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85년 3월 13일 |
전라도
진안현
마령면 평지리 (현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원평지마을)[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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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0년 11월 1일[3] (향년 55세)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 |
본관 | 동래 정씨[4] |
초명 | 정진희(鄭鎭喜)[5] |
이명 | 정택신(鄭澤信) |
자 | 택신(宅新) |
호 | 수당(修堂)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7묘역-138호 |
상훈 | 2003년 건국포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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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885년 3월 13일 전라도 진안현 마령면 평지리(현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원평지마을)에서 아버지 추남(秋南) 정성모(鄭聖謨, 1862.4.5. ~ 1906.7.18.)[6]와 어머니 천안 전씨(1859.10.14. ~ 1909.4.26.)[7] 사이에서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간재(艮齋) 전우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했으며, 이후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 봉좌마을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1907년 이석용과 전해산이 정미의병을 일으키자, 진안군에 살던 뜻 있는 고을 선비들과 함께 이를 지원하였다. 이후 이석용이 1907년 8월부터 1908년 4월까지 종군하며 작성한 《창의일록》을 자청해서 자택에 숨겨 훗날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
1911년 3월 옛 동지 몇 명을 모아 비밀조직을 결성한 뒤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 덴노를 암살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같은 해 이석용에게 군자금을 지원하였다. 1912년에 이석용이 의병활동의 재개를 위해 각 지역에 항일 비밀결사인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을 조직하자, 이에 진안군 지역 단원으로 입단하여 차후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여 활동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 망명을 위한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던 중 같은 해 10월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후 석방되었다.
1913년 겨울 이석용 또한 체포되었고, 끝내 1914년 4월 4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자 이후에는 진안군 마령면 계서리 계남마을에 거주하면서 이석용의 제사를 주관하였고, 마을에 도장각(道長閣)[8]·묵용재·직방재 등의 재실을 건립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1939년 이후에는 창씨개명에 반대하여 일본 제국 경찰의 끝없는 감시에 시달렸다.
1940년 11월 1일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자택에서 사망했다. 2003년 8월 15일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2023년 4월 1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7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