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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체임벌린


<colbgcolor=#000000><colcolor=#efd88f> 조지프 체임벌린
Joseph Chamberlain
파일:조지프 체임벌린.png
출생 1836년 7월 8일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런던 캠버웰
사망 1914년 7월 2일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런던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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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영국 자유당 -> 영국 보수당
직업 정치인, 기업가
자녀 오스틴 체임벌린, 네빌 체임벌린, 그외 아들 한명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정치 입문2.3. 식민지부 장관과 관세 개혁 시도
3. 정책과 사상4. 평가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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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정치가이자 사회개혁가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영국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국주의 관세 개혁, 그리고 버밍엄의 현대화에 크게 기여했다.

2. 생애

2.1. 초기

1836년 7월 8일 조지프 체임벌린은 신발 제조업자의 아들로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났다. 체임벌린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16세에 학업을 마치고 가족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1854년에 버밍엄으로 이주하여 나사를 제조하는 기업에 합류하여 1874년까지 막대한 돈을 벌고는 은퇴했다.

1873년 버밍엄의 시장으로 당선된 그는 1876년까지 재직하며 도시 재개발 정책을 추진했는데 가스 및 수도 시설의 시정화, 슬럼 제거 및 주택 개선, 도로나 공원 및 공공건물의 현대화로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체임벌린의 시장직은 "버밍엄 모델"로 불릴 정도로 영국 전역에서 주목받았다.

2.2. 정치 입문

1876년부터 정치에 입문한 그는 영국 자유당 소속의 하원의원이 되어 자유당 내의 좌파인사로 활동했다. 자유주의를 주장하면서도 개인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국가가 사회문제에 대해 적극 개입해야 하며 교육, 주택, 노동, 토지 문제등을 국가가 나서서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가 주장한 정책은 “비인가 계획(unauthorized programme)”에 따른 것이었는데 누진소득세, 무상교육, 빈곤층의 위한 주택 개선, 농업인들을 위한 정책을 폈다. 이는 그가 1880년대에 공산주의자라며 욕을 들어먹는 이유가 된다.[1] 물론 당연히 체임벌린이 공산주의자는 아니었고 그 스스로도 부인했다.[2]

그러나 1886년 아일랜드 자치 문제를 둘러싸고 자유당과 결별하게 되는데 당시 아일랜드는 홈 룰이라는 토지개혁과 자치를 요구했고 당시 총리였던 글래드스턴은 아일랜드의 요구를 자유주의 정책으로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광적인 제국주의자 조지프 체임벌린은 글레드스턴이 아일랜드 내에 펼치는 자유주의적 개혁을 도저히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고, 홈 룰 문제가 하원에서 투표에 부쳐졌을 때, 체임벌린은 다른 반체제 자유당원(자유 연합주의자)과 연합하여 글래드스턴 정부를 무너뜨렸다. 이후 영국 보수당 로버트 개스코인세실 1기 내각이 들어선다.

홈 룰 문제로 분열된 자유당은, 보수당이 1886년부터 1906년까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영국 정치를 지배하도록 만들었다. 체임벌린은 자유연합주의자들에 대한 통제력을 이용해 보수당에 압력을 가해 자신의 입맛에 맞는 더욱 진보적인 사회 정책을 채택하도록 했다.

2.3. 식민지부 장관과 관세 개혁 시도

1895년 그는 보수당 내각에 합류한 그는 로버트 세실 내각에 식민지부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the Colonies) 직책을 요청했다. 체임벌린은 식민지부 장관 재직 중 남아프리카 문제에 빠르게 관여하게 되었으며, 이웃한 케이프 식민지에서 영국 정착민들이 보어 공화국 트란스발을 침공하려 했던 실패한 시도인 제임슨 습격(Jameson Raid, 1895년 12월)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후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그는 명백한 반보어주의자였고 체임벌린은 제2차 보어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영국 제국의 통합과 확장을 도모했다.

보어전쟁으로 인해 영국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특히 친선을 원했던 독일과의 관계도 잘 풀리지 않자 그는 믿을 수 있는 자치 식민지들에 주목했다. 1902년 남아프리카 평화 협정을 협상하고 돌아온 체임벌린은 영국과 그 종속국들을 일종의 공동 시장으로 묶는 새로운 관세 계획을 발표했다. 체임벌린은 자신의 당을 새로운 계획에 동조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보수당 지도자인 아서 밸푸어가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자. 체임벌린은 내각직을 사임하고 1903년부터 1906년까지 강력한 개인 캠페인을 벌이며 청중들에게 "제국적으로 사고하라"는 주장을 설파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 사람들에게 보호무역이라는 시대를 앞서나간 정책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고 자유당과 자유무역 지지자들은 관세 개혁이 식량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이를 비판했다. "저렴한 빵(Cheap Bread)"을 외치며 대중의 지지를 얻은 자유당은 이를 주요 정치적 무기로 삼았고, 결국 1903년, 관세문제를 둘러싸고 보수당 내부에 찬반 논란을 일으켰다.

1906년, 총선에서 보수당과 자유연합당은 체임벌린의 자유무역 포기가 주된 이유가 되어 참패를 당했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자신의 고향 버밍엄에서 놀라운 과반수로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06년 7월, 그는 마비성 뇌졸중을 겪어 이후 평생 동안 불구 상태로 지내게 되었고 1914년 7월 2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정책과 사상

조지프 체임벌린은 집단주의적 자유주의를 주장했다. 이는 동시대의 허버트 스펜서가 주장한 자유주의와는 또 다른 것인데 스펜서는 개인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거부하였으며 각자의 삶에 대해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문제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빈곤과 질병과 같은 현상들은 설사 그것이 만연해 있다 하더라도 개인들이 각자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스펜서의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와 연결되는 특성이 강했다.[3]

반면, 조지프 체임벌린은 개인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교육, 주택, 노동, 토지 문제등을 국가가 나서서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스펜서의 주장과는 달리 체임벌린의 주장은 집단주의로 귀결되었다.[4] 그가 자유당과 결별한 이유도 정치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지 그가 자유주의를 버렸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다. 체임벌린은 자신을 자유주의자로 간주했다.[5]

또한 특권을 반대하고 기본권을 인정하는 공화주의적 발언도 자주 했다. 체임벌린은 인간의 자연권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영국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특권의 폐지를 주장했다. 그는 사람들은 자연권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은 존재할 권리 삶을 즐길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점을 지적해 자연권의 내용을 설명했다.[6] 그가 공격한 주 대상은 바로 교회와 귀족이었고 항상 특권층을 비호하는 영국 국교회라는 제도를 비판했고, 귀족의 신성한 권리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말도 안되는 허구라고 공박했다.[7] 하지만 체임벌린은 국왕 폐지론을 주장한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화주의자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영국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특성을 생각해보면 그는 오히려 왕당파에 가깝다고 해석되고 이는 그의 대외정책에서 발현된다.

체임벌린은 제국주의자이다.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중 하나는 애국심이다. 달리 말하면 국가를 단위로 하는 “우리” 의식이다. 체임벌린은 우리를 분열시키는 어떤 요소도 용납하려 하지 않았으며 우리는 더욱 강해져야 했고 확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를 야만과 미신의 지역으로 간주하며 영국인은 아프리카를 제국에 편입하여 문명적 지역으로 바꾸는것이 영국인의 의무라고 주장했다.[8]

이러한 그의 대외정책은 파시즘적 성향도 보인다. 물론 체임벌린이 파시즘 운동을 한 것은 아니기에 파시스트로 규정하기는 힘들다.[9] 제국주의와 파시즘이 동의어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속에서 몇가지의 파시즘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첫째는 인종주의로 백인과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다. 백인끼리 딱히 차별하지는 않았지만 흑인과 백인간의 인종적 우열이 존재한다 주장했으며 그에게는 흑인은 기질적으로 야만적이며 교화되어야 하고 순화되어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두번째는 힘의 논리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의 수중으로 떨어지는건 당연한 것이라는 주장이다.[10] 세번째는 그가 소국은 진보적이지 못하다며 힘과 진보의 개념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11] 네번째는 국가적인 단결과 중앙집권화를 추구한다는 것이고 다섯번째는 제국을 성립시키는 새로운 정신을 지적하며 인간의 개인의 사익추구를 벗어나 전체의 공통된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12] 자유주의자 맞냐

체임벌린이 제국주의를 옹호하면서 제시한 논리들은 그가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으며, 영국 민족에 대해 배타적인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13]

4. 평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쪽에서는 시장으로써 버밍엄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시대를 앞서간 개혁과 정책으로 호평한다. 1902년의 교육법은 지방 교육 당국을 설립하여 초등 및 중등 교육을 통합하고, 교회와 비(非)교회 학교 모두에 공적 자금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러한 법안은 영국 사회의 교육 역량을 향상시켰다.[14] 빈민가를 철거하고 깨끗한 공공주택을 지어 도시의 현대화에 기여했으며 상하수도 시설을 확충하여 시민의 건강을 개선시켰다.[15] 당시 쇠퇴하는 영국의 제조업을 경계하여 펼치려 한 체임벌린의 관세 개혁은 외교적으로 고립된 영국에서 보호무역과 제국 통합을 목표로 한 주요 정책이었다.[16] 체임벌린은 관세를 통해 추가적인 세수를 확보하고, 이를 교육법, 노령연금법, 노동계층, 농업노동자 등 사회 개혁에 투자하려 했다.[17]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쪽에서는 그의 외교정책과 당내 분열을 초래한 면을 비판하는데 정복 전쟁을 미화하고, 영국 민족의 이익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18] 그의 정책은 당내 갈등을 심화시키고, 정치적 통합을 저해한 측면이 있다.[19]

5. 참고문헌

  • 김명환. (2013). 조지프 체임벌린의 후기 사상―집단주의적 자유주의에서 파시즘적 대안으로―. 영국연구, 30, 203-236.
  • 김명환. (2012). 조지프 체임벌린의 집단주의적 자유주의. 영국연구, 28, 166-197.
  • Joseph Chamberlain

[1] Joseph Chamberlain, "Rich and Poor, Glasgow, Sep. 15, 1885," in Mr. Chamberlain’s Speeches, ed. Charles W. Boyd, vol. 1 (London, 1914): 200, 205. [2] Hill, Joseph Chamberlain 1836-1914, 19 [3] 김명환. (2012). 조지프 체임벌린의 집단주의적 자유주의. 영국연구, 28, 166-197. [4] 김명환. (2012). 조지프 체임벌린의 집단주의적 자유주의. 영국연구, 28, 166-197. [5] Chamberlain, "On Political Humanity, Bradford, Oct. 1, 1885," in Mr. Chamberlain’s Speeches, vol. 1: 216. [6] Chamberlain, "Rich and Poor," 198. [7] Hill, Joseph Chamberlain 1836-1914, 16. [8] 김명환. (2013). 조지프 체임벌린의 후기 사상―집단주의적 자유주의에서 파시즘적 대안으로―. 영국연구, 30, 203-236. [9] 김명환. (2014). 체임벌린의 후기 사상과 모슬리 파시즘의 비교. 역사와경계, 92, 325-368. [10] Chamberlain, “‘As One Great Nation’,” 108. [11] Chamberlain, “The True Conception of Empire,” 5. [12] 김명환. (2013). 조지프 체임벌린의 후기 사상―집단주의적 자유주의에서 파시즘적 대안으로―. 영국연구, 30, 203-236. [13] 김명환. (2013). 조지프 체임벌린의 후기 사상―집단주의적 자유주의에서 파시즘적 대안으로―. 영국연구, 30, 203-236. [14] The Quest for National Efficiency: a Study in British Politics and Political Thought, 1899-1914 [15] Charles Loch Mowat, Urban Britain: 1900–1960. [16] 유지은. (2018). 레오폴드 애머리(LeopoldAmery)가 본 영 제국의 미래 - 군사적 통합을 중심으로 (1890-1929) - [17] 김명환. (2013). 조지프 체임벌린의 후기 사상―집단주의적 자유주의에서 파시즘적 대안으로―. 영국연구, 30, 203-236. [18] 김명환. (2013). 조지프 체임벌린의 후기 사상―집단주의적 자유주의에서 파시즘적 대안으로―. 영국연구, 30, 203-236. [19] 유지은. (2018). 레오폴드 애머리(LeopoldAmery)가 본 영 제국의 미래 - 군사적 통합을 중심으로 (1890-1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