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 프랑크인의 왕비 프랑크인의 초대 왕비 Clotilde | 클로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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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클로틸데 |
라틴어 | Chrodechildis | |
프랑스어 | Clotilde | |
생몰 년도 | 474년경 ~ 545년 | |
재위 기간 | 살리 프랑크인의 왕비 | |
493년 ~ 509년 | ||
프랑크인의 왕비 | ||
509년 ~ 5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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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살리 프랑크족의 왕비이자 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비. 클로비스 1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왕국의 국교를 가톨릭으로 전환하는 데 크게 일조한 인물이다. 사후 가톨릭과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시성했다.2. 행적
474년경 부르군트 왕 킬리페리크 2세의 딸로 출생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클로틸데의 삼촌 곤데바우드가 아버지 킬리페리크 2세를 살해하고 킬리페리크 2세의 아내까지 목에 돌을 묶고 강에 던져 익사시켰다고 한다. 그녀와 여동생 크로마는 모종의 이유로 목숨을 건졌는데, 크로마는 수녀가 되었지만 그녀는 곤데바우드의 궁정에 그대로 살았다. 그러던 중 부르군트 왕과 협상하고자 찾아온 프랑크 사절단은 그녀의 우아하고 현명한 면모를 보고 클로비스 1세에게 알렸다. 클로비스 1세는 즉시 곤데바우드에게 그녀를 왕비로 삼고 싶다고 전했고, 곤데바우드는 선뜻 응했다. 당시 클로비스에게는 아내가 이미 있었고 아들 테우데리크 1세도 봤지만,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493년에 클로틸데와 결혼식을 거행하고 정실 왕비로 삼았다.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남편과 상의하지도 않고 처음 낳은 두 아들에게 가톨릭 세례성사를 주었다. 그 중 잉고메르(494년 출생)라는 아이는 유아세례를 받은 직후에 사망했고, 클로비스 1세는 이에 비통함을 느끼고 클로틸데를 비난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분은 제 태에서 태어난 아이를 그 분의 왕국과 관련시키는 것이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손실은 제 영혼의 고통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데려가는 자녀들이 그 분에게 양육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다른 아들 클로도미르(495년 출생) 역시 세례를 받은 후 건강이 나빠졌지만 클로틸데가 간절히 기도한 후 곧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후 클로비스는 자기 허락 없이 세례를 주지 못하게 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이 일로 부부관계가 나빠지진 않은 듯하다. 그들은 잉고메르와 클로도미르 외에도 킬데베르 1세(496년 출생), 클로타르 1세(497년 출생), 클로틸데(500년 출생)[1]를 낳았다.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클로틸데는 남편에게 하느님을 인정하고 우상을 버리라고 끊임없이 권했지만 클로비스는 아내의 간곡한 권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해 알레만니와의 전투에서 막대한 희생자가 발생하고 전세가 갈수록 불리해지자, 그는 하늘을 향해 눈을 치켜뜨며 "만약 당신이 나에게 이 적들에 대한 승리를 허락한다면, 나는 당신의 이름으로 세례받겠다"라고 했다. 그 후 알레만니족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 그는 비로소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508년, 클로비스는 랭스에서 부하 3,000명 및 일가족과 함께 레미기우스 주교로부터 가톨릭 세례를 받고 로마 교회 소속 주교들로부터 '아우구스투스(로마 황제)'의 칭호를 받았다. 다만 형식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에 복종하면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집정관과 로마 특별 시민의 지위를 얻었다. 클로비스와 클로틸데 부부는 가톨릭 개종을 기념하여 센 강의 왼쪽 기슭에 '거룩한 사도들의 바실리카'를 세웠다.
511년 11월 27일 클로비스 1세가 사망한 후, 클로틸데는 파리에 남아 프랑크 왕국을 분할 통치하고 있던 클로타르 1세, 킬데베르 1세, 클로도미르, 테우데리크 1세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오를레앙을 맡았던 클로도미르의 정책에 깊은 관여를 했다고 한다. 523년, 클로틸데의 아들들은 부르군트 왕이자 일찍이 클로틸데의 아버지를 죽인 곤데바우드의 아들 지기스문트와 전쟁을 벌여 완승을 거둔 뒤 지기스문트를 폐위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지기스문트는 이듬해에 살해되었고, 그의 유해는 우물에 던져졌다. 그레고리우스는 클로틸데가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아들들에게 부르군트 왕국 공격을 사주했다고 주장했다.
524년, 클로도미르가 지기스문트의 후계자 고도마르 왕을 상대로 베체롱체 전투를 치르다 전사했다.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가 클로도미르의 영지를 양분하려 하자, 그녀는 이에 맞서 클로도미르의 세 아들의 권리를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는 어머니의 반대를 뿌리치고 클로도미르의 영지를 양분했고, 클로도미르의 세 아들 중 2명은 클로타르 1세에게 살해되었다. 오직 클로도알드만이 목숨을 건졌고, 나중에 수도자가 되었다.
그녀는 이 일에 깊은 충격을 받아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 투르의 생 마르탱 수녀원에 들어가 수녀로서 여생을 보냈다. 여러 수도원과 교회를 세우고 빈민들에게 자선 활동을 활발히 했다고 전해지는데, 오세르의 생 제르멩 대성당이 그녀에 의해 세워진 대표적인 성당이다. 또한 노르망디의 레 안들리 수녀원을 세워 귀족 가문의 어린 소녀들을 가르치게 했다. 이 수녀원은 911년 노르만족에 의해 파괴되었고, 나중에 그 자리에 성모 교회가 세워지고 그녀의 동상이 세워졌다. 레 안들리에는 '성 클로틸데 샘'으로 알려진 샘도 있는데, 이 샘을 마신 사람은 피부병이 낫는다고 전해진다.
545년 사망했고,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던 클로비스 1세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그러다 1793년 프랑스 혁명을 벌인 상퀼로트 집단이 유해에 해를 입힐 걸 우려한 수도자들이 유해를 화장한 뒤 남은 유골을 Saint-Leu-Saint-Gilles 교회에 보관하고 일부는 랭스의 성 클로틸데 대성당에 안장했다. 가톨릭과 정교회는 남편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서유럽에 기독교 전파를 이끌어냈으며 자선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그녀의 공로를 인정하여 성인으로 시성했다. 축일은 6월 3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