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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앨런 에이브러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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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Alan Abrahamson
1933년 5월 19일~

1. 개요2. 공군 시절3. 전역 후

1. 개요

전대미문의 우주전 프로젝트 SDI를 주도했으며, 미군 공돌이 전설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매드 사이언티스트.[1] 그가 주도했던 연구의 성과는 목표의 거창함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지만, 그 중에서 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것조차 Missile Defense 등의 개념으로 계승되며 오늘날에도 미국 안보정책의 핫이슈로서 잊을만 하면 거론되고 있다. 또한 기업인으로서도 손에 꼽히는 인물로, GeoEye의 회장을 지냈다.

애칭은 Abe(에이브). 이름이 발음하기가 귀찮은 편이기도 하고 이름도 보기 드문 이름은 아닌데다 평판이 좋았기 때문에 그냥 에이브라고 불렸다.

2. 공군 시절

MIT에서 항공공학을 공부[2]한뒤, ROTC 과정을 통해 공군소위로 임관한 에이브는 전투조종사로서 우수한 기량을 인정받아 테스트 파일럿과 교관조종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다 오클라호마 대학교에서 항공공학 석사 학위를 딴 후, 소련 핵전력 정찰을 위한 군사위성 프로젝트에 참여한 인연을 통해 미 공군이 NASA와 별개로 추진하던 Manned Orbiting Laboratory 우주정거장 프로젝트에 투입될 우주 비행사로 선발되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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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로버트 헤레스, 로버트 헨리 로렌스[4], 도널드 피터슨[5], 그리고 에이브러햄슨.

하지만 MOL이 캔슬 크리를 맞았고, NASA에서 35세를 넘긴 나이를 이유로 그의 우주 비행사 편입을 거절당한 뒤에는 테스트 파일럿과 엔지니어로서의 커리어에 전념해야 했다. 에이브는 공군체계사령부[6]에서 F-16의 개발과 개량을 연구했고 매버릭 미사일 개발을 주도했다. 그 이후 장성으로 진급한 그를 NASA는 우주왕복선 프로그램 감독으로 모셔왔다.[7] 그 결과 장기간의 자본투자와 연구를 거쳐 당대 미국의 항공우주공학 기술을 모조리 갈아넣은 우주왕복선은 에이브의 감독 하에 STS-1부터 4까지의 궤도 테스트를 완료하고 성공적으로 우주에 데뷔했다. 특히 위성을 직접 싣고 올라가서 궤도에 띄워놓고 로봇 팔로 조립하거나 EVA를 통해 직접 뚝딱거리는 우주정거장 임무에 요긴하게 쓰일 것으로 평가받은 우주왕복선의 컨셉은 앞으로 열릴 우주시대에 매우 중요해질 것이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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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레이건의 오른팔 시절

1982년 NASA에서 일하던 중 중장으로 진급한 뒤, 에이브는 스타워즈를 시작하게 된다. 레이건이 1983년 3월 23일 발표한 전략방위구상(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이 그것. 이는 소련이 탄도탄을 쏴제끼면 우주에서 레이저로 요격해버린다는 상상도 하지 못한한 구상으로, 이는 레이건이 강한 미국을 주장하며 야심차게 추진했던 계획이다. 간단히 말해, 냉전의 정체성이기도 했던 MAD의 균형이 일거에 무너지는 것. 이에 NASA에서 셔틀 프로그램을 감독하던 에이브는 레이건이 셔틀로 SDI에 쓰일 위성을 쏘자는 제안에 낚였고, 결국 NASA 이후 레이건이 설립한 SDI 연구소(Strategic Defense Initiative Organization)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에이브는 그 과정에서 미국공군우주사령부를 신설할 정도로 미 공군이 나름대로 야심차게 계획하던 타이탄 등의 로켓 개량과 그를 통한 염가의 군사위성 발사 프로젝트에 본의 아니게 스스로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했다. 에이브가 장기간 매진했던 셔틀 프로그램이 여러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공군 로켓 개발 예산을 다 뺏어온 것. 그 당시 NASA의 주장은 "공군 위성을 셔틀로 자주 쏴주겠다"였으니...[8]

하지만 점차 이공계열 학자들[9]을 필두로 무슨 근거로 이러한 발상이 나오는가? 하는 비판이 흘러나왔다. 강력한 X선 레이저를 개발하는 것은 둘째치고 그것에 필요한 에너지부터가 큰 걸림돌이었고, 효과를 제대로 보기까지 아폴로 계획을 몇 번은 할 분량의 예산이 필요하다는 차라리 아폴로를 계속 하면서 달 뒷면까지 가는게 저렴했을 것 같은'''[10] 예산 문제도 지대했고, SDI의 주요 타겟이었던 ICBM이 아니어도 SLBM이나 전략 폭격 등의 핵투발 수단은 여전히 있었으며 그것들을 억제하기엔 ICBM 억제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연구와 예산이 더 필요했기에... 또한 군사적 목적의 우주 개발 자체에 대한 거부감에 기인한 반전주의적인 비판도 줄을 이었다.[11] 게다가 레이건은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와의 정상회담 중에 핵무기 100% 폐기를 논하다가도 "SDI 다 만들면 너네한테도 나눠줄게ㅋ" 같은 개드립이나 치며 고르비의 SDI 폐지 요구에 대한 답을 회피하여 인류사의 새 국면을 설계할 전무후무한 대업을 파토낼 정도로 말도 안되는 행동을 했다. 결국 에이브도 1986년 STS-51-L 챌린저 사고로 꽁기꽁기한 마당에 제출된 4성장군 진급안이 상원에서 인사청문회도 씹힐 정도로 차갑게 거절되는 등의 아픔을 겪었고, 외계인을 잡아다 고문하지 않고서는 이런 위성병기의 실용화는 힘들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SDI는 페이퍼 플랜으로만 남겨진채 1990년대부터는 아련한 냉전기의 추억으로만 남겨졌다. 레이건의 퇴임과 함께 에이브도 군복을 벗었다.

하지만 이 SDI의 개념과 기술에서 출발한 MD와 그 일환인 SM-3, THAAD 등의 여러 탄도탄 요격 미사일 기술이 미 안보정책의 핫이슈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SDI 연구에서 시작된 레일건의 개발이 결실을 맺는등 에이브의 연구는 결코 작지 않은 발자취를 남겼다. 비록 문 레이스에 버금가는 예산이었고 기대에 비해 매우 미진한 결실만을 얻었지만, 그 미진한 결실만으로도 영향력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3. 전역 후

이후 에이브는 우주개발 기업에 들어가 임원으로 활동했는데, 비즈니스맨으로서도 크게 성공했다. 오라클에서 근무한 뒤, 초고해상도 상업용 관측위성을 개발하는 오비털이미지의 회장이 되었다. 이 오비털이미지는 훗날 GeoEye가 되었고, 에이브는 지오아이를 펜타곤 외에도 야후!, 마이크로소프트 등 유수의 대기업들에게 위성사진을 제공하는 세계 최대규모의 상업용 관측위성 회사로 성장시켰다.[12] NASA나 국방부에서도 위성개발이니 청문회니해서 자주 출입하고 있다.

[1] 하지만 '매드' 사이언티스트라고 불리기엔 억울하다 싶을 정도로 성격이나 평판은 절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그의 연구가 무슨 반인륜적인 연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성격 좋은 아저씨가 주도한 SDI가 SF에 가까운 개념인데다 성공하면 오히려 세계 멸망을 앞당길 물건이었음을 감안하면 매드 사이언티스트란 칭호가 틀리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2] MIT는 NASA 우주비행사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민간 대학이다. 자기네 대학원 또는 학부에서 수학한 우주비행사를 집계해보면 1위가 미국해군사관학교, 2위가 미국공군사관학교이고 3위가 MIT. [3] 같이 훈련을 수료한 인물로 우주사령관/합참차장까지 지내는 로버트 헤레스가 있다. 에이브를 포함한 4명은 공군이 자체적으로 뽑은 우주비행사로는 마지막 인물들이었고, 이들 중에는 도널드 피터슨이 유일하게 NASA에 전속되었다. [4] 과부제조기 F-104의 교관조종사로 활동하다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나이도 순직 당시 고작 서른 둘이라서 NASA에서 받아줄 수 있었던 연령이었기에 우주에 올라갔더라면 사상 최초의 흑인 우주인으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던 인물. [5] NASA 우주왕복선 챌린저의 처녀비행 임무 STS-6에서 활동했다. [6] 공군의 신무기 연구개발을 담당했던 사령부로, 오늘날에는 군수사령부와 합치며 물자사령부로 간판을 바꿨다. [7] 셔틀 프로그램의 Associate Director(차장)로, 셔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공군의 입김을 대변하는 역할. [8] 하지만 훗날 STS-51-L 챌린저 참사 등으로 큰 인명피해가 나고, 정작 주로 쓰려던 목적인 대규모 우주정거장 계획에는 큰 차질이 빚어져서 효율성이 개판이 되었다. 결국 STS-107 컬럼비아 참사 이후에는 NASA는 우주왕복선을 차례로 퇴역시키게 된다. [9] 이들 중에는 훗날 미 국방장관이 되는 애슈턴 카터도 있었다. [10] 아폴로 17호의 승무원이었던 해리슨 슈미트가 실제 이런 주장을 했다가 아폴로 다 취소될 마당에 대체 얼마나 미쳤길래 이런 소리를 하냐며 씹혔다. [11] 21세기에도 미국공군우주사령부가 있는 콜로라도 주 피터슨 공군기지나 그 근처 동네에서는 우주의 군사적 이용에 반대하는 집회가 이따끔씩 열린다. [12] 2013년 지오아이는 디지털글로브에 합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