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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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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의 5 MB 하드디스크 2020년의 1 TB 마이크로 SD카드[1]
컴퓨터는 앞으로도 세계에 5대 정도만 있을거라 생각한다.
- 토머스 J. 왓슨, IBM 회장, 1943년[2]
개인적으로 집에 컴퓨터를 가지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
- 케네스 올센, 디지털 이퀴브먼트 社 설립자 겸 회장, 1977년[3][4]
30년 뒤에 사람들이 컴퓨터로 이루어낼 놀라운 일이 기대됩니다.
-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社 설립자 겸 초대 회장, 1990년

1. 분류2. 16세기까지3. 17세기 ~ 20세기 초반4. 20세기 후반5. 21세기
5.1. 차세대 컴퓨터
6. 여담

1. 분류

  • 세대별 분류 - 회로소자로 무엇을 사용했느냐에 따라 분류된다.
    • 1세대 컴퓨터( 진공관) - 회로소자로 진공관을 사용. 전력소모가 많고 열이 많은데다 고장도 잦았다. 하지만 컴퓨터의 계산성능 및 필요성 때문에 개발은 활발히 되었고 상용화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비슷한 기능을 하는 릴레이가 쓰이기도 했다.
    • 2세대 컴퓨터( 트랜지스터) - 트랜지스터가 회로소자를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크기 및 발열이 획기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한다. 2세대 컴퓨터를 주도했던 기업은 IBM이고 이때 고수준 프로그래밍 언어가 개발되기도 한다.
    • 3세대 컴퓨터( IC) - IC가 등장해 중앙처리장치가 작아지고 기억용량은 커진다. 운영체제가 본격적으로 나오며 다중 프로그램 등이 실현된다.
    • 4세대 컴퓨터(LSI) - LSI는 IC의 종류로 고밀도 집적 회로를 의미한다. 3세대보다도 더욱 소형화가 이루어져서 이때부터 개인용 컴퓨터가 개발되기 시작하고 일반 사무용 등으로도 컴퓨터의 사용이 확대된다.
    • 5세대 컴퓨터(VLSI) - 초고밀도 집적회로의 사용. 물론 요즘 컴퓨터들은 소자의 집적도가 수억은 가뿐히 넘어서 소자에 따른 분류는 희미해졌고, 현대에는 이러한 분류로 컴퓨터를 부르는 것은 거의 사장되어가고 있다.

2. 16세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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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에 있어 가장 오래된 계산 도구는 손이며, 그 후로 긴 시간에 걸쳐 주판이나 계산자, 산가지와 같은 계산을 돕는 보조 도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보조 도구를 이용한 인간 컴퓨터는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지다 전자 계산기의 발전으로 단가가 저렴해지고 소형화 되고 반대로 인권의 발전으로 인간 컴퓨터의 임금이 늘어나면서 사장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안티키테라 기계 아스트롤라베가 있었다. 기계에 의한 계산이라는 컨셉은 옛날부터 있었던 것.

3. 17세기 ~ 20세기 초반

1623년 시카르트와 1642년 파스칼에 의해 덧셈, 뺄셈이 가능한 최초의 기계식 계산기가 출현하였고, 1671년 라이프니츠에 의해 곱셈, 나눗셈까지 가능한 사칙연산 계산기가 나왔다. 하지만 본격적인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이는 찰스 배비지이다. 그는 차분기관이라는 기계식 계산기를 만든 뒤 오늘날의 컴퓨터와 개념적으로 같은 기계인 해석기관[5]을 설계(다만 예산의 한계로 당시에 실물이 제작되지는 못했다.)하였으며, 최초의 프로그래머가 탄생한다. 자매품으로 독일인 뮬러가 제작한 미분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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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배비지가 만들려고 시도했던 해석기관, 다 만들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후 1893년에 홀러리스에 의한 천공 카드 시스템이 개발되어 대규모 데이터의 취급이 가능해졌다. 천공카드는 다양한 자료를 동시에 취급, 관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종전까지는 데이터는 종류마다 모아서 취급, 관리되었는데, 천공카드의 등장으로 데이터의 종합이 가능해진 것이다.

1900년대 들어서는 천공 카드를 활용한 기계식 계산이 가능해졌다. IBM에서 천공카드를 이용한 다목적 기계식 계산기를 개발했으며, 이로 인해 '기계에 의한 데이터 처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로 인해 천공카드의 활용 범위가 급격히 넓어졌으며, 인구통계, 조세업무, 보험업무 등 대규모 자료의 취급과 처리가 가능해졌다. 특히, 미군은 양 대전에 천공카드와 기계식 계산기를 광범위하게 도입하여, 과학적 군수 체계를 갖췄으며, 이는 전쟁 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달성하게 했다.

1940년대 전자식 컴퓨터가 발명되기 전까지 기계식 계산기는 광범위하게 사용되며, 산업 발전과 대규모 전쟁 수행에 기여하였다. 기계식 계산기와 컴퓨터의 차이는, 기계식 계산기는 말 그대로 '계산'만 해주고, 자료의 취급, 처리, 의사결정은 인간이 수행해야 했다. 예를 들어, 어떤 자료의 평균값을 구한다고 할 때, 컴퓨터에서는 '평균'을 구하라는 명령을 입력하면, 평균을 바로 얻을 수 있으나, 기계식 계산기에서는 계산기 조작자가 평균을 구하는 프로그램 차트에 따라 계산기를 조작해야 했다. 물론, 1940년대 들어서는 기계식 계산기의 발전으로 인해, 평균이나 간단한 경우의 수 같은 경우는 프로그램이 기계적으로 내장되기도 했었다.

기계식 계산기 시대에도 '프로그램'은 '차트' 문서 형태로 존재했으며, 계산기 조작원들이 차트에 따라 조작을 실행하며 데이터를 처리했었다.[6] 데이터의 입출력, 저장은 천공카드 형태로 이뤄졌다.

4. 20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기계식 계산기가 광범위하게 활용되며, 계산 과정과 데이터 처리까지 프로그램에 따라 자동으로 실행하는 기계가 개념적으로 고안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기계식으로 프로그램 처리를 구현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예'와 '아니오'라는 논리 신호가 구분되고, 이를 다음 회로에 전달할 수만 있다면, 무엇을 재료로 하든 컴퓨터의 근본이 되는 논리 회로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당시의 기계식 계산기는 아날로그식으로 막대를 밀거나 당겨서 논리 연산 회로를 구현하는 경우가 많았다.[7] 그러나 대부분은 설계의 복잡성과 비용 문제로, 설계 자체에만 이르고 실제 제작되지는 못했다.

예외적인 사례로, 소련에서는 블라디미르 루캬노프(Vladimir Lukyanov)가 로 동작하는 아날로그 컴퓨터, 정식 명칭은 '물 적분기(Гидравлический интегратор)'의 발명에 성공했으며, 국가의 지원을 받아 몇 차례 개량되기도 했다. 마치 물시계처럼 수압을 이용해서 작동하는 주제에 데이터 입력은 물론 연산 결과를 모눈종이 위에 그래프로 그려주는 출력 기능까지 있었다. 놀랍게도 이 '물 컴퓨터'는 소련 각지는 물론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중국 등 여러 공산국가의 산업시설과 다양한 분야의 연구기관에서 1980년대까지 현역으로 활용되었다. 물의 움직임은 물리법칙을 따르기에 열역학적 변화를 시각적으로 모니터링하기에 좋았으며, 속도가 좀 아쉽긴 하지만 전기회로와는 달리 아무리 오래 연산을 시켜도 부하나 고장을 겪지 않아[8] 대규모 모델링 용도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1920~1930년대부터 구미 학계에는 이미 1900년대 초반 발명된 진공관을 활용하여 기본적인 논리 연산을 수행할 수 있음이 알려져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 디지털 컴퓨터 설계가 1930년대 중후반부터 개념적으로 제안되기에 이르렀으며, 1940년대 들어 각국을 중심으로 디지털 컴퓨터의 실제적 제작에 돌입한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938년에 독일의 콘라트 추제가 Z1을 개발하였고 이후에도 계속 개량하였다. 추제는 패전국이라는 이유로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서 십수 년 동안 최초 타이틀을 거머쥐었는데, 특히 Z3은 튜링 완전을 포함하여 프로그래밍이 불가능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현대 컴퓨터가 갖춰야 할 기능을 갖춘 세계 최초의 컴퓨터였다.

1937년 2차 대전 직전에 영국의 앨런 튜링은 추상적 계산기의 모형이 되는 튜링 머신을 고안했고 이는 추상적 계산기의 모형으로서 컴퓨터의 논리적 모델이 된다. 이후 1937년 조지 스티브츠가 전자식 계산기를 만든 데 이어 1942년에 아이오와 주립대학의 아타나소프 교수가 베리아와 진공관으로 이루어진 특수 목적용 컴퓨터 ABC를 개발하였으나 오늘날 이 기계는 최초의 전자식 계산기라고 보기엔 특수목적용이었으므로 일반적으로는 최초의 진공관 사용 계산기로 보는 경향이 있다.

1943년 영국 GCCS(현 영국의 GCHQ)에서 독일군의 최고위 암호장치인 에니그마를 깨기 위해 콜로서스를 개발하게 된다. 콜로서스는 진공관, 릴레이만 사용한 디지털 컴퓨터였으며 덤으로 프로그래밍도 가능한 컴퓨터였다. 즉, 시작은 에니악보다 더 빠른데 이놈이 발표된 건 기밀이 해지된 후인 1975년 이후였다.

이후 에이컨에 의해 1944년 전기 기계식 계산기인 MARK-1이 제작되었고 2차 대전 이후인 1946년 에커트&머큘리에 의해 범용 전자계산기 ENIAC( 에니악)이 개발되었다. 에니악이 개발되기 1년 전 헝가리 출신 수학자 존 폰 노이만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주기억장치에 두고 주기억장치에 있는 프로그램 명령어를 하나씩 수행해 나가는 방식을 제안하고, 또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2진법을 컴퓨터에 채택할 것을 주장하는데, 이 제안들이 적용된 최초의 컴퓨터인 EDSAC(에드삭)은 1949년 모리스 윌키스에 의해 개발되었다. 이로부터 현대적인 컴퓨팅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흔히들 애니악이 세계최초의 컴퓨터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소송을 통해서 1942년에 개발된 ABC(어태너소프-베리 컴퓨터)[9]가 세계 최초의 컴퓨터로 인정[10]받았다. 물론 여전히 에니악이 최초의 컴퓨터라고 아는 사람이 많다. 컴퓨터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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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악

1950~1960년대에 컴퓨터의 개발을 본격적으로 견인한 것은 ICBM 우주항공 분야에서의 수요였다. 왜냐면 이 이전에도 NASA의 전신인 NACA나 노스롭, 보잉 같은 우주, 항공분야에서는 수학적인 계산을 많이 요구했기 때문. 문제는 컴퓨터는커녕 계산기도 없으니 그걸 전부 사람 손으로 했다! 수많은 계산원이 계산을 하고 옆 사람에게 넘겨 검산하는 형식. 효율성은 당연히 꽝이었다. MIT 연구소에서 가공을 위한 CNC 공작 기계를 발명해 내게 된다. 공작 기계와 컴퓨터를 접목시킨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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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사령선 달 착륙선에 장착 되었던 아폴로 유도 컴퓨터. 레이시온 제작 제미니 우주선에 장착되었던 제미니 온보드 컴퓨터. IBM 제작

또한 이 무렵 소련과 미국에 우주 경쟁이 발발하여 우주선의 개발에 박차가 붙게 되었는데, 우주 비행은 사람의 손으로 계산 하기에는 너무 느리고 부정확 하다는 문제가 있어, 우주선에 탑재되어 인간 대신 계산을 수행하고 우주선을 제어하는 임베디드 컴퓨터의 개발이 매우 중요해졌다. 우주선에 탑재될 컴퓨터는 작고 가벼우며 전력 소모가 적은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실리콘 논리 회로로 구성된 컴퓨터를 사용 하였으며[11], 프로그램과 데이터의 저장을 위해서 자기 테이프나 자기 코어 메모리 같은 저장 매체를 이용하였다. 이러한 컴퓨터는 성능이 좋지는 않지만, 신뢰성이 높기 때문에 무인 탐사선에 탑재되는 컴퓨터는 아직도 RAD750 같은 오래된 컴퓨터가 사용 된다.[12]

민간에서도 수혜를 받아 이 시기 미국의 여러 기업에 컴퓨터가 확산되었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여러 가지 한계를 갖고 있었다. 먼저, 1947년에 이미 트랜지스터가 발명되었음에도 기술이 성숙하지 못해 여전히 1950년대 후반까지 진공관 컴퓨터가 주류였으므로 소형화에 난점이 있었다. 다음으로, 개인용 컴퓨터의 개념이 부재하여 하나의 컴퓨터를 두고 여러 사람이 동시에 사용하였다. 컴퓨터 한 대에 터미널 수십 대를 물려 사용하는 식이었다. 다만 1960년을 기점으로 트랜지스터가 상용화되어 컴퓨터의 진공관을 대체하기 시작한다. 특히 1960년대 중반부터 집적회로(IC)가 보편화되었는데, 이로써 컴퓨터 기판이 많이 작아질 수 있게 되었고 개인용 컴퓨터의 토대가 마련된다.

개인용 컴퓨터 개발의 또 다른 난점은 마이크로프로세서(CPU)였다. 마이크로프로세서가 개발되기 전에는 IC를 수백 개 이상 사용하여 CPU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들었으므로 그만큼이나 일반인들이 감당할 수 없는 큰 비용을 발생시켰다. 이것은 1970년대 초반에야 집적회로 기술이 발전하면서 해결되었다. 최초의 상용 마이크로프로세서는 1971년에 발표된 인텔의 4비트 프로세서인 4004였다. 4004에는 2,300여 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가있었다. 4004의 발표 이후로 컴퓨터의 가격이 크게 낮아졌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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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테어 8800

개인용 컴퓨터로서 처음으로 성공하여 널리 퍼진 컴퓨터는 알테어 8800였다. 알테어 8800은 1975년 1월에 출시되었으며, 1974년에 발표된 인텔 8080 8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사용한 컴퓨터이다. 비용을 낮추기 위해 조립 키트로 판매하였고 조작이 컴퓨터 전면의 스위치 여러 개 및 LED로만 이루어지는 등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매우 부실했다. 그러므로 컴퓨터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들만 주로 사용하였고 대중에게 큰 파급력을 미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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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PC[13]

이후 1977년 6월에 출시된 8비트 컴퓨터 애플 II, 1981년 8월에 출시된 16비트 컴퓨터 IBM PC가 미국 전역의 학교, 사무실, 가정에 먼저 퍼진 후 약간의 시차를 두고 한국과 서유럽, 소련 및 그 위성국, 중국 등지에도 천천히 확산되었다. 이렇게 퍼진 데에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시기적으로 반도체 산업이 충분히 성숙하여 가정에서도 컴퓨터를 구매할 정도로 가격이 싸졌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두 컴퓨터가 공통적으로 컴퓨터 사양을 거의 완전 공개하고 범용 IC를 사용했기 때문에 다른 업체에서 합법적으로 쉽게 복제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2번째 이유 때문에 한국, 동구권, 중국 등의 컴퓨터는 원본의 복제품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CPU 같은 핵심 부품은 미국에서 수입했지만, 구소련 러시아에서는 CPU까지 복제해내기도 했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대부분의 컴퓨터는 개인용 컴퓨터(personal computer, 약자로는 PC)이며 개인용 컴퓨터 규격은 IBM의 IBM PC IBM PC 호환기종, 애플 매킨토시에서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다만 개인용 컴퓨터 시장은 현재 애플 컴퓨터보다 IBM PC 호환 컴퓨터가 과점한 상태에 있는데, 이것은 IBM PC가 사무용으로 더 적합하여 더 많은 점유율을 차지한 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1970~80년대에 백색 가전에 제어용 IC가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아무데나 “콤퓨타”라는 말이 붙던 시절[14]이 있었지만, 제어용 IC의 소형화 및 가격 하락으로 인해 1990년대 이후에 출시되는 전자 제품 중 CPU(MPU)가 들어가지 않는 제품은 드물다.

인터페이스면에서도 발달했다. 배선들을 조합해서 프로그래밍 하던 시절에서 키보드를 사용해 직접 타이핑치면서 접근이 더 쉬워졌고, GUI 시대에는 마우스 사용도 발달해서 더욱 편해졌다.

1980년대만 해도 컴퓨터는 배우기도 힘들고 쓰는 것도 힘들었지만 지속적으로 컴퓨터 산업이 발전하면서 이젠 그 누구나 기초적인 지식만 있다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개선이 되었다. 컴퓨터의 특징은 정확성, 신속성, 대용량성, 범용성, 호환성이며 이 컴퓨터가 기계로서 다양한 곳에 성능을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1990년대부터는 개인용 컴퓨터의 최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은 거의 대다수의 업체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때는 엄청나게 다양한 컴퓨터 제조사가 난립했으며 이들은 온갖 종류의 완제품 컴퓨터나 컴퓨터 부품들을 내놓았다.

1995년 8월, 컴퓨터는 또 한 번의 대격변을 맞이하게 된다. GUI[15]를 채택한 Windows 95가 대중화되며 컴퓨터는 쓰기 쉽게 변모했다. 이게 없었다면 우리는 위키질도 못했다.[16]

이러한 대중화 때문에 단순 계산 뿐만 아니라, 영화, 음악, 게임, 소설 등 각종 멀티미디어 산업에서 컴퓨터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전자책, 전자문서의 등장으로 기존 필기구와 필름들을 거의 몰아내었다.

컴퓨터의 성능 향상만큼이나 놀라운 것이 가격의 하락이다. 컴퓨터의 가격대 성능비는 지난 반 세기 동안 몇 억 배로 증가했다. 일례로 미국 우주선인 아폴로 시리즈에 탑재된 각종 컴퓨터들은 80년대 패미컴만도 못한 성능을 가졌지만 한 대의 우주선 전체(즉 3단 로켓 및 착륙선(2개) + 사령선)에 탑재된 컴퓨터의 가격을 합치면 지금 돈으로 수십억 원에 육박한다고 한다. 애당초 미국이 우주왕복선을 개발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왕복선의 경우 탑재된 컴퓨터를 재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엔 지금처럼 컴퓨터 가격이 싸질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5. 21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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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는 역설적으로 컴퓨터가 사라질 것이다라는 떡밥이 돌곤 한다. 스마트폰, 웨어러블 디바이스 등이 대중화되어 컴퓨터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스마트폰과 웨어러블 모두 컴퓨터이므로 컴퓨터가 점점 많이 사용되면 모를까 사라질 가능성은 없다. 21세기에는 자동차, TV, 심지어 냉장고까지 CPU가 탑재된 컴퓨터이며 인간은 컴퓨터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컴퓨터를 써 본 적이 없다는 아이도 생기고 있다. 물론 이럴 경우 Microsoft Windows가 설치된 IBM PC 호환기종를 컴퓨터라고 지칭하며 대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를 다룰 줄 모를 뿐이지, 사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이 아이들은 태블릿 컴퓨터 같은 광의의 컴퓨터를 일상속에서 접하면서 살아왔을 것이다.[17]

컴퓨터를 일상에 밀접하게 소지하게 되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클라우드 서비스가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이것이 컴퓨터를 100% 대체한다는 전망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 개인이 올린 정보를 마음대로 들여다보거나 사용자의 동의 없이 자료를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서[18] 개인용 컴퓨터 자체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스마트폰 자체가 초소형 개인용 컴퓨터에 전화기능을 넣은 물건일 뿐이기 때문에 동일한 기술력을 사용하면 스마트폰보다 규모가 큰 노트북, 데스크톱 컴퓨터의 성능이 월등하기 때문에 게임을 하는 큰 규모의 작업을 하는 프로페셔널한 사람들로 인해 여전히 적지 않은 규모로 사용되고 있다.

프로그래밍 면에서는 딥러닝 같은 기계학습이 발달하여 스스로 프로그래밍하는 오토마타 개념이 탄생될 예정으로 보인다.

양자 컴퓨터 같은 기존 컴퓨터와 다른 연산 방식의 컴퓨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단순 키보드, 마우스 같은 인터페이스에서 터치패드, 터치스크린, 모션캡쳐, 음성인식 등으로 더욱 발달하였다. 그리고 21세기 초에는 기초적인 뇌-컴퓨터 인터페이스가 등장했다.

시험에 자주 나오는 건데 컴퓨터에 창의성 같은 건 아직 없다. 강인공지능이 개발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2011년에 구글이 가진 기술력으로 만든 인공지능을 바둑에 접목시킨 알파고로 이세돌과의 대국에서 창의적으로 보일 수 있는 수를 데미스 하사비스(알파고 개발자)의 알파고 원리(정책망과 가치망)에 의한 연산결과의 판단으로 인간보다 더 창의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바둑기사들에게 특이점을 선사했으므로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19] 다만 이는 창의적인 수를 두었다기 보단 딥러닝을 이용한 자가학습을 통해 나온 결과로, 자가학습 역시 컴퓨터 역사의 큰 획을 그은 것이지만 완전한 창의력이라고 하긴 힘들다.

5.1. 차세대 컴퓨터

6. 여담

  • 대한민국에 컴퓨터가 최초로 들어온 것은 공식적으론 1967년 경제기획원의 IBM 1401이다. 비공식적으론 후지쯔의 FACOM222인데, IBM 1401도입보다 몇 달 빠를 뿐이다. 대한민국의 컴퓨터 도입은 아시아 국가에선 꽤나 늦은 편으로, 일본은 미군정 말기인 1949년에 IBM SECC가, 중국에는 1959년에 소련의 모델 107이 도입되었다. 특히, 중국에 도입된 소련의 컴퓨터는 양탄일성 개발에 적극 활용되며 중소관계 악화의 발단이 된다.


[1] 1956년의 저장장치 HDD)는 여러 명의 장정들과 기계를 동원해야 간신히 옮길 수 있었지만, 50년 후 2006년의 저장장치( microSD)는 사람 손가락 하나 잘못 튕기면 사라질 정도로 작고 가벼워졌다. 저장용량은 64년만에 무려 20만 배나 커졌으며, 무게 대비 효율까지 고려한다면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경량화 및 용량 확장이 이루어졌다. [2] 이 시기 즈음에 한 연구원이 "50년 후인 1990년대에는 컴퓨터가 2톤도 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명대사가 있다. 1990년대는 커녕 예상 시기보다 15년이나 더 이른 1975년에 이미 22kg짜리 컴퓨터가 나왔다. 현대의 컴퓨터중엔 키보드, 본체, 모니터, 마우스 및 기능들을 합쳐도 1kg도 나가지 않는 물건이 많다. 모니터가 없거나 ARM 같은걸 쓰면 라즈베리 파이(컴퓨터) 처럼 46g 짜리도 있고, 인텔 에디슨처럼 더 작은 컴퓨터도 있다. [3] Digital Equipment Co. 메인프레임 시대에 IBM 다음가는 컴퓨터 회사인 적도 있었다. PC에 무관심한 대가로 사세가 축소, 90년대 후반 (당시까지) PC회사인 컴팩(COMPAQ)에 인수된다. 이후 컴팩도 계속된 적자로 마침내 휴렛팩커드(휴렛패커드)에 인수된다. 컴팩은 PC회사인 관계로 한국내에서는 경쟁 PC 회사가 있어서 인지도도 낮고 한국 지사의 규모도 작았다. 반면에 오래된 메인프레임을 고집하는 금융권의 수요 덕에 디지털 社는 국내에 사업기반이 컸었다. 컴팩이 디지털을 인수할 당시 한국컴팩도 한국디지털과 인수합병했는데(둘 다 미국 본사의 100% 자회사) 인수하는 한국컴팩 직원이 30여 명, 인수당하는 한국디지털 직원이 1500명 정도였다. 합병된 회사 한국지사장은 당연히도 한국컴팩 출신이다. [4] 2011년까지 생존하였다. [5] 해석기관은 조건 분기 기능이 있었기 때문에 튜링 완전한 기계이며 훗날의 천공카드와 같은 카드를 통해 프로그래밍이 가능했다. [6] 간혹 2차 세계대전 시기 미군측 영상을 보면 여성 조작원들을 모아두고 거대한 종이를 넘겨가며 교육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프로그램 차트를 교육하는 것이다. [7] 20세기 후반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1978년에는 대니얼 힐리스(Daniel Hillis)와 브라이언 실버먼(Brian Silverman)이 이 방식을 응용하여 나무 막대기만으로 틱택토 게임용 컴퓨터를 구현하기도 했다. [8] 1950년대까지만 해도, 전자식 컴퓨터는 고장이 잘 나는 진공관을 사용했기 때문에 안전성 문제가 있었다. [9] 존 어태너소프(John Atanasoff)는 아이오와 주립대학의 교수였고, 클리퍼드 베리(Clifford Berry)는 그의 제자다. 1939년 개발에 착수해 1942년에 실험을 거친 전자식 디지털 컴퓨터였다. [10] 1973년 10월 19일 미국 법원은 "인류 최초의 전자 계산기는 ABC다"라고 판결 하였다. [11] 당시에는 CPU같은 물건이 없었기 때문에, 논리 게이트를 이용하여 일일히 로직을 구성하였다. 아폴로 유도 컴퓨터의 경우 240개의 NOR 게이트로 구성된 논리 모듈이 여러개 장착 되었다. AGC는 개별 부품이 아닌 IC로 구성된 최초의 컴퓨터 중 하나이다. [12] 유인 우주선은 글래스 콕핏같은 장비로 인해 점점 고성능의 컴퓨터를 탑재하는 추세이지만, 여전히 민간에 보급된 컴퓨터들에 비하면 성능은 매우 낮다. 또한 컴퓨터의 다중화를 통해 높은 신뢰성을 확보한다. [13] 한 시대를 풍미한 8비트 컴퓨터 Apple II, 지금 보면 상당한 구식에 단조롭지만 출시 초창기의 컴퓨터란 매우 비싸고 굉장한 물건이었다. [14] 지금도 동네에 ‘컴퓨터 세탁소’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곳이 많은 데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콤퓨타"라는 발음은 일본어에서 전해진 것이다. [15] 사실 원조는 1973년에 등장한 제록스 연구소의 알토이고 이걸 배낀것이 1983년에 출시된 1만 달러짜리 애플 리사였으나, 시범적으로 탑재한게 겁나 비싸서 망한 대신 상용화된 건 1984년에 출시된 매킨토시 128K이다. 그래서 Windows의 GUI는 표절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는 애플의 언플로 표절은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애플에게 소송당하자 사실 이 모든게 제록스 연구소에서 배낀거라고 폭로했다. 애플은 결국 제록스 연구소에서 GUI에 대한 권리를 인수했고 그러자 MS는 애플과 계약하고 GUI를 사용했다. 법적 분쟁은 표절 문제가 아닌 계약서에 사용 기간이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자세한 건 GUI 문서 참조. [16] 좀 더 정확히 말하면 Windows 95의 등장 때문은 아니고, 비슷한 시기에 두드러진 인터넷 대중화 때문이다. Windows 95가 대중화된지 좀 뒤에 인터넷이 대중화되었다. 참고로 이 당시 PC통신과 인터넷 모두 1990년부터 1990년대 말까지 종량제 요금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에, 윈도우 3.1 시절에는 SLIP/PPP를 사용하여 매우 큰 돈을 ISP에 갖다 바친 후 겁나 비싼 시내/시외전화요금(&PPP서비스 요금)을 물어 가면서 느려터진 인터넷을 해야 했다. [17] "컴퓨터는 계산기이다." vs "화면이 있으면 당연히 터치입력이 되어야 한다."같은 컴퓨터를 대하는 기본 전제에서 세대차가 발생할 수 있다. 그 정도로 컴퓨터가 급격하게 발전해 온 것이다. [18] 서비스하는 기업이 망해서 개인자료가 담긴 서버를 팔아버리거나 혹은 해커가 서버를 해킹해서 개인정보를 팔아넘길 수도 있으며, 국가기관이 정보를 요청할 경우 기업은 자료를 넘길 수밖에 없다. [19] 계산과 연산은 더 정확한 선택을 찾기 위한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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