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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리사지에 있었던 목탑의 디지털복원도 (by 문화유산기술연구소) |
淸岩里 寺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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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사찰 터. 평양시 대성구역 청암동에 위치해 있으며, 고구려 사찰의 터이다.이 터에 있던 절에는 황룡사에 맞먹는 목탑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왠지 모르게 듣보잡이다. 21세기에 새로운 왕조를 이룩한 북한 때문에 연구가 쉽지 않기 때문.
이 절터는 평양 시가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3km 가량 떨어진 대동강 북안, 평양시 대성구역 청암동(平壤市 大城區域 淸岩洞) 청암리 토성 안에 있다. 인근에는 대성산성, 안학궁터와 많은 고구려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절의 구조 자체는 같은 고구려 사찰인 정릉사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2. 명칭
사실 이 절의 이름은 '청암리사'가 아니다. 단지 그 터가 옛 지명이 청암리[1]라서 '청암리에 있는 절 터'라는 뜻에서 '청암리 사지'라고 부를 뿐이다. 실제 이 절의 정식 명칭은 현재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다만, 문자명왕 7년(498)에 '평양 대동강변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여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북한 학자들은 정황상 '금강사(金剛寺)'로 추측한다.
그러나 청암리 사지에서 출토된 기와편이 장군총 출토 기와보다 시기가 늦고, 장안성 출토 기와보다는 앞서고 있어, 청암리 사지의 축조도 5세기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금강사는 맞더라도, 문자명왕 시대에 만들어진 금강사(金剛寺)는 아닐 것으로 추정한다. 후대에 다시 중건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외 고려 숙종 7년(1102) 9월에 왕이 평양의 금강사에 와서 옛 탑을 보고 갔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청암리 사지가 고려사에 등장하는 금강사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 금강사가 고구려의 금강사와 동일한 사찰이 맞는지는 불명이다.
3. 가람배치
탑과 금당 주변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인 1938년과 1939년에 발굴이 되었으나 황룡사에서처럼 본격적으로 실시한 발굴이었을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꽤 성과도 있어서 탑의 금당과 탑지의 배치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알아냈다. 다만 그 주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청암리 사지의 유구 배치도. |
8각 평면 다층 목탑을 중심으로 세 금당이 둘러싼 1탑 3금당식 가람배치였다. 정릉사와 유사한 전형적인 고구려 사찰의 가람형식이다.
가람배치의 개념도. 정릉사와 기타 고구려 사찰 그리고 일본 최초의 사찰인 아스카데라와도 구조가 유사하다. |
중앙에 있는 다각 다층 목탑의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으나 그 기단[2]의 넓이 등으로 미루어 봐서는 높이 80~90m대였을 가능성이 있다. 탑지의 모양은 8각형으로, 한 변의 길이가 10.2~10.4m, 폭은 24.7m이다. 이는 황룡사 9층목탑과 맞먹는 상당히 큰 크기이다.
탑의 초석은 8면 중 동서남북 4면은 5칸이고, 그 사이 나머지 4면은 4칸이다. 기단 밖으로는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흐르도록 냇돌(川石)을 깔은 수구(水溝)가 있다. 수구의 폭은 0.7m. 탑의 동서남북 네 방향에는 냇돌을 계속 깔아서 보도(步道)를 만들었다. 보도의 폭은 약 2m 정도이다. 탑의 계단 자리는 남면과 서면에서 발견되었다.
금당지는 탑의 북쪽에 자리하며, 탑의 북쪽 기단과 금당 기단의 남쪽 면 사이는 14.65m 정도 떨어져 있다. 금당지는 정면 32.1m, 측면 18.8m로 꽤 큰 규모의 기단이며, 역시 냇돌을 깔았다. 탑의 동쪽과 서쪽에도 금당지로 보이는 건물의 기단 흔적이 있다. 동쪽 금당지의 기단 정면은 24.48m, 측면 13.33m로 역시 큰 규모다.
4. 복원도
청암리 사지는 지금까지 총 3차례 복원되었다. 그중 첫번째는 북한에서 미니어처로 제작한 모형이고, 두번째는 김정은이 평양민속공원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한 실물 모형, 세번째는 국립부여박물관의 삼국문화교류 특별전에 전시된 디지털복원이다.북한에서 제작한 청암리사지 목탑의 미니어처 모형
평양민속공원에 건설된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청암리사지 목탑
파일:trich_chungamri03.jpg
국립부여박물관 특별전에서 전시한 청암리사지의 디지털복원도[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