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30 16:56:03

페이튼 매닝/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페이튼 매닝
파일:하위 문서 아이콘.svg   하위 문서: 페이튼 매닝/프로 경력
,
,
,
,
,
#!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
1. 아마추어 경력2. 프로 경력3. 은퇴 이후

[clearfix]

1. 아마추어 경력

쿼터백이던 아버지 아치 매닝의 아들답게 어린 시절부터 이미 장래가 촉망받는 엘리트 유망주였다. 고교 시절 이름을 날리며 무려 60여개의 대학팀들로부터 장학금 오퍼를 받았었지만 모든 사람들은 그가 아버지의 모교인 미시시피 대학교 올 미스 레벨스로 진학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이 예상을 깨고 같은 컨퍼런스 테네시 대학교 발런티어스를 선택하여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1]

1994년 1학년 시절에는 팀내 3번째 쿼터백이었지만 시즌 첫 경기 주전 쿼터백이 부상당하고, 4번째 경기에서는 두번째 쿼터백까지 부상당해 금방 주전의 기회를 맞게 된다. 참고로 이 때 테네시 대학에서 페이튼 매닝에게 주전 자리를 내준 상급생 쿼터백은 이후 백업으로 떨어진 풋볼대신 야구에 전념하게 되는데, 그 인물은 바로 1995년도 메이저리그 1라운드 8번픽으로 데뷔해 콜로라도 로키스의 레전드이자 정신적 지주로 활약했던 토드 헬튼이다.[2] 여하튼 미래의 슈퍼스타감으로 각광받았던 풋볼계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답게 1학년임에도 걸출한 실력으로 팀을 이끌어 한 경기를 제외한 모든 선발 경기에서 승리했다. 지금 테네시 대학의 상황을 보면 이런 학교를 챔피언쉽에다가 올려놓을 정도였으니 레전드라 불릴만하다.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팀을 이끌게 된 2학년 1995 시즌에는 아예 테네시를 SEC의 강팀 반열에 팀을 올려놓으며 전국의 주목을 받는 활약을 펼친다. 라이벌 앨라배마를 격파하며 무패행진을 달리지만 같은 컨퍼런스 디비전의 플로리다에 시즌 초반 당한 패가 유일한 패로 발목을 잡으며 전국 우승에는 실패한다. 그러나 사이트러스 보울에서도 오하이오 스테이트잡고 전국 3위에 개인적으로도 하이스만 트로피 후보에 오르는 선전을 했다.

이어진 3학년 시즌 내셔널 챔피언쉽 우승을 위해 칼을 갈고 나오지만 또다시 시즌 초반 플로리다전에서 인터셉션을 4개나 던지는 등 부진한 끝에 석패하며 우승 행보에 적신호가 켜진다. 그리고 시즌 중반을 넘어가며 멤피스 대학교전에서 약 300야드를 던지는 활약을 펼치고도 업셋을 당하며 또다시 우승 도전이 물거품이 된다. 3학년 시즌이 끝난 1997년은 고교를 떠난지 3년이 되어 NFL 드래프트 참가 자격이 주어지는 해였으며 조기 졸업을 위한 학점 이수도 마친 상태에 이미 지난 3시즌 동안의 활약으로 전미 최고의 쿼터백 유망주이자 전체 1번픽 후보에 올라 학교를 떠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매닝은 모교를 우승시키기 위해 졸업을 1년 늦추고[3] 마지막 대학 풋볼 참가 자격의 4학년 시즌에 테네시로 돌아오기로 결정한다.

1997 매닝의 대학 마지막 시즌은 또다시 시작부터 플로리다에 잡혀 결국 대학 시절 내내 한번도 꺾어보지 못한 천적으로 남게 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은 경기를 모두 승리해나가고, 매닝의 첫 컨퍼런스 챔피언쉽에 진출해 어번 타이거스를 꺾고 대망의 시즌 무패팀인 네브래스카 대학교와 오렌지 보울에서 만나게 되어 드디어 대망의 내셔널 챔피언쉽 우승 기회를 잡게 된다.[4] 그러나 이 드라마틱한 매닝의 우승 도전기는 네브래스카의 러싱 옵션 루트 플레이에 팀이 처참히 무너지며 42-17로 대패를 당한다.[5] 더욱 아쉬운 것은 매닝이 떠난 직후인 1998년에는 테네시가 마침내 플로리다를 꺾는 등 무패행진 끝에 내셔널 챔피언쉽 무패 우승을 이룬 것.

아무튼 이렇게 대학 무대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마친 매닝은 1998년 NFL 드래프트에서 전체 1번으로 인디애나폴리스 콜츠의 지명을 받아 프로 무대에 입성하였다. 등번호는 형 쿠퍼 매닝의 고등학교 시절 번호였던 18번을 선택하였다.

2. 프로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페이튼 매닝/프로 경력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은퇴 이후

은퇴 후에는 ESPN에서 DETAIL이라는 단독 코너로 실제 NFL 경기에서의 작전을 해설하고 있다. # 내가 쿼터백 해봐서 아는데 NFL 역사에 길이 남을 선수였던 그답게, 현역 쿼터백의 스냅이나 작전에 대한 훌륭한 분석과 유머로 인해 코너에 대한 팬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

그리고 동생도 2020년 은퇴를 선언하면서, 매닝 삼형제의 커리어는 이렇게 마무리가 됐다. 일라이도 은퇴한 이후 ESPN에 자리하면서 2021시즌부터 동생과 함께 매닝캐스트라는 프로그램을 론칭[6] 하여 중계를 하고 있는데, 매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7] 2022년 9월 12일(미국 시간) 먼데이 나잇 풋볼에서는 펌블을 저지르는 친정팀 브롱코스 선수들을 보면서 탄식했다(...).

2021년, 당연하게도[8] NFL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 해 콜로라도 로키스의 홈구장에서 열리는 MLB 올스타전에 초청받았다.

2023년 모교 테네시 대학교 정보대학 교수로 부임했다. 매닝은 대학 시절 공부와 풋볼을 병행했었는데, 그 당시에도 평균 3.61점을 받을 정도로 나름 괜찮은 성적을 낸 바 있다.
[1] 그의 형 쿠퍼도 전도유망한 와이드 리시버였지만 올 미스 진학을 앞두고 척추 협착이 발견되어 일찍 선수 생활을 접어야했다. 동생 일라이는 올 미스에서 뛰었다. [2] 헬튼은 통산 비율스탯 3-4-5을 기록했고 누적스탯 역시 2500안타와 360홈런을 넘겼는데,세 가지 기록중 하나만 기록해도 이 바닥에서 전설 소리를 듣는다. [3] 여기에는 페이튼 매닝 개인의 하이즈먼 트로피 획득은 물론 모교 테네시 대학교의 내셔널 챔피언 욕심도 있었지만, 1997년에 나왔다면 전체 1번 지명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라는 아버지 아치 매닝의 만류가 있었다는 설이 있다. 휴스턴 텍산스의 마리오 윌리엄스 관련 각주를 보면 알겠지만, 전체 1번이 못되면 날아가는 계약금&보장금액이 상당하다. 실제로 1997년은 페이튼이 나올까말까 고민하던 이유로 1번 픽 후보가 유동적이었었고 이때문에 중간에 한번 지명권이 트레이드되었으며, 명예의 전당을 예약한 NFL 역사상 3명뿐인 공격라인맨 출신 전체 1번 올랜도 페이스(前 세인트루이스 램스 소속)가 지명을 받았다. [4] 다만 이 때는 내셔널 챔피언쉽 게임 시스템이 정착하기 전 마지막 해로, 다른 보울 게임의 우승 후보팀의 경기 결과에도 영향을 받는 상황이었다. 게임 시작 전 랭킹은 미시건 #1, 네브래스카 #2, 테네시 #3이었다. [5] 당시 네브래스카는 강력한 공격라인맨들의 보호 속에 쿼터백 및 러닝백들이 쉴새없이 뛰어다녔고 수비라인맨들은 상대팀 공격진을 효과적으로 봉쇄하는등 공-수 양면에서 완벽하게 밸런스가 갖춰진 최강팀이었다. 이 당시 쿼터백인 스콧 프로스트는 2021년 현재 네브래스카 대학교 감독을 맡고 있다. [6] 여담으로 프로그램 제작은 2020년 페이튼이 설립한 엔터테인먼트 회사 Omaha Productions에서 담당한다. [7] 특히 매닝캐스트에 게스트를 초대하는데, NFL 전현직 선수들은 물론 르브론 제임스, 팻 맥아피 같은 타 종목 유명선수들, 심지어는 드웨인 존슨, 스눕 독 같은 연예인들도 초대한다. [8] 단 13초(...) 만에 헌액 여부가 결정났다고 한다. 콜츠를 오랜 시간 커버한 인디애나폴리스 스타(Indianapolis Star)의 칼럼니스트가 '페이튼 매닝이잖아. 됐지?'로 설명을 끝내는게 압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