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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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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고대
2.1.1. 내전기
2.2. 중세
2.2.1. 자치 도시
2.2.1.1. 롬바르디아 동맹
2.2.2. 전성기 (14 ~ 15세기)
2.3. 중근세
3. 관광


Cremona

1. 개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에 위치한 도시. 포강의 동안에 위치하였으며 피아첸차에서 동쪽으로 20km 떨어져 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간에 벌어진 내전에서 파괴되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1098년에 시장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직접 결투를 신청, 그를 낙마시켜 자치권을 얻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12-14세기에 이탈리아 북부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크레모나는 황제 편과 교황 편을 오가며 실리를 추구했다.

13세기에 건설된 종탑은 높이 120m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높은 탑이며, 16세기부터는 명품 바이올린 비올라 제작으로 이름을 날렸다. 현재는 농산물과 낙농제품의 주요 집산지이며 벽돌, 악기, 농기계, 직물 등의 제조업도 이루어진다. 이탈리아 여행 시에는 인근의 피아첸차나 크레마, 로디 중 하나와 당일치기로 다녀가는 경우가 많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도시이다. 현재 크레모나의 인구는 7만 2천명이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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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상징인 종탑

2.1. 고대

기원전 5세기에 갈리아 인들이 처음 정착하였는데 기원전 218년에 로마가 포 강 북쪽에 진출, 피아첸차와 함께 군사 기지를 지운 것이 현 도시의 기원이 되었다. 크레모나는 제노바 아퀼레이아를 잇는 가도 상에 위치하여 번영하였고, 1차 삼두정치 이후의 내전에서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2차 삼두정치 시기에는 원로원 파 ( 브루투스 - 카시우스) 편에 섰다가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에게 점령되었고, 영지는 몰수되어 그 병사들에게 분배되었다. (기원전 40년) 당시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크레모나에서 수학하던 중에 그역시 토지를 몰수당했다가 후에 되찾기도 하였다고.

2.1.1. 내전기

네로의 암살 이후 벌어진 내전에서 크레모나는 격변기를 격었다.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베드리아쿰 전투는 크레모나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진 평원이 그 전장이었다. 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크레모나는 공격군인 비텔리우스 측의 기지가 되었고(이웃의 피아첸차는 수비군의 기지였다), 전투에서 승리한 비텔리우스는 패배한 오토 측의 백인대장들을 처형하고 남은 병사들을 크레모나의 원형경기장 건설에 활용하였다. 이때 기록에 따르면 크레모나 시민들이 이 오토파 패잔병들을 심하게 조롱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2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패배한 비텔리우스파 패잔병들과 성문을 닫고 저항하다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군대에게 파괴되었다. 이때 크레모나는 역사 깊은 본국 대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패배와 시민들에게 받은 모욕에 눈이 돌아간 프리무스 휘하의 군단병들에게 주민들이 약탈, 강간, 살육당하고 도시 전체가 불에 타는 수모를 겪는다. 이때 죽은 사람들만 4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후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재건되었지만 이전의 번영을 회복하지는 못하였고 중소 도시로 전락하였다.

2.2. 중세

550년에 동로마 제국에게 회복된 크레모나는 6세기 후반에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한 랑고바르드 족의 진격에도 버텨내었으나 결국 603년에 아길루프 왕에게 직접 함락되어 파괴되었다. 다만 아길루프의 왕비였고 가톨릭 신자였던 테오도린다는 615년에 크레모나를 재건하였다. 774년에 샤를마뉴의 원정으로 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된 크레모나는 주교가 황제의 봉신으로서 다스리는 도시가 되었다. 이후 점차 영향력을 키워가던 크레모나 출신 주교인 리우프란트[1] 작센 왕조 신성 로마 제국의 국정에 깊히 관여하기도 하였다. 이후 크레모나는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2.2.1. 자치 도시

11세기 초에 크레모나는 동로마 시대 요새에 나루터가 번성하며 부를 축적하였다. 다만 1037년에 주교와 시민들간에 분쟁이 생기자 황제 콘라트 2세가 교황 베네딕토 9세와 직접 도시를 방문, 조정자 역할을 하였다. 11세기 후반에 크레모나는 하인리히 4세가 요구한 과중한 세금을 거부하였다. 이후로도 도시는 토스카나의 여백작 마틸다가 주도한 반독일 연맹에 가입하기도 하였고, 1098년부터 자치 도시, 즉 코뮌의 자격을 취득하였다. 1107년에 크레모나는 인근 도시인 토르토나를 점령하였으나 곧 브레사노로 전투에서 패하며 확장은 중단되었다.
2.2.1.1. 롬바르디아 동맹
이후 구도심과 시도심은 각각 기벨린 구엘프 파로 나뉘었는데,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이탈리아 원정 시에는 밀라노의 지원을 받던 서북쪽의 도시 크레마를 견제하고자 황제 편에 섰고 그 공로로 1154년에 동전 주조권을 얻었다. 1162년에 크레모나와 황제의 연합군이 밀라노를 공격, 파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167년에 도시는 롬바르디아 동맹을 제창하며 편을 바꾸었고 황제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1176년 5월 29일에 벌어진 레그냐노 전투에서 크레모나가 속한 동맹군은 프리드리히 1세의 제국군을 격파하였다. 하지만 1213년, 프리드리히 2세의 사주를 받은 크레모나는 카스틸리오네 전투에서 밀라노 - 로디 - 크레마 - 코모 - 브레시아의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1232년에는 제국군과 함께 코르테누오바 전투에서 2차 롬바르드 동맹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프리드리히 2세는 크레모나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교황과 황제 편을 왔다갔다 하고 자신이 만든 롬바르디아 도시 동맹을 스스로 분열시키던 크레모나는 곧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의 미움을 샀다. 그리고 1248년 2월 18일에 파르마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크레모나와 제국군은 동맹군에게 대패하였고 2천명의 크레모나 인들이 포로가 되었다. 1250년부터 파르마와의 복수전에 돌입한 크레모나는 몇년 뒤에 파르마를 패배시켜 도시를 점령하였고, 적병의 군복 바지를 벗겨 (1190년에 완공된) 크레모나 대성당 천장에 매달아 조롱하였다고 한다. 한편, 강력한 기벨린 파였던 포데스타 (시장) 팔라빈치노는 1266년에 도시에서 추 방되었고, 1271년부터 콘술 (집정관) 제가 도입되며 기벨린 파는 몰락하게 되었다.

2.2.2. 전성기 (14 ~ 15세기)

1301년에 포데스타로 취임한 루체고 가틸리시오는 구엘프 파이자 트루바도르(음유시인) 출신이었는데, 그의 시대에 크레모나는 8만 인구(현재 인구가 7만이다)의 대도시로 성장하며 전성기의 정점에 도달하였다. 당시 잉글랜드의 수도 런던의 인구가 4만여 명이었던 사실을 생각하면 대단한 규모의 도시였다.[2] 그리고 14세기 초에 도시를 지배한 카발카보 가문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을 후원하였고 운하를 이용한 관개를 통해 농업 생산량을 증대시켰다. 1311년, 크레모나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7세의 공격을 받았고, 1322년에는 카발카보 가가 몰락하고 밀라노 비스콘티 가문이 도시를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비스콘티의 크레모나 지배는 비텔스바흐 가문 바이에른 공이자 신임 이탈리아 왕이었고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루트비히 4세의 침공(1327년), 바이에른의 공작 룩셈부르크 가문 보헤미아 국왕이 얀의 침공(1331년)을 받아 잠깐씩 끊기면서도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1403년에 카발카보 가문의 지배가 회복되었는데, 3년이 지난 1406년에 용병대장이던 카브리노 폰둘로가 고용주인 우발도 카발카보를 죽이고 카발카보 가문을 멸족시켰다. 하지만 그는 도시 경영에 부담을 느끼고는 4만 플로린 금화를 받는 대가로 비스콘티 가문에게 크레모나를 넘겨주었다(1419년). 비스콘티 입장에서는 이득

이후 지배의 강화를 결심한 비스콘티 측은 도시를 자신들의 본부격이던 밀라노 공국의 지배 하에 두었고, 크레모나는 밀라노 다음으로 크고 중요한 도시로 기능하였다. 향후 한세기 가량 비스콘티, 스포르차 가문의 지배 하에서 크레모나는 문화적으로 번영하였고 1441년에는 시내의 산 지기스문트 성당에사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비앙카 마리아 비스콘티 간의 결혼식이 치러져 스포르차 가문의 밀라노 지배를 정당화시켜 주기도 하였다. 1446년, 밀라노 공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간의 전쟁에서 크레모나는 비스콘티 측의 용병인 니콜로 피키뇨의 군대에 포위되었으나 베네치아가 파견한 용병대에게 구원되기도 하였다. 다만 이후 다시 밀라노의 지배 하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2.3. 중근세

1499년부터 1509년까지 크레모나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았다.[3] 비록 3차 이탈리아 전쟁의 아그나델로 전투(프랑스-교황 율리오 2세-밀라노의 베네치아 격파) 이후 재차 밀라노 공국령이 되었으나 프랑스의 힘이 너무 커지자 교황은 페르난도 2세의 스페인 왕국을 끌어들였고, 스페인은 프랑스를 격파한 후 크레모나를 점령한 것이다. 밀라노 공국은 도시를 스페인에게 넘긴다는 노용 조약을 체결하였다(1513년).

비록 시민들은 프랑스의 지원 하에 저항하였지만 1524년에 산타 크로체 요새가 함락되며 스페인 왕국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1526년의 마드리드 조약으로 프랑스 군대는 크레모나 영토에서 철수하였다. 30년 전쟁이 한창이던 17세기 초, 크레모나는 1628년의 기아와 1630년의 전염병에 시달리며 쇠퇴하였다. 두세기 가까이 지속된 스페인 왕국의 지배 이후,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에서 프랑스 군대에게 점령된 후, 1707년부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702년의 크레모나 전투의 현장이기도 했던 도시는 1848년의 혁명을 겪은 후, 1859년에 이탈리아 왕국의 전신인 사르데냐 왕국령이 된 후 현재에 이른다. 2차 대전 이후 인근에서 천연가스가 발견되었고, 농업과 식품 공업이 발달해 있다. 농산물과 낙농제품의 주요 집산지이며 벽돌, 악기, 농기계, 직물 등의 제조업도 이루어진다. 특히 크레모나에서 만들어진 올드 바이올린은 아주 유명하다(스트라디바리우스).

3. 관광

https://en.m.wikipedia.org/wiki/Cremona

https://en.m.wikipedia.org/wiki/Cremona
[1] 962년에 주교가 됨 [2] 다만 파리의 인구은 20만이 넘긴 했다. [3] 구글 지도로 보면 16세기 초의 베네치아가 얼마나 내륙으로 진출했는지 알 수 있다. 직선거리로만 130km 넘게 떨어져 있다. 밀라노가 느낀 위협이 체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