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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티니아 왕국 6대 군주 Προυσίας | 프루시아스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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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프루시아스 1세 |
그리스어 | Προυσίας | |
영어 | Prusias I | |
존호 | 바실레프스 | |
별명 | 촐로스(Cholus: 절름발이) | |
생몰 년도 | 기원전 243년 ~ 기원전 182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228년 ~ 기원전 18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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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티니아 왕국 6대 군주.2. 생애
비티니아 왕국 제5대 군주 지아일라스의 아들이다. 기원전 228년 아버지가 갈수록 강성해지는 갈라티아를 두려워하여 갈라티아 지도자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 뒤 살해하려 했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오히려 살해당한 후 왕위에 올랐다. 그는 마케도니아 국왕 데메트리오스 2세 아이톨리코스의 딸 아파마와 결혼했다. 기원전 221년 아파마의 이복형제인 필리포스 5세가 왕위에 오르자, 양국은 동맹을 갱신했다. 필리포스 5세는 키오스와 미를리아 항구를 비티니아에 넘겼고, 그는 이를 각각 푸르사( 부르사)와 아파메아로 개명했다. 그 대가로, 그는 마케도니아 왕국에 적대적인 페르가몬 왕국을 견제하겠다고 약속했다.기원전 220년, 로도스에서 비잔티움을 함께 공격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들은 막대한 흑해 통행세 및 관세를 부과하는 비잔티움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비잔티움은 명목상으로는 비티니아 왕국의 영역이었지만 실제로는 자유도시로서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비잔티움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라고 요구했지만 무시당한 일로 반감을 품고 있었고,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1세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소아시아 사트라프 아카이오스와 가까운 사이인 것에 위협을 느끼기도 했기에 로도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는 육지에서 공세를 개시했고, 로도스는 해군을 파견하여 비잔티움의 해상을 봉쇄했다. 비잔티움은 아탈로스 1세와 아카이오스에게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아탈로스 1세는 말로는 돕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카이오스는 실제로 군대를 이끌고 비티니아군과 대치했다. 그는 보스포러스 해협의 전략적 요충지인 미시아를 장악했고, 제노판토스가 이끄는 로도스 전선 10척은 헬레스폰트로 항해하여 비잔티움의 동태를 살폈다. 한편, 비잔티움은 마케도니아 왕국에 망명가 있었던 지포에테스 3세[1]에게 비티니아 왕으로 모실 테니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지포에테스 3세는 비티니아 왕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길 원했던 필리포스 5세의 동의를 얻어 마케도니아 용병대를 모집한 뒤 비잔티움으로 향했지만 도중에 사망했다.
로도스인들은 비잔티움의 가장 큰 희망이 아카이오스라고 여기고, 이를 꺾기 위한 계략을 고안했다. 당시 아카이오스의 아버지 안드로마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다스리는 이집트에 억류되고 있었다. 로도스는 이집트에 안드로마코스를 석방시켜달라고 요청했고,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 안티오코스 3세와 전쟁이 한창인 때에 로도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면 유리하다고 보고 이에 동의했다. 아버지가 로도스의 도움으로 석방되자, 아카이오스는 로도스와 싸우길 거부했다. 이리하여 원군을 얻을 길이 사라진 비잔티움은 비티니아-로도스 연합과 강화 협약을 맺었다. 그들은 흑해에서 두 나라의 선박이 통과할 때 통행세를 추가로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프루시아스 1세는 자신이 점령한 영토와 포로들을 비잔티움에 반환하기로 했다.
기원전 216년, 아탈로스 1세가 아카이오스와의 전쟁에서 고용한 갈라티아인들이 헬레스폰트 해협의 도시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그러다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 주민들에게 격퇴되자, 아리스바로 이동한 뒤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주변 지역을 습격했다. 이에 프루시아스 1세가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공격해 전투에서 남자들을 물리친 뒤 적진에 남아있는 모든 여자와 아이들을 학살했다. 이후 갈라티아는 대외 전쟁을 자제하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동맹자로 남았다.
기원전 190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참패한 안티오코스 3세는 그에게 동맹을 맺자고 요청했다. 그는 처음엔 로마의 소아시아 확장에 위협을 느끼고 이를 진지하게 고려했다. 그러던 중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의 편지를 접했다. 스키피오 형제는 로마가 필리포스 5세를 물리쳤지만 왕좌를 계속 유지하도록 허용했고, 인질로 데려온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석방하고 빚도 일부 면제했다고 밝혔다. 또한 스파르타 참주 나비스가 로마와 전쟁을 벌이다 패했지만 역시 용서받은 점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로마는 동맹국의 영토를 늘리는 정책을 추진하니 로마의 편에 들라고 제안했다. 이에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 대신 로마와 손을 잡기로 했다.
기원전 188년, 안티오코스 3세와 로마는 아파메이아 조약을 체결하여 평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비티니아가 이 조약에서 어떤 이득도 얻지 못하자, 그는 분개했다. 기원전 186년 셀레우코스 제국에 망명했다가 아파메이아 조약 체결 후 안티오코스 3세에게 버림받은 한니발 바르카가 비티니아 궁정으로 망명했다. 그는 한니발을 니코메디아에서 은신할 수 있게 해줬다. 그러던 중 페르가몬의 국왕 에우메네스 2세와 비티니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비티니아군을 강화하여 나중에 로마와 대적할 수준으로 끌어올리길 희망했던 한니발은 그에게 군사 통솔권을 주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에 혹하여 한니발에게 해군 지휘권을 맡겼다.
한니발은 해군을 이끌고 페르가몬 왕국 함대와 교전했다. 그는 모든 종류의 파충류들로 가득찬 도자기 그릇들을 적 함대에 던져 적을 혼란에 빠뜨린 뒤 맹공을 퍼부어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에우메네스는 로마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기원전 183년, 프루시아스 1세는 키에로와 티오스, 그리고 헤라클레아 시를 잇따라 공격했다. 이때 헤라클레아를 공격하던 중 공성전이 지지부진하자 자기가 직접 사다리를 타고 성벽 위로 올라가 거의 도착했을 때 돌에 맞아 성벽 아래로 추락하면서 다리가 부러졌다. 병사들은 즉시 포위를 풀고 중상을 입은 왕을 본국으로 후송시켰다. 그는 이 일로 다리를 절게 되어서 촐로스(Cholus: 절름발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얼마 후,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대표를 맡은 로마 사절단이 비티니아 왕국을 방문했다. 그들은 그에게 에우메네스 2세와의 전쟁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고, 로마에게 가장 큰 해악을 끼친 한니발을 당장 로마로 넘기라고 압박했다. 결국 그는 로마인들에게 한니발을 넘겨주기로 했고, 한니발은 자신을 잡으러 사람이 왔다는 걸 알게 되자 평소 소지하고 있던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이후 비티니아와 페르가몬의 전쟁은 로마의 중재로 양국이 전쟁 전의 국경으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종결되었다.
기원전 182년, 프루시아스 1세는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장남 프루시아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