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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균(1913)

파일:조균(1913).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적명 조규운(趙奎篔)
본관 김제 조씨[1]
출생 1913년 9월 16일[2]
전라북도 김제군 읍내면 구산리
(現 전라북도 김제시 옥산동 구산마을 344번지)
사망 1989년 6월 7일 (향년 75세)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599호
상훈 대통령표창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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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2005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조내헌은 6촌 재종조부(再從祖父)이다.[3]

2. 생애

1913년 9월 16일 전라북도 김제군 읍내면 구산리(現 김제시 옥산동 구산마을 344번지)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현정(玄丁) 조영(趙永, 1892. 9. 5. ~ 1950. 8. 15.)[4]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예주(金禮珠, 1890. 7. 26. ~ 1959. 11. 22.)[5] 사이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전주군 전주읍 대화정(現 전주시 완산구 전동) 197번지로 이주했다.

고조부 남우(南愚) 조중민(趙仲民, 1837. 3. 17. ~ 1909. 9. 3.)[6]은 1892년( 고종 29) 4월 10일 당진현감(唐津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증조부 벽농(碧儂) 조방순(趙方淳, 1848[7] ~ 1917. 8. 23)[8]은 1894년(고종 31) 식년 진사시에 3등 935위로 입격했다. 조부 이당(彛堂) 조대헌(趙大憲, 1876. 3. 12 ~ 1938. 5. 16)[9]은 1894년 식년 생원시에 3등 67위로 입격한 뒤 1902년(고종 39) 2월 9일 조경묘(肇慶廟) 참봉 임용되었고, 1902년 9월 10일에는 광제원(廣濟院) 사무위원에 임명되어 활동하는 등 직계 3대가 모두 관직에 진출하거나 과거에 나아갔다.

1928년 전주공립고등보통학교(現 전주고등학교)에 입학했고, 2학년 재학 중이던 1929년 9월 중순에 전주읍 완산정(現 완산구 동서학동·서서학동) 뒷산 기슭에서 같은 학년인 소완영(蘇完永)·정백년(鄭百年) 등과 공산주의를 연구하는 항일학생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하여 사회과학 서적을 윤독하며 연구를 했으나 소완영이 병으로 사망함에 따라 독서회를 해산했다. 1929년 11월에는 전주읍 다가정(現 완산구 다가동2가) 정재향의 집에서 정재향, 정백년과 함께 독서회를 재차 조직했으나 이후 회원이 늘어나자 독서회를 해산했다. 1930년 2월 정재향의 집에서 다시 정재향, 윤기환(尹基煥), 박병기(朴炳琪), 정백년과 함게 독서회를 조직했으나 조직이 발각되어 1930년 4월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30년 6월 사립신흥학교 고등과(現 전주신흥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했고, 1931년 5월 말 김규선(金圭鮮)의 집에서 김규선에게서 신흥학교 3학년생을 대상으로 독서회를 조직할 것을 권유받았다. 이에 6월 초에 전주읍 노송정(現 완산구 노송동) 동쪽 산기슭에서 김갑복, 김인철(金仁喆), 유재근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했으나, 이후 해산했다. 또한 1931년 12월 말에 전주읍 고사정(現 완산구 고사동) 정인성(鄭寅聲)의 집에서 김갑복, 김인철, 유재근, 김영승(金永昇), 조종현(曺鍾鉉), 정인성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했고, 1932년 1월 중순에는 전주읍 화산정(現 완산구 중화산동1가) 예수병원 뒤에서 김영승, 조종현, 김갑복, 윤은익(尹恩益), 강봉준(姜奉俊)과 함께 또 다른 독서회를 조직해 2월 말에는 김인철과 유재근 또한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1932년 2월 27일 전주읍 화산정(現 완산구 중화산동1가) 뒤 화산(華山)[10]에서 김갑복, 김인철, 유재근, 김영승, 조종현, 정인성, 윤은익, 강봉준과 만나 1931년 12월 말과 1932년 1월 중순에 각각 조직한 독서회를 해산하고 통합된 새로운 독서회를 조직했다.

1932년 6월 신흥학교를 중퇴한 이후에도 활동을 이어나가던 중 이른 바 '전북적색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돼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1933년 12월 5일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범인은닉, 상해, 폭력행위 등의 혐의에 대해 예심이 종결돼 전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리고 1934년 3월 31일 전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4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18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곧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고, 1989년 6월 7일 별세했다.

2005년 3월 1일 삼일절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당초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가 2007년 10월 1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용두동파(龍頭洞派) 25세손 竹변 항렬.( 족보(1) 족보(2)) [2] 족보상 9월 19일. [3] 조부 이당(彛堂) 조대헌(趙大憲, 초명 조판득趙判得, 족보명 조병헌趙秉憲, 1876. 3. 12. ~ 1938. 5. 16.)의 4촌 동생이다. [4] 족보명은 조이완(趙履完), 자는 영수(永守). [5] 김덕식(金德植)의 딸이다. [6] 초명 조중경(趙重慶), 조재하(趙在河), 족보명은 조선민(趙善民), 자는 원초(元初). [7] 김제조씨대동보 중권 401쪽에는 1854년 6월 10일생으로 등재돼 있다. [8] 초명 조몽채(趙夢彩), 자는 가일(可日). [9] 초명 조판득(趙判得), 족보명 조병헌(趙秉憲), 자는 윤장(允章). [10]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길야산(吉野山, 요시노야마)으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