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파흐레틴 잔세웨르 (Fahrettin Cansever) |
생년월일 | 1930년 1월 1일 |
사망년월일 | 1987년 6월 1일 (향년 57세) |
국적 | 튀르키예 |
출신지 | 테키르다 |
포지션 |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
신체조건 | 167cm |
소속팀 |
베이코즈 SKD (1948-1949) 베식타스 JK (1949-1950) MKE 앙카라귀쥐 (1951-1952) 베식타스 JK (1952-1955) → 앙카라 귀네스포르 (1955 / 임대) 베이코즈 SKD (1955-1957) 파티흐 카라귐뤼크 SK (1957-1959) MKE 앙카라귀쥐 (1959-1960) |
국가대표 | 5경기 3골 (1949-1954) |
감독 |
셰케르스포르 (1961-1965) 메르신 탈림 유르두 (1965-1966) 베이코즈 SKD (1966) 존굴닥스포르 쾨미르스포르 (1967-1968) 삼순스포르 (1968) 파티흐 카라귐뤼크 SK (1968) 코냐스포르 (1969) 뒤즈세스포르 (1969-1970) 에디르네스포르 (1971-1972) 베이코즈 SKD (1972-1974) 코냐스포르 (1974-1975) 갈라타 SK (1975) |
[clearfix]
1. 개요
튀르키예의 전 축구 감독.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잔세웨르는 1948년 베이코즈 SKD에서 선수로 데뷔한 이후 여러 팀을 돌아다녔다.2.1.2. 국가대표
잔세웨르는 1950년 월드컵 지역 예선전이었던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경기에서 데뷔했다. 당시 튀르키예는 시리아를 7:0으로 크게 이겼고 잔세웨르는 해트 트릭을 기록했다. 원래는 2차전도 남아있었지만 시리아의 기권으로 튀르키예는 오스트리아가 기다리는 최종 라운드에 진출했다.이후에 오스트리아 역시 기권해서 튀르키예는 쉽게 본선 진출권을 얻었지만 튀르키예도 복잡한 국내외정세로 인해 월드컵 진출을 포기,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잔세웨르는 다음 대회 지역 예선 스페인과의 첫 경기를 끝으로 국가대표팀 경기에 더 이상 뛰지 못했다. 하지만 튀르키예는 스페인을 재경기[2]에 동전 던지기까지 해서 이기고 사상 최초의 FIFA 월드컵 진출에 성공했다.
2.2. 감독
잔세웨르는 선수 은퇴 이후 감독이 되었고 셰케르스포르에서 감독직을 시작했다. 1962-63 시즌에 그는 셰케르스포르의 강등을 막지 못했지만 이어진 시즌에 바로 새로 창설된 TFF 1. 리그에서 팀을 쉬페르리그로 다시 복귀시켰다. 그러나 1964-65 시즌에 그는 승부조작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셰케르스포르에서 해고당했다.1968년의 잔세웨르는 무려 4팀을 돌아다녔는데 삼순스포르에서는 경기 후 군인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복역하느라 감독직에서 잘린 적도 있었다.
파란만장했던 잔세웨르의 감독직은 1975년 갈라타 SK를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잔세웨르는 1977년 10월 22일[3]에 있었던 베식타스 JK와 페네르바흐체 SK의 경기에서 고별식을 갖고 축구계를 떠났다.
2.3. 이후
잔세웨르는 축구 경력을 마치고 생계를 위해 시장에서 청과물 상인으로 일했다. 그러다 잔세웨르는 1987년 6월 1일, 뇌출혈로 사망했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잔세웨르는 당시 튀르키예 선수들 중 중간 정도의 키였지만 신체가 탄탄해서 몸싸움이 강했고 끝없는 에너지도 있었다. 잔세웨르는 아웃사이드 포워드로써 경기에 대한 이해도는 공격보다 수비적인 편이 더 컸다. 그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이 보내는 패스로 동료들이 골을 넣을 수 있도록 했고, 득점보다는 득점을 만드는 것에 더 큰 기쁨을 느끼는 타입이었다.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 이스탄불 풋볼 리그 우승 1회: 1953-54( 베식타스 JK)
4.2. 감독
4.2.1. 클럽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2]
사실 골득실 제도가 있는 현재에 같은 결과가 나왔다면 스페인이
스위스에 갔다.
[3]
원래는 4월 16일에 예정되어 있었지만 날씨가 안 좋아서 이날로 미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