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10:19:13

즐라트코 차이코브스키

즐라트코 차이코브스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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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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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의 前 축구 선수
파일:Zlatko Čajkovski.jpg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즐라트코 차이코브스키
Zlatko Čajkovski
출생 1923년 11월 24일
유고슬라비아 왕국 자그레브
사망 1998년 7월 27일 (향년 74세)
독일 뮌헨
국적
[[크로아티아|]][[틀:국기|]][[틀:국기|]] |
[[독일|]][[틀:국기|]][[틀:국기|]]
포지션 풀백
신체조건 164cm | 66kg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선수 HAŠK (1939~1945)
FK 파르티잔 (1945~1955)
1. FC 쾰른 (1955~1958)
하포엘 하이파 FC (1958~1960)
감독 하포엘 하이파 FC (1959~1960)
세케르 힐랄 (1960)
1. FC 쾰른 (1961~1963)
FC 바이에른 뮌헨 (1963~1968)
하노버 96 (1968~1969)
키커스 오펜바흐 (1970)
GNK 디나모 자그레브 (1970~1971)
1. FC 뉘른베르크 (1971~1973)
1. FC 쾰른 (1973~1975)
키커스 오펜바흐 (1976)
AEK 아테네 FC (1977~1978)
FC 취리히 (1978~1980)
FC 그렌첸 (1980)
그라츠 AK (1981)
AEK 아테네 FC (1982~1983)
아폴론 칼라마리아스 FC (1983~1984)
국가대표 2경기 0골 ( 크로아티아 / 1942~1943)
49경기 4골 ( 유고슬라비아 / 1946~1955)
가족관계 동생 젤코 차이코브스키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2.3. 감독2.4.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사생활5. 여담6. 수상
6.1. 선수
6.1.1. 클럽6.1.2. 국가대표
6.2. 감독
6.2.1.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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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고슬라비아(現 크로아티아)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1]

2.1. 어린 시절

차이코브스키는 두살 어린 동생 젤코와 함께 자랐고 1930년부터 학교를 다니면서 축구를 접했다. 차이코브스키가 11살 되던 해에 그의 가족들은 막시미르 지방으로 이사갔는데 그곳엔 HAŠK의 본거지가 있었고 1937년에 학교를 마친 차이코브스키는 HAŠK 유소년팀에서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이때의 차이코브스키는 축구 훈련을 하면서 가죽 상회에서 견습생 생활을 했고 곧 두각을 보였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차이코브스키는 1939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HAŠK의 성인팀에 데뷔했다. 그리고 1940년 견습생 생활을 마친 차이코브스키는 축구에 전념하게 되었지만 당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라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그는 1942년에는 크로아티아 대표팀 자격으로 독일과 친선 경기를 가졌는데 이 시합에서 만난 프리츠 발터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1945년, HAŠK가 해체되면서 차이코브스키는 젤코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젤코는 자그레브에 남아 GNK 디나모 자그레브의 선수가 되었지만 즐라트코는 베오그라드로 건너가 FK 파르티잔의 선수가 된 것이다. 차이코브스키는 1947년 파르티잔의 더블 주역중 한 명이었고 1955년까지 파르티잔에서 뛰었다.

1955년에 해외 진출의 자격을 얻은 차이코브스키는 1. FC 쾰른으로 이적했고 이곳에서 3시즌을 보냈다. 1958년, 차이코브스키는 하포엘 하이파 FC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보냈다.

2.2.2. 국가대표

차이코브스키는 1946년,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서 첫 선을 보였고 젤코와 함께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다. 유고슬라비아는 결승에서 그레 트리오를 앞세운 스웨덴에 패해 준우승을 거뒀다.

차이코브스키는 1950년 월드컵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3경기에 모두 출전했고 마지막 경기엔 주장 완장도 달았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는 마지막 경기에서 브라질에 0:2로 패해 결선 리그 진출이 좌절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1952년 올림픽에서도 결승전까지 갔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다. 그 상대는 매직 마자르였고 유고슬라비아는 헝가리에 0:2로 패해 다시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1954년 월드컵에서 유고슬라비아는 8강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는 블라디미르 베아라의 부상과 제프 헤어베어거의 선수비 후역습 전술에 말리면서 0:2로 패했다.

2.3. 감독

2.3.1. 하포엘 하이파 FC, 1. FC 쾰른

차이코브스키는 1959년부터 하포엘 하이파 FC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긴 감독 경력의 첫 발을 내디뎠다.

차이코브스키는 1961년에 1. FC 쾰른의 감독으로 부임했는데 당시 쾰른은 한스 셰퍼, 카를하인츠 슈넬링어 등 스타 플레이어들이 있던 강팀이었다. 차이코브스키는 1962년, 레기오날리가 우승 후 독일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쾰른을 역사상 최초의 독일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다음 해에도 차이코브스키는 독일 축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의 결과를 냈고 당연히 쾰른은 그와 재계약을 시도했다. 그러나 차이코브스키는 쾰른과함께 페예노르트 로테르담과도 협상을 하고 있어서 쾰른과의 협상이 순조롭지 않았다. 결국 쾰른은 차이코브스키 대신 SV 베르더 브레멘의 감독 게오르크 크뇌플레와 계약을 했고 차이코브스키의 쾰른 1기는 마무리되었다.

2.3.2. FC 바이에른 뮌헨

1963년, 서독 축구계에는 큰 변혁이 있었는데 바로 분데스리가의 창설이었고 이는 서독 전체를 아우르는 리그의 탄생을 의미했다. 이 시기에 1. FC 쾰른은 차이코브스키 대신 크뇌플레를 감독자리에 앉혔고 페예노르트 로테르담과 차이코브스키의 협상도 결렬되었다. 이때 헝가리 출신의 스위스 변호사 게오르크오토 라츠(Georg-Otto Ratz)가 차이코브스키에게 접근했다. 그는 뮌헨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고 차이코브스키를 설득해 뮌헨을 연고로 하는 2부 리그 팀의 감독으로 만들었다. 이 팀이 바로 FC 바이에른 뮌헨이었다.

당시 바이에른 뮌헨은 1931-32 시즌의 독일 축구 선수권 대회, 1956-57 시즌 DFB-포칼에서 1회씩 우승한 것을 빼면 내세울 게 없던 클럽이었다. 1945년에서 1963년까지의 오버리가 쉬드에서 바이에른이 거둔 통산 성적은 12개 팀 중 6위였고 18년간 준우승 기록조차 없었다. 이런 당시의 바이에른이 분데스리가에서 시작하는 것은 언감생심이었고 차이코브스키는 바이에른에 오기 직전에 독일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과 준우승 경험까지 있는 감독이었다. 게다가 이 당시 바이에른의 1군 스쿼드에 이름이 좀 알려진 선수라고 해봐야 1962년 월드컵에 출전했던 빌리 기제만 정도였고 그나마 기제만도 차이코브스키가 부임할 때 함부르크 SV로 떠났다. 냉정하게 판단하면 차이코브스키는 바이에른의 규모에 맞지 않는 감독이었다.

바이에른은 차이코브스키를 영입하기 위해 급여도 많이 투자했고 빌헬름 노이데커 회장은 그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여기에 차이코브스키가 바이에른에 올 결심을 한 것은 바로 젊은 선수들이었다. 그들의 명단은 실로 대단했는데 일단 19살짜리 골키퍼가 1군 주전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유스팀 수비수들로는 역대 최고의 수비수가 될 재목 황제의 파트너가 있었다. 여기에 공격수로는 폭격기도 이륙 준비중이었다.

차이코브스키는 부임 첫 시즌에 바이에른의 기대를 절반만 충족시켰다. 레기오날리가 우승에는 성공했지만 플레이오프에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이다. 1964년, 차이코브스키는 유스팀에서 베켄바워와 뮐러를 콜업했고 결국 그 시즌에 승격에 성공했다. 차이코브스키는 바이에른에서 1968년까지 머물렀고 DFB-포칼 2연속 우승의 성과를 냈지만 아쉽게도 분데스리가 챔피언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2.3.3. 저니맨 감독

차이코브스키는 1968년, FC 바이에른 뮌헨을 나와 하노버 96의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여기에는 월급 2만 마르크의 계약이 결정적이었다. 하노버에도 유프 하인케스가 있었고 차이코브스키의 부임 첫 시즌은 11위로 마쳤다. 하노버에서의 두 번째 시즌에 시작은 좋았지만 8경기에서 7패를 당하자 차이코브스키는 해고당했다. 차이코브스키는 당시의 경험을 개구리에 말굽을 붙이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는 해고의 위약금으로 10만마르크를 받았다.

1970년에 차이코브스키는 키커스 오펜바흐의 감독이 되었다. 1970-71 시즌에 다른 감독이 취임할 것이 약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차이코브스키는 6개월짜리 임시 감독이었고 그럼에도 키커스 오펜바흐의 분데스리가 승격으로 능력을 보였다. 원래의 일정이라면 차이코브스키가 DFB-포칼 결승전도 지휘했어야 했지만 1970년 월드컵으로 인해 결승전 개최가 늦어져서 차이코브스키는 결승전까지만 팀을 올려놓았다.

1970년에 차이코브스키는 동생의 친정팀인 GNK 디나모 자그레브에 부임했고 선수들이 구단에서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있도록 만들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지난 시즌 6위였던 디나모 자그레브를 3위에 올려놓고 그 다음 시즌도 지휘했지만 상황이 나빠져 짐을 싸야 했다.

1971년 12월, 차이코브스키는 레기오에서 강등의 위기에 직면한 1. FC 뉘른베르크에 가서 강등을 막아냈다. 그는 뉘른베르크의 1972-73 시즌을 5위로 마무리했고 한스 틸코브스키에 자리를 물려줬다.

1973년, 차이코브스키는 10여년전 자신이 맡았던 1. FC 쾰른의 감독으로 재선임되었다. 당시 쾰른은 리그에서 부진했고 차이코브스키는 팀을 수습해서 5위에 올려놔 UEFA컵 진출을 이끌었다. 다음 시즌에 차이코브스키는 디터 뮐러를 영입해서 쾰른을 리그 4위, UEFA컵 8강의 성과를 냈지만 1974-75 시즌에 UEFA컵에서 조기 탈락하자 해임당했다. 그러나 이 당시 차이코브스키와 쾰른 선수들은 다소 갈등이 있었다. 선수들은 그를 구시대적이고 유아적인 감독이라 여겼으며 쾰른의 스타 플레이어이자 1974년 월드컵에서 서독의 중심 선수 중 한 명이었던 볼프강 오베라트는 차이코브스키를 현대 축구를 전혀 모르는 감독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1976년 1월에 차이코브스키는 오토 레하겔의 뒤를 이어 키커스 오펜바흐 감독 2기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키커스 오펜바흐의 2. 분데스리가 강등을 막지 못했고 2. 분데스리가에서 맞는 첫 시즌의 스타트는 좋았다. 그러나 2경기에서 연패를 당했다는 이유로 당시 2위였음에도 차이코브스키는 경질되었다.

2.3.4. 말년

차이코브스키는 1977년, AEK 아테네 FC의 감독을 맡아 더블을 달성했다. 그러나 1978년에 FC 취리히 감독 취임이 내정되어 있던 차이코브스키는 무거운 마음으로 팀을 떠나야 했다.

1978년, 취리히의 감독이 된 차이코브스키는 전년도 리그 5위였던 팀을 나티오날리가 A 2위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1980년 3월에 차이코브스키는 FC 장크트갈렌에 0:3으로 패한 후 선수들과의 갈등과 저널리즘 위반등을 이유로 들며 취리히와 더 이상 계약 연장을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그는 20년 넘게 성공적으로 감독 생활을 해온 위신을 유지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취리히는 인터뷰 이후 바로 그를 해고했다.

차이코브스키는 1980년 11월에 나티오날리가 B 소속인 FC 그렌첸의 감독이 되었지만 여기서도 오래 가지 못했고 오스트리아의 그라츠 AK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이곳에서 차이코브스키는 4승 3무 7패로 부진해서 시즌 중도에 해임되었다.

차이코브스키는 1981년 한스 틸코브스키의 뒤를 이어 AEK 아테네 FC에 재부임했고 4위의 성적을 냈다. 다음 시즌에 아테네는 알파 테스니키 10라운드까지 1위를 질주했지만 그 다음 경기들에서 부진해 2위로 내려가자 차이코브스키는 해고당했다.

차이코브스키의 감독 생활 마지막 팀은 아폴론 칼라마리아스 FC였다. 차이코브스키의 임기중에 칼라마리아스는 9경기 1승 3무에 그치자 그를 해고했다.

2.4. 이후

차이코브스키는 독일에 거주하며 자신이 성공의 토대를 닦았던 FC 바이에른 뮌헨의 경기를 자주 보러 갔다.

그러나 차이코브스키는 당뇨병을 앓았고 그로 인해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차이코브스키는 164cm의 키작은 수비수였지만 헤딩에 능했고 체력과 끈기로 필드 전체를 커버할 수 있었다. 그는 공격에도 자주 가담해서 득점을 올렸고 패스와 드리블 기술도 뛰어나 상대 수비수들의 예측을 어렵게 만들었다.

4. 사생활

차이코브스키의 1954년생 아들 즐라탄도 독일에서 축구 선수로 활약했다.

5. 여담

  • 차이코브스키는 1. FC 쾰른 선수 시절에 감독 헤네스 바이스바일러에게 욕을 좀 먹었다. 바이스바일러는 차이코브스키에게 "멍청아, 마크하라고!"라는 말을 거의 경기때마다 했다. 차이코브스키는 바이스바일러에게 여러 감정이 교차했는지 나중에 자신이 감독이 되어 바이스바일러가 감독하는 팀을 이기면 기분이 더 좋았다고 한다.
  • 차이코브스키는 활발한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독일어를 더 잘하는 비결에 대해 질문을 받자 나는 독일어 교사가 아니라 축구 감독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그리고 1962-63 유러피언컵에서 1. FC 쾰른 던디 유나이티드 FC에 1:8로 대패해 조기 탈락하게 되자 남긴 코멘트가 인상적이다.
가장 좋은 점은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것입니다.
  • 차이코브스키는 FC 바이에른 뮌헨 감독 시절에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제프 마이어 등 엄청난 레전드들을 키워낸 감독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베켄바워를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조금 더 지켜보고 나서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 그가 있으면 바이에른이 유럽을 넘어 세계 최고의 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고 한다. 베켄바워를 가리켜 자신 이후 세계 최고의 수비수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역대 최고의 수비수가 되었고 바이에른도 유럽을 대표하는 메가 클럽 중 하나가 되었으니 차이코브스키의 안목이 나름 정확했던 셈이다.
는 콩나무인데 바닥에도, 중간에도, 꼭대기에도 아무것도 없다. 너는 더 많이 먹어야 한다. 여자도 안 되고, 담배, 술도 안 된다. 그는 휘핑 크림으로 만들어졌고 전사가 아니다. 그는 밀짚을 좋아한다. 축구를 하는 것보다 신발을 닦는 것을 더 좋아하더라.
차이코브스키. 데뷔 초기의 베켄바워를 회상하며.

6. 수상

6.1. 선수

6.1.1. 클럽

6.1.2. 국가대표

6.2. 감독

6.2.1. 클럽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