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1:53:35

하이메 라스카노

파일:라스카노.jpg
이름 하이메 라스카노 에스콜라[1]
(Jaime Lazcano Escolá)
생년월일 1909년 12월 30일
사망년월일 1983년 6월 1일 (항년 73세)
국적 파일:스페인 국기.svg 스페인
출신지 스페인 왕정 복고 팜플로나
포지션 아웃사이드 포워드
신체조건 미상
소속팀 CA 오사수나 (1925-1928)
레알 마드리드 CF (1928-1935)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35-1936)
국가대표 5경기 1골 (1929-1930)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뒷이야기5. 수상
5.1.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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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

2. 생애[2]

2.1. 선수 생활

2.1.1. 클럽

라스카노는 오사수나에서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고 팀 내 에이스로 군림했다. 그러다 그의 활약에 눈독을 들인 레알 마드리드로 6,000페세타의 이적료에 이적하였다. 라스카노가 레알로 이적했던 시기는 1929년으로 라리가 출범 시즌이었기 때문에 오사수나에서의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1929년 2월 10일, 레알 마드리드가 에우로파를 상대로 5대0으로 승리한 경기에서 라스카노는 후반 5분 득점포를 가동했다. 이 골로 그는 레알 마드리드의 라리가 역사상 첫 골의 주인공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에 그치지 않고 그는 이 경기에서 59, 75, 83분에 걸쳐 3골을 더 넣어 총 4골을 퍼부어버렸으니 그야말로 레알 마드리드의 화려한 역사의 효시가 된 셈이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7년간 81경기 37골의 기록을 만들어냈고 그 당시 마드리드는 사모라[3], 킨코세스[4], 올라소, 시리아코, 레게이로, 올리바레스 등의 맴버들과 함께 활약한다. 그 이후에도 주제프 사미티에르[5], 에스파르사, 레온, 일라리오 등의 맴버들이 영입됨에 따라 한층 더 강력한 축구를 선보인 레알 마드리드는 이후 각종 대회에서 8번의 우승을 더 차지한다. 이 사이에 무패우승을 맛본 것은 덤.

은퇴 시즌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뛰기도 했다. 다만 이땐 11경기동안 득점이 없을 정도로 매우 부진하였고 그대로 은퇴하였다.

라스카노가 모든 커리어에서 남긴 기록은 147경기 출전 79득점이다.

2.1.2. 국가대표

라스카노는 국가대표팀에서 5경기 밖에 뛰지 못했다.

다만 1872년의 첫 A매치 이후 영연방외의 팀에게 무패행진을 달리던 잉글랜드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며 4대3으로 이겨버린 것은 당시의 축구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하프타임 직전 동점골을 기록했으며 이 당시 득점뿐만 아니라 후반 80분경의 골 상황에도 크게 관여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라스카노는 그 시대의 아웃사이드 포워드의 위상을 바꿔놓았단 평을 들을 정도였다. 정확한 움직임과 스피드, 파워풀한 슛을 지닌 선수였고 지능적인 움직임과 체력까지 갖췄다고 전해진다.

4. 뒷이야기

  • 그는 축구 선수이면서 산 로렌소에서 연극 대본을 쓴 극작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Dramaturgo" 라는 별명도 가졌다.
  • 그가 가장 좋아하는 라이벌은 바르셀로나였고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2차례의 해트트릭을 포함, 9경기 8골을 넣는 강한 모습을 보였다.

5. 수상

5.1. 클럽



[1] 라스카노는 아버지의 성, 에스콜라는 어머니의 성이다. [2] 출처: 위키피디아, bdfutbol, 레알 마드리드 공식 홈페이지 [3] 1930년대 유럽 최고급 골키퍼이자 카시야스의 등장 이전까지 스페인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평가받았던 명골키퍼였다. [4] 1930년대 유럽 최고급 수비수 중 한명이다. [5] 원래는 FC 바르셀로나의 초창기를 대표하던 레전드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경영진과의 마찰로 인해 1군에서 탈락에 대한 배신감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서 갚았다. [6] 라리가 역사상 두번째 무패우승. 첫번째는 아틀레틱 클루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