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10px" | <tablebordercolor=#000> |
동명성왕 관련 문서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000000,#2d2f34><colcolor=#fbe673,#f9d537> 생애 및 활동 | <colbgcolor=#fff,#1f2023> 생애 | |
관련 문서 | 동명왕릉 · 숭령전 | ||
매체 | 대중매체 |
{{{#!wiki style="color:black,white; 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tablebgcolor=#FFF,#1f2023><colbgcolor=#777777,#555555> 평양시 | 평양성 ( 대동문 / 보통문 / 연광정 / 전금문) · 숭령전 |
고구려 고분군 ( 호남리 사신총) · 광법사 · 안학궁 · 대성산성 · 청암리 사지 & 청암리 토성 | ||
고구려 고분군 ( 동명왕릉 / 진파리 고분군) · 정릉사 | ||
법운암 | ||
룡화사 · 평양성 ( 부벽루 / 을밀대 / 최승대 / 칠성문 / 현무문) | ||
단군릉 | ||
개성시 | 개성역사유적지구 ( 개성 성균관 / 개성 남대문 & 개성성 / 숭양서원 / 선죽교 / 만월대 / 현릉 / 현정릉) · 해선리 고려왕릉 · 관음사 · 영통사 · 흥국사 · 목청전 | |
남포시 | 고구려 고분군 ( 강서삼묘 ( 강서대묘) / 덕흥리 벽화분 / 룡강대총 / 수산리 벽화분 / 쌍영총 / 약수리 벽화분) | |
강원도 | 보덕암 · 총석정 · 표훈사 · 신계사 · 장안사 · 유점사 · 석왕사 · 정양사 · 고성행궁 | |
자강도 | 인풍루 · 보현사 · 상원암 | |
평안남도 | 강선루 · 고구려 고분군 ( 덕화리 고분군) · 백상루 · 법흥사 | |
평안북도 | 약산동대 · 영변행궁 · 통군정 · 귀주성 · 의주 남문 | |
함경남도 | 함흥본궁 · 황초령비 · 마운령비 · 귀주사 · 함흥읍성 | |
함경북도 | 개심사 · 북관대첩비 | |
황해남도 | 고구려 고분군 ( 안악 1호분 / 안악 2호분 / 안악 3호분) · 패엽사 | |
황해북도 | 성불사 | |
공통 | 천리장성 | |
}}}}}}}}} |
[clearfix]
1. 개요
崇靈殿전 왕조의 시조들을 제사하기 위한 조선의 팔전 중 하나. 북한 평양시에 있는, 단군과 동명성왕을 합쳐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단군과 동명왕을 같이 모시다 보니 단군사라고도 불리고 동명왕사라고도 불렸다.
현재 북한에서의 행정구역은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이며, 북한 국보문화유물 제6호다.
2. 역사
고려 숙종 7년 10월, 기자의 사당을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고 충숙왕 12년(1325년)에 '기자사(箕子祠)'를 세웠다. 조선 태종 대에 기자전 혹 기자사당[1]을 다시 지어 기자를 남향하고 단군을 서향해 같이 모셨다.세종실록 7년(1425년) 9월 25일자 기사에 실린 사온서주부(司醞署注簿) 정척(鄭陟)의 상소문에 따르면 그동안 단군은 기자 사당에 곁가지로 대충 배향되어 있는 처지였다. 기자의 신위가 높은 자리인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있고 단군의 신위가 낮은 자리인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도록 모셔져 있었다. 또 기자에는 제전(祭田)[2]이 있어 한 달에 두 번씩[3] 제사를 드린 반면, 단군은 그런 것도 없어서 한 해에 두 번씩[4] 제사를 드리고 있다며 단군을 모시는 사당을 따로 만들도록 건의했다.
이에 세종 11년(1429년)에 기자 사당 남쪽에 정전(正殿)과 동, 서 행랑(行廊)을 지어 사당을 따로 세웠다.[5] 또 사당에 단군뿐 아니라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을 합사했다.[6] 고려시대에 동명성왕은 중화현 용산의 동명왕묘[7]와 평양 인리방의 동명성제사[8] 두 곳에서 제사지냈다. 이중 인리방의 동명성제사가 없어지고 단군과 합사된 것이다.
세조 2년(1456년)에 기자, 단군과 동명성왕의 사당을 수리하고, 4년 뒤에 본인이 몸소 평안도를 순행하면서 친히 이 곳에서 제사를 거행했다.[9] 이때 조선시조 단군지위(朝鮮始祖 檀君之位), 고구려시조 동명왕지위(高句麗始祖 東明王之位)라고 위판을 다시 만들었다.
임진왜란 이후 소실됐지만 광해군 9년(1617년)에 재건했다.
숙종은 직접 제사를 지낸 후 단군묘시(檀君廟詩)를 지어 바쳤다.
영조 원년(1724년)에 숭령전으로 승격됐다.
순조 4년(1804년)에 평양부에 불이 나서 숭인전과 함께 불탄 적 있다. 순조 25년(1825년)에는 그 해가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세운 해라고 해서 그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승지를 보내서 숭령전에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10]
1868년 고종은 경복궁이 중건되자 "금년은 단군께서 나라를 세우신 무진년이라 하늘의 뜻이다"라며 제사를 지내고 이후 해마다 축문을 올렸다.
3. 기타
- 숭령전의 제사 등급은 중사(中祀) 급으로 매해 봄과 가을마다 제사지냈다.
-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특히 국가적 차원에서 단군을 민족 전체의 시조신으로 봉안했기에 숭령전에 모신 단군과 동명성왕 중 단군이 더 높은 위치에 있었다.[11]
- 원래 단군은 황해도 신천군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모셔져 있었다. 그러다 조선 태종 대에 평양으로 옮겨진 것이다. 단종 즉위년(1452년)에 경창부윤 이선제가 올린 상소에서는 "지금 황해도에 창궐하는 있는 역병은 삼성사에 멀쩡하게 잘 모셔져 있던 단군의 신령을 함부로 평양으로 옮겨가 버렸기 때문이다."라는 당시 황해도 아전 및 주민들의 발언이 소개되고 있다. 이선제도 '단군이 평양에 있다가 구월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된 지가 오래 전의 일인데 이제 와서 평양으로 옮겨갈 필요가 있겠느냐'며 삼성사를 복구하자고 주장했다.[12]
- 현재는 정전과 외삼문이 남아있다. 정전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동쪽에 동명성왕, 서쪽에 단군 위판을 안치했다. 특이점은 사당 건물은 보통 정면으로 보이는 칸수를 홀수로 짓는데 숭령전의 경우는 짝수로 지었다는 것.[13]
[1]
광해군 때 숭인전(崇仁殿)으로 승격됐다. 북한에서 국보문화유물 제5호다.
[2]
제사 비용 마련을 위해 지급된 토지.
[3]
매달 초하루와 보름.
[4]
매년 봄 초와 가을 초.
[5]
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조 기록.
[6]
동쪽에 동명성왕을, 서쪽에 단군의 신위를 두고 둘 다 남향했다.
[7]
원래부터 화반석으로 만든 능묘가 있었고, 1891년(고종 27년)에
동명왕릉으로 승격되며 개축되었다. 이때 동명왕릉비도 같이 세워졌다 한다. 이 직후인 1892년(고종 28년), 고종의 명으로 왕릉의 개축을 감독한 사학자 김재소(金在韶)는 삼국사기와 고씨가승(高氏家乘), 산론유서(山論遺書)를 참조하여 동명사제(東明事題)라는 책을 지었는데, 고씨가승에 따르면 동명성왕의 45대손이라는 고려시대의 연주(延州)군수 고기(高基)가 1049년(문종 3년), 궤짝에 삼국사(이 삼국사가 흔히 알려진 구삼국사와 같은 책인지는 불명이다)와 고씨가승을 넣고 12주갑(周甲) 후에 이 책을 다시 볼 날이 올 것이라면서 후손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그만큼의 시간이 지난 1825년, 고기의 후손인 고명강(高明疆)이 궤짝을 열어 책을 꺼내보았고, 다시 67년 후에 김재소가 그 책을 보게 된 것이라 한다. 고씨가승은 고기가 단독 저술자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적어도 편찬에 관했다고 전해지고, 풍수설과 관련된 저술인 산론유서 또한 고기가 직접 지었거나 편찬에 관여했다고 추정된다. 또한 동명사제의 저술에 관여한 사람들이 더 있는데, 한치유(韓致愈)가 교정하고 홍재조(洪在朝)가 편증(編證)하였으며, 서문은 민병석(閔丙奭), 발문은 황립(黃岦)이 지었다. 서문을 쓴 민병석은 당시 평안도관찰사로서 동명왕릉비의 비문을 짓기도 했고, 동명왕기적비(紀績碑)를 지은 이기홍(李基鴻)과 함께 동명왕릉의 개축을 주도했던 인물들 중 하나였다.
[8]
고려시대의
신사(무교)다.
[9]
세조는 유독 고구려사에 관심이 많은 왕이었는데, 결여된 정통성에 대한 컴플렉스로 부국강병을 추구했던 걸로 추정된다.
[10]
그런데 순조 25년은 간지로 을유년이고 동명성왕의 즉위는 갑신년이라 1년 차이가 난다.
[11]
단순히 시대상으로도 단군이 훨씬 빠르기도 하지만, 이전부터 한국에서는
해모수와 단군이 동일신격으로 여겨지게 되면서 동명성왕 또한 단군-해모수의 아들(후예)로 여겨지게 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단군보다 상위에 있을 건덕지가 없어지게 되었다.
[12]
출처: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 6월 28일 기사.
[13]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 북한의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