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최계원(崔啓元) |
생몰 | 1884년 3월 28일 ~ ? |
출생지 | 함경북도 명천군 서면 운동리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최계원은 1884년 3월 28일 함경북도 명천군 서면 운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4일과 15일에 명천군 하가면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 하가면사무소로 향한 그는 군중과 함께 하가면장 동필한(董弼漢)[1] 을 끌어내어 "너도 조선 사람이니 우리의 대열에 참가하여 같이 만세를 부르자"고 했다. 그러나 동필한이 "나는 조선총독이 임명한 면장이니 총독의 지시가 없이는 만세를 부를 수 없다."고 하자, 그는 격분하여 군중과 함께 면장에게 구타를 가했고, 동필한은 헌병의 도움으로 헌병분견소에 몸을 피했다.군중들은 면사무소로부터 헌병분견소로 몰려가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는 한편, 면장을 내 놓으라고 고함을 질렀다. 이때 헌병들이 군중에게 무차별사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하여 동민수 등 4명이 피살되었고, 남자 9명, 여자 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후 체포된 최계원은 1919년 6월 12일 함흥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공소했지만 경성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최계원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성구동
광천 동씨 집성촌 출신. 아래와 같이 구한말부터 지역 유지로 군림하였다. 구한말이던 1907년 10월 23일 함경남도 관찰도주사(觀察道主事)에 임명되었다.
# 이후 1910년 11월 5일
조선총독부 도서기를 그만두었고 1911년 7월 12일부터 1912년까지 경성군 서기로 근무했고, 1915년 9월 9일에 화태금융조합(花台金融組合)을 설립하여 대표로 취임, 1933년 4월 당시에도 대표로 있었다.
# 1918년 8월 28일 함경농공은행 주주로서 조선식산은행 창립에 참여하였다. 1919년 전후부터 명천군 하가면장을 지낸 사실이 확인된다.
조선총독부 직원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