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적명 | 정홍택(鄭弘澤) |
이명 | 정경택(鄭敬澤) |
출생 | 1921년 2월 9일 |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오곡리 | |
사망 | 2011년 11월 16일 (향년 90세) |
서울특별시 | |
본관 | 연일 정씨[1]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450호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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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21년 2월 9일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현 당진시 송악읍) 오곡리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정운채(鄭雲采)와 어머니 광주 안씨[2] 사이의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외조부 안종화는 1894년( 고종 31) 식년 진사시에 3등 390위로 입격하고 같은 해 시행된 식년 문과에 병과 8위로 급제한 뒤 1905년 비서감 승(秘書監丞)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해 체결된 을사조약의 폐기 및 을사오적의 주살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이후에는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등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국조인물지(國朝人物誌)》 등의 역사서 및 다수의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여생을 보냈던 인물이다.
한편, 정귀택은 1938년 인천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일본인 교장의 민족차별에 분노하여 학우들과 함께 오륜조(五輪組)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40년 창씨개명에 저항하다가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
인천상업학교에서 퇴학당한 뒤에는 조선상업은행에 취직하였다가,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습으로 학병으로 끌려가게 되자 1943년경 경기도 경성부에서 송재필(宋在弼) 등 인천상업학교 졸업생들과 함께 학병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44년 1월 충청북도 영동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944년 1월 10일 정식으로 영장에 의한 구속이 집행되어, 그해 6월 8일 동지들과 함께 대전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이후 대전형무소에서 갖은 고문 및 취조를 당한 뒤 구금되었다가,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직후 그는 기소중지 처분을 받고 이틀 뒤인 8월 17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용인시 수지구에 거주하다가 2011년 11월 16일 서울특별시에서 사망하였다.
200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사후 2011년 11월 19일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되었다.