보정걸.jpg
<colbgcolor=#0047a0> 출생 1880년 4월 14일
평안도 함종현 세곶방 석소안리
(현 평안남도 온천군 안석리)
사망 몰년 미상
사망지 미상
이명 황보정길(皇甫正吉), 백옥보(白玉甫)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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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유공자.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황보정걸은 1880년 4월 14일 평안도 함종현 세곶방 석소안리(현 평안남도 온천군 안석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886년 용강군 이화동으로 이사하여 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7세 되던 해인 1897년부터 상업에 종사하였고, 1904년 진남포로 이사하여 2년간 머물렀으며, 1906년 함경남도 원산으로 이사하여 원산 간이상업학교에서 3년 동안 수학하였다.

1910년 종성군 나남으로 이사하여 상업부기학교와 나남 영신학교(永信學校) 교장을 역임하였다. 1911년 북간도로 이주하여 옥성학교(玉成學校)와 길신여학교(吉新女學校) 강사로 일하였다. 중국 길림성 연길현에서 배일 단체인 진치동제당(唇齒同濟黨)을 결성하였다.

1912년 11월 국자가(局子街)에서 일제 관리를 처단하기 위한 암살당(暗殺黨)을 조직하였고, 1913년 2월 간민회(墾民會) 창립대회를 개최하고 중앙총회 부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914년 이후에는 의사원(議事員)으로 활동하였다.

간민회는 한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을 도모하고 근대적 신식 학교를 건립하여 학생들에게 근대 문명과 애국 애족 정신과 반일 사상을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한 단체였다. 황보정걸은 1913년 10월 13일 북간도의 청년들을 모아 '정의를 돈목하며 덕업을 상권함'을 목적으로 청년친목회를 결성하고 인사과장으로 활약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간민회가 탄압받자, 군자금을 모금하여 독립군에 무기 공급을 위해 1915년 애국저금단(愛國貯金團)을 조직하였다. 1917년 1월 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5월 대한인국민회 클레어몬트지방회에 가입하고, 8월 31일 흥사단에 입단하였다. 1917년 북간도명동학교 건축비 모집위원으로 건축비 100달러를 모금하여 명동학교로 보냈다.

1919년 3.1 운동 소식을 듣고 중국 왕청현 나자구로 가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다가 1919년 10월 미국으로 돌아왔다. 1922년 세탁업을 하며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24년 북미 민립대학기성회 후원회 평의원으로 참여하여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였다.

이후 흥사단 검사원(檢査員)으로 활동했으며, 다뉴바 지방 학무원, 오하이오주 애크런지방회 재무, 북미지방총회 부회장, 대의원,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실업부원 및 총무 등을 역임하였다. 동포 구제금, 동정금, 연조금, 국민 의무금, 특별 의연금, 광복군 후원금 등 각종 독립 의연금을 후원하고 8.15 광복 후에도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였다. 그가 1917년부터 1945년까지 지원한 액수는 330원 50전에 달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황보정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