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6 08:54:00

칠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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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죽 칠접선(斑竹 漆摺扇).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10호 선자장 엄재수 작품.


1. 칠접선이란?2. 칠접선의 역사3. 특징4. 칠접선의 종류
4.1. 겉대 치장에 따른 구분4.2. 속살에 따른 구분4.3. 선두 모양에 따른 구분4.4. 종이에 따른 구분
5. 구입6. 관리 방법7. 관련 문서


1. 칠접선이란?

칠접선()은 접었다 폈다 하는 쥘부채의 일종이다. 쥘부채는 대나무의 속살로 부채의 살을 만들고 한지를 붙여 접었다폈다 할 수 있게 만드는 접부채를 뜻한다. 칠접선은 이 쥘부채 속살에 옻칠을 한 것이다. 내구성, 방수성, 살균성의 특징을 가진 옻칠을 부채에 칠해 견고함을 더하고 여러 가지 부수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합죽선보다 훨씬 오래 전에 발생했으며 점점 그 모습이 화려해져 조선시대 후기에 절정을 이루었던 대표적인 부채다.

2. 칠접선의 역사

문헌에서 옻칠한 접부채에 대한 고려시대 기록은 없고, 한국에서 속살에 옻칠을 한 칠접선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 시기는 태종실록 10년 경인 4월 26일이다. 기록에 의하면[1] 접부채에 전부 칠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속살 및 종이에 모두 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합죽선이 영정조 시대 이전 기록이 없는 것과는 달리 칠접선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등장한 오래 된 부채다.

쥘부채는 보통 대나무의 속살로 부채의 살을 만드는데, 대나무의 속살이 무른 탓에 부채의 살이 쪼개지기 쉬웠다.[2] 따라서 장인들은 옻칠을 부채의 속살에 올려 내구성을 강화함과 동시에 살균성, 방수성 등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옻칠은 당시에는 귀한 물품이어서 조정에서는 부채 속살에 옻칠한 부채 제작을 엄금하기도 하였다.

귀한 옻칠을 올린 만큼 겉대에도 다양한 치장을 하여 매부리바다거북( 대모)의 등껍데기, 우각, 반죽 등의 화려한 재료를 덧대 부채 소유자를 과시했다.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는 영조 정조시대에는 이 칠접선의 화려함이 극에 달하여 별의별 부채가 만들어졌는데 그 중 대표적인 예가 국립박물관이 소장한 대모홍접선이다. 겉대를 매부리바다거북의 등껍데기로 전부 감싸고 속살에 옻칠을 하고 홍지를 붙인 사치품이다.[3]

일제 강점기에서 겨우 살아난 합죽선과는 달리 칠접선은 찾는 이도 적어지고 암울한 시대를 견디지 못해 그 맥이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한동안 칠접선이라는 단어는 문헌상에만 존재하는 유물이 될 뻔했다가, 무형문화재의 끈질긴 복원 노력으로 인해 다시 세상에 등장했다.

3. 특징

단순히 일반 접선에 속살 옻칠하였다고 하여 칠접선이 되는 게 아니다. 상기에 서술하였듯 당시에 귀한 옻칠로 속살에 칠하였기 때문에 겉대에도 그만큼의 화려함을 과시했다. 따라서 민선이나 딱선 같은 싸구려 접선에 옻칠한다 해서 칠접선이 되는 게 아니다. 실제로 칠접선 유물 중 민선 같은 밋밋한 접선에 옻칠을 한 유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합죽선과 마찬가지로 부채 허리는 부풀어 오르다가 고리에서 좁아지고 다시 머리로 가서 넓어지는 곡선이 흐르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다만 합죽선은 대나무 겉껍질을 맞붙여 만드는 특성상 그 곡선의 폭이 크지 않은데, 칠접선은 속살 하나로 만드는지라 쉬운 변형이 가능해 울룩불룩할 정도의 극단적인 곡선을 가지는 작품도 존재한다. [4]

칠접선은 그 크기가 매우 다양해서 접었을 때 23cm 정도의 작은 것도 있고 40cm가 넘는 것도 있다. [5] 큰 칠접선의 경우 두꺼운 종이를 쓸 수 있는데, 이 위에 옻칠이나 기름칠을 바르면 종이의 섬유질이 끊어지지 않고 내구성이 견고해져 그만큼 종이를 오래 쓸 수 있다. [6] 종이가 견고해지면 더욱 접고 펴기 용이해진다.

4. 칠접선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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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겉대 치장에 따른 구분

  • 다절선(多節扇)
    겉대에 마디가 많은 부채. 죽절선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마디 수가 적지만 견고한 분죽을 사용하였으나, 1980년대 이후에는 마디 많은 맹종죽을 올리고 마디 수가 20절 이상이면 더욱 비싸게 판매한다. 맹종죽은 분죽에 비해 육질이 물러서 부채를 접었을 때 간혹 앞이 벌어지곤 한다.
  • 외각선(外角扇)
    겉대에 케라틴 재질을 올린 부채. 소뿔이나 바다거북의 등껍질을 주로 사용한다.
    • 투명한 소뿔을 골라 안쪽에 그림을 그려 겉대에 붙이면 화각선(華角扇)이라고 한다. 유물로 남은 화각선은 조선말 ~ 일제강점기초에 만들어졌다. 화각장 이재만 선생의 말에 따르면 화각은 궁중에서 썼던 것이라고 하며, 최근 김동식 선자장과 이재만 화각장이 협업한 화각선이 등장하였다.
    • 매부리바다거북의 등껍질을 쓰면 대모선(玳瑁扇)이라고도 한다.[7] 국립민속박물관에 대모홍접선(玳瑁紅摺扇)이라는 유물이 존재한다. 부채 중 최고의 화려함을 자랑하나 매부리바다거북의 등껍데기가 워낙 귀한 재료라서 이것을 부채에 올리면 왕의 귀에 들어가는 모양이라 제대로 자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39권, 영조 10년 9월 24일 병신 2번째기사

      이때에 홍치기가 대모(玳瑁)로 부채를 만들어 윤유(尹游)에게 선사하였으므로 서명형이 논핵하였는데, 사문하자 마침내 그런 사실이 없는 것으로 귀결(歸結)되었다.

      이런 이야기도 있지만, 홍치기라는 사람이 정말 대모선을 만들지 않았는지, 대모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았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 내각선(內角扇)
    겉대 안쪽에 뿔 및 기타 재료를 덧댄 부채. 현재 유물이 존재한다. 이 내각은 선두까지 이어져 있어 겉대의 모양새를 잡아 주는 역할도 한다.
  • 나전선(螺鈿扇)
    겉대에 흑칠을 한 뒤 나전을 붙여 만든 부채. 유물이 존재하며 해당 유물에는 끊음 기법으로 수복다남자(壽福多男子)라고 씌여 있다.
  • 반죽선(斑竹扇)
    중국 소상강 유역에 자라는 소상반죽이라는 대나무로 만든 부채. 소상반죽은 줄여서 반죽(班竹 으로 표기하기도 한다)[8][9], 상비죽, 상죽, 이녀죽 등으로 불린다. 이 소상반죽은 대나무에 눈물점 같은 원형 반점이 있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10][11] 혹은 소상반죽 무늬를 인위로 만드는 대나무도 반죽이라고 친다.[12]
    만기요람에 오십죽백반첩선(五十竹白斑貼扇), 사십죽백반첩선(五十竹白斑貼扇) 등으로 나오는데 여기의 반(斑)이라는 글자가 바로 소상반죽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어피선(魚皮扇)
    겉대에 물고기 껍질을 말아싼 부채 문헌과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창작품에 가깝다. 최근 몇몇 선자장들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제작했다. 가오리나 상어의 껍질을 이용한 어피선은 굉장한 단단함을 자랑한다.

4.2. 속살에 따른 구분

  • 백접선(百摺扇)
    백 번 접힌다고 하여 백접선이라 부르지만[13] 문헌에 등장하는 정확한 명칭은 오십죽백첩선(五十竹白貼扇) 혹은 오십죽흑칠첩선(五十竹黑漆貼扇)이다.[14] 살 수가 50개라 오십살백접선이라고도 부른다. 만기요람에 이 오십죽백첩선을 왕 및 왕대비전, 혜경궁에게 진상하였다는 내용이 있으며, 일성록 순조 편에는 공주에게도 진상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주로 왕족이 썼을 것으로 추정한다.[15]

4.3. 선두 모양에 따른 구분

  • 어두선(魚頭扇)
    선두의 모양이 물고기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끝이 약간 뾰족하다.
  • 사두선(巳頭扇)
    선두의 모양이 뱀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어두선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선두의 끝이 약간 뭉실하다.
  • 승두선(僧頭扇)
    선두의 모양이 스님(중)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이 승두선은 그 특유의 둥그런 모양 덕분에 펴지는 각도가 좁은 부채일 때 비교적 손이 편안하다고 한다.
  • 유환선(有環扇)
    선두 사북에 고리가 있는 부채. 보통 부채는 고리가 달려 있고 여기에 선추를 달아 쓴다.
  • 무환선(無環扇)
    선두 사북에 고리가 없는 부채.

4.4. 종이에 따른 구분

  • 유칠선(油漆扇)
    종이를 기름에 먹인 부채. 그냥 기름을 먹이는 게 아니라, 특수하게 제조한 가공유를 바른다. 그 기름 제조 비법은 이미 실전되었으나, 최근 연구를 통해 명유(明油)라는 이름으로 부활하였다.
  • 협변선(狹邊扇)
    부채를 폈을 때 종이가 펴지는 각도가 180도 미만인 것. 대체적으로 140도 이하를 협변선으로 친다.
  • 광변선(廣邊扇)
    부채를 폈을 때 종이가 펴지는 각도가 180도 이상인 것. 흔치는 않지만 가끔 보인다.
  • 대륜선(大輪扇)
    별선(別扇)의 일종으로 종이가 표지는 각도라 360로라서 그 모습이 차바퀴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햇볕가리개 용으로 쓰였다고 한다.

5. 구입

아쉽게도 칠접선은 무형문화재 유물 재현 작품으로만 나와 있어 구입이 용이하지 않으며 가격도 상당히 비싸다. 현재 엄재수 선자장이 제작 중이다.

6. 관리 방법

  • 비를 맞히지 않는다. 대나무와 종이로 이루어진 부채의 특성 상 당연한 것이다. 옻칠이 올라가 있어 합죽선보다는 견고하지만 그래도 비를 오래 맞히면 대나무 사이로 물기가 스며 들어가 부채가 상할 수 있다. 겉의 물기를 닦고 바로 수리를 맡기는 것이 좋다.
  • 차 안 같은 뜨겁고 밀폐된 공간에 두면 부채가 열기에 틀어질 수 있으므로 직사광선을 피해 보관한다.
  • 모든 접부채가 그렇지만 부채를 거꾸로 피면 속살에 금이 가거나 부러진다.
  • 부채는 주인의 손을 타는 물건이므로, 함부로 남에게 주지 않는다. 부채를 모르는 사람은 소리꾼들처럼 멋있게 편답시고 겉대 한쪽 끝을 잡고 땅바닥에 떨어뜨리듯 편다거나 부채를 거꾸로 펴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 부채를 거친 표면에 문지르거나 높은 곳에 올려놓지 않는다. 잘못하면 속살 옻칠이 전부 벗겨진다.
  • 함부로 개조하지 않는다. 칠접선 같은 작품 부채를 데려가는 사람들이 어쭙잖게 부채를 내 맘대로 해보겠답시고 종이에 이상한 칠을 올린다거나 고리를 바꾼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수리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할 수 있으며, 작가의 허용치를 넘어서는 행위다.[16]

7. 관련 문서



[1] 칠한 부채(漆扇)를 금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언(上言)하기를, “전칠(全漆)은 이어대기 어려운 물건인데, 각전(各殿)에 해마다 바치는 접선(摺扇)에 모두 칠(漆)을 써서 국가의 용도를 허비하니, 금후로는 진상(進上) 이외에는 모두 백질(白質)을 사용하여 국가의 용도를 절약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2] 대나무 겉껍질을 두 개로 합쳐 만드는 합죽선은 겉껍질 특성 상 워낙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해 그런 문제가 별로 없었다. [3] 현재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중이라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는 없다. [4] 그런 유물들은 마치 근육질 남성처럼 마초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5] 옛 유물들 중에는 이게 쓸 수 있는 부채인가 싶을 정도로 크고 아름다운 부채들도 존재한다. 그런 부채들은 대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거나 신하들에게 내리는 하사품인 경우가 많다. 또한 화려한 치장이 이것저것 들어가면 합죽선보다 훨씬 무거워지기도 한다. [6] 합죽선의 종이는 얇아서 그 위에 옻칠이나 기름칠을 바르면 1년 정도 못 되어 종이가 부러진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바스라진다. [7] 대모는 원칙적으로 매부리바다거북을 뜻하며, 푸른바다거북이 여기에 포함되는 지는 불분명하다. [8] 경상도 감사가 아뢰기를,“군위(軍威) 사람 도운봉(都雲奉)이 그 후원(後園)에 대(竹)를 심고는 매일 이를 완상(玩賞)하며 즐기다가 운봉이 죽었습니다. 그의 아내 서(徐)씨는 나이가 28세였다는데, 조석으로 그 후원으로 가서 대나무를 쓸어 안고는 애모(哀慕)하기를 항상 처음 죽었을 때와 같이 하여, 17년간 계속하던 중 하루는 백죽(白竹)이 그 후원에 돋아났다고 합니다. 옛날 중국 고대의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상수(湘水) 물가에서 슬피 울어서 반죽(班竹)이 난 바 있고, 송(宋) 나라 앙흔(仰忻)이 부모 분묘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효성을 다하여 역시 백죽이 난 상서가 있어서, 군수(郡守) 양반(楊蟠)이 그 마을을 표창하여 ‘효렴방(孝廉坊)’ 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서씨집 뒤에 대가 난 것도 한 상질(常質)의 변이(變異)이오니, 그의 높은 정절을 표창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고 복호(復戶)함으로써, 뒷사람들을 권장하게 하옵소서.”하니, 명하여 그 마을에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0년 무오(1438) 7월 17일(기해) [9] 말하는 자들은, “죽서(竹書)에서 잘못되었다.” 하나 죽서에도 이런 말은 있지 않다. 굴원(屈原)은, “원상(沅湘)을 건너서 중화(重華 순 임금)에게 나아가야지.” 했으니 그 당시 남쪽 지방에 순 임금의 사당이 있었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런데 후세 사람이 이로 인해서 심지어는 반죽(斑竹)이니, 고슬(鼓瑟)이니 하는 노래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는 더욱 심한 것이다. 성호사설 제 19권 [10] 소상반죽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순임금은 순행을 나갔다가 영주 부근 창오산의 넓은 평야(蒼梧之野)에서 붕어하였다. 이 소식이 그의 두 부인이며 요임금의 두 딸이기도 한 아황과 여영에게 들어가자 그녀들은 순임금을 만나려고 소상강 뱃가로 달려갔다. 그녀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 또 하우씨가 배로 건너주는 사람은 사형시킨다고 하여 그들은 건너갈 방도가 없자 피눈물을 뿌렸다 한다. 그 때문에 그녀들은 소상강에 몸을 던졌고 그로인해 ‘소상야우’의 고사가 생겨나게 되었다. 또 그 곳에는 대나무가 많이 자라는데 그 피눈물 때문에 대나무에 반죽이 생긴 채 자라 그곳의 대나무를 소상반죽(瀟湘班竹)이라 부른다. # [11] 이 전설이 워낙 많이 알려진 탓에 이에 대한 반박글도 존재한다. "하지만 두 여인의 반죽(斑竹) 등에 대한 설은 모두가 근거 없는 허탄(虛誕)한 이야기라고 하겠다. 내가 나름대로 생각해 보건대, 순 임금이 유묘(有苗)를 몸소 정벌하는 과정에서 동정(洞庭)에까지 이르렀을 것이고, 교화를 받은 그 땅의 만이(蠻夷)들이 순 임금을 추모하여 제사를 올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을 것인데, 초(楚) 나라 땅의 풍속이 워낙 황당하고 허탄했기 때문에, 순 임금이 붕어하던 해에 실제로 형초(荊楚) 땅에 있었다고 그냥 말해 버린 것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은 근사(近似)한 자취가 그래도 있었던 만큼, 내용을 부풀려서 꾸미기도 비교적 쉬웠을 것이다." 향산집 별집 제3권 [12] 대나무에 반점을 만드는 방법은, 노사(瑙砂) 5전, 반묘(斑猫) 1전, 석회(石灰) 1전을 초(醋)와 개어 대나무 위에 떨어뜨리고 불로 지져서 빛깔을 낸다. 《거가필용》 산림경제 제4권 [13] 정확히는 98번 접힌다. [14] 백첩의 백(白)은 종이에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것임을 의미한다. [15] 임금만이 백접선 썼다는 이야기가 돌아다니는데 위 문헌에서 볼 수 있듯 사실이 아니다. [16] 부채의 외관을 바꾸려는 경우는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종이에 글씨를 올리거나 선추를 바꾸는 것에 한정해야 작품이 손상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