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0 22:57:57

정현수(1909)

<colbgcolor=#0047a0> 출생 1909년 3월 3일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권포리
사망 1952년 9월 8일
전라북도 남원군
이명 정현섭(鄭鉉燮)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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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사회주의자.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현수는 1909년 3월 3일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권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8년 운봉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에서 경성고학당(京城苦學堂)을 다니던 중 정운태(鄭云台)·정운종(鄭雲宗) 등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하여 1930년 8월 사회주의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5세 이상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일제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과 모순을 폭로하기 위해 동년 8월경부터 야학(夜學)을 열었다. 이 때 정현수는 야학의 강사를 맡아 20여 명의 학동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일경에 발각되어 야학은 금지되었으나, 그와 동지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포섭된 학동들의 단결력을 양성하기 위해 1930년 11월 단발계(斷髮契)로 위장하여 비밀결사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청소년의 이발을 무료로 해준다는 것을 표면으로 내세워 단발계를 조직하고 이면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이들은 지주에 대한 불경작동맹(不耕作同盟) 등을 비밀결사의 활동방침으로 세워 실행에 힘을 쏟았으며 회원의 공동작업 및 땔나무 채취 등의 방법으로 운동 자금을 충당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1931년 11월 단발계조차 금지하자 이들은 다시 조직원을 소집하여 위친계(爲親契)의 형태로 조직을 유지하여 활동하였다.

이렇듯 위장조직을 내세워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중 1932년 12월 14일 일경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1933년 10월 6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 이후 남원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2년 9월 8일에 사망했다.

3. 기타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정현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