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전반
수도교 유적
로마 시대 저수조
1. 개요
Kemerhisar튀르키예 중남부의 도시. 니으데에서 서남쪽으로 12km, 보르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인구 5천의 작은 도시로, 로마 시대 카파도키아 제2의 도시였고 우마이야 왕조에 의해 수차례 파괴된 티야나 유적으로 유명하다. 현 지명은 튀르키예어로 아치를 뜻하는 케메르와 성채를 뜻하는 히사르의 합성어로, '아치 성채'란 뜻이다. 도심 동북부에 수도교와 옛 모스크를 비롯한 유적 주요부가 있고, 수도교를 따라 동북쪽으로 3km 가량 가면 로마 시대 저수조 유적이 있다. 저수조 유적 동쪽 언덕에도 튀르키예의 주요 신석기 유적 중 하나인 쾨쉭 회윅 (Köşk Höyük) 유적이 있다.
2. 역사
일대에서 출토된 비석에 새겨진 타발 국왕 와르팔라와스 2세 | 트라야누스 ~ 하드리아누스 대에 지어진 수도교 |
티야나 (Τύανα)는 히타이트 시기 투와누와라 불렸고, 신히타이트 시기에는 루위 문화권의 신히타이트 국가인 타발 왕국의 수도 투와나였다. 기원전 8세기 티글라트 필라세르 3세 하의 아시리아에 조공하던 타발 왕국은 킴메르족에게 멸망당하였고, 이후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에서 일대의 티야니티스 평원에서 유래된 다나라 불리며 크고 번성한 도시라 묘사되었다. 로마 제국기에는 타우루스의 에우세비아라 명명되었으나 현지에서는 여전히 티야나로 통용되었고, 서기 1세기에 활약한 신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자 티야나의 아폴로니오스가 이곳 출신이다.
3세기 카라칼라의 치세에는 안토니아나 콜로니아 티야나로 명명되었고, 3세기 후반 팔미라 제국에 가담했다가 272년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점령되었으나 후자가 꿈에서 아폴로니오스를 영접했다는 이유로 약탈을 금하여 별탈이 없었다. 372년 발렌스가 카파도키아 세쿤다 속주를 신설하여 그 주도로 삼았고, 기독교화의 여파로 크리스투폴리스 (Χριστούπολις)라 명명되었으나 여전히 티야나로 통용되었다. 7세기 부터는 타우루스 산맥을 따라 조성된 이슬람 제국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전방 군사기지 중 하나였는데, 708년 오랜 포위 끝에 함락되었다.
2.1. 티야나 공방전
693년 세바스토폴리스 전투 후 공세에 나선 우마이야 왕조는 706년 티야나 방면으로 마이문 알 구르가미[1] 하의 습격대를 보내었으나 동로마 장군 마리아노스에게 격퇴되었고, 마이문 역시 전사하였다. 총애하던 부하의 죽음을 복수하기로 한 우마이야 조의 대장군 마슬라마는 707년 조카 알 압바스 이븐 알 왈리드와 함께 대군을 이끌고 티야나를 포위하였다. 포위군은 투석기를 배치해 성벽을 맹폭하였고, 이로써 성벽 일부가 붕괴했으나 수비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입하지 못하였다. 포위는 겨울까지 장기화되었고, 식량 부족에 시달리게 되자 마슬라마는 철수를 고려하였으나 일단 봄까지 버티기로 하였다. 이듬해 봄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테오도로스 카르테루카스와 테오필락토스 살리바스에게 원군을 주어 파견했는데, 숫자를 불리기 위해 미숙한 농민 징집병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티야나에 당도한 원군은 포위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하였다.테오파네스에 의하면 두 장수들이 다툰 끝에 무질서한 공격을 감행했다가 수천의 전사자와 그를 능가하는 포로를 내어주고 패퇴하였다 한다. 동로마 진영을 점령한 우마이야 군은 그들이 도시에 보급하기 위해 가져온 막대한 식량을 고스란히 얻어 포위를 지속하였고, 절망한 티야나 주민들은 항복 협상에 나섰다. 마슬라마는 성내의 인원에게 안전 철수를 약속하였고, 이로써 9개월의 포위 끝에 티야나는 항복하였다. 그후 우마이야 군은 도시를 약탈, 파괴하였고 도릴라이온 (혹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크뤼소폴리스)까지 아나톨리아 내륙 일대를 습격한 후 철수하였다. 테오파네스에 의하면 그후 우마이야 군은 약속을 깨고 주민들을 노예로 잡아 돌아갔다 하나 교차 증빙은 되지 않는다. 티야나의 함락 후 동로마 조의 아나톨리아 방어선은 도미노처럼 무너져내렸고,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마슬라마는 9년 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2.2. 그후
이후 동로마 당국은 티야나를 재건하는 대신 니그디 (니으데)를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버려져 있던 티야나는 806년 재차 점령한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에 의해 군사 기지화되고 모스크까지 세워졌으나 니키포로스 1세와의 강화가 체결되자 철수하였다. 그후 동로마측 요새로 환원되었으나 831년 칼리파 알 마문이 재차 점령한 후 파괴되었고, 얼마후 그 역시 동로마 침공의 전초기지로써 군사 기지화에 나섰으나 833년 급사해버리며 반쯤 재건된 도시는 다시 헐렸다. 10세기 들어 동로마 제국이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반격에 나서자 전방 기지의 역할을 다한 티야나는 완전히 버려졌다. 그러다 룸 셀주크기에 튀르크어로 '교회 성채'란 의미인 킬리세 히사르라는 마을이 생겼고, 이후 '아치 성채'란 의미인 케메르히사르로 바뀌어 오늘날에 이른다. 현재는 튀르키예 공화국 니으데 도의 보르 군에 속한 케메르히사르 읍이다.3. 갤러리
유적지 전경
티야나 수도교
파일:터키 티야나 4.jpg
로마 시대 저수조
3.1. 쾨쉭 회윅 유적
[1]
마르다이트 반란 당시 포로가 되었으나 그의 용맹함을 눈여겨본 마슬라마 이븐 압둘말리크가 그를 해방시키고 장교로 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