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9 19:59:11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라틴어: Publius Sulpicius Rufus
생몰년도 기원전 124년 ~ 기원전 88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공화국 라우렌툼
지위 플레브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아들)
직업 로마 공화정 호민관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호민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정치적 거래를 맺고 로마 시민권을 받게 된 이탈리아인들이 로마인들과 동등한 선거구를 배정받는 법안을 추진했다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로마 진군으로 목숨을 잃었다.

2. 생애

그를 거론하는 거의 모든 고대 기록은 프라이노멘과 노멘인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만 명명하며, 오직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만이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라는 이름을 밝혔다. 술피키우스 씨족은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으로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정치적 동맹을 맺고 독재관 3명, 집정관 23명, 감찰관 4명을 배출했다. 그런데 그는 오직 플레브스 만이 맡을 수 있는 호민관을 맡았고, 후대 학자들은 이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집안은 술피키우스 씨족의 평민 분파에 속했다고 추정하며, 몇몇 학자들은 그는 태어났을 때 파트리키 신분이었지만 정치적 이유로 평민으로 넘어갔다고 추정한다. 고대 로마의 전기 작가 코르넬리우스 네포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가 그의 형제라고 언급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명백한 파트리키인 세르빌리우스는 그의 형제가 아니라 먼 친척일 거라 추정한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거의 같은 나이였다"고 밝혔다. 그는 아마도 기원전 91년 호민관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기원전 75년 집정관에 오른 코타보다 몇 달 어렸을 것으로 보인다. 독일의 고전 역사가 프리드리히 뮌처(Friedrich Münzer, 1868 ~ 1942)는 그가 기원전 124년 말에 출생했을 거라 추정했다. 키케로는 그가 10대 시절에 "사소한 사건"을 다룬 법정에서 처음 연설했다고 밝혔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100년 재무관을 맡았을 때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해 "로마인의 위대함을 모독"한 혐의로 기소된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의 재판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이후 그는 기원전 103년 카이피오의 아버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아라우시오 전투의 참패를 초래한 혐의로 기소된 재판에서 호미노간의 거부권을 무시하고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전직 호민관 가이우스 노르바누스를 고발했다. 당시 폰티펙스 세나투스를 역임하고 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가 노르바누스의 과격행위에 대해 진술했지만, 당대 최고의 웅변가로 손꼽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의 변호를 받은 노르바누스는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하지만 많은 로마 시민들은 어린 나이에도 준수한 연설을 하는 술피키우스를 눈여겨보고 그가 미래에 탁월한 웅변가가 될 거라 짐작했다고 한다.

술피키우스는 몇년 간 다른 여러 재판에 변호사로 참여해 상당한 활약을 했다. 키케로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와 함께 그를 기원전 90년대 로마에서 가장 인기 있는 6명의 변호사 중 한 사람으로 지목했지만, 이 중에서 인기가 가장 떨어졌다고 덧붙였다. 또한 키케로는 어렸을 때 술피키우스의 연설을 직접 들었다며 그의 연설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의 목소리, 외모, 자세 및 기타 모든 것이 그의 소명과 완전히 일치했다. 그의 연설은 활기차고 성급했다. 그의 재능은 여기에 반영되었다. 연설 기술은 활기차고 아마도 너무 장황했다. 그의 어린 나이가 여기에 반영되었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저서 <웅변가에 대하여>에서 술피키우스만큼 경쾌하고 유쾌한 목소리를 가지고 소명과 일치한 외모와 신체 움직임으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인물은 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불굴의 힘, 강하고 충만한 목소리, 장엄한 움직임, 중요하고 무게감 있는 단어를 구사하는 등, 자연이 웅변 분야를 위해 그를 의도적으로 무장시킨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기원전 91년 호민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원로원 위주의 법정 개혁, 농지 개혁,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분배하는 법안 반포 등 일련의 정책을 단행했을 때, 그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아우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 등과 함께 드루수스를 지지했다. 그러나 개혁은 당해 집정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법무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고, 로마 시민들 역시 이탈리아인들이 자기들이 누리는 로마 시민권을 똑같이 부여받는다는 것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러다가 드루수스는 암살당했고, 필리푸스 등은 원로원을 압박해 드루수스의 모든 법안을 폐기했다. 드루수스의 뒤를 이어 개혁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호민관 선거에 출마한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로마 시민들의 외면을 받아 낙선했다. 일부 학자들은 술피키우스가 이때부터 호민관이 되어서 드루수스가 이루지 못한 뜻을 실현시키기로 마음먹었으리라 추정한다.

드루수스가 법안을 통과시키길 기대하던 이탈리아인들은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자 격분해 기원전 91년 말 동맹시 전쟁을 단행했다. 이에 필리푸스 등은 드루수스 지지자들이 이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규탄했고, 기원전 90년 호민관 퀸투스 바리우스 세베루스 히브리다는 동맹시의 반란을 선동한 자들을 추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로 인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강제로 추방되었고, 술피키우스 역시 추방될 뻔했지만 반란을 진압하는 군대에 복무하는 대가로 용서받았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 술피키우스가 피르무스 시에서 반란군에게 포위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를 구원하러 달려와서 스트라보와 함께 반란군을 대파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미래의 호민관 술피키우스가 이 인물이라고 추정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동맹시 전쟁과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활약한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라고 추정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스트라보 휘하의 레가투스를 맡은 술피키우스는 마르시족과 베스티 족을 물리치고 테아나 강 인근에서 격전을 벌인 끝에 마르시 족 지도자 퀸투스 포페디우스 실로를 물리쳤다고 한다. 하지만 아피아노스는 실로가 메텔루스 피우스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밝혔고, 현대 학자들은 아피아노스의 기록이 사실에 부합하다고 본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마르시족을 물리치고 그들이 점거했던 영토를 탈환한 레가투스 술피키우스를 언급했는데, 이 인물이 미래의 호민관 술피키우스였을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89년, 폰토스 왕국 미트리다테스 6세 비티니아 왕국과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순식간에 소아시아 전역을 석권하고 발칸 반도로 진출해 고대 아테네 등 여러 도시 국가의 호응을 얻었으며, 소아시아에 거주하는 로마인과 이탈리아인 8만 명을 학살했다. 이에 원로원은 그를 응징할 원정군을 파견하기로 했고, 야심가들은 동방으로 출진해 막대한 군공과 전리품을 획득할 기회가 주어질 집정관이 되고 싶어했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가이우스 마리우스 등이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는데, 아직 법무관을 역임하지 않았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려 했다. 당시 기원전 88년 호민관에 이미 선임되었던 술피키우스는 동료 호민관 푸블리우스 안티스투스와 함께 보피스쿠스가 집정관 선거에 출마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보피스쿠스를 따르는 무리와 술피키우스와 아티스투스를 따르는 무리간의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 후 카이사르는 선거에서 패배했고, 술라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가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호민관으로서 원로원 의원이 총 2천 드라크마(또는 2천 데나리온) 이상의 부채를 지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플루타르코스는 이 규정에 위배된 의원들이 원로원에서 추방되었는지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으며,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이 규정은 미래에 원로원 의원이 될 인사들을 겨냥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뒤이어 퀸투스 바리우스 세베루스 히브리다의 법안으로 인해 추방된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등 사회 인사들을 복귀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렇듯 여러 법안을 통과시켜서 입지를 다진 뒤, 그는 민감한 주제를 건드렸다. 당시 로마 정부는 동맹시 전쟁에서 귀순한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분배하기로 했다. 이제 이들에게 선거구를 어떻게 분배할 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엔 로마 포럼에 모인 시민들을 주거지 별로 35개 부족으로 나눈 뒤, 이 35개의 부족의 과반수로부터 지지를 얻어낸 이가 당선되는 방식으로 선거가 진행되었다. 원로원은 새로운 로마 시민들에게 8개의 부족을 할당하려 했다. 하지만 이 무렵 호민관에 당선된 술피키우스는 이탈리아인들에게 모든 선거구를 나눠줘야 한다고 여기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민회에 법안을 상정했다. 그러나 원로원이 강력히 반대했고, 로마 시민들 역시 정치적 특권을 새로운 시민들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술라에게 자신의 법안이 통과되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마리우스를 찾아갔다. 마리우스는 술피키우스를 도와주는 조건으로 동방 원정 지휘권을 자신에게 맡기라고 요구했다. 술피키우스는 이 거래를 받아들이고 마리우스의 지지자들과 함께 봉기를 일으켰다. 한편 놀라에서 동방으로 출진할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던 술라는 로마에서 분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포룸으로 이동한 뒤 동료 집정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와 함께 카스토르, 폴룩스 신전의 로스트라 연단에 서서 종교적 권한을 이용해 페리아이(feriae: 모든 공무가 중단되는 휴일)을 선언했다. 그러자 술피키우스의 선동을 받은 군중이 폭동을 일으켰고, 술라는 팔라티누스 언덕 기슭에 있던 마리우스의 집으로 도주했다. 마리우스는 술라에게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휴일 선언을 철회하고 술피키우스의 법안에 대한 표결 진행을 허락하라고 권고했고, 술라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술피키우스는 민회를 소집해 이탈리아인의 선거권에 관한 그의 법안을 통과시킨 뒤, 며칠 후에 술라의 동방 총사령관 지명을 철회하고 그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긴다고 선포했다.

마리우스의 요구에 따라 술피키우스의 법안 통과를 허용한 뒤 굴욕감을 간직한 채 놀라로 돌아간 술라는 전령으로부터 지휘권이 마리우스에게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그는 병사들을 선동하여 자기 편으로 삼은 뒤, 마리우스가 인수인계를 하려고 보낸 장교를 현장에서 살해하고 6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로마 법은 누구도 로마 시에 군대를 진군시키는 걸 허락하지 않았고, 공화정 수립 이래 이 원칙이 지켜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 등은 술라가 이리 나올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급히 검투사와 해방노예를 동원해 에스퀼린 포룸에서 맞섰으나 끝내 패배를 면치 못했다. 술라는 로마에 입성한 뒤 마리우스, 술피키우스를 비롯한 12명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숨겨주는 자들 역시 엄벌에 처하겠다는 포고령을 반포했다.

다른 11명은 로마를 무사히 탈출했지만, 술피키우스는 라우렌툼(Laurentum)의 사유지로 피신했지만 노예가 그의 위치를 술라에게 알렸다. 결국 그는 라우렌툼 늪에서 끌려나와 검에 찔러 피살되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와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술라는 "국가에 대한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노예를 해방시킨 뒤, 주인을 배신한 것에 대한 처벌로 타르페아 절벽에 내던졌다고 한다. 술피키우스의 수급은 포로 로마노 연단에 전시되었고, 그의 법안은 술라에 의해 폐기되었다.

아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카이사르를 지지했고 기원전 47년 법무관에 선임된 뒤 기원전 42년 감찰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