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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성(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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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수성 최씨[1]
출생 1893년
황해도 봉산군 사원면 사리원동
(現 황해북도 사리원시 서리동)
사망 1945년 8월 20일 (향년 52세)
가족 배우자 김윤옥, 아들 최태민, 손녀 최순실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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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항간에 사이비 종교 교주이자 일본 제국 경찰인 최태민의 아버지, 최순실의 조부로 널리 알려져 있다.

2. 생애

최윤성은 1893년 황해도 봉산군 사원면 사리원동(現 황해북도 사리원시 서리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봉산군 사원면 사리원동에서 남궁욱이 주도하는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독립선언서 1,000여 매를 인쇄하여 배부하고 피신하였다.

1920년 1월 초 남궁욱·신환은 '조선독립'을 위한 군사공채 모집의 내용을 담은 취지서와 통지서를 인쇄하여 이를 황해도 평산군 지방에 배포한 후 지방 부호들로 하여금 군자금을 납부하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최윤성에게 각 문서의 인쇄방법을 협의하며 활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최윤성은 이에 찬동하여 1월 중에 사원면 서리동 김문환(金文煥)의 집에서 남궁욱·신환과 함께 '현재 중국 상하이시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조선독립운동에 종사하고 있는데 그 취지에 찬동하여 응분의 자금을 거출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의 군사공채 모집 취지서와 통지서 초안을 작성하고 그곳에서 관할관청의 허가 없이 등사기로 60여 부를 인쇄하였다.

그후 남궁욱과 신환은 군사공채 모집 취지서와 통지서 60여 부를 들고 평산군 금암면에 가서 민가 10여 가구에 그 문서를 배포하였고 금암면 용천리에 거주하는 조인선(趙仁善)과 부정리에 거주하는 조영근(趙永根), 대촌리에 거주하는 유양우(柳揚雨) 등을 찾아가 자신들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조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파견되어 온 사람들이라고 밝히며 독립운동에 찬동하며 자금 거출에 응해준다면 7년 후에 반드시 독립운동의 목적을 달성하고 기부한 것은 그때 돌려줄 수 있으나, 만일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군율에 따라 가족 전부를 살해하겠다고 협박을 가하며 마침내 조인선과 조영근으로부터는 각각 군자금 100원을, 유양우로부터는 200원을 모집하였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곧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그해 4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죄,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아 미결 기간을 합산하여 총 11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광복 후 5일이 지난 1945년 8월 20일 별세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정작 수성최씨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