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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48년 헝가리 혁명( 헝가리어: 1848–49-es polgári forradalom és szabadságharc; 1848~1849년의 시민혁명과 독립전쟁)은 1848년 혁명의 일부로, 독립 헝가리 왕국을 목표로 한 헝가리인[1]의 봉기였다.2. 상세
1848년 혁명과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코슈트 러요시 등의 주도로 헝가리인은 실질적으로 독립된 헝가리 정부와 트란실바니아의 완전 병합을 목표로 헝가리 왕국과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에서 무력 봉기를 일으키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헝가리 혁명 세력은 전쟁 와중에 민주적 의회와 정부를 구성하는 한편, 농노제를 폐지하고 언론 자유를 확립하는 개혁도 추진했다. 1848년 8월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이탈리아 통일 혁명 운동을 제압한 오스트리아 제국군은 약 20만 여 명의 병력을 확보하여 헝가리로 진입했고 6월에는 세르비아인, 9월부터는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이 반 헝가리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당시 위원장이었던 버차니 러요시(Batthyány Lajos 1807~1849)는 헝가리의 독립성을 제한하되 자치 정부를 보존하는 것으로 타협을 모색했으나 빈 정부는 혁명 세력의 완전한 복종을 요구했다. 코슈트 러요시를 중심으로 한 혁명 정부는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하면서 슬로바키아인, 루신인 농민까지 끌어들였고 12월 부더와 페슈트를 함락시켰다. 1849년 3월, 유제프 벰이 푸스타 일대를 장악했고 4월에는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서부 국경까지 몰아붙였다. 그러나 독립 운동이 장기화되자 여기서 끝내자는 온건파와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급진파로 분열되었고, 대부분 온건파였던 귀족들은 농민 문제에 대해 미온적이다보니 기껏 끌어들였던 슬로바키아인, 루신인 농민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유럽의 헌병을 자처하던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1세가 6월부터 15만 명에 달하는 러시아 제국군을 보내자 헝가리 혁명군은 급격하게 붕괴되어 무너졌다. 니콜라이 1세가 당시 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군대를 파견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폴란드 영토의 안정이었다. 중부 유럽으로 혁명 운동이 확산되면 폴란드에서 11월 봉기 이후 또 새로운 봉기가 또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는데, 헝가리군에는 폴란드 망명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나름 근거있는 우려였다. 또한 오스트리아 제국이 혁명을 제압하지 못한다면 오스트리아 제국 영토이자 폴란드인 인구가 상당수 거주하는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2] 일대로 혁명이 확대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여 러시아 제국군이 파견되었고, 1849년 7월 부더가 함락당했다. 주도자였던 코슈트 러요시는 8월 11일 사임하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수도 토리노로 망명했다. 8월 13일 세게슈바르에서 러시아 제국군이, 테메슈바르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이 헝가리 혁명군을 상대로 완승하며 혁명은 진압되었다.
이듬해 헝가리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외덴부르크, 오펜, 프레스부르크, 카샤우, 그로스바르다인의 5개 군구와 보이보디나 공국으로 개편되었고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은 여전히 분리된 채 모든 자치권을 상실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제국 내 다양한 민족을 강압적으로 통치한 결과가 무엇인지 절감하게 만드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 프로이센 왕국에게 연달아 패배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867년 대타협(Ausgleich)을 통해 헝가리 민족주의자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선포하였다.
3. 기타
오늘날 헝가리에서는 3월 15일을 1848년 헝가리 혁명 기념일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으며 어러드에서 사형당한 13인의 독립운동가를 '13인의 순교자(aradi vértanúk)'로 추모하고 있다.[3] 또한 헝가리 독립운동가를 처형한 오스트리아 제국군이 맥주잔을 부딪히며 건배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후 헝가리인들은 앞으로 150년간 건배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1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맥주잔을 부딪히며 건배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이 사건은 이그나츠 제멜바이스의 손 씻기 이론이 무시받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혁명으로 인한 오스트리아의 헝가리인에 대한 인식 악화와 더불어 그의 형제가 혁명에 가담했다가 처벌받았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약 14~15,000 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대부분 에르데이에서 벌어졌으며 이 학살로 헝가리인 7~8,500 여 명, 루마니아인 약 6,000여 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헝가리인은 대부분 오스트리아 제국군이나 아브람 이안쿠가 이끄는 루마니아인 민병대에 의해 살해당했고, 루마니아인은 헝가리인에게 살해당했다. 이때 불거진 양국의 악감정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당시 헝가리 혁명군의 노래 '클럽커 행진곡(Klapka Induló)'. 혁명군을 이끌었던 클럽커 죄르지(Klapka György)에 대한 곡이다.
[1]
나라를 되찾으려던
폴란드인과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통치하고
토스카나 대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에 영향을 행사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에 맞서
이탈리아 통일을 열망하던
이탈리아인은 헝가리에 합류한 반면 헝가리 왕국의 주요 소수민족들, 특히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등은
합스부르크 가문 편을 들어 헝가리 혁명 진압에 앞장섰다.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날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옐라치치 광장의 주인공
요시프 옐라치치와
슬로바키아어의 아버지
루도비트 슈투르,
트란실바니아(에르데이) 출신의 루마니아인 법률가
아브람 이안쿠 등.
[2]
서부는 폴란드인, 동부는
우크라이나인이 많았으나 당시에는 아직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발흥하기 전이어서 폴란드 독립 운동만 거셌다.
[3]
현재는 아라드가
루마니아 영토이기 때문에 헝가리 각지에서 추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