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8:41:55

콘 마틴

아일랜드의 前 축구 감독
파일:Con Martin.jpg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fff> 이름 콘 마틴
Con Martin
본명 코넬리어스 조셉 마틴
Cornelius Joseph Martin
출생 1923년 3월 20일
아일랜드 자유국 더블린 러시
사망 2013년 2월 24일 (향년 89세)
국적
[[아일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83cm / 체중 83kg
직업 축구 선수 ( 센터 하프백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소속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fff> 선수 드럼콘드라 FC (1941-1946)
글렌토란 FC (1946-1947)
리즈 유나이티드 FC (1947-1948)
아스톤 빌라 FC (1948-1956)
워터포드 FC (1956-1959)
던도크 FC (1959-1960)
감독 던도크 FC (1959-1960)
셸번 FC (1965)
국가대표 30경기 6골 ( 아일랜드 / 1946-1956)
6경기 0골 ( 북아일랜드 / 1946-1950)



1. 개요2. 생애
2.1. 게일식 축구2.2. 선수 생활
2.2.1. 클럽2.2.2. 국가대표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clearfix]

1. 개요

아일랜드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1]

2.1. 게일식 축구

마틴은 어린 시절 게일식 축구 선수로 뛴 적이 있다. 마틴은 원래 게일식 축구 선수였고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무렵에는 더블린 대표로 뛰며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실력이 있었다. 하지만 게일식 축구 협회는 겸업 금지를 이유로 들며 마틴을 추방해버렸고 대회 우승 메달도 그에게 수여하지 않았다.[2]

마틴은 게일식 축구에서 축구로 전업한 선수들 중 대표적인 성공 케이스가 되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마틴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아일랜드군에서 복무하면서 축구를 접했고 1941년에 드럼콘드라 FC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마틴은 주로 수비수로 뛰었지만 특유의 다재다능함을 뽐냈다.

1946년, 글렌토란 FC에서 뛰고 있던 마틴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맷 버스비 감독은 조니 캐리의 추천으로 골키퍼로 영입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마틴은 필드 플레이어로 뛰고 싶어서 제안을 거절했고 대신 그는 리즈 유나이티드 FC를 택했다.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마틴은 하프백과 인사이드 포워드를 오갔다.

1948년 마틴은 아스톤 빌라 FC로 이적했고 아스톤 빌라에서 주전 하프백으로 활동했다. 1951-52 시즌에 마틴은 레프트 윙 하프로 뛰고 있었지만 주전 골키퍼 조 러더포드(Joe Rutherford)가 부상을 당하자 마틴이 골키퍼로 투입되었다. 마틴은 리그 26경기, FA컵 1경기를 뛰고 러더포드가 복귀하자 원래의 포지션으로 돌아갔다.

마틴은 1956년 아스톤 빌라를 떠나 워터포드 FC에서 3년을 더 뛰었다. 그리고 1959년, 던도크 FC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의 1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2.2.2. 국가대표

마틴이 선수 생활을 할 당시 아일랜드에는 FAI IFA, 2개의 팀이 있었다. 마틴을 포함한 몇 명의 선수들은 이 2개의 팀 모두에서 뛴 경력이 있다. 이 두팀은 1950년 월드컵 지역 예선전에 다른 조로 출전했고 마틴 역시 이 두팀의 경기에 모두 출전했다. 현재까지 유일하게 한 번의 FIFA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두 개의 팀으로 출전한 사례이며 지금 이런 방식의 참가는 불가능하다.
2.2.2.1. FAI
1946년 6월 16일, 마틴은 포르투갈을 상대로 아일랜드 대표팀 데뷔전을 가졌다. 그러나 마틴의 데뷔전은 꽤 특이하게 펼쳐졌는데 아일랜드가 0:3으로 끌려가던 전반 30분, 아일랜드의 골키퍼 네드 코트니(Ned Courtney)가 부상으로 빠지게 되자 아일랜드는 마틴을 골키퍼로 교체 투입시켰다. 마틴은 남은 시간동안 이미 이 경기에서 2골을 넣었던 페르난두 페이로테우를 포함해 포르투갈 공격수들에게 더 이상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고 아일랜드는 1점을 따라붙어 경기는 1:3으로 끝났다.

그리고 일주일 후, 마틴은 아예 골키퍼로 출전해서 스페인을 상대했다. 이때 스페인의 공격수로는 세사르 로드리게스, 아구스틴 가인사, 텔모 사라[3] 등이 있었는데 아일랜드는 오히려 스페인을 1:0으로 잡아버렸다.

마틴은 1950년 월드컵 지역 예선전에 참가했지만 아일랜드는 스웨덴에 밀려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아일랜드는 구디슨 파크에서 잉글랜드를 2:0으로 이겼는데 이는 최초로 잉글랜드에서 비영연방팀이 잉글랜드 대표팀을 이긴 경기로 남아있다.[4]

마틴은 1954년 11월까지 아일랜드 대표팀 경기에 출전했고 아일랜드는 노르웨이를 2:1로 이겼다.
2.2.2.2. IFA
마틴은 북아일랜드 대표팀으로도 6경기에 출전했다. 이 경기들 중에는 1950년 월드컵 지역 예선과 1947년 10월 스코틀랜드전에서의 2:0 승리, 11월 잉글랜드전에서의 2:2 무승부가 포함되어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마틴은 주로 센터 하프백으로 뛰었지만 미스터 다재다능(Mr. Versatility)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그는 게일식 축구를 하면서 익힌 손기술을 바탕으로 꽤 뛰어난 골키퍼로도 활약했다.

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2] 우승 메달은 1971년에서야 마틴에게 수여되었다. [3] 텔모 사라는 교체 출전했다. [4] 아일랜드는 강제긴 해도 오랫동안 영국의 영토였던 것도 있고 경기장도 잉글랜드의 메인 홈구장인 웸블리 스타디움이 아니라 세기의 경기에 비하면 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