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탁영래(卓泳來) |
생몰 | 1922년 11월 11일 ~ 2014년 10월 23일 |
출생지 |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조일정[1] (현 경상남도 통영시 태평동) # |
사망지 | 경상남도 진주시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2. 생애
탁영래는 1922년 11월 11일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조일정(현 통영시 태평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4살 때 부모를 따라 경상남도 진주군으로 이사했고, 부모가 종사하는 양조업이 번창했기에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진주제일공립보통학교(현 진주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일본 도쿄에 유학을 떠났다가 2학년 재학 중 방학을 맞이해 귀가했다. 그때 동창의 고향인 함경도로 여행을 떠난 그는 친구로부터 계몽운동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수락하고 그때부터 계몽 운동에 참가했다.학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는 함경도에 있는 독립군 연락소와 수시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편지검열을 피하기 위해 양파즙으로 쓰여진 비밀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안부인사가 적혀 있었지만, 불 위에 갖다대면 숨겨진 글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 후 일제가 중일전쟁을 벌이고 1938년 육군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고 이듬해엔 국민징용제를 실시해 한국인들을 전선으로 징집하자,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에 재학 중이던 1940년 이에 맞서기로 결심하고 1941년 강제 지원병 1기생들을 규합해 일제에 항거할 것을 계획했다.
탁영래는 각 지역별로 책임자를 선정하고 계획을 추진하면서 농민계몽운동을 위해 함경도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밀고로 그의 행위가 적발되고 말았고, 결국 그는 열차 안에서 부산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그 후 부산경찰서로 끌려간 그는 폭행,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 등 온갖 모진 고문을 당했고, 이로 인해 고막이 터져서 왼쪽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일제 경찰은 진주에 있는 그의 자택을 수색한 끝에 "왜놈들 죽이겠다"는 표현이 가득한 일기장을 찾아냈다. 그는 이로인해 한층 더 심한 고문을 받았고, 두 번이나 기절하기도 했다.
탁영래는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2월 2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 횡천리로 주소지를 옮겨서 살았는데 이때에도 여전히 경찰의 감시에 시달렸고, '비(非) 국민'이라는 낙인이 찍혀 온갖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다. 그러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면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이후 진주시에서 일반인으로 살았다. 2006년에 <기결수의 수난과 그 실상>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면서, 아이들이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며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쳐야 우리나라의 원뿌리를 알게 되고 나라가 튼튼해진다. 역사과목의 수능 필수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이는 것이 안타깝다. 역사교육은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고 밝혔다.
2014년 10월 23일, 탁영래는 진주시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92세.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탁영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1]
朝日町. 일본식 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