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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홋카이도대학 초대 교두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William Smith Clark|ウィリアム・スミス・クラー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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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26년 7월 31일 | ||
매사추세츠 애쉬필드 | |||
사망 | 1886년 3월 9일 (향년 59세) | ||
매사추세츠 애머스트 | |||
국적 | [[틀:깃발| | ]][[틀:깃발| ]][[미국| ]]||
직업 | 교수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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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817D72> 학력 |
<colbgcolor=#fff,#191919>윌리스턴 신학교 졸업 애머스트 칼리지 졸업 괴팅겐 대학교 화학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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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 매사추세츠 농업대학 총장 | ||
1867년 ~ 1879년 | |||
삿포로농학교 총장 | |||
1876년 ~ 1877년 | |||
매사추세츠 하원 의원 | |||
1864년 ~ 1865년, 1867년 | |||
병역 | 연합군 (1861년 ~ 1863년) | ||
참전 | 남북 전쟁 | ||
배우자 |
해리엇 윌리스턴 (Harriet Keopuolani Richards Willist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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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11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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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화학, 식물학, 동물학, 농학 교수이다. 일본 홋카이도의 개척을 담당한 개척자이자, 홋카이도의 개척 역사와 함께한 홋카이도대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미국의 매사추세츠 농업대학(현 매사추세츠 대학교)의 총장을 지내고 그 후, 홋카이도의 개척을 위하여 삿포로농학교에 초빙되어, 삿포로농학교(현 홋카이도대학) 초대 교두(敎頭)[1]로서 농학, 식물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을 영어로 가르쳤으며, 선진 낙농업을 홋카이도에 정착시켰다.
2. 생애
그는 윌리스턴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1844년 애머스트 칼리지에 입학, 1848년에 졸업했다. 그후 1848년부터 1850년까지 자신의 모교였던 윌리스턴 신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고, 화학 및 식물학을 배우기 위해 독일의 괴팅겐 대학교에 유학, 1852년 동 대학에서 화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미국에 귀국하여 그 해 애머스트 칼리지의 교수(敎授)가 된다. 그 후 클라크는 미국의 매사추세츠 농업대학(현, 매사추세츠 대학교)의 학장( 총장)으로 임명되게 된다.한편, 메이지 유신 후 일본 정부는 홋카이도 개척사(開拓使)의 차관으로 구로다 기요타카(黒田 清隆, 일본 제2대 총리)를 임명했는데, 그는 홋카이도의 식산흥업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1871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일본은 에도시대 말기부터 시작된 러시아 제국의 남진 정책에 자극받아 어떻게든 홋카이도를 개척하기 위해 해외 기술자의 도움을 얻으려 했다.
미국 농무국의 국장을 맡고 있던 호레이스 케프론과 지질 광산학자였던 T.안티셀 등이 일본을 방문하여 홋카이도를 3년 정도 머물며, 개척의 방법에 대해서는 가축과 기계를 이용한 밭농사와 축산업이 적당하다고 제안했다. 이에 구로다 기요타카는 미국식 시스템으로 홋카이도를 개척하기로 결정하고, 벼농사를 중심으로 했던 이주자들에게 새로운 축사 및 농업을 가르치기 위해 해외 기술사를 초청하기로 했다. 참고로 이전에 클라크가 교수로 취임했었던 애머스트 칼리지에는 최초의 일본인 유학생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도시샤영어학교(현, 도시샤대학)를 설립한 니지마 조(新島 襄)이다. 그때 인연이 있었던 니지마 조는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를 일본 정부에 소개하였고, 일본 정부는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를 포함하여 에드윈 던, W. M 휠러, W. P 브룩스 등의 미국인들을 홋카이도로 초청했다.
한편으로 1872년부터는 도쿄에 개척사 가설학교(開拓使仮学校)를 설치하여 홋카이도를 본격적으로 개척할 학생을 모집하였다. 국비 학생 50명, 사비 학생 5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학교 졸업 후 국비는 10년, 사비는 5년 간 의무적으로 홋카이도의 개척에 종사해야 했었다. 1875년에는 이 학교가 삿포로로 이동하여 삿포로학교를 출범하였고, 1876년에는 일본 최초로 학위를 수여하는 기관인 삿포로농학교(현 홋카이도대학)로 설립되었다. 1876년 7월에 클라크는 이 삿포로농학교의 초대 교두(敎頭)로 임명된다. 교두로서 한 일은 밑의 '교육 및 철학' 문단 참조.
삿포로농학교에서의 임기가 끝나고 1877년 4월 16일, 기타히로시마시(北広島市) 시마마쓰(島松) 역체소(駅逓所)[2]에서 삿포로농학교 학생에게 boys be ambitious라는 말을 남겼다. 떠나며 교토에도 들러서 니지마 조를 만나 금일봉을 주면서 삿포로농학교의 학생들도 지원해 달라고 부탁하고 귀국한다. 하지만 미국으로 귀국 한 뒤 지인과 함께 광산을 경영하지만 파산해 빚을 떠안게 돼 실패하고, 사업 실패로 온갖 송사에 휘말리다 1886년에 매사추세츠 애머스트에서 암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일본에서의 업적에 비해 말년은 매우 초라했다. 그는 미국에 귀국한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삿포로에서의 생활을 잊을 수가 없어, 삿포로에서 보냈던 생활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2.1. 교육 및 철학
클라크는 모든 수업을 영어로 했고, 학생들을 야외로 데리고 나가 대자연 속에서 동식물학, 광물학 등의 자연과학을 가르쳤다. 구로다 기요타카는 클라크를 높이 평가하고 학생들을 위한 도덕 교육도 의뢰했으며, 이에 클라크는 이에 대해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교육을 하겠다면서 학생들에게 ‘예수를 믿는 자의 계약(イエスを信ずる者の契約)’에 서명하도록 하고 이에 따른 도덕교육을 실시한다.삿포로농학교 제2농장 (札幌農学校第2農場) |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의 지도에 따라 삿포로농학교는 개교와 거의 동시에 광대한 농장을 열고 홋카이도의 이주자를 위한 현대적인 대규모 농업을 채용하는 거점이 되었다.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의 구상은 매사추세츠 농과대학의 제자인 WP 브룩스 등에게 인계되어 홋카이도 개척에 적합한 작물과 농기구의 수입과 선정, 재배 및 관리 방법의 지도를 실시하였고, 홋카이도 농법 구축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홋카이도대학 농학부 제2농장 문서 참조.
또한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는 식물학 및 원예학 교육을 위해 식물원의 필요성을 제안했고, 당시 소규모의 식물원 부지를 개척사로부터 할양받았다. 후에 삿포로박물관 부지(약 4만평)가 삿포로농학교에 이양되어 일본 최초의 근대적인 식물원인 홋카이도대학 농학부 식물원 및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한편, 일본 제국 측은 면학 분위기와 교내질서 확립을 위해 엄격한 규율이나 학칙을 제정할 것을 권했지만 클라크의 교육 철학은 달랐다. 그는 규율과 단속으로는 진정한 인간을 만들 수 없다면서 한 마디의 구호로 학칙을 대신했다. - Be Gentlemen! (신사가 되어라!)
일본 최초의 학위 수여기관이자 당시 홋카이도 개척의 최전선 역할을 한 삿포로농학교는 클라크 교육 신념 아래에서 니토베 이나조, 미야베 긴고, 아리시마 다케오, 야마모토 다다사부로, 오쓰 와타리, 우치무라 간조, 히로이 이사미 등 당대 메이지 시대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유명 인사를 다수 배출했으며, 후에 제국대학으로 승격하여 현재의 홋카이도대학이 되었다.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에도 클라크 박사가 기타히로시마시(北広島市) 시마마쓰(島松) 역체소(駅逓所)에서 삿포로농학교 학생들과 송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 유화가 전시되어 있으며, 거기에 써 있는 그가 남긴 말의 전체 글귀는 다음과 같다.
“Boys, be ambitious! Be ambitious not for money or for selfish aggrandizement, not for that evanescent thing which men call fame. Be ambitious for the attainment of all that a man ought to be.”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돈이나 이기심을 위해서도, 사람들이 명성이라 부르는 덧없는 것을 위해서도 말고. 단지 사람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추구하는 야망을."
우치무라 간조는, 클라크가 여기서 지칭한
소년(Boys)이란 단순히 젊은 남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위하여 전진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다”라고 설명했다."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돈이나 이기심을 위해서도, 사람들이 명성이라 부르는 덧없는 것을 위해서도 말고. 단지 사람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추구하는 야망을."
3. 기념물
3.1. 동상
홋카이도대학의 중앙 녹지 북서쪽 모퉁이에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박사의 흉상이 있다. |
홋카이도 삿포로시 도요히라구의 히쓰지가오카 전망대에는 그의 전신상이 있다. 여기에 전신상이 건립되기 이전에는 홋카이도대학 내에 설치된 박사의 흉상을 보기 위하여 관광버스로 방문하는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대학의 연구 활동에 지장을 초래하게 되어 관광버스의 출입을 금지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삿포로관광협회에서는 클라크 박사가 홋카이도에 방문한 100주년, 그리고 미국 건국 200주년에 맞추어 히쓰지가오카 전망대에 동상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
삿포로시 시계탑 내부에는 벤치에 앉아 있는 동상이 있다. 비교적 최근에 제작된 동상으로, 위의 두 동상에 비해 유명하진 않다. |
홋카이도대학 중앙 녹지 옆의 흉상(사진1)과 히츠지가오카 전망대의 전신상(사진2)이 가장 유명한 2개의 동상이다. 이 외에도 아래의 장소에 클라크 박사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 홋카이도대학 사무국 대회의실
- 홋카이도대학 클라크회관 2층 로비
- 홋카이도대학 보건센터 로비
- 홋카이도대학 부속도서관 북방자료실
- 홋카이도대학 종합박물관 1층 전시실
- 홋카이도대학 식물원 내 미야베 긴교 기념관
- 홋카이도대학 백주년 기념회관 (후, 매사추세츠 대학교에 기증)
- 삿포로 독립그리스도 교회
3.2. 기념비
홋카이도대학 구내 정문 안쪽 - 예과 기념비 |
정확히는 클라크 박사의 기념비는 아니지만 클라크 박사의 명언을 채용한 기념비이다. 大志を抱いて(야망을 품고)라고 써있다. |
기타히로시마시 구 시마마쓰 역체소 - 클라크 기념비 |
삿포로농학교 학생에게 boys be ambitious라는 말을 남기며 떠난 장소로 알려져 있다. |
3.3. 메달
게이테키료(恵迪寮) 위원 메달 |
홋카이도대학의 기숙사인 게이테키료(恵迪寮)의 위원 메달이다. 1937년( 쇼와 12년)에 제작되었고 메달에는 BOYS BE AMBITIOUS가 각인되어 있다. 현재 홋카이도 개척촌에 옮겨져 있는 구 삿포로농학교 기숙사(게이테키료)[3] 안에 전시되어 있다. |
3.4. 신용카드
홋카이도대학의 오리지널 디자인 TUO카드에는 클라크 박사의 흉상이 있다.[4] |
홋카이도대학 졸업생에게 발급되는 신용카드에도 클라크 박사 흉상이 있다.[5] |
4. 기타
▲ 기타히로시마시 배너 |
▲ 기타히로시마시 컨트리 사인 |
- 홋카이도 기타히로시마시는 그의 격언에서 따온 말인 The Ambitious City를 시의 모토로 하고 있다. 삿포로농학교 학생에게 boys be ambitious라는 말을 남기며 떠난 장소로 알려져 있다.
- 그의 격언 Boys, be ambitious!는 영어책 등의 예문으로도 단골로 나오는 문장으로, 덕분에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달샤벳의 미니 앨범 Be Ambitious나, 브라운아이드걸스 제아의 디지털 싱글 Greedyy의 가사, 엠넷의 스트릿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Be Mbitious 등, 여러 매체에서 인용되는 단골 문구.
- 현재 홋카이도대학의 마스코트급 인물로 쓰이고 있으며, 대학의 모든 안내 표지판에는 그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 홋카이도대학 정문에서 좀 직진하면 클라크 박사의 흉상이 있고, 거기서 좌회전하면 그의 이름을 딴 '클라크 회관(クラーク会館)'이라는 건물이 존재한다. 회관 2층에는 흉상이 또 있다.
- 그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도 존재한다. 이름은 클라크 기념 국제고등학교(クラーク記念国際高等学校)이며, 단위제와 통신제 제도를 갖춘 전국구 고등학교이다. 전국에 캠퍼스를 갖추고 있으며, 설립자이자 교장인 미우라 유이치로는 역시 홋카이도대학 출신.
- 그는 균형잡힌 식단을 위해 식사는 빵을 권장했으며 쌀밥은 금지했으나, 카레라이스만은 예외로 두어서 홋카이도가 카레로 유명해 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 1881년의 기숙사 식단에는 빵과 고기, 쌀, 카레가 격일로 제공되고 있던 것은 확인되고 있다.
- 클라크와 카레를 연결하는 문헌으로 "게이테키료시(恵迪寮史)"(1933년)가 있다. 이에 따르면, 삿포로농학교에서는 빵을 권장했으며, 개교 당시부터 카레 이외의 쌀 음식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 홋카이도립 문서관에서 발행한 아카렌가 81호(1984년)에 따르면, 개척사 도쿄 사무소에서는 클라크 방일 이전 1872년부터 직접 고용 외국인 전용으로 카레와 커피가 제공되고 있었다. 원래 홋카이도에서 빵을 추진 한 것은 클라크의 전임자인 케프론(개척사 고문)이라고 되어 있어, 삿포로농학교와 카레와의 관계는 클라크 이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1]
현재 일본의 학교 내 직위로는
교감에 상당하지만 실제 업무로는 지금의
교장 그 이상을 맡았다. 삿포로농학교의 설계부터 커리큘럼은 물론 홋카이도의 전체적인 개척 양상까지 계획했다.
[2]
역체는 옛 홋카이도 개척 시대에 존재하던 숙박, 우편와 인마 등의 업무를 하던 교통 보조기관의 일종이다.
[3]
현재 홋카이도대학 게이테키료는 1983년에 신설된 건물이다.
[4]
이런 식으로 TUO 카드(
생협에서 발급하는 학생용
신용카드)가 오리지널 디자인인 대학은 별로 없다. 알려진 대학 중에는
홋카이도대학,
교토대학,
오사카대학 정도.
[5]
클라크 흉상이 그려져 있는
미쓰이 스미토모 카드와 달리, UC카드에서 발급하는 홋카이도대학 신용카드에는 클라크 흉상 대신 포플러 가로수가 그려져 있다. 사진은
여기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