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895년 1월 5일 |
황해도 곡산도호부 (현 황해도 곡산군) |
|
사망 | 1959년 2월 19일 |
멕시코 멕시코시티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황보영주는 1895년 1월 5일 황해도 곡산도호부(현 곡산군)에서 태어나 4살 때 평안남도 평양부 고순화면 광탄리(현 평양시 만경대구역 대평동)로 이주했다. 그는 6년 동안 서당을 다닌 뒤 육영소학교를 재학했고, 1914년에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고, 1917년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이후에는 평안북도 강계군의 영실중학(英實中學)에서 학생을 가르쳤다.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강계 일대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1919년 8월 평남 대동군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애국금(愛國金) 수합위원(收合委員) 최경선(崔景善)의 위탁을 받아 9월 20일 독립운동자금 56원을 모집하여 전달하였다. 이후 평양신학교 학생이자 대한국민회 회원으로 박승명(朴承明)·김재덕(金在德)과 평양신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신문(獨立新聞)>, <국민신문(國民新聞)>을 비롯한 각종 경고문과 독립운동자금 수령증을 인쇄하여 모집원들에게 배부하였다.
1920년 9월 상하이로 망명하여 상하이의 삼육신학대학에서 7주 동안 머물면서 교육 과정을 마쳤다. 이후 흥사단에 입단하여 14명의 한인 학생들과 함께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여행증서를 받아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 뉴욕에 이르렀다.
1921년경 멕시코로 이주한 친척을 만나고자 멕시코로 향했다. 그러다 케레타로 엔 시나라스(Queretaro en Cinilla) 마을에서 목동으로 일하다가 그곳의 여성과 결혼하여 아예 멕시코에 정착했다. 멕시코 한인 이민자들이 처음에 도착하였던 베라크루스주(Veracruz州)의 코앗사코알코스(Coatzacoalcos)에 머물면서 미국의 더뷰크(Dubuque)대학에 유학하려고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대신 멕시코시티로 거주지를 옮겨 택시 운전사로 생활을 꾸렸다.
1927년부터 1942년까지 3.1절 기념식, 국민회창립기념식, 경술국치 기념식, 안창호 선생 추도식, 임시정부 대일선전 1주년 기념식 등에서 3.1 운동 약사, 독립선언서 낭독 등 각종 연설을 하였으며, 1933년부터 1941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1941년 12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멕시코 지방위원인 이순녀, 한종원(韓宗源) 등과 함께 오랜 시간 동안 폐쇄되었던 묵경지방회를 다시 설립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12월 20일자로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포고와 한국의 독립운동, 멕시코 한인들의 입장을 여러 신문사에 게재하였다.
이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묵경지회에서 활동하며 멕시코 한인 사회의 단결을 강조하던 그는 1959년 2월 19일 멕시코시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황보영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