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02 17:53:21

팔케스 드 브레오테

성명 팔케스 드 브레오테
Falkes de Bréauté
생몰년도 미상 ~ 1226년 7월 18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미상
사망지 로마
아내 마거릿 피츠제럴드
직위 기사, 왕의 집사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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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남작 전쟁 시기에 존 왕 헨리 3세 부자를 따랐지만, 전쟁 기간에 잔혹행위를 많이 저질러 많은 적을 양산했고, 결국 권력 분쟁에서 패배해 해외로 망명했다.

2. 생애

기원은 불분명하다. 일부 연대기는 그가 노르만 출신이었고, 브레오테 마을 주변에 살던 노르만 기사와 어느 여인의 사생아로 묘사한다. 그러나 대다수 연대기 작가들은 그가 평민 출신이며, 그의 이름은 그가 사람을 살해할 때 사용한 도구인 에서 유래했다고 기술했다. 그에 대한 최초의 확실한 역사 기록은 1206년 존 왕이 푸아투 원정을 떠날 때 참가한 기사 명단에서 그의 이름이 포함된 것이었다. 이듬해 잉글랜드로 귀환한 그는 글레모건과 웬록의 보안관을 역임했으며, 카마르덴, 카디건, 가워 반도의 보안관을 잇달아 역임했다. 1212년 웨일스 변경 지역에 있는 스트라타 플로리다 수도원에 사는 수도자들이 존 왕에게 반대를 표명하자, 그는 왕의 명령을 받들어 수도원을 파괴하고 수도자들을 무자비하게 대해 잔인한 자로 악명을 떨쳤다.

제1차 남작 전쟁이 발발할 무렵인 1215년 왕의 집사 칭호를 받았으며, 1215년 11월 28일 버킹엄셔의 한슬로프를 점령하고 곧이어 윌리엄 드 뷰챔프의 소유엿던 베드퍼드 성을 점령했다. 그는 그 보상으로 성을 자기 것으로 삼는 걸 허락했다. 1216년, 존 왕은 군대를 윌리엄 롱게스피, 팔케스를 포함한 4명의 "외부 사령관'이 이끄는 분대로 나누었다. 같은 해 루이 왕자가 존 왕에게 반기를 든 귀족들에 의해 잉글랜드 국왕으로 추대된 뒤 잉글랜드로 넘어오려 하자, 팔케스는 존 왕의 지시에 따라 옥스퍼드셔의 귀족들이 존 왕을 변함없이 따르도록 설득했으며, 7월 17일 라눌프 드 블론드빌과 함께 반란 세력과 연합한 우스터를 점령하고 약탈했다.

팔케스는 그의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왕실 시종이자 데본 백작 워린 피츠제럴드의 딸 마거릿 피츠제럴드와 결혼했다. 1217년 9월 10일 데본 백작 윌리엄 드 레드비어스가 사망하자, 윌리엄 드 레드비어스의 동생인 볼드윈 드 레드비어스(1216년 사망)와 마거릿의 아들 볼드윈이 직위 상속자가 되었고, 팔케스는 볼드윈의 계부이자 섭정이 되었다. 또한 마거릿은 지참금으로 와이트 섬 그에게 가져왔다. 존 왕이 1216년 10월 16일에 사망한 뒤, 팔케스는 헨리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캐임브리지셔, 옥스퍼드서, 버킹엄셔, 노스햄턴셔 및 베드퍼드셔의 보안관을 맡았다.

1217년 1월 22일, 부하들과 함께 잉글랜드 반란군에 가담한 성 알반스 수도원을 습격해 그곳의 요리사를 죽이고 다른 사람들을 붙잡아 놓았다가 한 사람 당 200파운드를 받아낸 뒤에야 풀어줬다. 이후 그의 부하들은 워든 수도원으로 쳐들어가 똑같이 약탈을 자행했다. 1217년 2월 말에 라이 항을 점령하려 했지만 격퇴되었고, 이후 엘리 섬을 점령하고 1217년 5월 링컨 전투에서 기사와 석궁병으로 구성된 선봉대를 이끌어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반란군 수뇌부를 모조리 생포했다.

제1차 남작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전쟁 기간 동안 거둔 공적이 컸기 때문에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218년에서 1219년 사이에 에식스, 동 앵글리아, 하트퍼드셔의 순회 판사를 맡았으며, 1217년 제5대 데번 백작 윌리엄 드 레드비에르가 사망한 뒤 플림튼 성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해 추종자들을 가능한 한 포섭하려 하자, 윌리엄 마셜 윌리엄 롱게스피 등 기성 정치인들의 경계를 샀다. 팔케스는 귀족이 아닌 시민으로 남아 있었고, 이 때문에 영지가 별도로 없어서 라눌프 드 블론드빌 피에르 데 로슈 같은 귀족 및 성직자들의 호의에 의존해야 했다. 1222년 런던에서 발발한 폭동을 강경 진압하고 주모자 3명을 재판 없이 처형했다. 이에 런던 시민들 역시 그를 안 좋게 여겼다.

이후 휴버트 드 버그의 강대한 권세를 질시해 1223년 11월 제6대 체스터 백작 라눌프 드 블론드빌, 제5대 허트퍼드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함께 런던 탑을 접수하고 휴버트를 타도하려 했다. 새로운 내전은 요크 대주교 사이먼 랭턴의 중재로 벌어지지 않았지만, 12월 양자간의 협상이 실패하면서 긴장은 다시 고조되었다. 그러다가 교황청으로부터 왕에게 반기를 들려 한다는 이유로 파문을 선고하겠다는 위협을 받자, 12월 30일 궁정으로 복귀하여 허트퍼드 성과 보안관 직책 일부를 내줘야 했다. 나머지 직책 및 성채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지만, 1224년 1월 18일 휴버트 드 버그와 그의 동료들로부터 베드퍼드와 플림튼 성까지 내놓으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는 두 성이 아내의 지참금 일부라며 항의했지만 무시당하자 두 성을 내주길 거부했다. 이에 헨리 3세의 궁정은 1224년 6월 20일 팔케스를 반역자로 성토하고 군대를 일으켜 베드퍼드 성을 포위했고, 사이먼 랭턴은 팔케스와 그의 모든 군대 구성원들을 파문했다. 공방전은 8주간 지속되다가 결국 수비대 전원이 항복 후 처형되었다. 이후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한 팔케스는 8월 19일 모든 재산을 내주는 대가로 사면을 요청했다. 8월 25일 자신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재판에 회부되는 대신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러나 노르망디에 도착하자마자 루이 8세에 의해 콩피에뉴 인근에서 체포되었다.

1222년에 석방된 팔케스는 로마로 가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긴 변호문을 썼는데, 자신이 부당하게 파문당했다는 사실을 열거하며 교황에게 도움을 간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로 돌아가던 중에 부르고뉴에서 전쟁 중에 자신을 투옥했던 기사에게 붙잡혔고, 교황의 개입만이 그를 다시 구해 냈다. 이후 팔케스는 트루아에 살기 위해 길을 떠났지만, 루이 8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걸 거부한 이유로 프랑스에서도 추방되었다. 이후 로마로 돌아가서 지내다가 1226년 7월 18일에 독이 있는 생선을 잘못 먹었다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