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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티베트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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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과정
2.1. 시작2.2. 중국군의 침공2.3. 승리 선언과 국제사회의 외면2.4. 중앙 티베트 침공과 합병2.5. 17개조 협정 이후
3. 기타

1. 개요

티베트 침공의 과정

1950년 중화인민공화국 티베트를 침공하여 완전히 합병시킨 사건.

2. 과정

2.1. 시작

중국 황제들은 13세기 이래 티베트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해 왔고[1] 이는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중화인민공화국에 티베트를 침공할 명분이 되고도 남았다. 때마침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공산당 마오쩌둥 정권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중국 대통일"을 완성함으로써 중국의 티베트 통치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달라이 라마를 국가 지도자로 하는 신정 체제 하의 티베트는 독립국이기는 했지만 중국에 저항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20세기 초반에 티베트는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에 외교적 접근해서 중국을 견제하고자[2] 했지만[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하면서 더 이상 영국이 인도 건너편에 있는 티베트에 신경쓸 이유가 없어져 버렸고 무엇보다 영국은 자국도 유지시키기 힘든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4] 또 주변 강국인 신생국가 인도 공화국은 아직 티베트를 도와줄 여력이 부족했다. 파키스탄 친미 국가로 나서던 때라 파키스탄과 적대관계인 인도는 소련에 접근했고 자와할랄 네루 역시 티베트 일대에서 양보한다면 중국과의 또 다른 분쟁지역인 카슈미르에서 양보를 얻을 수 있다고 오판하고 있었다.

1950년 1월 1일에 중국 국제방송(라디오 베이징)은 "판첸라마 10세의 요청으로 중국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해방시킬 준비가 되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티베트, 인도, 영국, 중국의 대표단이 협상을 논의했으며 티베트 대표단은 최종적으로 1950년 9월 16일에 델리에서 중국측 대표단을 만났다. 중국측 대표인 위안중센(袁仲賢)은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이다, 중국이 티베트의 국방, 외교, 무역을 담당한다"고 하면서 이를 받아들이면 평화적인 해방이 될 것이며 거부하면 전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2. 중국군의 침공

1950년 3월 중국 인민해방군은 티베트 국경에서 훈련을 마치고 먼저 캄의 다르셋(현재의 캉딩시)으로 진주했다. 이후 덩샤오핑[5]의 서남국 산하의 인민해방군 제18군이 가을부터 본격적인 침공에 착수했다.

이후 계획은 차차 진행되어 1950년 여름에 중국군은 티베트 침공 준비를 거의 마쳤다. 심지어 6.25 전쟁 도중이라 양면전선이 될 것이 뻔했는데도 침공 준비를 하였다.

1950년 10월 7일 밤에 중국군은 장궈화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여 라싸의 동쪽 100km 위치까지 침공했다. 중국군의 병력은 약 4만명 남짓으로, 동쪽에서 세 갈래로 동시에 진군했다.

이에 맞서는 티베트군은 의용군을 포함한 약 8천명이였다. 티베트군은 갸뽄이라는 자체적인 편제로 편제되어 있었는데 대략 1개 갸뽄당 5백명에서 1천명의 병력이 소속되어 있었다. 1950년 초 기준으로 티베트는 10개 갸뽄과 1개 근위 갸뽄, 2개 포병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들을 전부 합치면 8,500명 정도였다. 무장은 인도를 거쳐 수입한 브렌 경기관총 리-엔필드 소총, 소수의 박격포로 국한되었다. 여기에 영국으로부터 독립 이후 소련과의 파트너쉽과 별개로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 무력 병합은 회의적으로 본 인도 자와할랄 네루 수상이 2인치 박격포 38문, 3인치 박격포 63문, 294정의 브렌 경기관총, 1260정의 구식 리-엔필드 소총, 168정의 스텐 기관단총과 약간의 탄약을 제공하는 등 간접적인 군사적 도움을 주기는 했다. 출처

2.3. 승리 선언과 국제사회의 외면

라싸 정부는 어디까지나 중앙 티베트만을 지키며 사태가 중앙 티베트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인도의 매스컴이 티베트 대표단에게 중국의 침공에 대해 묻자 그런 사실이 없다며 부정하고 중국의 태도를 묵인하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중국군은 환영하는 모습과 항복조인을 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언론에 내보내며 선전활동에 열을 올렸다. 1950년 10월 25일 중국 정부는 중국군의 티베트 진주를 선언했다.

당시 국제사회의 관심은 6.25 전쟁에 쏠려 있었기 때문에 티베트 문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미국 소련을 제거하려는 데[6]만 열중하고 있었고 20세기 초반에 티베트와 관계를 맺었던 영국은 1950년 1월 인도를 독립시킨 후 더 이상 티베트와 지리적으로 무관해졌기 때문에 이들의 운명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인도는 중국과 당시에는 우호적인 관계였고 파키스탄과의 분쟁으로 인해 제 코가 석자였기 때문에 굳이 티베트 문제로 중국의 어그로를 끌려고 하지 않았다. UN총회 운영위원회도 <티베트와 중국, 인도에 평화를 위해서도 UN에서 토의하는 것은 걸맞지 않다>고 하여 심의의 연기를 결정했다.

그리하여 이전의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마찬가지로 중공은 이 지역의 영유권을 선언했고 한반도에 군대를 파병하기 직전인 1950년 10월 10일 티베트를 침공했다. 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티베트군은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채 패전했다. 티베트군은 칭하이의 군벌 마부팡군 수준을 넘지 못했다. 일개 군벌보다 강력했던 중화민국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중공군을 상대로 티베트군이 싸워 버틸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했다. 티베트는 험준한 산악지대니 지형을 살려서 끈질기게 저항하면 중공군에 큰 피해를 줄 수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티베트군은 장기전에 필요한 준비를 하지 않았고 중공군 부대들도 군벌내전, 국공내전, 중일전쟁을 수십년간 거치면서 산악전에 이골이 난 경험 많은 병력이 많았다.

2.4. 중앙 티베트 침공과 합병

중공군은 본격적인 침공 준비에 들어가기 전 티베트 정부와 협상을 계속했다. 중공군이 제압한 동티베트 지역에는 12월 15일에 시캉성, 장족자치구, 칭하이성 인민정부가 설치되었다.

인민해방군은 중앙티베트 지역으로의 군사침공 거점으로 1951년 1월 1일에 참도를 창두로 개칭하고 인민해방위원회를 설립했다. 1951년 중국은 신장, 칭하이, 창두의 세 방면에서 인민해방군을 라싸로 진격시켜 그 무력을 배경으로 달라이 라마 정권에 17개조 협정을 강요시켜 조인하게 했다.

중공 정부는 티베트 정부대표로서 아보 아왕 지그메 등에게 <인민해방군의 창두에서의 철수를 협상하는 권한>을 주어 베이징으로 파견했다. 창두 인민정부의 티베트인 괴뢰였던 아보는 중국공산당이 제시한 17개조 협정에 서명하여 5월 23일에 승인하게 했다.

17개조 협약에서 티베트 정부는 지방정부로 규정되었고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사실상 귀속이 이루어졌다.

2.5. 17개조 협정 이후

달라이 라마 14세는 협정 체결 뉴스를 듣고 아보의 행위에 충격을 받았지만 판첸 라마는 5월 30일에 달라이 라마에 대하여 중국 정부의 지도하에 티베트 정부에 협력한다고 표명했다. 한편 아보는 이후 티베트에서 중국 공산당의 충실한 대변자가 되었다. 1951년 7월에 라싸 주둔 중국군 사령관인 장징우 장군이 야톤을 방문해 달라이 라마 14세에게 조약의 유효성을 인정하도록 요구했다.

미국은 달라이 라마 14세에게 망명하여 협정의 무효를 외치라고 했지만 많은 승려들이 달라이 라마 14세의 라싸 복귀를 원했기 때문에 결국 라싸로 돌아가 협정에 기초한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9개월만인 9월 6일 라싸로 돌아왔는데 3일 후 3,000명의 중공군이 라싸에 진주했다. 10월 24일 달라이 라마 14세는 <협정을 승인하며 인민해방군의 진주를 지지한다>는 편지를 마오쩌둥에게 보냈는데 이 편지는 이후 중국이 티베트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크게 이용되었다.

중국은 다리와 도로, 학교를 건설했지만 동시에 불교 성직자들의 권위를 깨뜨리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전통 문화와 티베트 엘리트층의 파괴는 물론 엄청난 인권 침해를 수반했다.

1959년 무렵 티베트인들의 분노는 민족 봉기로 이어졌고 중공은 이를 무력으로 가혹하게 제압했다. 유엔과 긴밀하게 연결된 국제법학자위원회는 1959년 티베트의 상황에 대해 조사하고 "티베트에서 제노사이드가 벌어지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유엔 총회는 1959년, 1961년, 1965년에 티베트인들에 대한 인권 침해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도출했다. 이후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서 티베트 망명정부를 수립했다.[7]
1959년 티베트 봉기의 노래인 "Mimang Langlu".
당연히 티베트 자치구와 중국에서는 강력한 금지곡 중 하나다.

이후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티베트 문화유산이 대거 파괴되기도 하였다.

3. 기타

브래드 피트 주연의 '티벳에서의 7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쿤둔 등에서 당시의 상황이 나온다.

티베트 합병 이후 여러모로 서부개척시대 시기 미국, 캐나다에 의해 행해진 아메리카 원주민 탄압과 매우 유사한 수법을 보여주었다.


[1] 티베트를 굴복시킨 원나라를 몰아낸 명나라가 티베트에 대한 권리를 계승했다고 주장했으며 청나라는 티베트를 지배하기까지 했다. [2] 우습지만 티베트가 중국 영토로 확정된 게 영국의 티베트 침공으로 인한 라싸 조약 때문이다. [3] 비슷하게 몽골 중국의 무력침공 위협에 시달렸지만 소련의 도움을 받아 비록 소련의 내정간섭을 당하긴 했지만 독립은 지킬 수 있었다. [4] 돈이 없어 유럽에서 가장 빨리 징병제를 폐지했으며 거의 대부분의 식민지를 독립시키며 영향력을 잃는 와중에 해외파병이나 군사지원은 너무 어려웠다. [5] 추후에 중국 최고지도자가 되는 그 덩샤오핑 맞다. [6] 마셜플랜 참고 [7] 출처 : 모리 카즈코 <주변국가와 중국>, 마이클 우드 외 3인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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