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 ~ 1933년 8월 31일
1. 개요
청나라 말기에서 중화민국 초기에 살았던 저명한 경학자, 역사학자이다. 자는 봉손(鳳孫), 호는 요원(蓼園)으로 중국 산둥성 내주부 교주출신이다.2. 생애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인 이장하의 교육하에 자랐는데 여러가지 책을 두루 읽었고 기억력이 비상했다.광서 12년(1886년)에 과거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같은 해 5월에 한림원서길사에 임명되었다. 광서 15년(1889년) 4월 산관(散馆)시험을 거쳐 한림원편수에 임명되었다.
1901년 호남학정(湖南学政)에 임명됐고 임기 4년을 마쳐 베이징에 돌아온 이후에는 국자감사업, 귀주학장총교사, 한림원일강기거주관 등의 직위를 거쳤다. 1906년 황명을 받들고 일본에 가서 교육제도를 시찰하였다. 귀국후에는 귀주제학사에 임명되었다. 2년후 베이징에 돌아와 학부참승, 탁서우참의, 경사대학당 경과감독 등을 지냈다.
청 선통 2년(1910년) 자정원(资政院)이 설립되고 이곳에 의원으로 취임하였다. 1911년 자정원의 파견으로 산동선위사 겸 독반산동단련대신으로 부임하였다. 얼마후 전례원학사로 불러들이고 자금성에서 말을 탈수 있는 특권을 하사하는 동시에 선통제 부의와 더불어 공부하도록 하였다.
중화민국이 성립하고 난 이후 그는 전 왕조의 구신으로 자처하였다. 1914년 약법회의의 임원이 되었다.
1914년 여름 위안스카이가 청사관을 설립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조이손을 관장, 커샤오민을 총찬으로 임명하였다. 1927년 조이손이 죽고나서는 커샤오민이 관장을 대리하여 직무를 수행하였다. 커샤오민은 주로 청사고(清史稿)의 편찬에 관여했는데 1927년 청사고가 완성되었다. 커샤오민은 특히 그중에서 천문지(天文志), 시헌지(时宪志), 재이지(灾异志)와 몇 부분의 전문적인 원고를 썼고 총체적인 체제도 관리하였다.
같은 때에 커샤오민은 따로 신원사(新元史)를 저술하였는데 학술계에서 아주 높은 평가를 하며 이 책은 500여년간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집대성하여 원사(元史)의 많은 결점을 보충하는 동시에 새로운 내용을 풍성하게 채워 넣었다며 칭찬하였다. 일본 도쿄제국대학은 이 업적으로 커샤오민에게 문학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 하지만 현대의 검증으로는 신원사에도 적지 않은 결함이 있으며 오히려 원사보다도 더 부실하다.
1919년 12월 4일 대총통 쉬스창은 신원사를 정사의 반열에 들도록 하여 25사의 체계를 갖추게 하였다. 1922년 신원사의 저술이 완성되었다.
1925년 10월 커샤오민은 사고전서제요(四库全书提要)의 편찬사업을 주관하면서 친히 역경류제요(易经类提要) 152조를 썼다.
1933년 8월 31일 베이징에서 병으로 죽었는데 향년 83세였다.
3. 학술저작
- 《 신원사新元史》
- 《춘추곡량전주春秋穀梁傳注》
- 《춘추곡량전보주春秋穀梁傳補注》
- 《신원사고증新元史考证》
- 《역사보译史补》
- 《이아주尔雅注》
- 《문헌통고교주文献通考校注》
- 《문선보주文选补注》
- 《설경차기说经札记》
- 《요원문집蓼园文集》
- 《요원시초蓼園詩鈔》
커샤오민의 저작은 이후에 《커샤오민선생유저柯劭忞先生遗著》로 종합편성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