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21:10:06

하비브 하우스

파일:Seal_of_an_Embassy_of_the_United_States_of_America.svg
주한미국대사관저 (하비브 하우스)
The Residence of the U.S. Ambassador
to the Republic of Korea (Habib House)
파일:The_Residence_of_the_U.S._Ambassador_to_the_Republic_of_Korea_(Habib_House).jpg
<colbgcolor=#131230>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길 83
건축일 1974년 (착공)
1976년 (준공)
종류 대사관저 (공관)
관리기관 미합중국 국무부
주한미국대사관
1. 개요2. 역사
2.1. 조선말기~대한제국2.2. 일제강점기2.3. 광복 후
3. 시설4. 사건사고
4.1. 1989년 서총련 대학생 관저 점거 및 방화미수 사건 4.2. 2019년 대진연 무단침입 사건

[clearfix]

1. 개요

주한미국대사관 하비브 하우스 소개 영상
주한미국대사관의 부속건물이자, 주한미국대사의 거주시설인 외교공관 관저이다. 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길에 위치해있다. 1974년까지 구 주한미국공사관을 관저로 사용하다가, 시설 노후화로 인해 1974년 현 정동 덕수궁길 근처 부지에 새로운 관저를 착공, 1976년 신축 관저가 완공되고 나서, 관저 이름을 필립 하비브 전 주한미국대사의 뜻을 기려 "하비브 하우스"로 명명하였다.

외교공관이기에 타국 대사관저처럼 대한민국 경찰청이 경비를 서고 있지만,[1] 한미관계의 중요성으로 인해 주한미국대사관에 버금가는 가장 높은 수준의 보안을 자랑한다.

2. 역사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46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46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

2.1. 조선말기~대한제국

1883년( 고종 20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미국은 서양 국가 최초로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미국 정부는 첫 공사로 루시어스 하워드 푸트를 파견했다. 푸트 공사 일행은 자신들이 머물고 근무할 공사관 한성에 설치했다. 처음에는 잠시 박동의 묄렌도르프 집에 두었다가 통역관 윤치호 등에게 새 공사관 부지를 알아보게 했고, 곧 정동에 있는 민계호, 민영교( 명성황후의 친족들)의 집을 2,200 미국 달러에 사들여 그곳으로 옮겼다. 민계호 집은 건물 125칸, 빈 공간 300칸, 민영교 집은 건물 140칸, 빈 공간 150칸 규모였으며 이외에도 주변 가옥을 몇 채 더 매입해 미국공사관 영역을 조성했다. #
파일:1880년대 후반 미국공사관.png
1880년대 후반 미국공사관 #
파일:수옥헌과 미국공사관.png
1899년에 아펜젤러가 촬영한 경운궁 수옥헌(맨 왼쪽)과 미국공사관(맨 오른쪽). 맨 왼쪽의 흰 탑이 러시아공사관이다.
서양 외교공관 중 처음으로 생긴 미국공사관의 정동 입주를 계기로, 정동은 한성 서양인들의 터전이 되어갔다. 1897년( 건양 2년)부터 고종이 인근의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서 거주했고, 점점 경운궁의 영역을 넓히면서 미국공사관은 경운궁에 둘러싸인 모습이 되었다. 1900년( 광무 4년) 즈음에 부분적으로 개수했고, 실내도 고쳐지었다. 그리고 행랑도 만들었다.
파일:구한말 미국공사관2.png
19세기 말 ~ 20세기 초 즈음의 미국공사관 #
미국공사관 건물은 다른 나라 공사관들과 차이점이 몇 가지 있었다. 처음부터 단교 때까지 쭉 한옥이었고 자리도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 조선 전통을 존중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조선 주재 미국 외교관들은 당연히 자신들에게 편한 양옥을 세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본국에서 지원을 적게 해줬기 때문에 짓지 못했다. 정동 공사관을 마련한 첫 미국공사 푸트는 미국 정부 서양식 건물을 짓게 돈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미국 국무부에서는 자금을 주지 않았다. 푸트가 이유로 든 것이 ‘ 모자가 천장에 닿는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국무장관은 ‘실내에서 모자를 안 쓰는 것이 조선 풍습으로 안다’고 답하며 거절한 것. 표면적인 이유는 저렇지만 미국이 조선에 큰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한옥을 수리해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

2.2. 일제강점기

파일:미국영사관 정문.png
일제강점기 주 경성 미국영사관 정문 #
1905년( 광무 9년) 11월에 일제 을사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여 한국과 미국 국교는 끊겼다. 당시 미국 일본에 굉장히 우호적이었고 이미 그해 7월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의 대한제국 합병을 인정했다. 그래서 을사늑약 직후 제일 먼저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옛 미국공사관 부지는 영사관 기능으로 격하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주일미국공사관 소속 경성주재영사관으로 기능했다. 태평양 전쟁 때에는 미국과 일본이 적대관계가 되어, 영사관 피해가 우려되어, 경성주재 미국 공사관은 중립국인 스위스 국기를 내걸어 보호조치를 해서 전쟁 중 일제에 의해 피해를 입는 것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2.3. 광복 후

해방 이후, 한국에 미 군정청이 주재하면서 옛 미국공사관 건물은 미 국무부 직원들의 합숙소로 사용하였고, 1949년에 공식적인 주한미국대사관저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6.25 전쟁으로 인하여 주한미국대사관저는 북한군의 공습과 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아, 서울 수복 후 복구하여 대사관저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이후 1970년대에 들어, 100년 가까이 사용해오던 미국대사관저는 건물의 노후화로 새로운 대사관저의 신축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1974년에 한국 건축의 명장인 조자용, 신영훈등 한국 건축가와 미국 정부에서 파견한 건축 인력이 협심하여 새로운 대사관저를 지었고, 1976년 5월 18일에 새 대사관저가 준공되었다.

이후 현재까지 하비브 하우스는 주한미국대사의 사저로 역할을 하고 있고, 때때로 시민들을 대상으로 관저 개방 행사를 열고 있다.

3. 시설

4. 사건사고

4.1. 1989년 서총련 대학생 관저 점거 및 방화미수 사건

1989년 10월 전대협 서울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서총련) 소속 반미구국결사대를 구성한 대학생들이 나서서 자행한 대사관저 점거 및 방화 미수 사건. 이 사건의 핵심 가담자가 훗날 더불어민주당에서 4선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 정청래인데 당시 건국대학교 산업공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정청래 외에 이선홍, 이대준, 심상오 등 학생 총 6명이 사건에 가담했다.

1989년 10월 13일 정청래를 비롯한 학생 6명은 새벽 6시 25분경 대사관저 담장을 넘어서 침입해 사제폭탄을 터뜨렸다. 이후 쇠파이프를 휘둘러서 대사관저 현관 유리창을 부수고 응접실로 침입한 뒤 조지 H.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초상화 액자도 파손했다. 그 후 관저 내 집기를 바리케이드로 삼아서 노태우 대통령 방미 반대, 도널드 그레그[2] 주한 미국대사의 추방, 농산물 수입 개방 압력 철회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에 나섰다.

대사관 측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학생들을 체포하려고 하자 학생들은 관저 바닥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이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 불이 붙지는 않았는데 그동안 대한민국의 운동권 대학생들이 툭하면 미국문화원과 미국대사관 등 미국 관련 시설에 불을 질렀던 전과가 있었기에 미국대사관 측이 관저 거실 바닥을 불연내화재로 만들면서 불이 안 붙었다. 학생들은 마지막까지 항거하는 과정에서 경찰을 향해 사제폭탄을 던졌으나 이 폭탄마저 터지지 않아서 방화에 이어 폭탄 테러도 미수로 끝났다.

결국 관저 침입 후 50분 정도가 지난 오전 7시 15분경 관저 침입 학생 전원이 검거돼 서울남대문경찰서로 연행됐고 모두 구속됐다. 핵심 가담자인 정청래는 재판 결과 징역 6년 자격정지 2년의 중형을 선고받았으나 1992년 출소했고 1995년 김영삼 정부의 특별사면 때 복권됐다. 그리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4번에 걸쳐 서울 마포구 을 지역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인 생활을 하고 있다.

세월이 훌쩍 흘러 2024년에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 사건이 다시 언급된 바 있는데 서울 마포구 을 지역의 선거 매치업을 두고 조선일보가 정청래 의원을 '대사관 방화범'이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정 의원과 맞붙게 된 함운경 민주화운동동지회 회장은 1985년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을 주도한 인물인데 두 사람을 붙이면서 "'美문화원 점거' 함운경 vs '美대사관 방화' 정청래…운동권 大戰"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에 정청래 의원은 허위 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조선일보사와 해당 기자를 상대로 고소했다. 그러자 조선일보 측은 해당 기사의 제목을 수정했다.

4.2. 2019년 대진연 무단침입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한국대학생진보연합 문서
3.4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국내 대표적인 반미 단체인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트럼프 행정부의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인상 요구에 대한 반발로 2019년 10월 18일에 미국대사관저인 하비브하우스 담장을 넘어 침입, 관저 내부에서 기습 시위를 하였다. 당시 관저를 경비하는 경찰이 있었으나, 주한미국대사관 본관과 달리 경비 병력이 적어, 갑자기 몰려드는 시위대가 담장을 넘는 것을 모두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침입한 대학생 12명은 집시법 위반 및 공동주거침입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그중 4명이 구속되었다. 이후 경찰은 미 대사관저의 경비를 강화하였다.

이후 국회는 경찰청 국정감사에서 여야 의원들은 민갑룡 경찰청장에게 대사관저를 경비하는 경찰의 부실한 대처를 질타하였다.

대사관저 침입사건 당시 대사관저 영내에서 침입을 저지하고 있던 와중에 미 대사관 직원 2명이 경상을 입었고,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는 이들의 헌신에 감사를 표했다.
[1] 관저 내부는 미합중국 해병대 대사관 경비대원들이 경비한다. [2] 운동권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눈엣가시 같은 미국 사람이자 미국 고위 관료였겠지만 따지고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명을 위해 힘쓴 미국 내 인물 중 한 명이다.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CIA 서울지부장이었던 그레그는 미국 정부에 김대중의 구명을 요청했고 김대중이 풀려날 수 있도록 손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