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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수

정재수
鄭載秀[1]在洙라고도 한다. 1974년 6월 15일 조선일보 기사]
파일:정재수.jpg
출생 1964년 3월 1일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법화리[2]
사망 1974년 1월 22일 ( 향년 9세)
충청북도 보은군 마로면 갈전리 고개[3]
가족 아버지 정태희, 어머니 김일순

1. 개요2. 설명3. 추모사업과 동상건립4. 대중매체에서5.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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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랜 기간 효자의 대명사에 있었던 인물.

2. 설명

1964년 3월 1일,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법화리에서 아버지 정태희(鄭泰熙)와 어머니 김일순(金一順)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를 따라 경상북도 상주군(現 상주시) 화북면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화서면 사산리에 있던 사산국민학교[4]에 입학해 사망 당시에는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1974년 1월 22일[5] 아버지와 함께 폭설이 내린 충북 옥천군 큰집에 제사를 지내러 가던 중 보은군 마로면 갈전리 마루목고개[6]를 건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쓰러지자 쓰러진 아버지를 살리려고 가진 옷을 벗어서 덮어주고 아버지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때 당시 충북 보은군에는 영하 -20도까지 떨어졌을 정도로 엄청나게 매서운 추위였다. 저녁 때였던 당시 아버지 정태희는 선술집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나서 주위 사람들의 엄청난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해가 뜰때까지 고개를 넘어야만 한다는 본인의 고집으로 인해서 술에 취한채 선술집을 나섰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계속해서 만취한 상태로 방향감각을 못잡고 고갯길을 헤메야만 했으며 그러다가 결국 아버지는 못가겠다. 라는 말을 남긴채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정재수 군은 이렇게 쓰러진 아버지에게 자신의 잠바를 덮은채로 서서히 저체온증으로 최후를 맞게되었던 것이다.

3. 추모사업과 동상건립

그 후 정재수는 효자의 상징이 되어 반공의 상징인 이승복군과 함께 거의 모든 초등학교에 동상이 세워지고[7] 도덕 교과서에도 실렸다.

그러나 1994년에 모교이던 화령국민학교 사산분교가 폐교되고 교과서에서도 사라져 아예 잊혀지는 듯하다가 2001년에 상주시 측이 효자정재수기념사업준비위원회와 협력해서 고향이던 화서면의 동 분교 건물을 '효자정재수기념관'으로 개수해 문을 열었다.

4. 대중매체에서

1974년에 정재수를 소재로 제작한 영화인 ‘아빠하고 나하고’라는 영화가 있다.

5. 외부 링크



[1] 1974년 1월 29일 조선일보 기사. [2] # [3] 1974년 3월 14일 동아일보 기사 [4] 1994년 폐교됐다. 현재는 후술할 효자정재수기념관의 일부로 사용 중이며, 정재수가 다니던 시절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5] 다음 날이 설날이었다. 참고로 이 당시에는 공휴일이 아니다. [6] 보은에서 옥천까지의 큰집으로 가려면 보은군 마로면의 험준한 고갯길인 마루목재를 건너야만 했다. 사건 이후 효자고개로 개칭되었다. [7] 이때 세워진 동상들 중 일부는 2010년대까지도 남아있었고, 아직도 극소수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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