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45년 |
경상도
상주목
모서면 갈천리 (現 경상북도 상주시 모서면 석산2리 갈밭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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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95년 6월 17일 (향년 50세) |
안동부
상주군 (現 경상북도 상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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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풍양 조씨[1] |
이명 | 조동호(趙東鎬) |
자 | 국필(國弼) |
호 | 국은(菊隱) |
묘소 | 경상북도 상주시 모서면 석산2리 갈밭마을 |
상훈 |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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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45년 경상도 상주목 모서면 갈천리(現 경상북도 상주시 모서면 석산2리 갈밭마을)에서 아버지 조주하(趙胄夏, 1817. ~ 1877.9.6.)[2]와 어머니 상산 김씨(1818. ~ 1862.1.27.)[3] 사이에서 1남 2녀 중 3대 독자로 태어났다.[4] 부사직공(副司直公) 조승호(趙承瑚, ? ~ ?.9.18.)의 12대 주손(胄孫)이기도 하다. 1874년( 고종 11) 증광(增廣) 생원시에 3등 9위로 입격했다.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시해당하자 국권 피탈의 위기를 느껴 이듬해인 1896년 음력 2월 10일[5] 이기찬(李起燦)· 허위·강무형(姜懋馨) 등과 함께 대구부 김산군(現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산군 군내면 읍내를 점령했다. 그리고 포군(砲軍)을 포함한 수백 명의 군사를 모집해 무장시켰으며, 이기찬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의병대의 군문도총(軍門都摠)에 취임해 의병 활동을 주도했다.[6]
이후 진용을 갖춰 대구부 대구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 계획을 미리 간파한 관군에 의해 성주군에 주둔해 있던 진영이 공격을 받았고, 관군의 대공세가 잇따랐다. 결국 음력 2월 18일[7] 고종의 의병 해산 조령이 내려지자 그해 4월 이기찬은 의병대장직을 사임했다.
이후 의병진을 해산하고 남은 의병들의 무장을 해제해 모두 돌려 보냈으나, 조선군 및 일본 제국 육군에 체포돼 1895년 6월 17일 순국했다.
2002년 8월 15일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