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5 08:33:09

페르디난드 다우치크

페르디난드 다우치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black,#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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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클럽
파일:FC 바르셀로나 로고.svg

19대
파일:아틀레틱 클루브 로고.svg

20대
파일: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로고(1980~2016).svg

29대
파일:FC 포르투 로고.svg

30대
파일: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로고.svg

36대, 49대
파일:세비야 FC 로고.svg

29대
파일:RCD 에스파뇰 로고.svg

3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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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의 前 축구감독
파일:Ferdinand Daučík.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페르디난드 다우치크
Ferdinand Daučík
출생 1910년 5월 3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포이사그
사망 1986년 11월 14일 (향년 76세)
스페인 알칼라데에나레스
국적
[[슬로바키아|]][[틀:국기|]][[틀:국기|]] |
[[스페인|]][[틀:국기|]][[틀:국기|]]
신체 179cm | 체중 74kg
직업 축구선수( 풀백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KFC 코마르노 (1927~1928)
1. 체슈크 브라티슬라바 (1928~1933)
SK 슬라비아 프라하 (1933~1942)
감독 ŠK 슬로반 브라티슬라바 (1942~1946)
슬로바키아 대표팀 (1942~1944)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 (1948)
FC 바르셀로나 (1950~1954)
아틀레틱 클루브 (1954~1957)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57~1959)
FC 포르투 (1959~1960)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1960~1962)
레알 무르시아 CF (1963~1964)
세비야 FC (1964~1965)
SD 인다우추 (1965~1966)
레알 사라고사 (1966~1967)
엘체 CF (1968)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1968~1969)
UE 산트 안드레우 (1970)
RCD 에스파뇰 (1970~1971)
카디스 CF (1971)
UE 산트 안드레우 (1973~1974)
UE 산트 안드레우 (1977)
국가대표 15경기 (1931~1938 / 체코슬로바키아)
1경기 (1942 / 슬로바키아)
가족 매부 라슬로 쿠발라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2.2. 감독2.3.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4.2. 감독

[clearfix]

1. 개요

슬로바키아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다우치크가 처음 1군 선수 생활을 시작한 코마르노(Kómarno)는 당시 대부분의 선수들이 헝가리인들로 구성된 팀이었다. 그러다 다우치크는 1. 체슈크 브라티슬라바(1. ČeŠK Bratislava)로 팀을 옮겼고 1933년까지 브라티슬라바 선수로 뛰었다.

1933년, Zväzové Majstrovstvá Slovenska[2] 체코슬로바키아 1부 리그에 통합되면서 다우치크는 당시 리그의 강팀 중 하나였던 SK 슬라비아 프라하의 선수가 되었고 리그 우승 3회 등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다.

2.1.2. 국가대표

1931년에 다우치크는 처음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 경기에 뜀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 역사상 세 번째로 슬로바키아 출신 대표팀 선수가 되었다.

1938년 월드컵에서 다우치크는 레프트 풀백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3경기에 모두 다 뛰었지만 팀은 브라질에 패해 8강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

그의 마지막 A매치는 1938년 12월 4일의 루마니아전이었고 이 경기를 포함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총 15경기에 출전했다.

2.2. 감독

1942년, 선수 생활을 마친 다우치크는 친정팀 ŠK 슬로반 브라티슬라바에서 감독 커리어의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슬로바키아 지역에는 나치 독일의 괴뢰국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 있었고 체코의 보헤미아모라비아 리그와는 분리되어 슬로벤스칸 리가라는 별개의 리그로 운영되었다. 다우치크는 슬로반 브라티슬라바의 감독직과 더불어 슬로바키아 대표팀 감독직도 병행했다.

이 시기에 다우치크는 독일과의 친선 경기에서 슬로바키아 대표팀 선수로 45분간 필드에서 뛰기도 했다. 다우치크는 소련군과 반란군 슬로바키아의 연합군에 의해 국가가 해방된 1944년까지 슬로바키아 대표팀을 이끌었고 1946년 나치 독일에 의존하던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정부와의 관계가 공개될 것을 두려워하여 슬로반팀의 감독직에서도 사임했다.

다우치크는 1946년 무렵 한 유망주 선수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후에 FC 바르셀로나의 레전드가 되는 쿠벌러 라슬로이다. 쿠벌러는 당시 슬로반팀에서 뛰고 있었고 다우치크의 여동생이 쿠벌러와 결혼하면서 처남 매부 관계가 되었다.

1948년, 다우치크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을 맡아 2경기를 지휘했다. 그러나 쿠데타가 터지며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다우치크는 가족과 함께 스페인으로 망명을 택했다.

1950년부터 다우치크는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에 취임했고 1951년부터 매부 쿠벌러가 여러 복잡한 문제가 해결되면서 바르셀로나에 영입되었다. 다우치크가 바르셀로나에 있던 4년간 리그 우승 2회,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3] 우승 3회 등 성공적인 시기를 보냈고 그는 스페인에 귀화해 페르난도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1954년, 다우치크와 바르셀로나의 계약이 끝날 때 다우치크와 카탈루냐 선수들 간의 갈등이 생기자 계약 연장은 이뤄지지 않았다.

바르셀로나를 떠난 다우치크가 새 팀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아틀레틱 클루브의 감독이 되었고 3년 중 1955-56 시즌의 더블과 1957년 유러피언 컵 8강을 달성하기도 했다.

1957년, 다우치크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이끌며 바로 아틀레티코를 리그 준우승에 올려놓았다. 1958년 시즌을 시작하면서 아틀레티코는 직전 월드컵의 챔피언 브라질의 주전 스트라이커 바바를 영입했지만 다우치크의 임기에 우승컵을 들지는 못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떠난 다우치크는 ​​여러 클럽을 코치했지만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한 시즌 동안 FC 포르투를 이끌었지만, 클럽은 리그 4위에 그쳤고 포르투갈 컵에서는 준결승에 멈췄다.

다우치크는 두 시즌 동안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를 이끌었고 그의 아들 얀코(Janko)가 클럽에 데뷔하도록 허용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그는 레알 무르시아 세비야 FC를 코치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레알 사라고사에서 다우치크는 그의 감독 커리어에서 마지막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사라고사는 1965-66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에서 4강부터 다우치크가 이전에 감독직을 맡았던 팀들을 상대했다. 4강 바르셀로나전에서 사라고사는 2차전에 1대0으로 승리해 합계 3대2로 결승에 진출했고 결승 아틀레틱 클루브전에서는 2대0 승리로 우승컵을 들 수 있었다.

다우치크는 이후 엘체 CF,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UE 산트 안드레우, RCD 에스파뇰, 카디스 CF를 거쳐 UE 산트 안드레우에서 감독 커리어를 마감했다.

2.3. 이후

다우치크는 마드리드 근처의 알칼라 데에나레스(Alcala de Henares)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내다 1986년 11월 14일,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다우치크는 빠르고 강하며 기술적인 수비수였다.

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4.2. 감독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2] 슬로바키아 연합 챔피언십 [3] 이때 스페인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 시기라 왕정이 없었고 대신 장군컵이라는 뜻의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라는 이름으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