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전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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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례주*의 구성 |
노스웨스트 잉글랜드 | 체셔, 컴브리아, 그레이터 맨체스터, 랭커셔, 머지사이드 | |
노스이스트 잉글랜드 | 노섬벌랜드, 타인 위어, 더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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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미들랜즈 | 헤리퍼드셔, 슈롭셔, 스태포드셔, 워릭셔, 웨스트 미들랜즈, 우스터셔 | |
이스트 미들랜즈 | 더비셔, 노팅엄셔, 링컨셔***, 레스터셔, 러틀랜드, 노샘프턴셔 | |
이스트 오브 잉글랜드 | 에식스, 하트퍼드셔, 베드퍼드셔, 케임브리지셔, 노퍽, 서퍽 | |
사우스웨스트 잉글랜드 | 서머싯, 브리스톨, 글로스터셔, 윌트셔, 도싯, 데번, 콘월 | |
사우스이스트 잉글랜드 | 버크셔, 버킹엄셔, 이스트서식스, 햄프셔, 와이트 섬, 켄트, 옥스퍼드셔, 서리, 웨스트서식스 | |
그레이터 런던 | 그레이터 런던, 시티 오브 런던 | |
* 도시주(녹색, 6개), 비도시주(청색, 28개), 단일 자치주 및 기타(흑색/다크모드에서는 백색, 14개)로 구분된다. |
컴브리아 카운티 Cumbria Coun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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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州旗) | |||||
컴브리아 카운티의 위치 | |||||
행정 | |||||
국가 | 잉글랜드 | ||||
시간대 | (UTC+0/+1) | ||||
주도(州都) | 칼라일 (Carlisle) | ||||
인문환경 | |||||
면적 | 6,768km² | ||||
인구 | 500,012명(2024년) | ||||
인구밀도 | 74/km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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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북서부에 있는 전례주이다. 주도는 칼라일이며 면적은 6,768㎢, 인구는 500,012명(2024년 기준), 인구 밀도는 74명/㎢이다. 북쪽으로는 스코틀랜드, 서쪽으로는 아일랜드 해, 남쪽으로는 랭커셔 주, 남동쪽으로는 노스요크셔 주, 동쪽으로는 더럼 주, 노섬벌랜드 주와 접한다. 동부는 페나인산맥이 주 경계를 이루며, 중앙부에서 남서부에 걸친 컴브리아 산지에는 빙식호가 많아서 호수지방(Lake District)이라고 부른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영국 국내여행지로 이름이 높다. 잉글랜드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스카펠 파이크(Scafell Pike, 978m)가 이 주에 위치에 있다.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호수인 윈더미어 호도 있다.1.1. 경제와 산업
변방에 규모와 인구도 적어서 전체적인 비중으로 봤을땐 그 비중이 적긴하지만, 나름 격동있는 경제사와 탄탄한 산업체계를 지니고 있다. 산업 혁명 당시에는 아일랜드해 근역 서부 해안가 도시들에 제철소와 조선소가 건설되었고, 13세기부터 계속되어온 [1] 석탄 생산이 본격적으로 확장되었으며, 이렇게 쌓인 자본을 기반으로 칼라일과 같은 주요도시들의 경공업이 진흥되어왔다. 물론, 대처의 탈산업화와 노조탄압등의 정책들로 인하여 주요한 경제 기반들이 파괴되었으나, 희박한 인구밀도와 드넓은 자연환경등을 강점삼아 영국의 주요시설들과 주요기업들을 끌어들였는데, 셀라필드 원자력 발전소 [2]에서 1만명, BAE 시스템즈의 원자력 잠수함 조선소에서 1만 2천여명의 고용효과를 유치하는데 성공했다.그리고 컴브리아를 견인하는 가장 큰 사업은 단연 관광 사업인데, 산업 혁명동안에도 비교적 잘 보존된 목가적인 지역마을들, 산악지형에 잘 보존된 스톤 서클들과 헨지들,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서쪽 부분, 영국에서 가장 큰 호수인 윈드미어 호수를 포함하는 레이크랜드 국립공원등은 연간 10억 파운드 [3]의 수익과 4만여명의 고용효과를 창출했다.
2. 행정 구역
2023년 4월부터 행정구역으로서의 컴브리아가 해체되어 2개의 단층제 행정구역(웨스트모어랜드 퍼니스, 컴벌랜드)으로 분리되었다.2.1. 과거 행정구역
- 현 웨스트모어랜드 퍼니스
- 배로인퍼니스
- 이든 구
- 사우스레이클랜드
- 현 컴벌랜드
- 앨러데일 자치구
- 칼라일
- 코프랜드 구
3. 역사
로마가 도래하기전까지 브리튼 켈트 문화가 융성했던 지역이다. 이름에서부터 알수있듯이, 컴브리아는 웨일스어로 동포를 의미하는 컴리(Cymru)[4] 와 연관이 있다고 추측되는데, 이는 컴브리아의 켈트적 기원을 증명한다 [5].이후 서기 70년경, 로마가 도래할적에는 지역 씨족의 족장들인 카르티만두아와 베누티우스에 의하여 공동통치되어왔는데, 당시 족장이었던 베누티우스가 반로마 노선을 이어나가려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로마 당국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이후로 브리튼 열도 북부지역에 대한 여러 차례의 토벌과 정복이 진행되었는데, 당시에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지어지기 이전이라 적절한 요새도시가 필요했기에 로마군은 당시 로마 최북단의 도시이자 요새도시인 루구발리움(Luguvalium), 훗날의 칼라일, 을 건설하며 컴브리아에서의 통치를 본격화해갔다.
80년대부터 120년대까지는 북부의 픽트인들에 대한 군사적인 통합시도들과 방어전쟁등이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이는 로마로 하여금 컴브리아에 수많은 요새들과 도로, 그리고 군사시설들을 건설하게 만들었다. 110년대부터 120년대까지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북부의 여러 켈트 부족들에 대한 더욱 통제적이고 직접적인 수단이 필요함을 느꼈고, 이후 직접 로만 브리튼 북부에 와서 컴브리아에서 노섬블랜드에 달하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건설을 주도하여 완성시켰다. 이러한 대방벽의 건설은 컴브리아에 남아있던 부족들의 북부와의 단절을 야기했고, 이 컴브리아만의 독자적이고 독특한 문화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카라칼라 황제의 외교정책에 의하여 컴브리아는 한층 평안한 시기를 맞이했다. 로마인과 지역부족들은 긴밀한 관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했고, 국지전은 감소했으며, 군대의 규율과 인원은 감소하여 로마군의 역량이 지역사회로 유출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권력투쟁과 내전등에 로만 브리튼이 개입되기 시작하면서 컴브리아의 평화도 심하게 훼손되었다. 갈리아와 브리튼에서 발생한 2번의 내전들이 컴브리아에 주둔한 로마군의 역량을 파괴하였고, 이는 방벽에 충분한 규모의 로마군이 근무하게 하지 못하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이후 방벽이 아닌 지역 거점에 있는 요새들을 강화하여 사용하였다. 로마군은 색슨족과 픽트인들에게서 평원과 해안선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했고, 현지의 로만-브리튼 부족들에게 더욱 자치적인 권한과 지원이 주어졌다. 이러한 경향성은 5세기 로마가 브리튼에서 철수할때까지 강화되었다.
로마가 브리튼에서 철수한 이후 발생한 권력의 공백으로 인하여 지역의 군벌적인 부족들은 지역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쟁투를 벌였다. 이후 6세기경까지의 역사는 정확하게 기록되어있지않다고 여겨지는데, 민담에 의하면 옛 북부 브리튼의 왕이었던 우리엔 레게드의 후손들이 세웠다는 레게드라는 이름의 왕국이 컴브리아에 형성되어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당시 수많은 가톨릭 성자들이 컴브리아의 기독교 공동체와 연관이 있다고 여겨진다. 7세기 경에는 노섬브리아 왕국이 컴브리아에 확장하였고 9세기 후반까지 통치했었는데, 이는 앵글리아인들이 컴브리아에 정착하게 만들었고, 수많은 켈트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할수있었으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
865년, 노르웨이와 북유럽 등지에서 이교도 대군세가 잉글랜드에 침공하였는데, 이때 컴브리아의 해안선과 수도원, 여러 마을들이 파괴되거나 약탈되었으며, 침공한 노르드인들과 그 침공으로 파괴된 다른 칠왕국 출신의 브리튼 민족들이 유입되었으며, 당시의 환란을 피하기 위하여 컴브리아에 남아있던 켈트인들이 글래스고 부근으로 도피하였다. 927년에 애설스탠이 컴브리아를 비롯한 북부에 개입하기전까지 칠왕국의 난민들, 그리고 로우랜드의 켈트계 부족들과 요크의 데인로와 협력하는 노르드계 세력간의 다툼이 지속되었다.
이후 애설스텐이 잉글랜드 왕국을 건국하여 잉글랜드계 세력들을 지원하기시작하자 켈트계는 더블린과 요크의 노르드계와 연계하여 잉글랜드 왕국을 해체하려 시도하였는데, 애설스텐이 937년 브루넌버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잉글랜드 왕국의 우위를 가져오는데 성공하며 실패로 돌아갔다. 이어 945년 애설스텐의 후계자인 에드먼드 1세의 정복으로 컴브리아에 남아있던 토착세력들은 모두 축출되었고,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분할한다. 이후 971년에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일으킨 국지전으로 인하여 973년 협정을 통하여 컴브리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완충지역이 설정되었다.
크누트가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여 힘의 공백이 발생한 이후 여러 차례의 전투들이 발생하였는데, 이로 인해 혼란이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 노섬브리아 백작 시워드가 잉글랜드 북부의 패권을 차지했다. 1040년대에서 1050년대 사이에 시워드는 스코틀랜드의 분쟁을 이용하며 컴브리아의 일부분을 정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왕[6]이 컴브리아인의 왕임을 자칭하며 잉글랜드 북부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여러번 감행하여 노섬브리아를 비롯한 잉글랜드 북부의 역량을 쇠퇴시켰다. 스코틀랜드의 왕은 직접적인 군사적 침공을 통하여 1092년 컴브리아의 상당부분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왕이 1093년 노르만 왕조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이후 지역의 영주인 루퍼스가 칼라일을 차지하여 1100년까지 유지하였다.(...)
이후 잉글랜드의 헨리 1세가 스코틀랜드의 국왕[7]과의 친선관계를 유지하며 컴브리아를 개발에 착수할수있었다. 루퍼스는 노르만계 귀족들에게 컴브리아 여러곳의 토지를 양도하였다. 이후 헨리 1세는 1122년 칼라일에 왕림하여 여러 영지들의 창설과 요새의 강화를 명령하였으며 1133년까지 수도원과 대성당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이후 헨리 1세가 사망한 이후 발생한 무정부시대에 스코틀랜드 국왕이 컴브리아의 통치권을 주장하며 침공을 시도하였고, 1149년에 앙주의 헨리 [8] 에게 컴브리아 통치권을 인정받았으며 1153년에 칼라일에서 사망했다. 1157년 왕이 된 헨리는 컴브리아의 통치권을 요구하였고, 잉글랜드 북부에서의 다른 이권들과 교환하여 다시 잉글랜드령이 되었다.
1165년까지 평화가 지속되었는데, 헨리 2세는 이런 평화로운 시기를 이용하여 컴브리아에서의 통치권을 강화했다. 치안판사와 세리들을 파견하였고, 여러 영주들을 봉작하여 군사적 역량을 강화했다. 이후 1165년 새로 즉위한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국경에서의 국지전들을 발생시켰지만 헨리 2세는 스코틀랜드의 국왕을 포로로 잡는데 성공하여 1174년에 스코틀랜드 왕국을 속국화하였고, 그 과정에서 컴브리아에 대한 잉글랜드의 통치권을 확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1177년에 컴벌랜드 카운티가 형성되었다.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대에 이르러 십자군이 일어나게 되는데, 리처드 1세는 십자군에 참여하기위한 자금들을 벌충하기위하여 금전을 댓가들로 스코틀랜드에 대한 종주적 위치를 철폐하였다. 이 과정에서 스코틀랜드의 국왕은 컴브리아에 대한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묵살되었다. 이후 존왕은 북부 지방들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는 정책들을 추진하였고, 이는 양국의 국경지대에서의 전운을 고조시켰다.
앙주 제국에서 제 1차 남작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존왕은 잉글랜드 북부에서 병력과 자원들을 끌어모았으며, 이러한 흐름속에서 스코틀랜드의 국왕은 귀족들의 지지와 함께 1216년 칼라일로 진격하였으나, 이 소식을 들은 존왕이 병력을 이끌고 스코틀랜드 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하며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1219년까지 여러 차례의 군사행동들이 있었으나 대부분은 존왕의 군대와 그의 아들, 헨리 3세의 군대들에게 빈번히 격파되었다.
헨리 3세의 치세에 이르러 1219년, 잉글랜드는 컴브리아의 통치권을 용인받았으며, 스코틀랜드의 국왕은 컴브리아 북부 일부지역과 마을들, 그리고 잉글우드 숲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가 유지됨에 따라 양국의 국경확립에 대한 조약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1237년, 요크 조약을 통하여 스코틀랜드의 국왕은 컴브리아에 대한 영유권과 칭호를 폐기하였으며, 잉글랜드의 국왕은 기존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지닌 컴브리아내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이후 13세기동안 평화기가 유지되었으며, 양모사업과 양국간의 무역이 활성화됨에 따라 여러 귀족들이 대두하기 시작한다.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스코틀랜드에서의 내전과 뒤이은 잉글랜드 국왕의 스코틀랜드 정복시도에 의하여 여러 차례의 전쟁과 다툼등이 발생하게 되었다. 가문에 기반한 여러 군소집단들의 가축및 곡물들에 대한 약탈행위가 성행하였으며,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도시와 가택들은 요새화되기 시작한다.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컴브리아의 내부에 지녔던 몇몇 영토들에 대한 종주권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 의하여 회수되었으며, 칼라일의 자치권 [9]은 묵살당했고 스코틀랜드 국왕[10]을 지지했던 여러 스코틀랜드계 귀족들의 영지들이 압수당했다.
이후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에드워드 1세에게 다시 축출된 이후, 윌리엄 월리스[11]에 의하여 칼라일과 컴브리아는 여러번의 약탈과 침공들을 겪어야했으며, 로버트 1세가 1316년에서 1322년까지 진행한 잉글랜드와의 전쟁속에서 컴브리아에 감행한 대대적인 규모의 약탈로 인하여 13세기 전반에 걸쳐 축척된 경제적 기반들이 붕괴되고 말았다. 이후 300년동안 국경간 반독립적인 군벌적 영주들에 의한 상호적대적인 약탈과 국지전, 그리고 전투등이 진행되었다. 교회나 수도원도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자유로울수 없었으며, 몇차례의 대대적인 전쟁들이 종결난 이후에 양국은 국경부근의 영주들에게 자율적인 권한과 칭호를 하사함으로써 국경의 혼란을 해결하고자했다.
스코틀랜드 왕국은 1328년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평화적인 국면이 시작될것만 같았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 내에서 영지를 잃은[12] 귀족들을 규합하여 스코틀랜드 2차 독립전쟁을 일으키게 되며 1337년부터 1357년까지 전쟁에 돌입하게 되는데, 이 전쟁에서 여러 대영주 가문들과 군소가문들이 성장하게 된다. 이후 백년전쟁이 발생하면서 프랑스는 잉글랜드를 견제하고자 스코틀랜드를 불러들이게 되는데, 이후 컴브리아에 아주 약간이나마 잔존해있던 경제적인 풍요로움은 그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컴브리아의 융성한 고을중 하나였던 애플비(Appleby)는 1388년에 완전히 약탈되어 남아있는것이 없다고 기록되었으며, 칼라일은 1380년대에만 3번을 포위당하며 주변의 고을들이 황폐화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백년전쟁이 끝난이후 시작된 장미전쟁에서 컴브리아를 포함한 잉글랜드 북부지방의 군벌적인 대영주들은 편을 갈라다투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랭커스터 가문을 지지하였으며, 에드워드 4세는 리처드[13]를 컴브리아로 보내 귀족들을 위무하게 하였다. 이후 리처드 튜더가 랭커스터 파벌의 수장이자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었을때까지 컴브리아의 대영주들은 리처드를 지지했다.
4. 기타
칼라일 유나이티드 FC, 배로 AFC, 워킹턴 AFC가 이 주의 축구팀이다. 칼라일만 컴브리아 지역에서 유일하게 1부리그 및 2부리그 경력이 있다.
[1]
런던과 같은 영국의 도시들은 대륙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력한 영국의 추위를 버티기 위하여 12세기부터 석탄을 이용한 난방방식을 사용했다.
[2]
여러 사건사고들이 있었지만 지역경제에 크나큰 영향을 준 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렵다.
[3]
2024년 4월 12일 기준 한화 1조 7천억 가량된다.
[4]
웨일스어로 웨일스를 지칭하는 명칭이다.
[5]
아직도 컴브리아 방언은 켈트어에서 영향을 받은 단어들과 문법들이 잔존해있다.
[6]
당시 시워드의 친척이었고, 노렸던 영토는 다른 영주들의 영토였다.
[7]
이전에 노르만 왕조에게 사망한 선왕의 여덞번째 아들이었다.
[8]
1154년이후로 잉글랜드의 국왕이었고 앙주 제국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9]
로만 브리튼 시절부터 칼라일의 자치권은 존중되었다고 한다.
[10]
에드워드 1세가 개입하여 옹립했으나 그후의 불화로 인하여 컴브리아와 노섬벌랜드를 침공했다.
[11]
브레이브 하트의 그 월리스가 맞다.
[12]
이들은 스코틀랜드 1차 독립전쟁당시 잉글랜드의 국왕을 옹호하였다.
[13]
훗날의 리처드 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