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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생애

한신의 북벌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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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겁쟁이 한신
1.1. 걸식표모(乞食漂母)1.2. 과하지욕(胯下之辱)
2. 한(漢)의 대장군
2.1. 죽을 지경에서 벗어나다2.2. 소하가 천거하다2.3. 유방에게 진면목을 보이다
3. 전설의 시작
3.1. 삼진 정벌과 관중 평정3.2. 팽성대전, 한군의 대패 - 한신의 책임소재는?3.3. 위표를 박살내다
4. 한신, 북벌을 시작하다
4.1. 정형 전투(井陘戰鬪)4.2. 연나라를 항복시키다4.3. 잠자다가 군사를 빼앗기다4.4. 역이기의 죽음4.5. 용저를 격파하고 제나라를 평정하다
5. 한나라의 신하가 되느냐, 대왕의 길을 걷느냐6.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는다
6.1. 밥값을 갚다6.2. 반란혐의와 회음후 강등6.3. 다다익선6.4. 성야소하 패야소하6.5. 한신은 실제로 모반을 일으키려고 했나?

1. 겁쟁이 한신

1.1. 걸식표모(乞食漂母)

한신의 집안은 왕족과는 거리가 멀며[1], 가난한 집안 출신에 지나지 않았다.[2] 가난하게 자란 탓에 한신 본인의 품행도 그다지 단정하지 못해 어디서 추천도 받지 못했다. 한신의 키는 꽤 큰 편으로 보이지만 장사꾼 노릇도 그럴 듯하게 하지 못해 항상 누군가에게 빌붙어서 밥을 얻어먹는 백수 신세였다. 이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거의 한신을 겁쟁이로 업신여기면서 싫어했다. 그럼에도 큰 뜻을 품고 검을 항상 차고 다녔다.

그러다가 한신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한신은 장례를 치를 비용도 없었다. 그러나 물기 없는 높은 곳에 어머니를 매장하여 마치 그 주위에 1만여 가를 둔 것 같이 했는데, 사마천(司馬遷)은 자신이 직접 회음에 가보니 진짜로 그러하였고, 한신이 그때 상황은 막장이었어도 뜻은 높은 곳에 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묏자리를 잘 쓴다고 해서 당장 없는 밥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비참한 꼴이 된 한신은 알고 지내던 정장(亭長)의 신세를 지며 밥을 빌어먹었는데, 정장의 아내가 한신을 대단히 싫어해 일부러 새벽에 남편의 밥을 지어 먹여 한신이 빈대짓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신은 그 뜻을 알고 정장과 절교하고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딱히 밥을 벌어 먹을 수 있는 재주도 없고, 굶주린 채 낚시터를 어슬렁거렸는데, 빨래 하던 아낙네가 그 모습을 불쌍히 여겨 한신에게 밥을 주었고, 한신은 그걸 얻어먹으면서 굶주림을 해결했다. 며칠을 이렇게 얻어먹자, 한신은 워낙 고마워서 아낙네에게 이렇게 약속하였다.
내가 나중에 꼭 베풀어준 은덕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아낙네는 성을 내었다.
대장부가 스스로 살아가지 못해 내가 왕손(王孫)[3]을 불쌍히 여겨 밥을 준 것이니 어찌 보답을 바라리오![4]

그러나 훗날 한신은 진짜로 약속을 지켰다.

1.2. 과하지욕(胯下之辱)

이렇게 동네 아낙네들에게도 무시당할 지경인데, 젊은 사람들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어느 날 회음의 젊은 사람들 중 불량배 한 명이 대놓고 한신을 욕하면서 소리쳤다.
네가 체격이 좋고 칼도 즐겨 차지만 속은 겁쟁이가 아니더냐? 네가 용기가 있으면 나를 찌르고 이 길을 지나가고, 없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 지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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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은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허리를 굽혀서 가랑이 사이를 질질 지나갔다. 마침 길거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는 비웃음을 터뜨리면서 한신에게 겁쟁이라고 놀려대었다. 이 사건으로 한신은 고향에서 그야말로 조롱거리 신세로 떨어져버렸다. 용저가 훗날 이 이야기들을 들먹인 걸 보면 어지간히 유명한 일이었던 듯 하다. 한신이 떠들고 다녔을 리는 없을 테고.[5][6]

2. 한(漢)의 대장군

2.1. 죽을 지경에서 벗어나다

답이 없는 찌질이가 되어 막장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던 한신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 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BC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하여 진승·오광의 난이 발발했고, 진승은 장초(張楚)를 건국했다.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봉기에 동참했다. 이때, 오현(吳縣)에서 거병한 항량(項梁) 역시 북상하여 회수(淮水)를 건너던 참이었다. 한신은 칼을 하나 차고 서둘러 항량에게 달려가 그 부하가 되었다.

그러나 항량의 부하가 되었다고 해서 무슨 반전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한신은 철저하게 이름이 묻혀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훗날 용저가 한신의 일화들을 들먹인 걸 보면 오히려 안 좋은 쪽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곧 항량이 전사하고 그의 조카 항우(項羽)가 그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한신은 집극랑(執戟郞)[7] 자리에 임명되었다.

상황이 조금 나아진 듯 싶기도 했지만, 한신이 무슨 제안을 올릴 때마다 항우는 철저하게 무시했고, 어떤 계책도 써주지 않았다. 결국 참다 못한 한신은 항우에게서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8] 마침 그 시기는 유방 홍문연(鴻門宴)의 일이 있은 후, 천하의 벽지인 파촉(巴蜀)으로 터벅터벅 들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한신은 그 행렬에 합류해 한군에 귀속했다.

홍문의 연회 이후 파촉 땅으로 떠나는 유방을 따라 떠난 한신의 일화는 유명하고, 바로 여기서 유방과 한신의 첫 만남이 이어졌다. 다만, '초한춘추'(楚漢春秋)라는 사료를 참조하면 한신과 유방간의 '접촉'은 이때보다 좀 더 이전이다.
패왕이 홍문에서 몸을 빼내 샛길을 따라 군중에 도달했다. 이에 한신과 장량이 항왕의 군문에 이렇게 아뢰었다. "패공께서 신에게 백벽 한 짝을 받들어 대왕 족하께 바치고, 옥두 한 짝을 대장군 족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부( 범증)는 옥두를 받아 땅에 놓고는 극(戟)을 쳐들어 이를 깨버렸다.

초한춘추는 바로 이 초한전쟁 당대의 인물인 육가(陸賈)라는 사람이 쓴 그 시대의 1차 사료로, 현재는 소실 되었지만 여러 사료에 파편적으로나마 약간의 원본이 남아 있다. 그 유명한 '홍문연' 자리에서 유방과 항우 뿐만 아니라 한신 역시 한 구석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러나, 한군에서도 한신의 자리는 없었고 거기서도 이름을 날리지 못한 채 곡식 창고를 관리하는 '연오'라는 낮은 직책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 어떤 죄에 연루되어 한신은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고[9] 한신과 같이 있던 죄수들도 모두 끌려와 눈 앞에서 차례로 처형당했다. 한신 앞으로 13명이 모두 처형되고 이제 한신의 차례가 되자, 한신도 이렇게 죽기는 어이가 없었는지 하늘을 바라보다가 마침 눈 앞에 있는 하후영(夏侯嬰)에게 소리쳤다.
“왕께서는 천하를 취하지 않으실 것입니까? 어찌 장사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하후영이 듣기에 실로 기묘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우선 한신이 죽지 않게 했고, 이야기를 해보니 이 사람이 키도 크고 허우대도 좋고 해서 유방에게 한신을 추천했다. 말을 들은 유방은 한신에게 전군의 군량의 수급, 운송, 관리를 담당하는 치속도위(治粟都尉) 자리를 주었지만,[10] 아직은 한신이 별로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11]

2.2. 소하가 천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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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소하는 한신과 몇 번 대화를 해볼 기회가 있었고, 말을 나눠 본 후 이 사람이 생각보다 뛰어난 인물임을 알아차렸다.

이 당시 한나라는 대단히 상황이 좋지 못했는데, 터벅터벅 파촉으로 걸어온 유방의 군대가 산시성 남정(南鄭)에 이를 무렵이 되자 이 벽지를 견디지 못하고 향수병에 빠져버리는 바람에 하루에도 장수 수십 명이 도망가버리는 막장스런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머나먼 지역에 고향을 두고 있는 병사들도 매일매일 동쪽의 고향에 돌아갈 생각으로 노래만을 불러대었다.

그리고 그렇게 도망가는 장수들 중에는 한신도 있었다. 어차피 여기 있어봐야 유방은 자기를 써주지도 않을 것이니 다른 나라로나 가자고 여긴 것. 이 사실을 들은 소하는 미처 사정을 고할 겨를도 없이 한신의 뒤를 쫓아 추격했다.

한편 유방은 소하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소하마저 나를 버리고 가는구나라는 생각에 두 팔을 잃은 것처럼 낙담하고 있었다. 그러다 소하가 돌아오자 기쁘기도 하고 분통이 터지기도 해서 연유를 물었는데, 소하는 한신을 쫓아간 사실을 말했다. 이에 유방은 지금껏 도망 간 장수가 많았지만 소하는 한번도 붙잡으러 간 적이 없었다며 한신 같은 이를 붙잡으러 갔다는 말은 거짓이라 추궁하자 소하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를 대장으로 임명할 것을 권했다.
"여러 장수들 같으면 얻기 쉽지만, 한신 같은 자라면 나라 안의 인물 중 그에 비견할 자가 없습니다. 왕께서 꼭 오래토록 한중(漢中)의 왕이 되려고만 하신다면, 한신을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천하를 다투고자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면 더불어 대사(大事)를 도모할 만한 자가 없습니다. 원컨대 왕께선 편안히 결정하십시오."

이때 한신은 그저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하찮은 인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소하는 한신의 진면목을 완전히 꿰뚫어 본 것이다. 유방 역시 이런 벽지에 처박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소하의 말대로 한신을 장수로 쓰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소하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비록 장수로 삼으신다 해도 한신은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유방은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소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제안을 했다.
"대왕은 평소에 오만무례하십니다. 오늘 대장군을 임명한다고 하시면서 대장 될 사람에 대한 태도가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하십니다. 이런 자세로 인해 한신 같은 호걸들이 대왕 곁을 떠나려고 합니다.[12] 왕께서 한신을 대장군에 임명하시려고 한다면, 필시 좋은 날을 택해 목욕재계(沐浴齋戒) 하신 다음, 단을 세우고 예를 갖추어 의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에 유방은 소하의 제안대로 단을 세우고 대장군을 임명하는 예를 갖추었다. 그러자 번쾌나 조참과 같이 유방 곁에서부터 시작한 개국공신급에 가까운 장수들이 " 야 신난다! 보나마나 내가 대장군이 되겠지?" 같이 기대감에 부풀어 식장에 모였다. 정작 모이고 보니 웬 키만 큰 놈이 단에 오르고 있었다. 이에 장수나 병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경악했다고 한다. 사기 회음후열전의 표현을 빌리면, 한신이 대장이 되자, 일군(一軍)이 모두 놀랐다.고 나온다.
諸將皆喜(제장개희)
여러 장수들도 모두 기뻐 하면서,

人人各自以爲得大將(인인각자이위득대장)
사람이면 사람마다 각기 자신이 대장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至拜大將(지배대장) 乃韓信也(내한신야)
대장이 배수되자, 이에 그가 한신이니,

一軍皆驚(일군개경)
군사들이 모두 놀랐다.

유방의 용인술에 대해 비범함을 보여주는 대목인데, 만약 유방이 파촉에 처박혀 있으려거든 내부 단속이 중요하기 때문에 굳이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아서 분란의 씨앗을 심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유방의 야망, 혹은 치지 않으면 당할 수 있다는 날카로운 위기 의식을 보여준다. 둘째로, 도박이긴 하지만 실제로 유방은 저평가 되던 한신에게 걸어볼 정도로 답이 없던 상황이었다. 유방의 부하들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항우와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0에 가까운 확률이기 때문에 도박도 걸어 볼 만하다. 셋째로, 이 도박에서 소하와의 관계이다. 유방은 최측근이자 우수한 내정관련 참모인 소하가 없으면 자신의 세력을 이끌어나가기 몹시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소하의 사람됨과 능력을 믿고 있었다. 실제로 소하는 유방과 항우의 전쟁 중에 배신은커녕 옛 진나라의 역량을 싹싹 긁어모아 유방을 뒷바라지한 인물이기에 소하 없이 내 야망이나 위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는 판단이라면 도박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부하가 자신이 오만무례하다는 혹평을 면전에다 대고 했는데도, 무례하다고 화를 내기는커녕 그의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여 실행하는 모습 또한 비범한 면이다. 훗날 걸주드립도 웃어넘긴 거 보면 확실히 대범하다 가장 놀라운 부분은 하후영이나 소하 말고는 알지도 못하는 한신을 대장군으로 만들고도 내부를 수습할 수 있던 통솔력이다.

시기상으로도, 한신의 기용은 대단히 파격적이었다. 유방이 관중에서 파촉으로 향했을 때가 기원전 206년 2월, 후술하겠지만 유방이 출전 준비를 끝내고 삼진을 공격했을 때가 같은 해 8월이다. 관중에서 파촉으로 이동한 시간과 새로 기용한 한신의 지휘 아래 전쟁 준비를 한 기간을 고려하면 한신이 이 대장군 직에 임명된 것은 한신이 유방에 합류한 지 길어야 2~3달 남짓이다. 진영에 들어온 지 몇 달 안 된 외부 인사를 대장군이라는 최고위 직위에 임명한 것이다.

2.3. 유방에게 진면목을 보이다

이렇게 임명식이 끝나고 난 뒤, 유방은 따로 한신을 불러들였다. 소하가 하도 칭찬해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항우에 대적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벽지인 파촉지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일단 대장군으로 뽑았으니 뭔가 방법이라도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신은 감사의 예를 올리며 유방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대왕의 적은 항왕(項王)이 아니겠습니까? 대왕께선 스스로 용맹함과 날램, 인자함과 강인함을 항왕과 비교해보신다면 어떠십니까?"

이 시기 항우는 거록전투에서 진나라군을 격파하고, 모든 제후들을 영향권 아래 두고 있는 그야말로 전성기였다. 유방은 살짝 머뭇거렸지만 일전에 장량도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기에 유방은 솔직하게 " 내가 다 항우만 못하다."고 인정했고, 이에 한신은 유방에게 두 번 절을 올리고 유방을 치하하며 말했다.
"저도 대왕께서 항왕보다 못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항왕을 섬긴 적이 있으니 그의 됨됨이를 말해보겠습니다. 항왕이 분노하여 소리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나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현명한 장수를 임명하여 맡기지 못하니 이는 필부의 용맹에 불과합니다. 항왕은 다른 사람에게 공손하고 화기애애하게 말을 하며 다른 사람이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눠주지만, 다른 사람이 공을 세워 마땅히 봉작(封爵)할 때는 아쉬워하며 어쩔 수 없이 인수를 새겨주니, 이는 아녀자의 인자함에 불과합니다.

항왕이 비록 천하를 제패하고 제후들을 신하로 삼았으나, 관중(關中)에 머물지 않고 팽성(彭城)을 도읍으로 정했습니다. 또 의제(義帝)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제후들을 고르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제후들은 항왕이 의제를 강남(江南)으로 쫓아낸 것을 보고는 각자 돌아가서 주인을 쫓아내고 좋은 땅을 차지해 스스로 왕을 칭했습니다.

항왕은 지나가는 곳마다 잔멸(殘滅)에 잔멸을 거듭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가득하며, 백성들이 스스로 항왕에게 의탁한 것이 아니라 그 위세에 겁을 먹어 강제로 복종했을 뿐입니다. 비록 패왕(覇王)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천하의 인심을 잃었으니, 그래서 강성함이 쉽게 약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이를 바로잡고 천하에서 무용(武勇)이 있는 자를 임명한다면 어찌 주살하지 못하겠습니까! 천하의 성읍을 공신들에게 나눠준다면 어찌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의병의 마음을 쫓아 동쪽으로 거병한다면 무엇인들 무너뜨리지 못하겠습니까! 또 삼진(三秦)의 왕들은 진(秦)의 장수가 되었는데, 오랫동안 진의 병사들을 거느려 죽은 자는 헤아릴 수 없고, 또한 그 무리를 속여 제후들을 항복시켰습니다. 항왕이 신안(新安)에 이르렀을 때 항복한 진나라 병졸 20여만 명을 속여서 파묻고, 오직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만 살려주었습니다.

진의 부형들은 이 세 사람을 골수에 사무치도록 원망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무관(武關)에 입성하여 백성들에게 추호도 해를 끼치지 않고, 가혹한 진의 법을 폐지하고, 백성들에게 약법 3장을 약속하여 진나라의 백성들은 대왕께서 진나라의 왕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다른 제후들과의 분봉에서 대왕께서 당연히 관중의 왕이 되어야 하며, 관중의 민호(民戶)들도 이를 알고 있습니다.

왕께서 관중을 빼앗기고 촉으로 쫓겨나 모든 진의 백성들이 한탄하고 있으니, 이제 왕께서 동쪽으로 거병하여 격문을 돌린다면 삼진은 저절로 평정될 것입니다."

이 말은 파촉에 처박혀 항우보다 모든 면에서 불리한 자신이 그에게 맞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뇌하던 유방에게, 그야말로 막힌 곳을 뻥 뚫어주는 것처럼 시원한 말이었다.[13] 유방은 한신의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면서, 자신이 한신을 너무 늦게 얻었다고 여겼다. 유방은 마침내 한신의 능력을 완전히 신뢰했고, 한신은 유방의 신뢰를 바탕으로 작전을 수립해 각 장수들이 움직일 곳을 정하여 동진하기 시작한다.

3. 전설의 시작

3.1. 삼진 정벌과 관중 평정

마침내 BC 206년 8월, 한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군이 동진하기 위해서는 진령산맥(秦嶺山脈)을 넘어 관중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이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적이 진나라의 명장이었던 장한이었다. 이는 진(秦)을 멸한 후 항우가 각 제후들에게 분봉할 때 유방을 한중의 왕으로 삼고 파촉의 벽지에 몰아 넣고 그를 견제하기 위해 옛 진나라 땅에는 옛 진나라의 장수이자 충성을 맹세한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를 각각 옹왕(雍王), 새왕(塞王), 적왕(翟王)으로 삼아 진나라 땅을 3등분하여 삼진 땅에 봉하여 군을 주둔시킴으로써 유방이 주둔한 파촉을 견제하며 유방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장한에게 관중의 8백 리 진천(秦川)을 봉해 유방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즉, 이곳에 장한을 배치했다는 것 자체가 유방을 봉쇄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 유방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파촉에서 나가지 못할까 두려워 했고 한신을 등용하기 전까지도 딱히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허나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한 뒤 한신의 제안에 따라 장한을 공격했는데 이때 한신이 제안한 전술은 성동격서에 기초한 것으로서 당시 유방은 파촉에 들어올 때 항우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장량의 건의에 따라 여러 절벽 등에 만들어놓은 잔도(棧道)를 모두 불태웠는데 이 상황을 이용한 것이었다. 한군이 잔도를 모두 불태웠으니 장한은 당연히 한군이 나오려면 그 험한 환경의 잔도를 복구하는데 최소한 년 단위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으며 잔도를 수리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적당히 주기적으로 정찰을 보내 감시하면 대비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들과 장한의 저런 심리를 이용하여 잔도를 대대적으로 고치는 모습을 보여줘 장한의 주의를 끌고 다른 길을 통해 몰래 기습을 했는데 이때 나온 말이 명수잔도(明修棧道) 암도진창(暗度陳倉)[14]이다. 이에 대해 흔히들 그냥 '잔도를 고치는 척하며 다른 길로 나아갔다'라고만 알고 있으며 그 진격로나 길 등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 과정은 당시 한군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었고 한군의 관중 진출에 중요한 고비인데 이에 대한 자료나 정보는 찾아보기 힘들다.[15]

파일:환정삼진.png
당시 한군의 진격로를 살펴보면 과연 옹나라에서 방비하지 않은 옛 길이라는 것이 있었는지가 의심스럽다. 위의 그림을 보면 진창 서쪽에서 행해진 작전이 꽤 있음을 볼 수 있다. 장한이 대비하지 않은 옛 길을 통해서 진창을 급습한 것이라면 옹나라의 진창에서 군대와 교전하는 것은 이상하다. 옛 길에 대비가 미약하다면 굳이 진창에 가기 전에 정리해야 할 만큼의 군대가 있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더구나 옹군은 한군이 진격하는 것에 맞서 싸우려는 움직임까지 보여준다. 이를 통해 봤을 때 한나라의 진창 진격은 옹나라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기습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도리어 옹나라도 한나라가 그쪽으로 올 것을 알고 준비는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장한이 원래 거느린 군대는 항우 신안대학살로 인해 하나도 남지 않았고 막 옹나라 왕으로 와서 8달 동안 뽑은 군사들과 장한이 진나라 장수로서 함곡관을 나올 때 남아서 진나라 각 지방을 지키던 군사들로서 실전 경험이 이미 충분히 쌓인 한나라 군대를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참고로 설명하자면 한중(漢中)에서 관중(关中)으로 가는 길을 알아야 한다. 일단 관중으로 나가려면 한중의 북쪽을 통해 나아가야 하는데 이 한중의 북쪽과 관중 사이에는 해발 3,000m의 거대한 진령산맥(秦嶺山脈)이 있다. 훗날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북벌을 할 때 항상 넘어야 했던 곳인데 진령산맥은 매우 험준한 곳으로 긴 산맥 중에서도 제대로 된 길이 거의 없었으며 최단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잔도를 만들어 넘어야했다. 군대를 움직이기 위해 쓸 수 있는 길은 별로 없었으며 당시의 한중은 거의 개발되지 않아서 그나마 있는 길들 또한 제대로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단 가장 동쪽에는 자오곡(子午谷)이 있는데, 후에 촉한(蜀漢)의 위연(魏延)이 북벌 당시 제안했던 자오곡계책의 길이 바로 이 길이다. 이 길의 북쪽 구역을 자곡(子谷), 남쪽 구역을 오곡(午谷)이라 하여 자오곡(子午谷)이라 한다. 자곡의 입구가 장안(長安) 남쪽에 있어서[16] 당시에는 함양으로 가는 길이기도 했으며 간혹 한신이 이 자오곡을 통해 장한을 습격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길은 한중에서 바로 장안으로 가는 길이라 그 길이가 660리에 달하고 높은 산과 계곡들로 이루어져 거의 죽음의 길이라 불리었으며, 대규모 병력을 움직일 수 없고 결정적으로 아직 개발조차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시기는 진한교체기로서 장안성은 유방이 항우를 쓰러뜨리고 한나라를 세운 후에 지었으며 함양은 항우에 의해 불태워져 폐허가 되었기에 출격하더라도 거의 황량한 벌판이었다. 중간에는 당낙도(儻駱道), 즉 낙곡이 있었는데 계곡 길이가 420리로 장한이 도읍으로 둔 폐구와 가까워서 이 길로 나아가면 가장 위협적이었지만 당낙도 또한 길이 험한 데다가 자오도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개발되어 있지 않아 대군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서쪽에는 포야도(褒斜道)가 있는데 이 포야도는 관중으로 가는 길 중 상대적으로 넓고 평탄했으며 길이가 470리로 당락곡보다 조금 더 먼 길이다. 남쪽 구역을 포곡(褒谷)이라 하였고 북쪽 구역을 사곡(斜谷)이라 하였는데 사곡(야곡)의 입구는 미현의 남쪽으로 진한교체기 당시 이 길은 관중에서 한중으로 들어가는 주요 교통로로서 유방도 이 길을 통해 한중으로 들어왔는데 유방이 군을 이끌고 들어간 것처럼 대군을 이끌기에 좋은 길이었다. 그런데 장량의 계책에 따라 포야도의 잔도를 모두 불태워서 포야도를 통해 출병하려면 반드시 잔도를 복구해야 했다. 그리고 포야도의 서쪽에 진령을 통해 북쪽으로 이동하면 진창(陳倉)에 도달하는 길이 또 하나 있는데 일찍이 관중에서 한중을 드나들 때 사용되던 주요 길이었으나 포야도가 개통되면서 점차 버려지고 잊혀졌다. 이 길이 바로 고도(故道)인데 당시에는 진창으로 가는 길이라 하여 진창고도(陳倉故道)라 불렸다. 포야도만큼 바른 길은 아니지만 군을 이동시키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양호했으며 포야도에 의해 가려진 길이라 장한 또한 경계를 별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B.C 206년 6월~7월 사이 한신은 병사와 백성들을 대거 동원하여 포야도의 잔도를 복구하는 작업이자 기만책을 거하게 펼치며 장한의 주의를 포야도 쪽으로 집중시켰다. 일단 포야도의 잔도 수리가 장한을 속이기 위한 수단이기는 하였으나 군을 움직이고 물자를 나르는 등 보급을 위해서는 반드시 잔도를 복구해야만 했기에 기만책이여도 착실하게 행하였고 이것이 장한을 더욱더 쉽게 속일 수 있는 요소였다. 하여 장한은 군을 사곡 쪽에 집중시켰으나 잔도 복구의 시일과 유방의 세력 안정, 복구 후에도 한군은 지쳐있을 거라 생각하여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결국 그 해 8월, 한신은 충분한 시간차를 두어 장한을 안심시킨 후 몰래 진창고도(陳倉故道)를 통해 군을 이끌고 진창을 기습하였다. 진창은 교통이 발달하여 진나라 시절 최초의 현이 설치된 곳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되어 옛날부터 성곽을 축조하고 많은 물자가 비축된 곳이었는데 한군은 이곳을 기습해 대량의 군량과 군수품을 얻었고 진창의 견고한 성곽을 함락시켜 대승을 거둔 덕분에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에 장한은 한군을 막기 위해 진창(陳倉)으로 달려나왔으나 패했고 이후 지금의 섬서성[17] 건현(乾縣)인 호치(好畤)로 물러나서 다시 싸웠으나 여기서도 또 다시 패배했다. 그리하여 장한은 결국 폐구(廢丘)로 물러났다. 이후 장한을 폐구에서 포위한 채 유방은 그 사이에 다른 장수들을 시켜 1달 사이 옹 땅을 모조리 평정했다. 그리고 폐구에 포위된 사이 사마흔과 동예의 구원을 막기 위해 이들도 패배시킨 후 항복을 받았으며 이때 자신의 주군이었던 항우는 제나라 정벌에 발이 묶여 정창을 한왕으로 삼아 유방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한신( 한왕 신)[18]이 정창을 격파하여 한나라 땅을 탈취하였고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이 항복하자 유방은 그곳에 하남군을 두었다. 장한의 동생 장평(章平)과 조분(趙賁)은 농서와 북지로 퇴각해 저항하며 항우의 지원을 기다렸으나 한군이 농서를 공략하고 이듬해 정월, 북지를 공략해서 장한의 동생 장평을 생포하고 후에 폐구성을 수공으로 수몰시키자 장한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유방은 관중 지역을 모조리 평정했다.

이 과정에서 사마흔, 동예, 장한, 신양 등을 격파한 공을 모조리 한신의 공적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1가지 알아둘 점은 이때의 공적은 한신뿐만 아니라 한군 전체에게 공적이 있다는 점이다. 회음후 열전에서는 이 진격 과정이 잘 나와있지 않은데 예를 들면 번쾌는 폐구 수공에서 활약했고, 주발은 함양 일대를 장악했으며, 역상은 북지군을 함락시켰다. 즉, 당시 한신의 지위가 대장군이었기에 삼진 정벌과 관중 공략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분명 한신이지만 총지휘는 유방이 맡았고 빠른 시일 내에 여러 곳을 공략해야 하는 과정에서[19] 직접 성이나 군을 공격하거나 함락시키는 데 여러 장수들이 나섰어야 했으며 이러한 움직임에서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장수들의 공 또한 크다는 것이다. 사실 잔도를 고치며 위장하는 부분도 <사기> 등에서는 딱히 언급이 없으며[20] 단지 우회로를 통해 장한을 쳤다고 나와있는데 이 우회로를 제공한 사람도 한신이 아니라 수창정후 조연이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암도진창 자체가 대부분 허구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21] <사기>에 한군의 우회공격에 대한 얘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본기나 열전이 아닌 고조공신후자연표에 107위 공신으로 나오는 수창정후 조연의 공적으로 나온다.
"알자로서 한왕 원년(기원전 206년) 처음 한중에서 일어났는데 옹나라 군대가 진을 막자, 황상에게 아뢨다. 황상은 돌아가고자 했는데, (조)연의 말을 좇아 다른 길을 내니, 길이 통했다. 나중에 하간수가 됐고, 진희가 반란을 일으키자, 도위 상여를 죽였다. 이 공으로 열후가 돼 1400호를 받았다."

3.2. 팽성대전, 한군의 대패 - 한신의 책임소재는?

이후 유방은 위왕(魏王) 표(豹), 은왕(殷王) 사마앙(司馬卬) 등을 격파하고 이들의 항복을 받아내며 순조롭게 진격을 거듭했다. 당시 항우는 북쪽에서 제나라와 싸우고 있었고, 유방은 초 의제를 암살한 서초의 팽왕을 친다는 명분을 앞세워 다섯 제후를 끌어모아 무려 56만이라는 대군으로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彭城)에 진입했다. 이때, 제나라에서 싸움이 끝나지 않았던 항우는 팽성 함락 소식을 듣고 제나라에 병력 다수 남기되 최정예 3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급히 달려와 한군을 그야말로 개박살냈다. 한군은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서 10만이 죽고 수수(睢水)에서 또 10만, 도합 30만 이상이 죽었다. 그야말로 처참할 정도의 패전을 당한 것.

팽성대전에 대해서는 유방 때문에 한신이 공적을 세우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한신이 공적을 세우는 것을 시기했거나, 아니면 유방 스스로가 다 이겼다고 생각해서 한신 말을 듣지 않거나 하는 식으로 한신의 군지휘권을 가로막았고 심하게는 혈통에만 집착해 위나라 왕 위표를 총대장으로 임명했다는 인식이다. 이후에 유방이 크게 자폭한 다음 한신이 이를 겨우 수습했다는 것이다.

다만 사기나 한서 같은 정사 기록에서는 이와 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소설 초한지 등에서는 유방의 쪼잔함과 방심(...)을 강조하기 위해 위와 같은 에피소드가 첨가되어 있고,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는 유방이 박탈하고 자시고 이전에 팽성대전 당시엔 한신에게 지휘권 자체가 없었다. 한신이 총 지휘권을 가지게 된 것은 팽성전투 이후 유방이 장량에게 문의하여 얻은 답변을 기초로 영포와 팽월을 끌어들이고, 그와 별개로 휘하 장수인 한신에게 일군을 주어 조와 대를 공략하도록 명령한 뒤였기 때문이다. 팽성대전에서 끌어모은 제후연합군은 유방이 직접 통솔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유방에게 전권이 있었으며, 한신은 곁에서 유방을 보좌했거나 혹은 유방 휘하에서 일군을 담당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일부에서 한신을 미화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팽성대전 당시에 한신이 팽성에 없었다 주장하기도 힘들다. 고조본기, 항우본기, 회음후 열전, 하후영 열전, 관영 열전, 유후 세가, 조상국 세가, 한서 고제기, 한서 한신전 등의 역사 기록을 살펴볼 경우 한신이 따로 움직여서 행동했다고 보기 힘든 탓이다.

요컨대 이 팽성대전에서 한신은 별다른 지휘권이 없었으며, 유방을 필두로 한 제후국 전부가 항우에게 영혼까지 털린 결과라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이를 두고 한신도 항우에게 털렸다거나, 쪼잔한 유방이 한신을 물먹인 결과가 팽성대전의 패배라는 건 다소 어불성설인 셈. 굳이 말하자면 한신은 항우와 싸운다 운운하기 이전에 유방이 있던 자리에선 따로 병권을 쥐지 못했고[22], 항우는 팽성을 점거하고 방심한 연합군을 쳐서 단번에 격퇴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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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면 당시 한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묻는다면 결론적으로 그는 팽성대전의 패잔병을 수습하고 있었다. 이후 형양에서 유방과 만난 한신은 초군을 격파해 그 진군을 저지했고, 덕분에 유방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여기서 한신이 패잔병을 수습한 후 유방과 만났다는 것에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팽성에서 패배한 후 남은 병사들을 수습하고 서쪽으로 향하다가 유방을 만났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전술했다시피 한신이 팽성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근거는 달리 존재하지 않으며, 만일 한신이 팽성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패잔병을 수습한 게 아니라 지원군을 데리고 왔다 기록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회음후열전 등에서도 유방과 한신이 형양에서 만나 적을 격파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항우 본기나 하후영 열전 등에서도 유방이 형양에 도착한 뒤에 패잔병들을 모두 모을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관중의 인력을 모두 끌어모아 형양으로 미친 듯이 보내고 있던 소하 덕택에 유방을 포함한 한나라는 태세를 추스를 수 있었다.

참고로 이후 벌어진 경색 전투(京索之战)에서는 기병대 관영의 활약이 컸다.[23]

여기까지 한신의 모습을 정리해 보자면, 분명 전략적인 식견은 있었으나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처럼 독보적으로 엄청난 활약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애초에 활약할 무대도 주어지지 않았다. 병권은 없었지만 일단 대장군 직책을 맡고는 있었으니 팽성대전의 참패에도 명목상의 책임 정도는 물을 수 있을 테고, 패잔병들을 수습해 반격하긴 했지만 수많은 공신들을 제치고 대장군에 임명된 장수의 활약이라 보기엔 부족한 모습인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신의 진가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3.3. 위표를 박살내다

팽성에서 한군이 처참하게 박살나자, 항우의 지릴 듯한 포스에 정신이 번쩍 든 제후들은 죄다 한나라에서 초나라로 편을 갈아타기 시작했다. 새왕(塞王) 사마흔(司馬欣)과 동예(董翳)가 모두 항우에게 도망쳤으며, 제·조·위나라가 모두 유방을 배신하고 항우에 붙어먹었다. 특히, 위왕 위표(魏豹)는 부모의 병문안을 가야 한다고 구라(...)를 치고는, 유방의 곁을 떠나자마자 항우의 편으로 갈아탔다. 뭐하는 놈이야 이거

이때, 유방은 위표를 다시 이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역이기(酈食其)를 보내 설득을 해봤지만, 통하지 않았다.[24] 그러자 유방은 무력 행사로 나가기로 하고, 한신을 좌승상으로 임명해서 위표를 치게 했다.

당시 역이기는 위표를 회유하는 데 실패했지만 위나라를 쳐야 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위군의 정보를 수집하여 돌아왔는데 유방이 역이기에게 물었다.
"적의 대장이 누구이던가?"

그러자 역이기가 대답했다.
" 백직(栢直)이라는 인물이옵니다."

그 말을 들은 유방은 크게 기뻐하고 웃으며 "그놈은 젖비린내나는 더벅머리일 뿐이다. 그놈이 어찌 한신을 당해낸단 말이냐?"라고 말하며 좋아했다. 여기서 구상유취(口尙乳臭)가 유래했다.

그리고 위표를 치기 위해 군을 이끌고 가던 한신 또한 위나라에 대한 정보를 알기 위해 역이기를 만났는데, 한신은 주숙(周叔)이라는 자를 경계하고 있어서 역이기에게 혹시 위표가 주숙을 대장으로 삼지 않았냐고 재차 물었다. 역이기가 위표가 백직을 대장으로 삼았다고 재차 답해주자, 한신은 "어린 놈일 뿐이군!"이라고 말하며 좋아했다. 참고로 위표와 백직 중 누구를 어린 놈이라 표현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때, 위표는 포판(蒲坂)이라는 곳에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임진(臨晉)쪽으로 한신이 강을 건너 올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한신은 일부러 군을 나누어 임진 쪽에 위표의 부대를 붙잡아 둘 일부 군을 두고 대군으로 보이게 끔 하여 도강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기만술로 속이는 한편, 그 사이에 한신 자신과 실질적인 주력은 포판보다 더 북쪽의 하양(夏陽)으로 이동시켜 목앵부(항아리를 나무에 엮어 만든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서 위나라의 수도 안읍(安邑)을 공격했다.

한편 대치중이던 위표는 갑작스런 한군의 공격에 수도가 함락당했다는 소식에 경악해서 빠르게 군대를 돌려 안읍으로 돌아가지만, 임진 쪽에서 적의 주의를 끌던 한나라군은 당연히 순식간에 도하하여 위나라군의 뒤를 쳤고, 안읍으로 갔던 병력 역시 위표를 공격했다. 앞뒤에서 공격받는 협공상황이 벌어지자 위나라군은 단박에 무너지고 총사령관 위표는 사로잡혔다.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나라 하나를 멸망시키고, 적 군주를 사로잡은 것. 안읍 전투에서 위나라를 평정한 한신은 그곳에 하동군을 설치했다.

4. 한신, 북벌을 시작하다

하동을 평정한 한신은 유방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원컨대 3만 병사를 더해주시면, 신이 북으로 연(燕)‧조를 잡고, 동으로 제를 치고, 남으로는 초의 보급로를 끊은 후, 서쪽에서 대왕과 형양에서 만나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장량 역시 이를 권하자, 유방은 장이(張耳)를 감군으로 삼아 병사 3만과 함께 보내주었다. 한신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유방과는 별개로 장이, 조참을 옆에 둔 채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4.1. 정형 전투(井陘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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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이 위표를 격파했을 때가 8월이었다. 그런데 9월 무렵, 한신은 대(代)를 평정하고 있었다. 본래 대나라는 진여(陳餘)의 땅이었으나 진여가 조나라에서 조왕을 보필하고 있었기에 대나라는 그의 측근이었던 재상 하열(夏說)이 지키고 있었다. 한신의 군대가 몰려오자 하열이 한군을 막아보려 안간힘을 써봤지만, 연여(閼與)에서 대패하고 한신에게 사로잡혔다. 다른 사서인 조상국세가에서는 하열이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나라 정벌의 과정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 어떻게 전투가 이루어졌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뒤에 광무군 이좌거(李左車)가 계책을 내놓을 때 '한신이 연여(閼與) 땅을 피로 물들였다 합니다.'라고 말하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한군의 일방적인 공세에 대나라의 군대가 처참히 깨진 것으로 보인다.[25]

그런데 이 무렵, 유방 쪽은 항우가 성고와 형양 지대를 계속해서 쳐들어왔고 간신히 팽월과의 연계로 번번이 위기를 빠져나가고는 있었지만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에 유방은 한신의 부대에서 정예병들을 차출하여 형양으로 데려가 초군을 막도록 했다. 하여 한신의 부대는 규모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정예병이 모두 빠지고 신병들과 위나라, 대나라에서 군사를 개편한 오합지졸의 군대가 되었다. 게다가 조나라 정벌을 위해 조참에게 따로 군사를 맡겨 오성(鄔城)에 주둔한 조나라의 별장 척장군(戚將軍)을 공격케 했는데, 이후 조참의 군대는 유방의 군대에 합류했다. 또한, 대나라에서의 교전에서도 사상자가 있었을 것이며 대나라 땅에도 군을 주둔시켜야 했기 때문에 한신의 군세는 3만은커녕 실질적으로는 1~2만 내외의 오합지졸 군대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신과 장이 등은 이러한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동쪽 정형(井陘)으로 나아가 조나라를 격파하려고 했다. 이에 조왕 헐(歇)과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등은 호왈 20만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한신을 막으려고 했다. 이때, 조나라의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는 조왕과 진여(陳餘)에게 자신의 계책을 말했다.
듣자하니, 한의 장수 한신이 서하(西河)를 건너, 위왕을 사로잡고 하열을 붙잡았으며, 연여(閼與) 땅을 피로 물들였다 합니다. 오늘 다시 장이(張耳)의 보좌를 받은 한신은 조나라를 함락시키려는 계책을 의논하고 있다니, 승세를 타고 나라를 떠나 멀리서 싸우는 그들의 예봉(銳鋒)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천 리 밖에서 군량을 운송하여 먹는 군사들은 그 얼굴에 주린 기색을 띄우고, 또한 장작을 패고 풀을 베어 불을 지펴야만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군사들은 항상 굶주려 있다.'고 합니다. 지금 정형의 길은 수레가 굴러 다닐 수 없고, 기병이 대열을 이룰 수 없습니다. 수백 리를 행군하였으니, 그 군대의 군량은 반드시 뒤에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족하(足下)께서는 신에게 뛰어난 병사(奇兵) 3만을 빌려주시면, 샛길을 따라 그 수송대를 끊겠습니다. 족하께서는 도랑을 깊이 파고 성채를 높게 쌓고 적과 더불어 싸우지 마십시오. 적은 앞에서는 싸울 수 없고, 퇴각해서는 돌아갈 수 없으니, 신이 병사로 그 배후를 끊고, 들판에서 약탈할 만한 식량을 치워버리면, 열흘도 지나지 않아 두 장군인 한신과 장이의 머리를 휘하에 바칠 수 있습니다. 원컨대 군(君)께서는 신의 계책에 유의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적의 두 장군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즉, 방어 태세로 일관하면서, 따로 별동대를 뽑아 적의 길어진 보급로를 차단해서 박살을 내버리자는 것이었지만, 진여는 싸움은 항상 정정당당하게 해야 하는 것이라는 근육뇌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병력의 양이 많아 그냥 싸워도 우리가 이길 텐데 비겁하게 그런 방법까지 써야겠나?"(...)라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것만 보면 인의도덕만을 내세우다 송양지인(宋襄之仁)의 주인공이 되어 웃음거리로 전락한 송양공(宋襄公)처럼 보일 수가 있는데, 전력에 자신이 있으면 단기간에 정면승부로 끝내는 것이 병법상 옳다. 그리고 자신감을 가질 근거도 충분히 있었다. 진여는 이좌거의 계책에 반대하며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내가 들으니 병법에 "아군이 적군의 열 배가 되면 포위하고, 두 배가 되면 싸우라"고 했소.[26] 지금 한신의 병력이 수만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수천에 지나지 않소. 게다가 천리 먼 곳에 와서 우리를 치는 것이니, 역시 벌써 아주 지쳤을 것이오. 지금 이런 적을 피하고 치지 않는다면 나중에 대군이 쳐들어올 때에는 어떻게 싸우겠소? 그렇게 되면 제후들이 우리를 비겁하게 여기고 함부로 쳐들어올 것이오.

조나라의 군대가 실제 20만이 되지는 않더라도 분명 한군의 몇 배에 달하기에 질질 끌지 말고 단숨에 제압해야 주변 국가들에게도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며, 거의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으니 공격만 해도 절대 질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진여의 영지인 대나라가 한신에게 털린 상황이니 오합지졸에 불과해보이는 한나라 군대를 최대한 빨리 섬멸하고 실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여의 입지가 아무리 확고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조왕의 신하에 불과하니, 압도적인 병력 우세를 앞세워 단기결전 후 실지 회복을 노리는 게 사실 정상이다. 그리고 조왕 또한 이러한 진여의 생각을 받아들여, 진여를 대장으로 삼아 한군을 상대하도록 하였다. 당시 양측 군대를 비교했을 때 조나라 군대가 수도 몇 배는 더 많았고 훈련도 더 잘 되어 있었으며, 자기네 영토에서 싸우기 때문에 지리적 이점과 보급 면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진여의 계책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석적이었다. 문제는 상대가 한신이었다. 한신은 첩자를 보내 염탐하였는데, 첩자로부터 이좌거의 계책이 쓰여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대단히 기뻐하였다. 이좌거의 계책은 멀리 원정군을 이끌고 온 한신으로서는 가장 상대하기 힘든 대처법이었기 때문이다.

여튼 이 소식을 접한 후 한신은 지체없이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나섰는데, 당시 조나라군은 정형구(井陘口)의 누벽에 군을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이에 한신은 정형의 약 30리 앞에서 야영을 했다. 그리고 새벽이 되자 몸을 가볍게 한 경기병 2천을 따로 선별하여 그들 모두에게 한군의 깃발인 적기를 나눠주며, 정형 앞 샛길을 통해 몰래 병사들을 산으로 보낸 후 조나라 군대가 있는 누벽을 보게 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조나라 군대는 우리가 달아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누벽(壘壁)을 비워놓고 우리를 쫓아올 것이다. 너희들은 그 사이에 빨리 조나라 누벽으로 들어가서 조나라 깃발을 뽑아버리고 한나라의 붉은 깃발을 세워라."

게다가 이후 어떤 일련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는데... 그 당시로서는 모두가 경악할 만한,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이 전투의 핵심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당시 정형의 조군 앞에는 '면만'(綿曼)이라 불리는 강이 있는데, 이를 면만수(綿曼水)라 불렀다. 그리고 이곳에서 한신은 가뜩이나 병력도 없는 상황에서 오합지졸의 군사들 중 1만 정예군을 따로 조직하여 이 면만수를 건너게 한 뒤, 강을 뒤에 두고 진영을 치게 했다. 오래전부터 손무(孫武), 오기(吳起), 사마양저(司馬穰苴) 등 병법가들을 비롯한 많은 명장들이 경고했고 심지어 일반 병졸들도 알고 있으며 절대 해서는 안 될 금기인 등에 강을 지고 진을 치는 배수진(背水陣)을 펼친 것이다. 그러고서는 한술 더 떠 오합지졸의 1만 정예병들을 제외한 나머지 군사들과 노약자들로 부대를 구성하였다.

배수진만으로도 이미 요단강을 눈 앞에 둔 것과 같은데 적이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곳에서 병력을 분산시키는 아주 대담하면서도 위험천만한 행동을 한 것이다. 만약 이때 진여가 군사를 보냈으면 패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우려하였으나 한신은 한 군리(軍吏)에게 이렇게 얘기하며 조나라군이 먼저 나올 일은 없을 거라 단언했다.
조나라 군대는 우리보다 먼저 유리한 지점을 골라 누벽을 쌓았다. 또 저들은 우리의 대장기와 북을 보기 전에는 우리의 선봉을 공격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좁고 험한 곳에 부딪쳐 돌아가 버릴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즉, 진여는 한군을 이곳에서 전멸시켜 한 번에 끝내고자 하니, 한군이 병력을 나누더라도 도망칠 것을 우려하여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며, 그 말은 그대로 적중하였다.

한군의 배수진을 보고 진여는 물론 일반병사들까지 웃었으며, 진여는 "역시 한신 저 놈은 병법을 모르는 게 확실하다."라고 여겨 한군이 가까이 공격해 오면 전군을 보내 일거에 소탕하려고 했다. 그리고 한신은 날이 밝자 모든 군사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 조나라 군대를 격파한 뒤에 모여서 잔치를 하자!

실로 패기 넘치는 발언이었고, 당연히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각한 병력차와 물자 부족 및 보급 문제, 그리고 도무지 자신들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작전으로 이길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사들은 물론 장수들도 건성으로 "네, 네" 하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한신은 앞서 진영에 남겨둔 병력을 제외한 군사들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장이와 함께 몸소 직접 조나라 군대에게 북을 울리며 도전하였다. 물론 조나라 군사들은 모두 비웃기만 했으며 당연히 이 도전을 받아들여 출격하였다. 그러나 비록 한군도 두려워하며 출정할 때는 건성으로 대답하곤 했으나, 이미 배수진을 치고 진격하니 그들 또한 인간이기에 살고는 싶었으나 도망갈 곳이 없음을 알고서는 퇴로가 막힌 병사들은 오로지 살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한신이 노렸던 점이었다. 살기 위해 미친듯이 싸우는 군사들의 패기(霸氣)와 살기(殺氣)란 실제로 엄청났다.

그래서 수적으로도 매우 우세한 조나라 군대였지만 이러한 한군의 저항에 놀라 쉽게 한군을 밀어내지 못한 채 전투가 지속되자 전의면으로 보면 압도적인 차이가 나다보니 그 사기가 크게 꺾였다. 허나 전력차가 워낙 컸으며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기에 한군은 이내 감당하지 못하고 병사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것이 연기가 아님을 숨기기 위해 적은 병력으로 오랫동안 싸웠으며, 도망칠 때도 리얼함을 보여주기 위해 대장기까지 버리고 강가에 쳐둔 진까지 도망쳤다. 비록 초반의 완강한 저항에 눌리긴 했으나, 오히려 이러한 저항과 도망치는 리얼함에 속아 넘어간 진여는 요새에 있는 군대까지 모두 출격시켜 도망치는 한군을 추격해 섬멸하려 하였다.

한신, 장이를 비롯한 한군이 도망쳐 강가에 있던 진영에 이르자 진을 지키던 군사들이 문을 열어 그들을 맞이하였고, 진여가 정형에 있던 조나라의 모든 병마를 이끌고 누벽을 비운 채 나오자, 한신은 강가에 진을 쳐둔 1만의 정예병과 합세하여 20만 대군에 맞섰다. 그리고 이제 진짜 도망갈 곳조차 없음을 알게 된 한군은 강을 등지고 필사적으로 싸웠는데, 질적으로는 밀리지만 목적 의식 자체가 다른 한군은 살고자 하는 일념하에 그야말로 살기 드러내며 미친개처럼 싸웠고 조나라 군대는 한군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조나라는 그래도 상황은 자신들에게 유리하니 일단은 철수하여 진영에서 재정비를 하기 위해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조나라 군대의 배후로부터 엄청난 고함소리와 함께 진영에는 이미 한군의 적색 깃발이 도배되어 휘날리고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면, 새벽녘 양쪽 산에 숨겨둔 2천의 경기병들이 줄곧 매복해 있다가 조나라 군대가 한신의 말대로 정말 누벽을 극소수의 군사만 두고 비운 채 전군이 공격을 나가자 한신이 진영에 합세하여 배수진에서 미친 듯이 버티고 있을 때 그 틈을 타 빈집에 가까운 적의 누벽을 급습한 것이었다.

이렇게 한신의 예상대로 모든 계책이 성공했고, 조나라 군사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있던 누벽이 한군에게 점령된 것을 보자 아연실색했다. 허와 실을 모르는 조군은 한군이 이미 누벽을 점령해 돌아갈 곳도 없는데 누벽에 휘날리는 많은 수의 깃발을 보자 얼마나 많은 수의 한군이 후방에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기에[27] 포위된 채 뒤에서 한의 대군이 공격해올 것이라 생각하여 그 공포감이 엄청난 속도로 퍼져나갔고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 와해되어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이러한 광경을 본 진여가 병사 몇 명의 목을 베어 막으려 했지만, 이미 패닉에 빠진 조군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왕과 진여도 급히 도주하였다. 이렇게 조군 전체가 혼란에 빠져 도망치자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어 한신은 조군을 추격하였고 뒤에 누벽을 점령한 병사들도 함께 공격하기 시작, 앞뒤로 협공을 당하자 조군은 이제 퇴각하여 도망치기 바빴으며 오히려 조군이 강 속으로 뛰어드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이곳 정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한신과 한군은 계속해서 조군을 추격하여 지수(泜水) 부근에서 진여(陳餘)의 목을 베었고, 조왕 헐(歇)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한신은 반나절 만에 조나라의 20만 대군을 물리치고, 단 한 번의 싸움으로 하루아침에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전투가 끝난 후 정말 한신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조나라 진영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여러 장수들이 전투 전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한신의 용병술에 탄복하면서 절대 이기지 못할 것이라 여기며 한신의 전술을 믿지 못한 자신들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의문어린 표정과 어조로 한신에게 물었다.
병법에는 "산릉(山陵)을 오른편으로 해 등지고, 수택(水澤)을 앞으로 해 왼편으로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장군께서는 저희들에게 도리어 물을 등지는 배수진(背水陣)을 치라고 명령하시고, 조나라를 깬 뒤에 잔치하자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마음속으로 승복하지 않았으나, 허나 결국은 이겼습니다. 이것이 대체 무슨 전술입니까?

그러자 한신은 여제껏 장수들이 의문을 품어왔던 전술에 대한 질문에 웃으며 명쾌히 답했다.
이것도 병법에 있는 것이다. 다만 그대들이 살펴보지 않았을 뿐이다. 병법에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사지에 빠뜨린 뒤에야 살 수 있고, 망지에 놓은 다음에야 보존할 수 있다." 또한 내가 평소부터 훈련받은 사대부들을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았던 시장 바닥의 사람들을 몰아다가 싸우게 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들을 죽을 땅에 두어서 사람마다 자신을 위해 싸우도록 만들지 않고, 이제 그들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준다면 모두 달아날 것인데, 어찌 그들을 쓸 수 있겠는가?

한신이 이것 또한 병법에 있는 것이라 하였지만, 배수진(背水陣)은 정말 절박한 상황이 아니면 위험성 때문에[28] 줄곧 금기처럼 여기던 전술인데 한신이라 하여 어찌 이것을 몰랐겠는가? 허나 한신의 말처럼 그가 이끌던 병사들은 어딘가의 정예병이 아닌 시장 바닥에서 놀던 사람들을 급히 모아 만든 오합지졸의 부대였다. 위나라와 대나라에서 모병된 군사들도 많았기에 한군에 대한 애착이 없어 살 길이 생기면 도망치기 바빴을 것이며 기존 한나라의 군사들 또한 신병이기에 조금만 패색이 보여도 도망쳤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신 또한 어쩔 수 없이 고민 끝에 병법을 응용하여 군사들을 사지로 내몰아 그 능력을 극대화시켜 죽기살기로 싸우게 하였고, 한편으론 상대의 생각을 읽어 과감한 행동으로 진여와 조나라군을 방심하게 만들고 자만하게 하여 계획을 손쉽게 이끌고 갈 수 있었다.

한신은 이러한 한군의 상황과 진여의 심리를 자세히 관찰하고 따져 계책에 계책을 더한 용병술을 썼으며, 배수진(背水陣)이라는 금기이자 위험한 상황을 오히려 대전략으로 승화시켜 지금까지도 계속 쓰이는 금기가 아닌 전략적 배수진(背水陣)의 정의를 만들었다.

이 조나라와의 정형 전투는 전략, 전술적 관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초한전쟁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한신의 이름이 온 천하에 알려져 명성과 위세를 떨쳤으며, 동시에 한신이 북방에서 자리를 잡아 세력을 키우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반면에 항우는 전선이 늘어져 북쪽에 적을 두게 된 탓에 군을 나눠야만 했다.

또한 후대에 한신의 이 배수진을 얼치기로 따라하려다가 강가를 피로 물들이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좋은 예로 읍참마속의 그 마속이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신립 탄금대 전투를 이 얼치기 양산형 배수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런 얼치기 배수진과 한신의 배수진을 비교해보자면, 한신의 군사들은 애초부터 상식적이고 규칙적인 전술을 운용할 수 없는 잡배들이었기에 한신으로서는 뭔가 변칙수(배수진으로 모든 사람들의 원초적 욕망인 생존의지를 자극함)를 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거기에 이러한 잡졸들의 의지만으로는 전술적 승리를 불러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2000의 경기병을 활용하여 적의 사기와 진형에 거대한 충격을 가한 것이다. 일단 성이 점령당했다는 것에 놀라고, 양쪽에서 포위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진형이 형편없이 무너지지 않을 수가 없다. 즉, 적은 군사와 보잘것없는 병력을 최대한 알뜰하고 살뜰하게 활용한 결과물이었기에 그 승리가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지, 아무 때나 쓴다고 이길 수 있는 전술은 아니다. 쉽게 생각해도, 적군이라고 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적이 보다 신중하여 위에서 언급된 이좌거의 계책대로 성문을 걸어잠그고 한신이 피폐해지기를 기다렸더라면 이러한 전술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성공한 전략에는 운도 따라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운이 아니라 적장 진여의 심리를 잘 꿰뚫어봤던 것이다. 진여는 나름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헛된 명성에 휘둘리는 면도 있어서 만약 한신이 공격해오면 기다리기보다는 맞서 싸울 거라고 생각했고 이게 적중했다. 또한, 아무리 한신의 계획대로 진여가 움직인다 한들 군대가 배수진이라는 말도 안되는 진형을 유지하고 싸울 수 있는 배경에는 진여를 잘 아는 장이가 진영에 있으면서 한신의 결정을 지지했기에 가능했을 수 있다. 무턱대고 적장은 물론이고 병사들조차 비웃는 위치에 진을 피고 싸우면서 별동대가 적 거점을 점령한다는 작전은 당장 오합지졸인 배수진 위치의 병사들의 반란으로 자멸할 수도 있지만 상술한 대로 적장을 잘 아는 장이가 이 작전을 지지한다면 병사들의 불안감이 일부 해소되어 작전대로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4.2. 연나라를 항복시키다

한편 한신은 정형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군중에 광무군을 죽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고, 그를 사로잡아 오는 자에게는 천금(千金)을 내리겠다 하였다. 그러자 누군가가 광무군을 포박해 데리고 왔는데 한신이 직접 광무군의 포박을 풀어주며 동쪽을 향해 앉게 하고 자신은 서쪽을 향한 채 광무군을 스승으로 삼고자 하였다.[29]

그리고 자신이 연나라와 제나라를 공격할 의도가 있음을 설명하고 광무군에게 "내가 북쪽으로 연나라를 치고 동쪽으로 제나라를 치려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

허나 광무군은 이를 사양하며 말했다.
신이 들으니 "패배한 군대의 장수는 무용(武勇)에 대해서 말할 수 없고, 망한 나라의 대부(大夫)는 나라를 존속하는 일을 도모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신은 패망한 나라의 포로인데 어찌 큰 일을 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한신이 광무군을 설득하고자 말했다.
내가 들으니 백리해(百里奚)가 우(虞)나라에 있었지만 우나라는 망했고, 그가 진(秦)나라에 있을 때에는 진나라가 패자(覇者)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백리해가 우나라에 있을 때에는 어리석다가 진나라에 있을 때에는 현명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임금이 그를 등용했는지 안 했는지, 그의 계책을 들었는지 듣지 않았는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만약 성안군이 그대의 계책을 들었다면 나와 같은 자는 벌써 포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허나 그대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대를 모실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래도 광무군이 주저하자 한신이 강한 태도로 말했다.
내가 진심으로 그대의 계책에 따르겠으니 더 이상 사양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한신이 진심으로 부탁하자 광무군이 말했다.
신이 들으니 "슬기로운 사람도 천 번 생각하다 한 번의 실수가 있을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은 맞을 수 있다[30]"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미치광이의 말도 성인(聖人)은 가려서 듣는다"라고 했습니다. 신의 계책이 반드시 채용될 만한 것은 못 되지만 그래도 충심껏 아뢰겠습니다.

그리고 이좌거는 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며 한신에게 계책을 올렸다.
원래 저 성안군 진여는 백전백승(百戰百勝)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단 한 번의 실수로 그의 군사는 호성(鄗城)에서 패하고 그의 몸은 저수(泜水) 강안에서 죽었습니다. 오늘 장군께서는 서하에서 하수를 건너 위왕 표(豹)를 사로잡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연여(閼與)를 피로 물들이며 대(代)나라의 상국 하열(夏說)을 포로로 삼았습니다. 계속 진격하여 일거에 정형(井陘)의 관문을 떨어뜨리고 오전도 미처 다 가기 전에 조나라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그 대장 성안군 진여를 죽였습니다.

장군의 이름은 해내에 멀리 퍼지고, 그 위세는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이에 병화가 머지않아 자기 몸에 이르리라고 생각한 농부들은 농기구를 손에 놓아 밭 갈기를 멈추고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언제나 동원령이 내릴지를 알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정세는 장군에게는 매우 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백성들은 과로에 시달리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있어 사실은 전투에 동원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장군께서 피로에 지친 군사들을 다시 일으켜 연나라로 진격하여 그 견고한 도성 밑에 진을 치고 비록 싸우려고 하신다 할지라도 장시간의 공격에도 그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한군의 피폐한 실상만 드러나고, 군대의 기세는 꺾이어 결국은 시일만 오래 끌게 되어 군량미만 다하게 될 것입니다.

약한 연나라를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제나라는 필시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여 전력을 다해 한군에 대항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연(燕)과 제(齊)는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며 서로 양쪽에서 버티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로써 한(漢)과 초(楚)의 싸움은 승부가 분명하게 되지 않고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면 천하의 정세는 장군에게 불리하게 변하게 됩니다.

소인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연제(燕齊) 두 나라를 공격하려는 장군의 계획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고로 용병에 능한 자는 자기의 단점으로 상대방의 장점을 공격하지 않으며, 자기의 장점으로 상대방의 단점을 공격합니다.

즉, 사실 이미 한신의 군대는 한계에 봉착했고, 연나라와의 싸움에서 고전하게 된다면 그 어려운 실상을 드러내게 되는 꼴이니 그렇게 되면 결국 연나라도, 제나라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다. 그러나 한편으론 정형 전투의 승리와 조나라 평정으로 인해 지금 한신의 명성이 절정에 오르고, 모두가 한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에 이좌거는 굳이 싸울 필요 없이, 적당한 사람을 보내서 항복을 권유하면 저쪽에서 항복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한신은 이좌거의 계책이 옳다고 여겨 그 계책에 따라 연나라에 사람을 보냈고, 연나라의 왕 장도(臧荼)와 신하들은 바람에 쓰러지는 풀잎처럼 모두 한나라에 항복했다.

4.3. 잠자다가 군사를 빼앗기다

한신과 장이는 진군을 멈추는 대신 하수를 통해서 넘어와 조나라 땅을 넘보는 초나라 군을 쫓아내고, 그 대가라는 구실로 사람들을 징발해 유방에게 보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유방 쪽은 한신과 달리 상당히 위급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형양에서 1년 넘게 항우의 공격을 근근이 막아내고 있었지만 이제 한계에 가까워진 것. 급한대로 진평(陳平)의 계략을 이용하여 범증(范曾)을 쫓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눈앞에 있는 항우의 군대는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기신(紀信)이 유방으로 분장하여 초나라 군대의 시선을 끌고, 본인은 관중으로 몸을 피했다. 소하와 영포가 긁어온 군사를 얻어 잠깐동안 완성으로 항우를 유인해 버티던 유방은 팽월의 유격전으로 항우가 일시적으로 회군하자 성고(成皐)로 진입했지만, 병사가 모자라 형양의 포위까진 뚫지 못하고 그 사이에 팽월을 어느정도 처리한 항우가 돌아와 형양의 주가를 쳐부수고 성고에 있는 유방에게 맹공을 퍼부어 6월 즈음에 이르러 형양-성고 라인은 붕괴 일보 직전에 몰렸다.

그런데, 정작 한나라가 이렇게 멸망까지 몰리는 와중에는[31] 한신이 원군을 보내주었다는 언급이 나오지 않으며, 항우가 없어진 틈에 성고에 입성한 유방과 호응한 적 또한 없었다. 이렇게 되자 유방은 한신이 찝찝해진 듯 일단 포기하기로 한 성고에 잠깐 더 병력을 남겨둔 채[32] 하후영만 데리고 몰래 빠져나와 한신의 군영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신이 있는 소수무에 도착하고도 일부러 하루를 머물러서 새벽에 일어나서는 처음에 한나라의 사자라고 자신의 이름을 대고 성벽으로 들어가, 한신의 침소로 침입해 장군의 인수(印綏)와 부절(符節)을 손아귀에 넣고 순식간에 인사 배치를 끝내 그 병력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놓았다.

이때 한신은 잠자고 있었다.

유방이 눈 깜짝할 사이에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하는 동안, 한신은 장이와 함께 꿈나라 여행을 떠나고 있던 중이었다. 자고 일어나 보니 느닷없이 유방이 있자 한신과 장이는 경악했다. 유방은 장이에겐 줄어든 군사를 조나라에서 보충하라는 명목으로 한신의 곁에서 떼어놓았고, 한신은 한나라 좌승상에서 조의 상국으로 사실상 강등시키고 조참, 관영, 주설, 부관을 한신에게 협조하라는 명목으로 북방 전선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한신에겐 즉시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많은 역사에서는 지방에 파견된 군대에서는 지휘권을 가진 장수가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기 때문에, 마땅한 호위 부대 하나 딸려 있지 않은 군주가 찾아오면 장수에게 이래저래 휘둘리고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나쁜 뜻을 품은 장수라면 군주가 비명횡사하는 경우마저 적지 않은데, 그런 시나리오를 무시하고 유방은 순식간에 지휘권을 손에 넣어 군권을 장악했다. 잠자고 있던 한신은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털렸다.

한신과 유방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인데, 이후로도 한신은 잠자다가 창졸간에 군대를 빼앗긴 이때처럼, 유방에겐 이상할 정도로 약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만다. 또한 멋대로 군대를 강탈해 간 유방이 치사하게도 보이지만, 달리 보면 주군이 지휘하는 본진 쪽이 무너지기 직전인데도 먼저 원군을 보낼 생각은 않고 잠이나 잘 만큼 한신과 유방 사이의 연결이 약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웃기는 점은, 이때 한신의 옆에 있었던 건 다름아닌 자기가 죽을 상황인데 원군을 안 보내줬다고[33] 절친 진여와 원수가 된 장이였다는 것.

다만 유방 입장에서는 좀 조심하긴 했지만 딱히 크게 생각하고 한 짓은 아닐 수도 있다.[34] 한신을 꺼려서 한신의 군사를 뺏어갔다기보다는 그냥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게 한신이라서 급한 김에 들러서 한참 항우에게 당하고 있을 성고와 형양을 지원할 군사들을 데려간 것이라는 말이다.[35] 물론 한신을 만나기 전에 이미 군권을 회수, 확보하긴 했지만 원래 한신과 장이는 유방과 처음부터 함께 거병한 인물들은 아니므로 주의하는 건 오히려 당연한 것이고[36] 이것만으로 한신을 핀포인트로 찝어서 노렸다고 할 수만은 없다. 굳이 말하자면 한신 정도면 내가 좀 급한데 군대 좀 떼어가도 알아서 잘하겠지 정도?

게다가 이때는 이미 목표였던 조와 대를 평정한 터라 군대를 좀 떼가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도 무리도 아니고,[37] 한신이 워낙 혁혁한 공을 세운 터라 연과 제는 천천히 압박해도 충분했다. 당장 연은 한신의 존재만으로도 냉큼 항복해 버렸고 한신이 이후 다시 출진하게 된 것은 역이기가 제나라를 설득하러 갔기 때문이었다. 또, 이미 조와 대를 얻고 기존의 위나라도 함락했던 만큼 여기서 징병하는 것도 가능했다.[38]

그러나 유방은 이러한 기습 인사를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한신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사실 역이기가 죽은 비극은 별 일 아닐 거라며 군대를 빼간 유방의 조치로 말미암은 한신의 불신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4.4. 역이기의 죽음

유방의 명령대로, 한신은 조참, 부관, 주설 등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의 평원(平原)으로 이동했다. 이때, 아직 한신이 도착하기 이전, 역이기가 먼저 유방에게 청하여 제나라를 항복시키기 위해 떠났다.

처음에 역이기를 경계하며 이전 초나라에 거역했다가 당한 험한 꼴때문에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이내 역이기의 화려한 언변과 한신의 조나라를 시작해 여러 나라를 복속시키고 초나라가 불리하다는 전황에 대해 능숙한 설명을 들은 제왕 전광(田廣)은 한나라와 싸워봐야 더 나을 것도 없다고 생각하여 유방에게 항복하기로 하고 역이기를 믿고 역하(歷下)에 주둔하고 있던 제나라 군사들의 경계를 전부 풀게 했다. 이대로라면 싸우지 않고도 한나라가 제나라를 영향권 아래 둘 수 있는 상황. 그리고 한신 또한 역이기가 제나라를 설득하여 항복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제나라 정벌을 그만두고자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언변이 뛰어난 제나라 출신의 변사이자 연나라 정벌이후 합류한 책사 괴철(蒯徹)이라는 인물이 한신에게 ‘유방은 제나라를 설득할테니 군사를 멈추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이대로 제나라 함락이라는 큰 공을 역이기에게 빼앗길 셈이냐고 한신의 불안감을 충동질했다. 결국 전공에 눈에 멀어 괴철의 말에 넘어간 한신은 즉시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나라는 한껏 준비를 하고 싸워도 승부가 어떨지 모르는 판에, 경계를 완전히 풀고 있다 기습을 당했으니 전방위로 밀고 들어오는 한신의 군대에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한신은 황하를 건너 역하(歷下)에 있던 제나라 군대를 습격하여 순식간에 격파해 크게 승리하고 제나라 군대를 패퇴시켰으며, 패주하는 적을 파죽지세로 쫓아 결국 제나라의 수도 임치(臨淄)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역이기는 제나라 중진을 비롯해 사람들과 좋게 술자리를 가지면서 주연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파발마가 달려와 한신의 전면적인 침공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고, 이에 역이기에게 속았다고 생각한 전광은 역이기에게 "지금 당장 저 한신의 군대를 오지 못하게 하지 않으면 네놈을 삶아 죽여주마."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역이기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도 불구, 기개를 끝까지 잃지 않았다.
큰일을 도모하는 사람은 자질구레한 일을 개의치 않으며, 덕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책망을 사양하지 않는다고 했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공을 위해 무슨 일을 다시 할 수 있겠소?

결국 역이기는 전황에 의해 팽형당해 죽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해 사마천은 전담열전(田儋列傳)에서 "참으로 심하도다, 괴통(蒯通)[39]의 지모여! 제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으며 회음후를 교만하게 만들어 마침내는 그 두 사람을 망하게 만들었다."라고 하며 괴철을 비난했다.

만일 이때 괴철이 한신을 부추기지 않았다면 제나라 전씨는 유방에게 무난하게 항복했을 테고, 연왕 장도나 조왕 장오(張敖)처럼 이성왕에 임명되면서 가문을 좋게 보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40] 그러나 괴철의 트롤러급 제안 때문에 역이기는 사망하고 제나라는 박살이 났으며 유방은 한신의 충성심을 본격적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마천은 이 일이 제나라 전씨를 몰락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신을 교만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이때 역이기는 유방의 승낙을 받고 제나라에 파견되었으므로 한신의 이 행위는 한왕 유방의 뜻을 분명하게 거스르는 행위였다.[41] 보는 시각에 따라 한신에 대한 유방의 분노를 사버렸고 이후에 상관인 유방이 위험한 와중에 왕을 시켜달라며 조르는 협박에 가까운 한신의 행태가 훗날의 비참한 말로로 이어졌다는 평가도 있으니 여기서 업보의 씨앗을 뿌렸다고 볼 수도 있다.

여담으로 초한전쟁이 모두 끝난 후 황제가 된 유방은 오호도라는 섬으로 도망가있던 제왕 전광의 숙부 전횡에게 '그대를 왕으로 삼아줄 터이니 지난 날의 아픔은 잊자'고 하며 낙양으로 올 것을 명하고, 역이기의 동생 역상에게도 전횡에게 해코지할 경우 처형하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전횡은 두 명의 식객과 함께 낙양으로 오던 중 "천자께서 내린 명령이라 할지라도 내 손으로 직접 삶아 죽인 자의 동생을 죄스러워 어찌 본단 말인가. 이제 낙양이 멀지 않았으니 여기서 내 목을 베어 가져간다면 썩지 않고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자결해버렸다. 유방은 눈물을 흘리며 죽은 전횡을 왕의 예로 장사지내게 하고 두 식객을 도위로 임명했으나 그 두 식객마저 전횡의 무덤 앞에서 자결해버리고 말았다. 한신이 저지른 민폐가 이렇게 큰 파급력의 비극을 야기한 셈이며 이런 후환을 고려 못했다면 진짜 역대급 눈새라고 볼 수 밖에는 없다.

4.5. 용저를 격파하고 제나라를 평정하다

제왕 전광은 역이기를 삶아 죽이고 고밀(高密)로 달아나면서,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을 구했다. 한신은 유방의 부하이고, 유방에 적대한다면 붙을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바로 항우였고, 전광은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항우 역시 한신이 초나라 북쪽을 완전히 평정하는 일을 두고 볼 수는 없었기에, 항우로서는 이례적으로 기록상 무려 20만이나 되는 대군을 용저(龍且)와 주란(周蘭)에게 맡겨 한신을 상대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용저는 군대를 이끌고 전광과 합류했다.

이때, 용저가 한신과 겨루기 전, 어떤 사람이 하나의 전략을 제시했다. 지금 한신이 이끄는 군대의 기세가 엄청나 싸우면 형세가 좋지 못하니 싸움은 피하고, 제왕 전광을 내세워 항복한 제나라의 성들을 설득하고, 초나라 20만 대군의 기세를 보이면 항복한 성들이 모두 다시 분위기를 보고 들고일어날 것이며, 후방이 막히게 되는 한신은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하고 박살 나버린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용저는 한신을 저평가를 하였는지 이렇게 말하며 사망 플래그를 세웠다.
나는 평생 한신의 사람됨을 알아 왔는데, 쉬운 상대일 뿐이다. 빨래하는 아낙에게 밥 얻어먹었으니 자신의 계책을 취하는 바가 없고, 가랑이 밑을 지나가는 치욕을 받았으니 사람의 용기라곤 겸한 것이 없으니, 족히 두려워할 바가 아니다. 또 제를 구하고 그를 항복시킨다면 내게 무슨 공이 있는가? 지금 싸워서 그를 이긴다면 제의 반을 얻을 수 있는데, 어찌 그만두겠는가?

한신이 초나라 군대에 있었던 적이 있었으니, 용저 역시 한신의 막장 시절 이야기는 들어본 것으로 보인다. 용저는 한신의 찌질한 일화들을 들먹이며 지금껏 초와의 연전연승한 그를 무시했고, 즉시 교전을 벌이기 위해 유수(濰水)를 사이에 두고 한군과 대치했다.

이때, 한신은 밤을 틈타 1만 개의 주머니를 만들고, 그 안에 모래를 잔뜩 넣어 모래 주머니를 만든 뒤, 강의 상류에 가서 그것을 던져 물의 흐름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용저의 군대에 싸움을 걸다가, 짐짓 패하는 장면을 연출하여 달아났고, 이를 본 용저는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한신이 겁쟁이라는 것을 원래 알고 있었다!

초나라 군이 얕아진 유수를 건너 한군을 추격하자 한신은 모래주머니로 만들어 둔 임시 보를 터뜨려 수공을 가했다. 이에 초나라 군대는 혼란에 빠졌으며 그 와중에 한군이 재차 반격을 가하자 용저는 전사했고, 사령관이 죽으면서 초나라 군대도 여지없이 박살이 나버렸다. 제왕 전광도 달아났고, 한신은 도망치는 부대를 성양(城陽)까지 추격하여 대부분의 병사들을 사로잡았다.

BC 203년, 마침내 한신은 위(魏), 대(代), 조(趙), 연(燕), 제(齊) 5개국을 모조리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5. 한나라의 신하가 되느냐, 대왕의 길을 걷느냐

5.1. 제나라의 왕이 되다

이때 한신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때 한신에게 유방의 사신이 와서 "항우의 매서운 공격에 형양이 함락 직전이니 구원하러 오라"라는 군령을 내리나 한신은 제나라의 민심을 다스려야 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을 제나라의 가왕(假王), 즉 임시적인 왕으로 봉해주면 가겠다고 청하였다.[42]
제나라 사람들은 거짓과 속임수가 많고 [43] 변화무쌍하니 번복이 심한 나라입니다. 또한 남쪽으로 초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가왕(假王)이라도 되어 진정시키지 않는다면 정세가 안정되기 어렵습니다. 신을 가왕으로 삼아 주시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입니다.

이 한신의 제안이 천하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는 사나이의 야심인지, 아니면 진실로 그저 일시적인 계책으로 제안을 하는 일인지 그 동기에 대해 사기나 한서에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이때 유방의 상황을 보자면 사수(汜水)에서 초나라 대사마(大司馬) 조구(曹咎)와 장사 사마흔을 격파했으나, 소식을 들은 항우 팽월(彭越)을 공격하다 말고 돌아와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44]

게다가 이미 한신은 역이기의 협상으로 쉽게 복속시킬 수 있었던 제나라의 뒤통수를 쳐서 역이기도 죽게 만들고, 불필요한 전투를 벌여서 국고와 인명을 낭비하기도 했다. 거기에 이 당시 유방은 휘하장수 기신이 가짜 유방으로 투항하며 희생하고 그 사이 후방으로 도망치는 등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애초에 제나라의 민심을 불안하게 만든 게 누군데, 그걸 빌미로 상관을 협박하는 모습이었다. 이 때문에 유방은 몹시 분개해서 앞뒤 생각하지 않고 크게 노하여 욕을 퍼부었다.
나는 이곳에 포위되어 밤낮 네가 와서 도와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네놈은 스스로 가왕이 되려고 한단 말이냐!

이때 장량이[45] 유방의 발을 슬쩍 밟고 귓속말로 "한신이 왕이 되고자 한다면 지금의 우리가 어떻게 막겠습니까? 그냥 달라는 대로 주십시오. 아니면 변고가 일어납니다."라는 말을 해주자, 열받긴 했지만 초나라를 무찌르려면 한신이 필요하다는 사리분별을 할 능력은 충분히 있던 유방은 순식간에 태도를 돌변해서 소리쳤다.
대장부가 제후를 평정했으면 진짜 왕이 되는 것이지 어찌 가왕이 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곧바로 장량을 한신에게 보내 한신을 제나라 왕으로 책봉했고, 곧바로 초나라를 치도록 명령했다. 밥을 빌어먹고 지내던 회음의 겁쟁이가 당당한 제나라의 왕이 되는 순간이자 토사구팽 엔딩이 확정지어지는 순간이었다.[46]

5.2. 천하 삼분

믿었던 최측근 용장 용저까지 죽어버리고 나자, 항우 역시 한신의 기세에 덜컥 겁을 먹었다. 게다가 제나라는 초나라의 바로 머리 위쪽이니, 한신이 항우를 압박하기 시작하면 이미 초나라 후방을 휘젓던 팽월만으로도 부담스러운 항우에게는 정말 가공할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항우는 우이(盱胎) 사람 무섭(武涉)을 보내 한신을 회유하려고 시도했다. 무섭은 한신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천하가 다함께 진(秦)을 괴로워한 지 오래되어 서로 힘을 합쳐서 진을 쳤습니다. 진이 이미 격파되자 공로를 계산하여 땅을 나누고 왕을 봉해 사졸들을 쉬게 하였습니다.

지금 한왕(漢王)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서 동쪽으로 나와 다른 사람의 몫을 침략하고 다른 사람의 땅을 탈취하니, 이미 삼진(三秦)을 격파하고 군사를 이끌어 함곡관을 나와 제후들의 군사를 거두어 동쪽으로 초를 쳤는데, 그 뜻은 천하를 다 삼키지 않으면 그치지 않을 것이어서 그가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 이처럼 심합니다!

또 한왕(漢王)은 반드시 할 수 없을 것인데, 몸이 항왕(項王)의 손에 들어간 것이 자주 있었고, 항왕은 그를 연민하여 살려두었습니다. 그러나 벗어나면 번번이 약속을 어기고서 다시 항왕을 치니, 그를 믿을 수 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이제 족하(足下)가 비록 스스로 한왕과 두텁게 사귀어 그를 위하여 힘을 다하여 군사를 사용하였으나, 반드시 끝내는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입니다. 족하가 잠시라도 오늘까지 오게 된 것은 항왕이 아직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왕의 일에서 저울질하는 것은 족하에게 있으니, 족하가 오른쪽으로 던지면 한왕(漢王)이 이기고, 왼쪽으로 던지면 항왕이 승리할 것입니다. 항왕이 오늘 망한다면 다음 날에는 족하를 빼앗을 것입니다. 족하와 항왕은 연고가 있는데, 어찌하여 한을 반대하고 초와 연합하여 화친하면서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여기에서 왕 노릇하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이제 이 시기를 놓아 버리고 스스로 한에게 분명히 하면서 초를 치려고 하는데, 또한 지혜로운 사람이 정말로 이처럼 하겠습니까?"

하지만 한신은 단칼에 거절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항왕(項王)을 모실 때는, 관직은 낭중에 불과했고, 하는 일은 극(戟)을 들고 항왕의 신변이나 지켰습니다. 간언을 올려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고, 계책을 내어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를 한왕은 상장군에 임명하고 그 인장과 함께 수만 명의 군사를 주었습니다. 또한 나를 대하기를 자기의 옷을 벗어 나를 입혀주고, 자기의 식사를 같이 나누어먹게 했습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나의 계책을 채택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에 무섭도 대답할 말이 없어 물러갔다. 그런데, 이때 또 괴철이 슬금슬금 한신에게 다가왔다. 괴철이 보기에 천하의 향방이 한신에게 달려 있었으므로[47], 그를 위해 계책을 한번 내어보기로 한 것. 괴철은 처음에는 '관상을 봐주겠다'라는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한신에게 접근하더니, 곧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천하에 처음으로 일어나 어지러워졌을 때, 영웅호걸들이 제각기 명분을 내걸고 한 번 소리치니 천하의 재사들이 구름과 같이 몰려들어 물고기 비늘처럼 서로 뒤섞이더니, 들불처럼 번지는 화염과 같이, 일진광풍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일어났습니다.

당시 선비들의 관심사는 단지 진나라의 멸망에 대한 것뿐이었으나, 그러나 지금은 초와 한이 나뉘어 다툼으로써, 천하의 죄 없는 백성들은 그들의 간과 쓸개가 땅에 깔리게 되었고, 황량한 교외의 들판에 나뒹굴고 있는 아비와 자식의 해골은 그 수효가 많아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초나라가 팽성에서 일어나 사방의 적을 쫓아다니다 그 패주하는 적의 뒤를 따라 형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승세를 탄 초군이 천하를 석권하며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초군도 경(京)과 색(索) 사이에서 한군의 반격으로 기세가 꺾이고 성고의 서쪽에 있는 험악한 산세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 지가 이미 3년이 되었습니다. 한왕은 몇십만이나 되는 인마를 이끌고 공현(鞏縣)과 낙양(洛陽) 일대에서 초군의 서진을 막고, 그곳의 험준한 산과 강의 요충지에 의지하여 초군의 공격에 간신히 버티고 있습니다.

한왕은 그동안 하루에도 몇 번이나 싸움을 치렀음에도 지금까지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패전만 계속하다가 외부로부터 구원도 받지 못하고 결국은 형양과 성고의 싸움에서 타격을 입고 완(宛)과 섭(葉) 땅으로 달아났습니다. 이것이 소위 지혜는 바닥이 나고 용기는 다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군대의 사기는 험준한 요새에서 꺾이고 창고의 양식은 다 떨어졌으며 백성들은 고통과 피로에 지쳐 그 원성은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어 민심은 동요되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제 소견으로는 이러한 형세는 천하의 성현일지라도 그 화란을 그치게 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오늘 결국 한왕과 초왕 두 왕들의 운명은 모두 장군의 손안에 달려있게 되었습니다. 장군께서 한왕에게 협조하면 한왕이 승리할 것이고, 초왕에게 협조하면 초왕이 승리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제 속마음을 피력하여 어리석은 계책이나마 올리고자 하오나 단지 걱정되는 것은 장군께서 제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진실로 능히 장군께서 저의 계책을 받아들이신다면 한과 초 두 나라에 이익을 주어 모두 존속케 하고, 천하를 삼분하여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루어 아무도 감히 먼저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장군의 뛰어난 능력과 성스러운 덕성으로 수많은 무기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부강한 제나라를 근거지로 삼고, 연과 조 두 나라를 복종시키고 유(劉)와 항(項)의 군대가 없는 땅으로 나아가 그들의 후방을 압박한다면, 그것은 바로 백성들의 마음에 순응하는 바가 될 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서쪽의 형양성 쪽으로 진격하여 유(劉)와 항(項)의 분쟁을 중지시켜 군사들과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목숨을 보전시키라고 요구한다면, 천하 사람들은 바람처럼 달려와 메아리처럼 호응할 것입니다. 누가 감히 장군의 명을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큰 나라는 쪼개지고, 강한 나라는 약하게 되어 제후들을 세울 수 있게 됩니다. 이에 제후들이 일단 서게 된다면, 천하는 장군이 베푼 덕에 감격하여 제나라의 명을 받들며 귀의할 것입니다.

이에 제나라의 옛 땅을 안정시키고 교하(膠河)와 사수(泗水) 유역을 근거지로 하면서 덕을 베풀어 감동시킨 제후들을 소집해서 두 손을 높이 들어 읍을 하면서 겸양의 자세로 자신을 낮춘다면 천하의 제후왕들과 그 재상들은 줄을 서가며 제나라에 들어와 조배를 드릴 것입니다.

나는 ''하늘이 주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후에 벌을 받고, 때가 왔을 때 행동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다(盖聞天與不取 反受其咎, 時至不行 反受其殃)"라고 들었습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괴철이 설득하고, 한신이 고민하는 이 부분은 회음후열전과 사기 전체에서도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부분이다. 한신은 이 말을 듣고, "한왕이 나에게 잘 해주었는데, 내가 배신하는 게 옳겠는가?" 하고 고민했다. 그러자 괴철은 문경지교라 일컬어졌지만 파탄난 장이와 진여의 우정, 그리고 월왕 구천을 패자로 만들었지만 의심을 피해 떠난 범려를 언급하며, 하물며 유방과 한신의 관계가 한때의 장이와 진여만큼 각별한 것도 아니고, 한신이 범려가 구천에게 한 것만큼 유방에게 지극하게 충성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유방만이 의리를 지키기를 바라느냐며 강하게 밀어붙였다. 한신은 "조금 생각해 보겠다."면서 답변을 미루었다.

며칠 뒤, 애가 탄 괴철은 다시 한 번 한신을 설득했으나, 한신은 주저하다가 결국 괴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의 공이 워낙 크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유방이 제나라를 쉽게 빼앗아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괴철은 한신의 어중간한 태도에 일이 글렀음을 알고, 일부러 미친 사람 행세를 하고 무당이 되었다. 유방이 승리하면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만으로도 처형감인데, 정신병자 행세를 해서 이를 모면해 보려고 한 것.

이 이야기에서 한 가지 의문은, 괴철과 한신의 이 대담은 그야말로 완전히 밀담인데, 어떻게 사마천이 바로 이 이야기를 옆에서 본 것 같이 생생하게 기록했냐는 점이다. 일단 회음후열전에서도 '주위의 사람을 물리고' 이야기를 했다고 나온다. 이는 진시황 사망 후, 이사와 조고, 호해가 사구(沙丘)에서 모의를 하는 부분과 더불어 사마천이 절대로 그 내막을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손꼽힌다.

다만, 사구정변 쪽도 항목에 나오듯이 사마천이 '절대로 그 내막을 알 수 없다'는 부분에 반론이 있으며, 괴철의 대담 쪽은 오히려 이런 의문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우선 한신과 괴철이 대담을 가졌던 사실 자체는 확실하다. 한신의 사망 후에 유방은 괴철을 잡아들였으며, 이때 괴철은 "내가 한신에게 반란을 권했다."라고 인정했기 때문. 자세한 대화 내용이 문제인데, 괴철이 결국 죽지 않고 풀려났음을 생각해본다면 괴철이 상황을 말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우선 유방이 괴철을 잡아들여 신문하는 과정에서 자세한 대화의 내용도 당연히 조사했을 것이고, 괴철은 그런 권고를 했다는 것을 당당하게 자백한 만큼 자세한 대화의 내용도 숨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공식적으로 괴철이 한신에게 그런 권고를 했다는 것이 공개된 상태에서 황제가 괴철을 친히 석방했으므로, 이후에 괴철이 대화 내용에 대해 계속 함구해야 할 이유가 없다.

5.3. 해하 전투, 초왕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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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팽월·영포를 대장으로 봉하다[48]

항우는 팽월과 유방의 협공 때문에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있었고, 군량도 부족해졌으며, 또한 한신의 기세 때문에 두려움에 떨었다. 결국 항우는 먼저 유방에게 홍구(鴻溝) 이서의 땅은 한나라에, 그 이동의 땅은 초나라 땅으로 하여 천하를 양분하자는 제안을 내었다. 유방도 이에 승낙하여, 두 사람은 각자 동쪽과 서쪽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쪽으로 떠나던 유방은 장량과 진평의 제안으로 항우의 뒤를 치기 시작했고, 동시에 팽월과 한신에게도 연락하여 움직이기를 권하였다.[49] 그런데 한군이 고릉(固陵)에 이르렀음에도 불구, 팽월과 한신은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티기만 했고, 유방은 초나라의 반격을 받아 고릉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했다. 결국 장량의 제안에 따라 유방은 자신의 신하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과 또다시 '거래'를 해야만 했고, 거래 성사 뒤 한신 역시 그제야 부대를 이끌고 직접 유방을 도우려 달려왔다.[50] 또다시 감히 임금을 상대로 '거래'를 시도한 한신은 분명 다시 유방에게 찍혔을 테고, 유방은 한신을 완전히 위험인물로 주시했을 것이다.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유방은 장량의 제안에 따라 팽월과 한신의 봉지를 넓혀주기로 약속하고, 초에 오랫동안 봉직한 장수이자 항우의 대사마 주은을 회유하였고, 수춘을 공격하던 영포와 유고까지 합류시켰다. 그리고 유방에게 합류한 관영의 공격에 항우가 진현에서 패주하자 한신과 팽월이 결국 유방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옴으로써, 영웅들은 마침내 해하(垓下)에서 모두 집결하였다. BC 202년, 해하에서 집결한 연합군은 항우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이때, 한신은 무려 30만 대군을 이끌고 초군과 정면으로 격돌하였다. 이후 항우의 괴력에 밀려 후퇴하다가, 측면 부대를 이용해 초나라 군대를 요격했고, 다시 본대가 뒤돌아 공격을 퍼부어서 초군을 대파하였다. 결국 항우가 도주하다 자결하면서 초한전쟁은 드디어 종결을 맞이했다.

유방은 최후까지 버티던 노현(魯縣)을 굴복시켜, 완전한 끝을 장식했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후 서쪽으로 가던 유방이 정도 부근에 이를 무렵, 유방은 또 갑자기 한신의 진영으로 달려가 한신의 군권을 빼앗았다. 이미 한번 당해본 일이었지만 이미 전쟁도 끝난 마당에 갑작스러운 기습에 한신은 놀랐는지 제대로 반항도 못 해보고 고스란히 병권을 넘겨주었다. 이와 동시에 유방은 한신을 본거지인 제나라에서 항우가 다스리던 초나라 왕으로 옮기고, 도읍을 하비(下邳)에 정하게 하였다. 제나라는 폐지해서 한나라에서 1년간 직접 다스리다가 BC 201년에 부활시켜 유방의 서장자 유비에게 맡겼다.

숙청은 기본적으로 이쪽이 상대보다 힘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유방이 당초에 한신의 세력을 압도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초한전쟁의 최종 결전인 해하 전투에서 한신은 유방의 후군과는 별개로 단독으로 30만 대군을 동원했다. 설사 이를 3분의 1만 믿는다고 해도 그 군대는 10만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인데, 전 중국을 뒤흔들고 수많은 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왕들을 참살한 군사 10만을 이끄는 장군의 위세란 실로 어마어마했을 것인데 유방은 이런 한신을 어떻게 숙청했을 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다만, 워낙 한신의 정치력이 떨어졌으니 이때 역시 정말로 자기 방어를 철저히 했을지 의문스럽긴 하다. 뻔히 숙청당해 제왕에서 초왕으로 옮겨졌으면 경계를 하던 진짜 바란을 일으키던 이제라도 보신을 하던 해야 하는데 당하고 또 당해서 회음후로 떨어지고 결국 자기 목까지 떨어졌으니. 사실 숙청을 피하려면 군사력 못잖게 중요한 것이 정치력인데 이 점에서 한신은 빵점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한신을 뒤에서 받쳐줄 사람들은 없거나 원래 유방의 사람이었고 한신 자신의 사람은 괴철뿐이었다. 그런 주제에 유방 주위의 사람들과 교류를 할 생각도 없어서 자신을 찾아온 번쾌를, 그것도 관영 등과 싸잡아서 모욕했을 정도니 참으로 생각이 없는 인물이다. 당장 위에 나오는 유비도 여후에게 한번 죽을 뻔하자 자기 땅을 여후와 딸 노원공주에게 바쳐서 살아남은 적도 있고, 소하도 고제가 자신을 의심하자 자기 가문 사람들을 전쟁터에 보내서 고제의 의심을 가라앉힌 예도 있는데 비해 정작 한신은 이런 융통성을 발휘했다는 말조차 없으며 그렇다고 오왕 유비처럼 반란을 착실하게 준비한 것도 아니다.

일단, 이때는 제나라 군사는 빼앗기긴 했어도, 최소한 일방적인 숙청은 아니었다. 한신은 자신의 기반이 있던 제나라에서 자신의 고향 초나라로 왕직을 옮겼는데, 초나라 역시 결코 중요성이 떨어지거나 작은 나라는 아니었다. 규모로만 따지면 임치·낭야·제북·교동 4군(또는 임치·낭야·제북·박양·교동·교서 6군) 73성인 제나라보다 오히려 더 큰 나라가 설·회양·사천·동해·회계 5군 89성인 초나라였다. 거기다 항우가 죽고 유방이 황제가 된 시점에선 큰 의미는 없는 얘기지만, 초나라는 몇년 전까지 유방이 섬겼던 나라이며 유방이 항우를 정벌한 명분도 초의제 시해였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숙청"은 좀 더 뒤의 시점이고, 제왕에서 초왕으로 옮긴 것은 봉지를 바꾸는 "전봉(轉封)"이라 할 수 있다.
  • 그렇다면 왜 규모도 크고 명예도 좀 더 얹어지는 초왕으로 전봉시킨 것인가 생각할 수 있는데, 한신을 그가 몇년 동안 운영했던 부대와 분리시키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현대사회의 인사 용어로 풀면 좌천 영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미 여러번 한신이 유방을 자극했던 이력이 있으니 항우가 패사한 시점에서 한신이 가장 위험분자라 할 수 있었다. 그런 한신의 손 아래에, 한신의 부대의 장교진이 모두 유방의 수하라고는 하지만, 몇년 동안 수족처럼 부린 부대가 그대로 있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다고 바로 왕작을 박탈하면 한신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고, 다른 이성왕들이 불안해할 수 있다. 그렇다보니 일단 다른 왕작으로 옮겨서 손에 익은 부대와 분리시키는 것이 해당시점에서는 최선일 것이다. 일단 옮기는 것 자체가 요즘처럼 깔끔하고 간단한 것도 아니라 상당한 기력을 소모시키는 것이기도 하고[51], 비록 초나라가 제나라보다 규모가 크고 명예가 얹어지더라도 초나라는 엄연히 방금 전까지 싸우던 적국이었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항우의 평가와는 별개로 해하에서 자국을 박살내고 자국의 왕을 죽이는데 크게 일조한 사람이 이제 자국의 왕이라는 점은 초나라 사람들이 한신을 딱히 즐겨 따르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으며, 거기에 초나라에는 황제본인과 주요 공신들이 악연으로 친인척 관계로 엮여있는 고향 동네도 있었다. 실제로 한신을 초나라 병사가 고변한 것이 한신의 회음후 강등의 계기가 된다. 거기에 당시 제나라 인근에는 고릉전투에서 한신 못지않은 위험분자로 밝혀진 팽월의 양나라나, 한신과 인연이 있는 장이[52] 의 조나라 장도(연왕)의 연나라[53]가 인근에 있어 한신이 반란을 일으키면 같이 호응할 가능성이 높았고, 이에 한신의 세력을 남쪽으로 강제이주시켜 당시 주요 제후왕중 그나마 한고조와 코드가 맞고 한신과의 인연이 적은 회남왕 영포[54] 장사왕 오예와 이웃하게 만들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사한 사례로 일본 전국시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동의 호죠씨를 박살내고 관동땅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준 것이 있는데, 석고가 150만에서 250만으로 100만이나 가증되었음에도 이것이 이에야스에게 좋은 일이라기보다는 히데요시의 노림수가 있었다고 설명하는게 일반적이다. 차이점은 정치력 분야에서 히데요시는 유방보다 못했고 이에야스는 한신보다 훨씬 나았으며 히데요시의 삽질까지 더해져서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이지만.

6.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는다

6.1. 밥값을 갚다

졸지에 제왕에서 초왕이 되긴 했지만, 초나라 지역은 한신의 고향이기도 했다. 한신은 위풍당당한 왕이 되어, 과거 자신을 찌질이로 여겼던 사람들 앞에 다시 나타났다. 한신은 자기에게 밥을 주던 아낙네들을 찾아나서 천금(千金)을 주었고, 밥을 빌어먹었던 정장에게는 백전(百錢)만 주면서 이런 소리를 덧붙였다.
"공은 소인이다. 덕을 베풀면서 끝까지 하지 않고 중도에서 그만두었다."
밥 한 그릇의 은혜를 천금으로 보답하니 일반천금(一飯千金) 고사다.

그리고 과거 자신을 가랑이 사이로 걸어가게 했던 사람도 찾아내서, 초나라의 중위(中尉)에 임명하였고, 이번에는 이런 말을 부하들에게 하였다.
"이 사람은 장사다. 그가 나를 욕보였을 때, 내가 어찌 그를 죽일 수 없었겠는가? 그를 죽인다 한들 이름을 얻을 길이 없어, 오랫동안 참아 공을 이루어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인내는 쓰고 그 열매는 달다는 명언을 몸소 실현한 것이었다. 가랑이 사이를 긴 것은 한때고 밥을 빌어먹은 건 여러 날이 되었는데 분명 후자도 한신이 분기탱천하는 계기가 되었음에도 조롱하며 백전만 준 것은 오히려 자기를 중간에 저버린 정장을 창피주기 위해서 이랬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좀 더 첨언하자면 현대에 와서는 꽤 오랜 시간 밥을 먹여주고 잠자리도 제공해준 정장한테는 밥값만 주고 자기한테 대놓고 모욕을 준 사람에게는 관직을 주고 밥 몇번 준 사람에게는 천금을 줬으니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한신이 뻔뻔한게 아니라 당시 관념으로는 한번 식객으로 받으면 끝까지 책임지는 게 도리이기에 정장이 잘못한 건 맞다. 한신 자신도 종리말을 보호하다 말고 죽게 만들어서 더 심하게 어기기는 하지만...

게다가 한신을 내쫓는 과정도 찌질하기 그지 없었는데 비록 한신도 말년에 인의를 저버렸다곤 하나 최소한 종리말에게 본인이 직접 사죄하고 해명하며 "사정이 이리이리 됐으니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는 종리말을 내주지 않으면 100% 확률로 한신은 극형에 처해질 위기였기에[55] 한신의 입장도 이해가 가는 편이다. 그러나 정장은 한신 한명의 숙식을 대기 어려워서 중간에 식객을 파기한 게 아니라 단지 부인의 잔소리가 싫어서 식객의 예를 파기한 것이다. 목숨이 걸려있는 사안이라 종리말을 팔아먹은 한신이랑은 명분에서 차이가 다르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정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식객의 예를 파할 거 같으면 정장 본인이 직접 한신에게 해명하고 사죄하면서 "사정이 이리이리 됐으니 더 이상 숙식을 제공하지 못하겠다. 미안하게 됐다."라고 하는 게 예법에 맞다. 적어도 이랬으면 한신이 나중에라도 정장의 사정을 봐줘서 편의를 봐주거나 똑같이 천금을 하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장은 아내의 잔소리가 두려워서 한신을 쫓아내는 일을 아내에게 일임해 버렸다. 그런데 아내가 택한 방법이란 게 남편 대신 설득하거나 그런 것도 아니라 식사시간 때 찾아온 한신에게 말 한 마디도 안 하고 밥솥 바닥을 긁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아무리 한신이 당장은 직업이 없고 한량이라 한들 본인이 자처해서 정장의 식객이 된 것도 아니고 정장이 먼저 한신에게 식객이 되길 권했는데 이런 식으로 모욕을 주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차라리 자기 다리 밑을 기어가라고 한 사내는 그 모욕이 찰나의 순간이고 본인도 칼을 찬 사내 앞에서 그 정도 오기를 부릴거면 목숨을 걸었다는 변명이라도 가능하지 본인이 식객으로 먼저 맞이해놓고 나중에 본인은 스리슬쩍 빠지고 부인 뒤에 숨은 주제에, 그것도 부인이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너 같은 놈 줄 밥은 없다. 꺼져라."라는 식의 압박을 하는 건 전례가 없는 아주 몰상식한 행동이다. 괜히 한신이 정장을 찾아서 소인배라고 욕한 게 아닌 것이다.

6.2. 반란혐의와 회음후 강등

한편으론 매우 의심되는 행동도 했었는데 무슨 의도인지는 불명이나 당장 항우의 몰락 이후에도 유방에게 항복하지 않은 초나라의 주요 장수 종리말이 의탁해오자 유방으로부터 숨겨준 것이다. 심지어 황제인 유방이 종리말을 체포하라는 명령까지 한신에게 내렸는데도[56] 이를 무시하고 숨겨준 것이다. 당시 한신은 팽성 근처인 하비에 수도를 삼아 항우의 서초 지역 대부분을 통치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옛날 항우의 부하들을 포섭하는 행동은 항우 잔존세력 기반으로 유방에게 반기를 도모해보겠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거기에 한신은 초 땅에 부임하자 곧 군대를 대거 양성하고 초나라 지역을 순행하는 등 수상한 행보를 이어갔다. 이렇게 되자 앞에서 말한 행동들도 죄다 반란을 준비한다는 것으로 의심받았다. 그것도 가뜩이나 같은 시기 영천후 이기, 연왕 장도가 각각 반란을 일으켜 유방이 직접 진압하러 간 상황에서 이런 짓을 벌인 것이었다. 특히 이기는 항우의 부하 출신이라 항우 세력의 재집결에 전 한나라가 신경이 곤두선 상황이었다. 정리하자면 한신은 과거 항우의 본거지에서 항우의 백성들과 부하들을 모으는 짓을, 그것도 황명까지 어겨가며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한신의 말이나 행동을 종합해보면 정말로 유방에게 반기를 들고 대적하려는 것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건 한신 생각이고 이미 제나라 사건 등으로 눈 밖에 나있었던 한신이 이런 짓을 한다는 건 사실상 자신의 명을 재촉한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초나라 쪽의 여론도 한신에게 부정적이었는지, BC 201년 음력 12월 다름아닌 이렇게 징병된 병사 중 한 명이 한신의 진지를 드나들더니 유방에게 한신이 모반하려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57] 작년 연왕 장도의 반란으로 유방과 신하들 모두 반란에 신경이 곤두선 상황에서 신하, 장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유방에게 "군사를 동원해 한신을 묻어버려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제장들의 태도와는 별개로 유방은 오히려 침묵을 유지하며 신중을 기했다. 유방이라고 한신이 별로 이뻐서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고, 다만 '이렇게 단순무식한 방법으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라는 쪽에 가까웠던 듯. 유방이 진평에게 대응책을 묻자, 지금 폐하의 장수와 군대는 한신을 이길 수 없고, 한신이 모반했다는 걸 아는 사람도 없으며, 한신도 계획이 새어나간 걸 모르니 그냥 놀러 온 척 하고 찾아가서 한신을 간단하게 사로잡으라는 것이었다.[58] 유방은 진평의 계책에 따라 남방의 운몽택(雲夢澤)으로 놀이를 나간다고 하면서 제후들을 모두 진현으로 모이게 했다. 물론 이는 한신을 사로잡기 위한 계책이었다.

회음후 열전에 따르면 처음에 한신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이후에는 알게 되었는데, 당초에는 놀라 아예 한번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와 전쟁을 벌일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괴철의 제안에 우물쭈물했던 그때처럼 머뭇거리다가 직접 나서서 억울함을 밝히면 공신입장인 자신이니 유방이 용서해줄 거라고 믿고 그만두어버렸다. 이에 누군가가 한신이 숨겨주고 있던 '종리말의 목을 가져다 바치면, 황제가 용서해줄 것'이라고 말하자 한신은 그 이야기를 종리말에게 꺼냈다.?????? 그러자 종리말은 한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황제가 초를 공격하지 않은 것은 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를 바치면 나도 죽지만, 곧 너도 죽을 것이다. 너 같은 자를 어찌 장자(長者)라고 하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목을 찔러서 자결해버렸다. 한신은 종리말의 목을 베어 싸들고 유방을 만나러 갔는데, 당연히 유방은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고, 근흡(靳歙) 등은 한신을 사로잡아 수레에 태워버렸다. 한신은 이렇게 한탄하였다.
"과연 사람들이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좋은 사냥개가 삶겨진다(狡兎死 走狗烹)라 한 것과 같구나!"

이 한신의 누명 주장을 들은 유방은 "나라에 반기를 든다는 고변이 있었다"라며 차갑게 반박한 뒤 한신에게 수갑을 채워버린다. 진승상세가에서는 좀 더 노골적으로 윽박지르며 "네가 뭐가 억울하냐!"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낙양에 도착한 유방은 대사면령을 내려 한신을 사면하고, 직후 한신의 초왕자리를 박탈해 그 땅을 유씨 친척들에게 분봉할 것을 주장한 전긍의 건의를 받아들여[59] 10여 일 뒤 한신의 초왕 직위를 박탈하고[60] 회음후로 강등시켜 버린다. 이렇게 한신은 이번에도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막대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초왕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6.3. 다다익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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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劉邦)
그 이후로 한신은 유방이 자신을 두려워하여 제거하려든다는 것을 인지한 뒤로 병을 칭하면서 조정의 조회나 행사에 전혀 참석하지 않으면서 흠을 주지 않기 위해 방안에 틀어박혔다. 그러다 보니 비참해진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도 날이 갈수록 높아졌고, "내가 주발이나 관영 같은 놈들하고 동급이 되다니!" 하고 불평했다. 어느 날 번쾌의 집에 초대받아 갔는데, 번쾌는 후작으로 강등당한 한신과 동급이었지만, 연신 굽신거리며 한신에게 왕 대우를 했다. 한서에서는 번쾌가 한신을 대왕으로 부르면서 "왕께서도 자신이 신하라는 사실을 인정하셔야 합니다."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번쾌의 성격상 이는 진심으로 한신을 존중한 것이다. 원래 선비를 하찮게 보던 고제와 달리 번쾌는 선비들을 매우 존중했다. 그러나 이미 심기가 단단히 꼬인 한신은 "살다 보니 번쾌 따위와 같은 항렬이 되었구나!"하고 쓴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이는 한신이 망한 이유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한신이 폄하한 관영, 주발, 번쾌는 다 초한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익장들이자 명장, 용장들이며 고제와의 관계도 한신보다 훨씬 가까웠고, 또 관영은 한때 한신 휘하에서 함께 싸우기도 했던 인물이었으며 특히 번쾌는 유방과 초창기부터 함께한 깊은 인연과 공적도 높은 데다 여후의 여동생과 결혼했기에 유방과 친인척 관계가 되는 중신이며 주발은 나중에 한나라에서 재상직까지 맡게 되는 거물이다. 고조공신후자연표에 의하면 관영은 9위, 주발은 4위, 번쾌는 5위로 걸물 중에 걸물이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간에 번쾌는 한신에게 예를 다해 위로하며 한고조에게 충성을 하라며 조언을 한 행동임에도 오만해진 한신의 이러한 자세는 결국 자신의 수명을 갉아먹었다고 할 수 있다. 사타구니 밑을 기어서라도 참으며 인내했던 한신은 대성한 후엔 뭐든 제 맘대로 돼야 속이 풀리는 소인배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은 그래도 기분이 괜찮았는지, 유방을 만나 각 장수들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때, 유방이 한신에게 "내가 어느 정도 숫자나 이끌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묻자, 한신은 "10만 정도."라고 대답했다. "그럼 너는?"이라는 유방의 질문에 한신은 이렇게 대답하였다.[61]
이에 기분이 상한 유방이 그렇게 잘났으면서 왜 자신에게 사로잡혔는지[62] 물어보자, 한신은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비록 군사를 많이 거느릴 수 있는 재능은 부족하시지만, 그 군사들을 잘 통솔할 수 있는 장군들을 거느릴 수 있는 재능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제가 폐하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하물며 폐하는 하늘의 도움을 받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말은, 유방이 실제로 재주는 없는데 운이 좋았다는 식의 조롱일 수도 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한신을 몇번이나 간단하게 제압해버리는 유방에 대한 한신의 솔직한 감정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행적들이 한신의 수명을 차근차근 깎아먹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6.4. 성야소하 패야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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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도 소하 덕이요, 실패도 소하 탓이다.[63]
成也蕭何 敗也蕭何
이렇게 불만이 쌓이는 와중에, 진희(秦豨)라는 인물이 거록군의 태수로 임명되는 일이 생겼다. 진희는 유방이 직접 "무척이나 믿음직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신임받던 인물. 그런데 한신은 진희를 따로 만나더니 하늘을 우러러 보고 탄식하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그 속내는 바로 반란에 관한 일이었다. 진희가 부임하는 거록에는 강병들이 많으니 진희가 반란을 일으키고, 한신 본인이 내부에서 흔들어버리면 일은 쉽다는 게 요지였다. 이에 진희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BC 197년 8월 실제로 반란을 일으켰다. 유방은 9월 달에 진희를 진압하러 떠났지만, 한신은 병을 핑계로 같이 나서지 않았다.

한신은 몰래 진희와 연락을 계속하면서 조서를 가짜로 꾸미고 사람들을 움직일 계획을 세우고는, 먼저 여후부터 족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한신의 밑에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죄를 지어 한신이 가두어 놓았는데, 하필 그 사람이 탈출한 뒤 여후에게 도망쳐 이 모든 일을 고해버리고 말았다.

계책을 알았어도 한신의 이름이 워낙 대단하니 함부로 적대의사를 표방하고 잡으려고 하면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여후가 계책을 물어본 사람이 바로 소하였다. 소하는 이미 진희가 패배했다고 거짓 정보를 꾸몄고, 한신에게 “병중이기는 하지만, 억지로라도 들어와서 축하하시오.”라고 했다. 이에 한신은 의심 없이 궁으로 나왔다가, 여후가 준비해놓은 무사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결국 장락궁(長樂宮)에서 참형을 당하게 된 한신은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어이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내가 괴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참으로 원통하구나! 내가 한낱 아녀자에게 속임을 당해 죽게 되었으니, 이것은 분명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64][65]
그렇게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회음의 시정잡배에서 당당히 제왕과 초왕의 직위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항우를 제압하고 천하를 유방에게 안겨 준 장본인인 한신은 오만해져 업보를 쌓은 나머지 비참한 말로를 걸으며 그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한신이 죽은 후 연좌제로 인해 그 삼족도 모두 처형된다.

한신의 모반은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소하가 그의 죽음에 관여한 사실은 분명하다. 소하는 이후, 한신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한몫했다는 이유로 상국(相國)에 임명되었다. 한신은 소하의 추천으로 인해 한나라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소하 때문에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송(宋)나라 사람 홍매(洪邁)[66]는 자신의 저서인 용재속필(容齋續筆)에서 "한신이 대장군이 된 것은 소하가 천거했기 때문이요, 이제 그가 죽음을 맞이한 것도 소하의 꾀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항간에 성공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고, 실패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다라는 말이 떠돌게 되었다(信之爲大將軍, 實蕭何所薦, 今其死也, 又出其謀. 故俚語有成也蕭何敗也蕭何之語)"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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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후와 소하에게 유인당해 살해당하는 한신 신간전상평화전한서속집에 실린 그림

한편 한신이 죽은 후 진희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부재중이었던 유방은 돌아와 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는 기뻐했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했다(차희차련)라고 한다. 한신이 최고의 위험분자였지만 어쨌든 자기를 그 자리에 올려준 일등공신이었던 것과 전술재능이 최고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유방과 한신 사이의 미묘한 애증 관계를 잘 나타낸 말이라고 볼 수 있겠다.[67]

6.5. 한신은 실제로 모반을 일으키려고 했나?

일세 영웅의 최후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허무한 죽음이라 이 한신의 반란 의도 자체에 대해 당시의 상황과 신빙성, 근거가 적고 설득력이 낮아 옛날부터 사기에 쓰여 있음에도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았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단순히 한왕 신과 한신을 당대 사람들과 사마천까지 헷갈려서 진희가 흉노 측과 접선하면서 그쪽에 망명해있던 한왕 신과 결탁한 것이 이쪽 한신이 한 일로 혼동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한신에게는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다면 이미 일으킬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많았다. 특히 제나라 정벌 후 제왕 시절에는 명성과 위세가 천하를 진동시켜 항우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군세나 세력이 커져서 유방과 항우를 합친 것보다 크거나 비슷할 정도였기에 괴철이 천하삼분을 제시하고 항우는 자신에게로 회유시키고자 하였으며 유방은 가왕을 요청하는 사신에게 화를 냈다가 장량의 조언에 가왕이 아닌 진짜 제왕으로 봉했다. 게다가 조나라 정벌 시절 때에도 일으키고자 하였으면 반란 자체는 충분히 가능했으며 제왕 시절부터 해하 전투가 끝나고 난 후, 그리고 제왕에서 초왕으로 전봉되었을 때에도 충분히 반란을 일으켜 성공시킬 기회는 수없이 많았으나 단 한 번도 배신하지 않았기에 그대로 유방에게 당했다.[68]

다만, 이 부분은 막연히 유방을 믿고 방자하게 굴던 한신이 이에 대해 처벌을 받고 앙심을 가져 뒤늦게 배반할 마음 품었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한신의 시기적인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그 외의 여러 부분에서 한신의 역모는 그 실재가 의문스럽다.

우선 한신의 참수 이유는 '진희의 모반에 가담했다'라는 명분이었는데 당시 진희의 행적을 보면 한신과 한 번 만났다는 기록조차 엇갈리고 친분 등 다른 연계되는 부분이 전혀 없으며 진희가 한신을 거론한 적도 없고 내부동조임에도 불구하고 문서 같은 것 하나 없었다. 사기에서 진희와 내응했다는 부분을 보면 모순되는 부분과 이상한 점이 너무나도 많다. 사기에서 둘이 만났을 때 진희가 아닌 한신이 먼저 진희에게 모반을 부추겼다는 식으로 나와있으나 실제로 모반을 꾀한 주범은 진희였다. 그 또한 그를 따르는 행렬에 수많은 빈객들과 수레로 인해 주창에게 의심을 받다가 유방의 지시에 따라 조사했더니 실제로 수레와 빈객들의 불법적 내용이 들키면서 유방으로부터 의심을 받기 시작해 진희가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고 그 무렵부터 모반을 꾀해 실제로 왕황, 만구신 등과 내통했다.

게다가 사기의 내용을 보면 진희가 밖에서 모반하고 한신이 내부에서 동조하겠다 했는데 내통을 했다면 당연히 연락 등을 했을 것이며 상황을 살펴보았을 텐데 실제 한신이 죽은 것이 진희가 군사를 일으킨 후인지 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군사에 있어서는 정점인 그가 모반을 위해 진희를 믿고 군사를 일으키도록 한 거라면 진희의 회답을 기다리는 사이에 벌써 그렇게나 빨리 진압되었다는 거짓을 모를 리가 없다. 게다가 정말 가담했다면 최소한 도망의 시도라도 하는 것이 정상인데 한신은 그냥 소하를 따라가기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한신이 배신하려고 했다면 여후와 태자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군사를 일으켜서 나라를 세우거나 한고제를 암살했을 것이다. 그런데 직접적으로 한고제의 신상을 위협하거나, 가신을 제거하거나, 병력을 일으킨 것이 아닌 여후와 태자에 대한 습격이 한신의 역모의 근거가 되었다. 허나 이 방법은 한나라를 전복시키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 아니다. 용병술에서 극에 달했던 한신이 한나라를 배신하려고 하는데 고작 여후와 태자를 죽이는 방법으로 역모를 시작하는 것보다 병력을 일으켜 주요 거점을 공격/장악하는 게 제대로 된 방법이다. 따라서 한고제가 사망하자 여후가 한나라 개국공신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모습에 비추어 한신이 모반을 꿈꾼 것이 아니라 배신의 근거조차 여후가 조작하여 여씨천하의 최대 방해물인 한신을 숙청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문제들을 넘어가더라도 정치에 대해서는 까막눈이었으나 군사에 대해서는 통달한 그인데 갑자기 미치지 않고서야 진희가 유방을 상대로 성공할 리가 만무한, 무모한 계획과, 본인은 여후와 태자 세력을 제압한다는 영양가 없는 계획을 세웠다는 건 매우 이상한 부분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시기적인 문제를 그런대로 이유를 붙여 넘어가더라도 반란의 계획 자체가 이상한 것이다.

게다가 당시 상황으로는 유방은 반란을 제압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모두 진압하였으며 여후는 권력을 잡기 위해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제거할 계획을 짜고 실제로 옮기고 있었다. 특히나 여후는 모략으로 많은 이들을 죽였는데 그 대표적인 게 팽월이다. 물론 팽월은 한신보다 후에 죽었지만. 그래서 회음후로 강등되어 실권조차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두려운 존재였기에 여후가 가장 먼저 한신을 죽이기 위해 모략으로 진희의 반란에 연루시켰다는 것으로 여기고 한신이 정말로 모반에 가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는 한신이 미쳐서 진희에게 가담했고, 경비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정보가 여후에게 흘러들어갔으며, 거짓 조서를 내려 각 관아의 죄인들과 관노를 풀어주고서는 순순하게 소하를 따라가 제 발로 사지에 들어갔다는 소리가 된다.

실제로 당시 유방은 진희를 토벌하러 갔으며 후에 돌아올 때 한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편으로는 씁쓸했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사실상 유방 또한 한신이 많은 심기를 건드리긴 했지만 엄청난 공적과 오래동안 함께 해왔기 때문에 애증이 생긴 것인지 항상 유방 자신은 한신으로부터 군권을 박탈하고 강등을 시킬지언정 직접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유방 자신 또한 한신이 위협은 되지만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며, 그렇기에 회음후로 강등시켜놓고 계속 구금시켜 놓은 것이다. 게다가 한신은 모반을 꾀했다고 그냥 참수만 했는데, 실제 모반은 일으키지 않고 고향으로나 되돌아가게 해달라는 팽월은 죽일 뿐만 아니라 젓갈까지 담그어 제후들에게 보내었으니. 오히려 그 시기에 한신으로부터 가장 위험을 느낀 것은 유방이 아닌 여후였다. 유방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은 짐작하는 내용이고 유방이 죽고 나면 자신이 권력을 잡고자 하는데 거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게 한신이니. 한신의 최후는 유방이 아닌 여후가 계략을 짜서 소하를 이용해 한신을 죽인 셈.[69]

소하 여후 등에 의해 죽음을 면했던 근거도 "애초에 배신하려면 한참 전에 했을 것이다"라는 말로 의혹을 면하는데, 한신 또한 배신하려면 가왕이 되었을 시절이나 초왕 시절에 충분히 하고도 남았다. 한신이 한나라 영토의 2/3를 정벌하고 그의 군사력이 항우와 유방의 군력을 합친 것보다 많거나 또는 비슷했기 때문이다. 소하가 위 발언으로 숙청을 면했는데, 한신이 위에 해당하지 않았던 것도 한신의 배신이 진실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1] 한국에서는 고우영 초한지의 영향으로 흔히 한나라의 왕족 출신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과 교류가 어려웠던 시절 고우영 화백이 사료 해석 과정에서 동명이인인 한왕 한신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2] 다만 활자 접근성 자체가 떨어지던 고대에 글을 알고 병법을 아는 수준이면 한신도 결코 단순한 무지렁이 백성 출신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방만 해도 흔히 평범한 백성 출신으로 소개되지만, 조부가 위나라에서 대부를 지냈으며 집안에 벼슬을 지낸 사람이 꽤 많았다. 하지만 유방 부친 대에 가세가 몰락해 가난해졌고 유방 본인도 방탕하게 살아서 출신이 낮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한신 출신도 대강 비슷한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 [3] 여기서 나오는 왕손이라는 표현 때문에 한신 한나라 왕족설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냥 청년의 존칭에 가깝다. 당시 육국이 멸망하며 몰락한 왕족과 귀족들이 거리에 넘쳐나 청년의 존칭이 왕손과 공자가 되었다고 한다. [4] 이 일화가 노파가 성을 내었다는 대목 때문에 너같은 버러지 불쌍해서 밥준 건데 주제나 알아라 는 해석과 내가 불쌍해서 준 것일 뿐 보답할 필요가 없다는 해석이 공존한다. 대부분은 전자대로 해석해 한신의 비참함을 더 살리는 편. 한신의 눈치 없고 오만한 인성을 보았을 때 '나중에 은혜를 갚겠다'는 말을 되게 재수없게 한 거 아닐까 하는 해석도 있다. 고우영 초한지 등. [5] 현대 기준으로도 충분히 굴욕적이지만 당시 의복 문화를 생각하면 비교할 데가 없는 모욕이었다. 당시 중국 문화에서는 현대와 같은 바지의 개념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춘추전국시대 때 현대의 바지와 비슷한 옷이 보급됐지만 잠방이 역할을 하는 고당(袴襠), 고요(袴腰)가 없이 다리만 덮는 형태였고 중요한 부위가 있는 곳은 속옷만으로 덮혀 있었다. 그리고 이런 초기의 바지 위에 치마를 둘렀다. 즉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 지나간다는 것은 타인의 성기 아래를 지나가는 불결한 행동이었다. [6] 고대에는 속옷도 없는 하체에 치마만 두르는 형태였고 상나라, 주나라 때 포자(袍子)라는 속옷이 들어왔다. 참고로 현대와 비슷한 바지인 연당고(連襠袴)는 후한 때 도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https://m.blog.naver.com/cytchoi/221996198960 [7] 창을 들고 대기하는 사람, 말단 하급 장교 직책으로, 윗사람의 무기를 '들고' 있다가 요구에 맞춰 건네는 비서 역할까지 맡았다. [8] 결정적으로 모종의 사건으로 연좌죄를 물게 되어서 한신을 포함한 여러 명의 집극랑들이 참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본인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9] 정확히 어떤 죄인지는 한서나 사기나 언급이 없다. 고대의 군법은 상상 이상으로 엄했기에 죄의 대소는 훗날 사람에겐 추측의 영역이다. [10] 즉 전군 1종 보급 총괄지휘직. 군대는 굶으면 못싸운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이라 군수에서도 가장 중요한 분야가 1종 급양이니만큼 적당히 아무 관직이나 막 던져줬던 것은 결코 아니다. [11] 다만 도위라는 벼슬이 그렇게 낮은 게 아니었다. 적왕 동예나 역이기의 동생 역상이 한때 이 벼슬에 있었고, 그 관영도 유방을 따라 적과 몇 차례 치열하게 싸운 끝에(...) 도위에 임명된다. 이런 직위를 한군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한신에게 준 것이다. [12] "아니 뭐 말을 그런 식으로 하세요?"에 가까운 반응이라서, 애초에 유방이 엄근진하게 임명한 게 아니라 "아 알았어! 대장군 시키면 되잖아!" 같은 식으로 말한 것으로 보인다(...). [13] 쉽게 말해 한신은 '항우는 분명 대단한 사람이고 주공은 항우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 그러나 그런 항우도 치명적인 실책을 여러 번 범해 겉으로는 패왕이니 뭐니 해도 그에게 진심으로 복종하는 이는 거의 없다. 따라서 주공께서 딱 항우가 하는 것의 정반대로만 행동하면, 천하를 손에 쥐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라고 말한 것이다. [14] 어두울 암, 건널 도, 진창은 지명으로 지금의 보계시이다. 즉, 몰래 진창을 건너간다는 말. [15] 장량의 조언으로 잔도를 태운 것은 《사기 유후세가》에 나온다. 그러나 잔도를 보수해서 장한의 눈을 돌리게 한 사이 장한이 대비하지 않은 옛 길을 지나 진창을 쳤다는 것은 <유후세가>는 물론이고 사기의 <회음후열전>이나 <번역등관열전>, <고조본기>, <항우본기>에 나오지 않는다. [16] 후에 유방이 황제로 등극한 뒤 이곳에 장락궁을 짓고 그 외곽을 장안성이라 하였다. [17] 산시성을 말한다. [18] 회음후 한신과 한왕 신은 이름이 똑같다. 그래서 사기 열전에서는 한왕 신의 열전을 한신 열전이라 하고 회음후 한신은 열전에서 이례적으로 작위 이름인 회음후 열전이라 하였다. 사마천이 이렇게 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9] 당시 항우와 그의 주력군은 제나라를 공격 중이었는데 초반에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죄없는 제나라 백성들에게까지 만행을 저지르자 전횡과 전광 등이 패잔병 등을 수습하고 제나라 백성들이 그에 호응하여 저항했으며 이에 항우 또한 제나라를 정벌하지 못하고 고착 상태에 빠져 고전 중이었다. 그렇기에 지원군을 빠르고 쉽게 보내기는 어려웠다. [20] '8월, 한왕이 한신의 계책에 따라, 고도를 따라 돌아와서, 옹왕 장한을 습격했다. (장)한은 한군을 진창에서 맞아 싸웠으나, 옹나라 병사가 져서, 돌이켜 달아났다. 멈춰서 호치에서 싸우니, 또 다시 져, 폐구로 달아났다.'라는 얘기는 있으나 잔도를 보수했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21] 여기에서는 길을 막은 주체가 한나라이다. 한나라가 잔도를 태워서 길을 막았고 그 길을 보수하는 움직임에 장한이 따라갔다. 그러나 조연의 이야기에서는 길을 막은 주체가 옹나라이다. 여기에서는 유방이 길이 막히니까 진짜로 돌아가려고 했다. 어쩌면 현재의 암도진창의 고사는 조연의 이야기에서 한나라가 옹나라를 우회해서 공격했다는 이야기와 장량의 계책으로 한나라가 잔도를 태운 것을 가지고 잔도를 태운 것을 바탕으로 우회공격으로 대충 섞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리하면 한나라가 삼진을 평정할 때 부서진 잔도를 수리함으로써 옹나라의 시선을 돌리고 그 틈에 옛 길로 우회해서 기습했다는 이른바 암도진창은 없었다는 것. 옹나라는 잔도도 없으니 한나라가 서쪽으로 돌아서 나올 것을 알고 있었고 한나라도 그 길을 따라오면서 도전하는 옹나라 군대들을 무찌르고 북진했을 뿐이다. [22] 애시당초 유방 본인이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병권을 줄 이유가 없다. [23] 초에서 기병을 잘 써서 재미를 본 것을 보고 유방이 초에 맞서기 위해 기병에 능한 전직 진나라 장수들인 이필과 낙갑을 뽑아다 관영 휘하에 두고 기병대를 양성했는데 경색전투에서 이 기병대를 시험해보기 위해 내보냈던 것이다. [24] 소설에서는 한신에게 대패한 이후 시간벌기 용으로 위표에게 유명한 점쟁이를 보내 그를 부추겨 초나라로 배반하도록 유도했다는 이야기로 각색되었다. [25] 알여는 하동에서 태행산맥으로 넘어가기 위한 교두보가 되는 지점 중 하나로 전국시대 조나라의 조사가 진나라 병사를 격파한 전투가 벌어진 옛 고전장 중 하나이다. 당시 "짐승 두마리가 한 굴에서 싸우는 형국의 지형이니 쎈놈이 이긴다" 라는 말을 남겼는데 한군이 먼저 대기하고 있던 대나라 군세를 별 피해없이 압도적으로 갈아버린걸로 보아 한신이 후에 시정잡배라는 단어를 써가며 자군의 오합지졸스러운 면모를 강조했지만 실상 조나라와 대나라 군대도 대단한 정예병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 [26] 손자병법의 모공편. [27] 설마 1인당 1깃발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28] 항우도 진나라와의 전쟁을 할 때 파부침주라 불리는, 3일분의 식량을 제외하고 전부 강물에 내던져 배수진 전략을 행한 적이 있었다. 범증을 비롯한 참모진은 만약을 위한 보급품을 은닉해둔 사실을 알고있으나 이를 모르는 일반 장병들은 필사로 할 수 밖에 없었다. [29] 당시 관념에서 동쪽은 해가 뜨는 방향이라 양으로, 서쪽은 해가 지는 방향이라 음으로 생각했기에 자리를 동서로 배치할 경우 동쪽 자리를 상석, 서쪽 자리를 하석으로 여겼다. [30] 천려일실 천려일득의 고사. [31] 관중은 대기근의 피해를 회복하는게 급선무였기 때문에 형양 라인이 무너지고 오창의 식량 기지를 빼앗긴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심각한 의미였다. 역이기가 무리를 해서라도 형양을 수복하라고 주장한 이유이기도 하다. [32] 유방이 한신의 군사를 빼앗아서 돌아오는 사이에 다들 슬금슬금 빠져나왔다. [33] 실제로는 원군을 보내줬으나 전부 죽은 건데, 장이는 이를 믿지 않고 되려 이들을 진여가 숙청한 것으로 여겼다. [34] 애시당초 이 때 유방은 소수의 병사만 데리고 간 것이기 때문에 몸조심을 하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35] 한신과 장이를 제외한 다른 장수들은 대부분 팽월을 도우러 가느라 더 멀리 있었다. [36] 당장 장초왕 진승도 칭왕하면서 부하들한테 병사들을 떼어줬더니 죄다 배신했다. [37] 즉, 한신의 군대는 당분간 조나라 땅에 주둔해 있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미 조, 대, 연을 평정한 이상 지금 당장 급한 형양과 성고 쪽으로 군사를 융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38] 무엇보다 한신의 군대는 전부 다 유방이 마련해준 것이었다. [39] 괴철의 이름은 ( 한무제 때문에) 피휘되어 사서에서는 오랫동안 괴통으로 불렸다. [40] 물론 이성왕들은 대부분 유방과 여치에게 당해버렸지만 장사왕의 자리를 유지한 오예나, 비록 왕 자리는 잃었어도 가문은 좋게 보존한 장오처럼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한신의 군대에 박살 나는 일보다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41] 제나라는 항복했으나 항복한 군대를 공격했다는 것은 단기적으로 이익이 있을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았을때(중화통일 가정시) 제나라 이외 적국이 대세가 불리하더라도 항복은 커녕 결사항전하게 하는 명분만 주게 된다. 애초에 항우와 다르게 명분을 제대로 쓰는 유방과 그외 측근들 눈에는 한신의 행동은 도가 지나친것. [42] 일부 창작물에서는 한신이 유방의 명에 따라 출군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객장 신분인 괴통이 이를 막으며 가왕을 받을 때까지 출군하지 말라는 꾀임에 넘어가 이런 상소를 보낸 것으로 각색되었다. [43] 항복을 준비하고 있던 제왕 전광의 뒤통수를 친 전적을 생각하면 훌륭한 망언이다. [44] 이 상황이 사기 회음후 열전이나 한서 한신전에는 유방이 형양성에서 포위당하여 그야말로 위기일발의 상황으로 묘사가 되는데, 고조본기나 한서 고제기를 보면 이미 형양은 5월 기신의 일이 있었을 때 함락당했고, 한신이 용저를 격파하고 왕 자리를 요구한 일은 11월의 일이다. 한서의 언급을 보면 당시 유방은 광무(廣武)에서 대치를 하다가 부상 때문에 휴양차 성고에 머무르고 있었다. [45] 한서 한신전에 따르면 진평도 같이 조언을 올렸다. [46] 아닌게 아니라 전술한대로 장량과 진평은 한신을 까딱하면 반역을 저지를 종자로 파악했고, 훗날 한신의 왕작위를 뺏거나 처형할 때 신하들 대부분이 환영할 정도로(오히려 한신을 처형할 때 제일 씁쓸하게 반응한 사람은 한고제였다.) 한신은 한나라 신하들 전체에게 반란분자 취급을 받았다. [47] 실제로 한신이 붙는 쪽이 이기는 쪽일 정도로 천하의 주도권은 한신에게 있었다. 항우든 유방이든 한신이 반항하기 시작하면 막을 수가 없고(항우는 군사력과 용병술로 한신에게 찍히며, 유방은 항우를 이기기 위한 전력으로서 한신이 반발하면 대책이 없어진다), 오히려 죽일 듯이 으르렁대던 둘이 연합해서 한신에게 대항해야 할 판이다. 한신이 왕위를 달라고 하자 유방이 열받아서 욕을 하다가도 "달라는 대로 줘라. 아니면 변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라는 장량의 제안에 덜컥 태도를 바꾼 것도 항우를 이기는 데에 한신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48] 신간정상평화전한서속집의 그림. [49] 나중의 숙청 때문에 흔히 영포가 여기서 같이 엮이지만 사실 유방이 부른 건 한신과 팽월 뿐이고 영포는 이때 그냥 유방이 시키는 대로 구강 방면에서 주은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라 고릉 전투와는 무관하며, 유방과 소하 등만 해도 한신은 몰라도 영포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50] 소설 초한지에서는 출동하려 했으나 부하들에 대한 영토 포상 권한이 없어 출동 못 했던 식으로 각색되었다. [51] 이런 점 때문에 후술할 일본 막부에서도 다이묘들 힘을 뺄 때 자주 써먹던 방법중 하나가 영지를 바꾸는 전봉이었다. [52] 장이는 한신이 자신의 조나라를 회복하게 해주고 한신과 가장 오랜기간동안 같이 종군한다. [53] 장도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항우가 죽고 나서 유방이 황제가 된 바로 그해에 반란을 일으키고 토벌당해 가장 먼저 숙청당한 이성왕이 되었다. [54] 흔히 고릉전투때 영포도 유방의 지시를 어긴것으로 오해하는데 고릉 전투때 유방이 참전을 지시했다 어긴건 한신과 팽월 2명이었고 영포는 따로 수춘지역 토벌을 지시받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오히려 한신과 팽월의 항명을 겪자 보험으로 급하게 호출할 정도로 당시 영포는 유방에게 제법 신뢰받고 있었다. [55] 물론 종리말을 내줘도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90% 이상은 한신이 죽을 상황이었다... 괜히 종리말이 그 정도 안목도 없냐고 욕한 게 아니다. 다만 한신 입장에서는 낮은 확률로 한고제가 참작해줄 것에 걸었을 뿐이다. [56] 사기에는 이를 종리말이 유방을 곤경에 자주 처하게 만들어서 그랬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같은 이유로 체포 명령이 떨어진 계포는 아무리 하후영의 변호가 있었다 하더라도 항복하자마자 벼슬까지 내려줘서 중용했고 그 외에도 항백 등의 항씨 일족들에게 유씨 성을 주고 열후에 3명을 봉했을 정도로 대접했는데 이를 보면 원한이 문제가 아니라 항우의 잔당이 모여 다시 일어날 것을 염려한 것으로 추정되며 오히려 빨리 유방에게 귀순했더라면 벼슬을 받거나 벼슬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면받아서 편하게 살수도 있었을 것이다. [57] 징병이나 군사 순행이나 전후대책이 시급했던 당시 초나라에겐 가혹한 낭비였으니 한신이 좋게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유방과 한나라 쪽에선 군대를 일시적이나마 해산해서 집으로 돌려보내고 조세 감소 등 갖가지 전후 대책을 발표하며 한창 관중을 위무하고 있는 와중이기도 했다. [58] 한신이 비록 정치력이나 처세술은 빵점이였지만 그 지랄맞은 항우조차 먼저 손을 내밀 정도로 한신의 군재나 지휘력은 세계 전쟁사를 통틀어도 대체자를 찾기 힘들정도로 뛰어난지라 그가 정말 딴마음 먹고 반란이라도 일으켰다면 아무리 그 유방이라도 한신을 제압하는건 어려웠을 것이다. [59] 전긍은 이것으로 상을 받는데 이는 한신이 결코 무죄방면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실제 한신이 풀려난 것은 무죄방면이 아니라 대사면령 덕분이었다. [60] 한신이 다스리던 초나라 땅은 회수를 경계로 둘로 쪼개고 동쪽을 형나라로 떼어내 유방의 사촌 형 유가를 왕으로, 서쪽은 초나라로 남겨두어 유방의 동생 유교의 왕으로 삼았다. [61] 사실 이 10만 발언도 다다익선 발언만 빼고 봐도 상당히 문제의 소지가 많은 발언인게 고대 중국에서는 천자는 만승지국이라고 해서 100만의 병력을 거느릴수 있는걸 기준으로 보고 10만이면 제후급으로 여겼다. 유방의 능력이 10만따리인 게 팩트라고 해도 이럴 땐 눈치껏 100만이라고 해 주는 게 예의인 것이지, 그냥 10만이라고 팩트폭력을 박아 버리면 유방 너는 제후왕 급이지 천자급은 아니라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고 만다. 그러나 눈새 한신은 결국... [62] 왜 신하가 되었느냐는 뜻으로 해석되며, 간혹 '그렇게 잘나서 나한테 잡혔냐?' 라고 비꼬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63] 순서대로 소하가 한신을 따라가서 잡는 장면, 단을 쌓아 대장으로 봉하는 장면, 약법 3장을 짓는 장면. 앞의 두 폭은 양한개국중흥지전(兩漢開國中興志傳)에, 마지막 그림은 경본통속연의안감전한지전(京本通俗演義安鑒全漢志傳)에 실려있는 그림이다. [64] 그러나 많은 역사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이 한탄은 심한 어폐가 있다. 한신이 유방에게 단단히 찍힌 이유는 오히려 괴철의 말을 들어서다. 제나라를 기습해 역이기를 죽게 만든 것도, 유방이 위험에 빠져 있는데 제나라 왕을 달라고 졸라서 왕이 된 것도 다 괴철의 아이디어다. 그 때마다 유방은 한신에게 엄청나게 분노했으나 꾹 참고(유방은 반사적으로 진노했으나 장량과 진평이 말려주었고 일단 한신을 왕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분노 스택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괴철의 말을 듣지 않고 유방에게 잘 보였으면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들을꺼면 끝까지 듣던가 아니면 아예 듣지를 말았어야 하는데 어중간하게 괴철의 말대로 유방과 척을 지다 결정적 부분에서 주저해버렸고 결국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그 부분을 이야기 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65] 사실 괴철 말대로 반란을 일으켜서 삼분 계획을 일으킨다 해서 그게 제대로 돌아갈 확률은 낮았다. 범증밖에 없었던 항우도 마찬가지였지만 한신 주변에 인재가 괴철밖에 없었고 유방의 인재풀들의 결속은 오히려 단단했으면 단단했지 한신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서 그게 깨질 정도로 낮진 않았다. 거기에 명분을 등에 업고 제대로 자리를 잡은 유방과 다르게 한신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제후들이 동조해주어야 할 명분이 없었다. [66] 홍수전의 조상이다. [67] 만약 한신이 유방에게 제대로 충성심을 보였다면 전후에도 그를 중용하였을 것이다. [68] 물론 배신만 하지 않았지, 하극상이나 명령불복종, 상관협박 등 고제의 이목을 끌만한 어그로는 잔뜩 저질렀다. 특히 같은 편의 중심 인사인 역이기를 죽게 만든 것은 사실상 반역이나 다름 없는 짓이었다. 그리고 대전쟁이 끝나서 당연히 다들 군축 기조로 들어서고 반란도 일어나고 있을 때 멀리 떨어진 초나라에서 전후처리보다 군사양성에 집중하는 것도 문제였다. [69] 한신이 수많은 미심쩍은 행동을 보였음에도 끝끝내 거병하지 않았던 것에 유방 및 유방의 부하들과 싸우기에는 부담스러웠던 부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방이 죽은 후 여후나 혜제가 앉아있을 때라면 한신은 그들에게 항우 이상 가는 위협이다. 주발이나 관영 등 유방의 직속 수하들로 절대 한신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니까. 또한 괴철에게 넘어가 역이기를 죽이는 한신의 갈짓자 행보를 보면 유방이 죽은 후의 한신에게 큰 신뢰성을 보낼 수는 없다. 사람 좋은 혜제야 그렇다쳐도 여후는 절대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한신에게 병권이 없다한들 누군가 또 유방처럼 한신을 쓰지 말라는 법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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